# 192
192화 감쪽같네
“그래, 꼰대 같은 말일 수도 있고, 말년 고참이 하는 개소리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나중에 사회 나와서 겪어보면 알 거야. 진짜 세상 사는 거, 니들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
강형우도 그랬다.
막 제대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못할 게 없었고 뭘 해도 다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젊었고, 체력도 좋았으며 자신감이 폭발했었다. 빌어먹을 군대라는 제약만 벗어나면 세상을 다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아직 외환 위기 여파가 한창일 때, 강형우는 사회에 던져졌으니까.
그때 사회 분위기는 정말 엉망이었다.
IMF 때보다는 덜했지만 청년 실업자들과 노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많은 공장들은 인건비가 저렴한 외국인 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형우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가 않았다.
한 집안의 가장이기에, 바로 일을 시작해야 했기에, 너무도 환경이 열악한 공장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솔직히 공장에서 일하는 건 부끄럽지 않았다.
일단 삼시 세 끼 꼬박꼬박 밥을 준다.
군대 짬밥 수준이라 맛보기 전에 욕부터 나온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었다.
사장 마누라가 그거 먹고 남편하고 싸우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그 이후에 분석이 형네가 납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제 날짜에 월급 꼬박꼬박 나온다.
분명 한 달에 한 번 있는 날인데, 꼭 일주일에 한 번씩 받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일이 힘들고 바빠서 날짜 관념이 수시로 뒤엉켰던 것이다.
게다가 월세 걱정 없게 기숙사에서 잠도 재워준다.
진짜 네 평도 안 되는 공간을 둘이서 쓰는데, 월급에서 이십만 원이나 까더라.
하여간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단지 공장의 부속품 취급을 받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을 뿐.
한마디로 수명과 영혼, 그리고 자존심을 갈아 넣어서 월급을 받는다고나 할까?
강형우는 소주 한 잔을 마신 뒤, 심호흡을 했다.
이강석, 백창호 그리고 인정둥이.
이 네 명 다 현직 국방부 소속이었다. 때문에 이런 현실을 이야기해 줘도 이해 못 할 것 같았다.
어쩌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도 있겠지.
잠시 고민하던 강형우는, 보다 이해하기 쉽게 방향을 돌렸다.
“너희들! 나 사는 거 보면, 편안한 것 같니? 군대보다 널널하게 생활하는 것 같아?”
거의 동시에 이강석과 백창호가 고개를 저었다.
군대? 당연히 힘들다.
밤 열 시 취침, 아침 여섯 시 기상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한두 시간씩 야간 경계근무를 나가야 하고, 수시로 점호를 받아야 한다.
나 강형우, 새벽 1시 전에 자서 평균 5시 전후로 일어난다. 그리고 하루 종일,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일+일+일이었다.
이건 이강석도 백창호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노는 사람은 아니란 것을, 같이 생활했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내일 쉬니까 너희들하고 술 마시고 편하게 자지만, 최근 삼 년 동안 평균 수면 시간이 네 시간 밖에 안 됐어. 왜 그랬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형은 자기 장사잖아요?”
알코올의 영향력이 쎄긴 센 모양이었다. 백창호가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후하하, 맞아. 내 장사지. 내가 힘들게 일한 만큼 많이 버는 거고, 그래야 너희들 맛있는 거 사줄 수 있는 거니까. 근데 바꿔서 생각하면, 그렇게 일 안하면 돈 못 번다는 거야.”
“에이, 설마요. 친구들 일하는 거 보면 다 자기 할 거 다 하고 살던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 누구나 말 못 할 고충 같은 게 있는 거니까. 단지 그걸 밝히지 않을 뿐이지.”
강형우는 말하다 말고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나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현실 부정에 가까운 반응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것이다.
역시 직접 겪어봐야 깨닫게 되겠지.
“하여간, 결론은 간단해. 많이 버는 사람은 일을 많이 하는 거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일하는 거야. 그런데 주혁 형이 그러더라.”
