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화 형은 괜찮대요
묻는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유리 형수와 김상일 이사님 얼굴이 보여서 다가가려 했던 것인데…….
동시에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주혁 형은 대기업 회장이었다.
연 매출이 조 단위가 넘어가는 회사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수십억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직원만 수만 명에, 내 연봉이 고작 시급밖에 안 되는 그런 부자였다.
그걸 잊고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때론 친구 같고 형 같아서 그 차이를 뒤늦게 느꼈던 것이다.
“저, 저는…….”
더듬더듬 말을 이으려는데, 순간 목이 탁 메였다.
주혁 형이 그만큼 날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으니까.
그때 상대가 다시 물었다.
“혹시 강형우 씨! 맞습니까?”
“아! 예.”
“저는 김철진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 인상착의를 이야기했을 거다. 곰같이 커다란 덩치에 근육질이라 했겠지.
때문에 체형 때문에 날 알아본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기시감 같은 걸 느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
순간, 상대의 이름이 떠올랐다.
분명 김철진이라고 했다. 바로 철진 기획의 진짜 대표가 이 사람인 것이다.
강형우는 철진 기획을 오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폭들이 운영하는 사채 회사인 줄 알았다. 심지어 주혁이 형은 그걸로 속이기까지 했었으니까, 그렇게 믿어버린 것이다.
그때 말한 게 이거였다.
대표님 성함이 김철진이었다.
전직 조폭이지만 손을 씻고 열심히 노력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어둠의 길에 빠져서 헤매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단다. 주로 전과자들을 데려와 취직을 시키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철진 기획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것도 맞기는 했다.
하지만 진짜 철진 기획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두루 컴퍼니와 아무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자회사나 마찬가지였다. 대기업들과 정치인들의 견제 때문에 은행권의 협조를 받을 수 없어서, 아예 금융업으로 진출해 버린 것이다.
그 시작은 당연히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부업체들이었다.
철진 기획은 그렇게 소규모 대부업체들을 야금야금 흡수해서 자본금 오백 억이 넘는 거대 회사로 성장했다.
게다가 합법적인 이자만 받았고 여기에 직업 알선이 더해졌다.
제대로 취직시켜서 부채를 받아내는 회사!
어떻게 보면 현대판 노예제도를 운영하는 걸로 오해받을 만했다.
하지만 평판은 나날이 올라갔고, 지금에서는 일부 은행들이 눈치 볼 정도까지 성장했다.
그런 회사의 대표가 눈앞에 있었다.
“죄송하지만 면회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철진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왜죠?”
“그게… 아직 환자의 안정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수술이 끝난 직후고, 담당 의사가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복도에 머물렀던 모양이었다.
그때 김철진은 주위를 둘러본 뒤 손으로 신호를 했다. 그러자 복도를 채운 검은 정장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말이지 재벌 나오는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행동들이었다.
그만큼 조용했고 신속했던 것이다.
“잠시 이쪽으로.”
김철진이 한손으로 옆 복도를 가리킨 뒤 앞섰다.
그쪽으로 따라 나가니 바로 야외 휴게실이 보였다.
“담배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아! 예.”
김철진이 주는 담배를 받아 들자 손수 불까지 붙여줬다.
길게 한 모금을 빨고 연기를 흩뿌리는데, 김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모님 전화 받고 오셨습니까?”
“예.”
“흐음, 일단 알겠습니다. 하지만 면회는 안 될 겁니다. 일단 안정도 필요한 것도 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김철진은 그렇게 말한 뒤, 조용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제 저녁.
주혁 형은 예정된 스케줄대로 현장을 돌아보기로 했단다.
장소는 금정구 노포동 일대.
부산 종합버스 터미널 맞은편의 산 쪽이었다. 부산시의 협조를 받아내 부지까지 무리 없이 매입했고 공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강형우도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민락동 골목시장 횟집에서 주혁 형이 술에 취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뜬금없이 아파트를 짓겠단다.
정확히 말하면 저층 아파트형 주거 단지를 만들겠다고 했었다. 회사 돈으로 짓는 대신에 보증금과 월세를 획기적으로 낮춰서 직원들에게 우선 분양하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두루 컴퍼니의 체인점과 식당들을 넣고, 편의점과 마트, 그리고 은행까지 직접 운영할 계획이라 했다. 심지어 마을버스까지도 말이다.
이걸 간단하게 표현하면, 일명 강주혁 시티였다.
규모는 작은 아파트 단지 수준이지만 두루 컴퍼니의 의지대로 모든 컨트롤이 가능하단다.
정말이지 황당한 계획이었다.
한 개인이 작은 행정지구 하나를 마음대로 운영할 거라니.
따지면 자신만의 왕국의 건설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때는 이 형이 미쳤는가 했는데, 진짜 진행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어쨌든, 현재 현장 사무소와 인부 휴게실, 식당을 포함한 건물 공사가 한창 마무리 단계였단다. 거길 돌아보다가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자재들이 쏟아졌다고 하더군요. 사장님 혼자라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주변 사람들을 피신시킨다고 그만…….”
역시나 주혁이 형다웠다.