순간 네 녀석의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성공한 대기업 대표라 그런지 집중도가 올라갔던 것이다.
약간 괘씸하긴 했지만, 그게 현실이겠지.
“앞으로는 일 많이 해도 돈 못 버는 시대가 올 거래. 취직 자체가 하늘에 별 따기가 된다는 거지.”
이 말이 믿기지 않는지 다들 격하게 부정했다.
“설마요?”
“형,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에이, 그건 말도 안 되죠.”
강형우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변에 장사하는 친구들 말고, 다들 어디서 뭘 하는 줄 아냐?”
“글쎄요?”
“둥이는 내 친구 박정수 알지?”
“정수 형이요?”
“그래, 그 녀석 지금 중국에서 삽질한댄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이드 한대. 그래야 먹고 살 정도라고 하더라.”
표현은 좀 그랬지만, 건축 관련 쪽에 겨우 취직했단다.
지잡대 출신은 지방 공장에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는는다더라.
대학 중퇴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나?
그래서 기회가 생기자마자 중국으로 날아갔다고 했다.
“기성이는 울산 올라가 있다. 현대 하청이라는데, 힘들어 죽겠다더라.”
원래 알바하면서 무슨 시험인가 준비했는데, 학자금 대출 때문에 숨도 못 쉴 지경이라고 했다. 결국 돈부터 갚고 다시 공부하자고 월급 많이 준다는 공장에 몸을 던진 것이다.
그게 벌써 3년 전이었다.
이제는 뭘 공부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단다.
“걔들 말고도 내 동창 중에서 지금 부산에 일하는 사람 진짜 얼마 안 된다. 일자리가 없어서 대부분 시외로 나가 버렸거든.”
인정둥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곧 제대하는 입장인지라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터.
“그만큼 좋은 직장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 거야.”
강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니 강인우도 자동이었다.
강형우는 피식 웃은 뒤, 이강석과 백창호를 쳐다봤다.
“아마 너희들 제대할 때 즈음 되면, 취직하는 데 목숨 걸어야 할걸?”
“그건 좀…….”
백창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강석이 옆구리를 푹 찔렀다.
“정말이라니까? 뭐,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놈들아!”
강형우의 구박에 네 녀석들이 움찔거렸다.
이제 슬슬 결론을 내야 할 때다 싶었다.
“그러니까 이 하늘같은 형님 좀 잘 모셔라. 너네 취직 걱정은 안 하게 해줄 테니까.”
어깨에 힘 좀 주나 했는데, 돌아온 건 야유였다.
하긴, 악덕 사장이니 별수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1차를 마무리하고 밖을 나왔는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어! 눈이네?”
진짜였다.
부산에선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 눈이, 그것도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버린 것이다.
뭔가 기분이 오묘하고 희한했다.
그때, 백창호가 투덜거렸다.
“하아, 복귀하면… 눈 졸라 쓸어야겠네. 씨발!”
그 말에, 세 녀석들이 빵 터지고 말았다.
역시, 군바리는 군바리였다.
어쩌면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우리는 기분 좋게 3차까지 달렸다.
역시나 최종 종착지는 내 자취방이었다.
***
“이모, 어때요?”
강형우가 묻자 희숙 이모와 애란 이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몇 번이고 육수 맛을 본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가 한 거보다 낫네. 역시 육수는 큰 통에 끓여야 제맛이라니까.”
“그러게. 이 정도만 준비되면 하루 삼백 그릇도 팔겠는걸?”
애란 이모의 말에 강형우는 움찔했다.
“하루에… 삼백 그릇요?”
“그럼, 당연하지. 나 전에 일하던 식당에서는…….”
된장 3, 고추장 1의 비율에 각종 야채를 먼저 뚝배기에 쓸어 넣는다. 여기에 육수 넣고 끓이다가 두부와 양념 조금 넣고 새우젓으로 간 하면 끝이라고 했다.
그렇게 간편하기에 하루 삼백 그릇 팔아도 크게 힘들지 않다는 거다.
“근데 된장은 미리 끓여두면 안 되나요?”
“재래 된장은 그렇게 하면 맛있지. 그런데, 우린 시판 된장을 쓰잖아.”
희숙 이모가 설명하길 만들어서 파는 건 오래 끓이면 묵은 냄새가 난단다. 떫고 시큼한 맛까지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다 쓰는 게 좀 비싼 거라, 오래 끓일 필요도 없어.”
미화합동이라고, 부산에서 아주 유명한 회사 제품이었다. 대용량 판매밖에 하지 않아서 일반 가정에서는 해먹지 않지만, 유명한 된장찌개 집들은 거의 이걸 쓴다는 것이다.
해서 된장찌개의 경우 10분 이상 끓이면 안 된다고 했다.
“흐음,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하고요. 잠시만요.”
강형우는 커다란 스텐 통을 올렸다.
“이거는 회사에서 만든 김치찌개인데, 한 번 맛보세요.”
“오! 이거 냄새가 괜찮은데?”
“그러게, 언니. 이거 한참을 끓인 거 같은데?”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했다. 찌개 색상과 향만 맡고서도 그걸 파악한 것이다.
두 이모의 말대로, 이건 인성식품에서 제조한 거였다. 무려 세 시간을 넘게 끓여서 제대로 고기 맛까지 우려낸 것이다.
처음에는 지성분식 본점, 아니, 이제는 간판을 바꿔 달아서 이모들 식당이 되었다. 순이네 식당으로 하려고 했는데, 순이 이모가 부끄럽다고 그렇게 바꿔달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강형우의 계획은 이모들 식당에 육수만 제공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세 이모들의 의견을 듣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
무엇보다 김치찌개는 오래 푹 우려야 깊은 맛이 난단다. 그래서 공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만들었는데, 일단 비주얼은 합격한 것 같았다.
강형우는 김치찌개를 뚝배기에 덜어서 끓였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김이 올라오면서 찌개 향이 훅 퍼졌다. 식욕이 땡기는지 입에 침까지 고일 정도였다.
“다 됐습니다.”
강형우가 김치찌개를 덜어서 놓자 바로 세 이모들이 달려들었다.
“맛은… 어때요?”
하지만 이모들은 별말 없이 계속 맛만 봤다. 그래서 강형우는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희숙 이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초를 조금 넣었네?”
“헐, 그걸 어떻게?”
“나 추어탕집에서 일해본 이모거든?”
“그러게, 이 정도면 모를 리가 없지.”
두 이모가 웃으면서 장난을 치는데, 강형우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조금 넣었다. 고추로만 매운 맛을 내니 너무 단조로워서 약간 추가했던 것이다.
물론 특유의 향이 조금 나기는 했지만, 몇 번 먹어봐서 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사장님, 정말 듣던 대로네. 어떻게 내 맛을 감쪽같이 가져간 거야?”
희숙 이모는 정말 신기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몇 번 물어보고 직접 끓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깊은 맛에서 차이가 있었다. 혀를 땡기게 하는 묘한 감칠맛이 부족하다 싶었던 것이다.
해서 강형우는 다른 방식으로 답을 찾았다.
오래, 아주 오래 우리는 것.
왜, 하루 지난 김치찌개가 맛있다고 하질 않았던가?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여러 번 테스트해 본 것이다.
한 시간 끓이고, 잠깐 식히고, 또 한 시간 끓이고 식히고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랬더니 돼지고기에서 기름이 나와서 굳고 퍼지고를 반복하면서 깊은 맛이 났던 것이다.
물론 실패도 몇 번 하긴 했다.
하지만 비용이 나간 만큼 업소용 김치찌개 요령을 조금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게 나오기까지 재료비만 무려 오십만 원이 넘게 들어갔으니까.
결론은 이거였다.
고기 많이 넣고, 오래 끓이면 무조건 맛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