미처 옮기지 못한 거푸집 기둥들을 쌓아놨는데, 그게 한꺼번에 떨어졌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행 비서들을 밀치는 바람에 움직임이 늦었다는 것이다.
혼자 깔린 건 그 때문이었다.
“많이 다친 건가요?”
“머리 쪽 출혈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수술은 잘됐다고 하지만 장담하기 어렵다는군요.”
그게 어젯밤이라고 했다. 새벽 늦게 수술이 끝났고, 이제야 겨우 안정세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의식이 회복될거라고 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단다. 의사의 장담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침묵 상태라는 것이다.
유리 형수가 전화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깨어날 거라 생각했기에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연락을 했다는 거다.
“그럼 면회는… 기약이 없는 거군요.”
“예. 깨어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김철진이 먼저 명함을 꺼내주자 강형우는 공손히 받은 뒤 자신의 명함을 꺼냈다.
그때 김철진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사모님이라도 만나보시겠습니까? 지금 아니면 당분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휴게실을 나서는데, 방금 한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없을 거라니.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복도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어디서 소문이 흘렀는지 기자들이 잔뜩 몰려왔던 것이다.
건장한 경호원들이 입구를 막고 있었지만, 기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때 김철진이 나섰다.
“모두 물러나.”
그 순간 검은 정장들이 기자들을 가볍게 밀치고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김철진이 신호를 줬다.
강형우는 몰래 그 사이로 파고들어 유리 형수가 있는 쪽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김철진이 기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데도,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병실 복도를 향해 카메라를 내밀더니 마구 사진까지 찍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덩치 큰 사내가 강형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
“호호호,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예.”
강형우는 겨우 대답을 꺼냈다.
정말이지 유리 형수의 말대로였다.
미안하다면서, 주혁 형이 깨어날 줄 알아서 전화를 한 건데 상황이 너무 어수선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했다.
의사가 수술이 잘됐다고 해서 그 말을 너무 믿었었단다.
어쨌든 유리 형수가 정신없다고 한 이후, 얼마 안 되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루캅 대표 이현강이라고 합니다. 여기 경비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사설 무장을 한 열여 명의 남자들이 복도를 채웠다.
그 직후 본사 경비 팀과 김철진이 모습을 감추었고, 잠시 후 경찰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정덕찬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받았는데, 북부 경찰서 형사계장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리 형수와 무척 잘 아는 모양이었다.
정덕찬이 지휘를 하자 경찰들이 엘리베이터 일대를 막아섰다.
결국 기자들은 아무런 소득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었다. 경비 회사와 경찰들이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더는 얻을 것이 없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강형우는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형은 괜찮대요?”
“당연히 괜찮죠. 우리 오빠가 어떤 사람인데… 잘 알잖아요?”
“그야 잘 알기는 하지만…….”
확실히 주혁 형이 다쳤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창문을 통해서도 병실 내부가 제대로 보이질 않았고, 의사들만 수시로 왔다 갔다 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렴풋이 구별은 가능했다.
수술 때문인지 삭발한 것 같았다. 머리에 온통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팔과 다리에도 깁스를 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 옆에는 이름 모를 기계들만이 삑삑 하고 신호음을 내고 있는 듯했다.
“일어날 거예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예. 형이라면 일어날 겁니다.”
이후, 뭐라 이야기해야 할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많이 당황스러웠고 정신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종이컵의 커피가 모두 비워지자 유리 형수가 말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형이 다쳤다는데, 만사 제쳐놓고 와야죠.”
“아뇨. 아마 오빠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장사꾼이 가게를 지켜야지 어딜 함부로 돌아다녀?’ 하고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표정과 연기가 너무 그럴듯했던 것이다.
오히려 위로받는다는 느낌이랄까?
유리 형수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줬다. 그러면서 웃는데, 진짜 구김이 하나도 없었다.
주혁 형이 깨어날 걸 확실히 믿는, 그런 얼굴이었다.
“여긴 걱정 말고, 회복되 는대로 연락드릴게요.”
“예.”
“호호, 오빠 일어나면 가게 놀러갈 거니까요. 그때 맛있는 거 부탁해요.”
“연락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 차려 드리겠습니다.”
강형우가 고개를 숙이는데, 갑자기 한 청년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청년은 오른팔과 오른발에 깁스를 한 채였다.
순간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강형우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이름도 듣지 않았는데, 눈앞의 상대에 대해 알 것도 같았던 것이다.
아마 술김에 주혁이 형이 이야기한 거겠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짜릿한 뭔가가 있었다.
“미안해요. 배웅 못 해서.”
유리 형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형우는 이후 몇 번의 대화를 한 뒤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렸는지 대부분을 기억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갑자기 들어선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
“정신 차리자. 정신!”
강형우는 두 손을 자신의 뺨을 마구 때렸다.
대체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일은 손에 안 잡히지, 정신은 어디다가 팔아먹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직도 주혁 형이 의식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제도 한 번 갔다 왔는데 상태가 여전했던 것이다.
그게 이상하게 마음을 무겁게 했다.
동시에 주혁 형과의 일들이 밤새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