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화 놀면 뭐 하냐
“일단 그건 그거고. 이모, 한 번 날 잡아서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자.”
순이 이모는 환하게 웃었다.
그걸 보니 마음의 짐 하나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동안 여러 번 망설였다.
지성분식 본점.
정을 많이 쏟았기에, 성공의 발판이 되었기에, 마지막으로 지난 몇 년간의 희로애락이 쌓였기에… 너무 질질 끌고 말았다.
변화에 맞게 놓아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해서 순이 이모가 여러 의견을 냈음에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영제가 나감으로 인해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는 정리하는 게 맞는 것이다.
“형우야,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적당히 마셔.”
순이 이모는 그렇게 말한 뒤, 힘내라고 등을 팡팡 두드려 줬다.
강형우는 그렇게 순이 이모를 보내고 2차 장소로 향했다.
이제는 애들 화풀이를 받아주어야 할 시간이었다.
***
“그렇게 좋냐?”
백창호는 말없이 씨익 웃은 뒤, 정은혜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주~ 입 찢어지겠다.”
“형도 다섯 달 만에 봐봐요. 좋나 안 좋나.”
그동안 만나지 못한 게 억울했는지, 백창호와 정은혜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강석이 못 볼 걸 본다는 듯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한 소리를 했다.
“창호야, 나 보고 싶어서 내려온다고 한 건 다 뻥이지?”
“그것도 맞아. 하지만 사랑보다 먼 우정이란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
“울 자기는 나 밥 먹여주던데?”
그 타이밍에 맞춰서 정은혜가 새우튀김 하나를 백창호의 입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걸 본 이강석은 진심으로 토할 뻔했다.
강형우는 녀석들의 장난(?)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근데, 너희들 어떻게 할래?”
“뭘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이강석과 백창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강형우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놀면 뭐하니? 젊을 때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형! 우리 휴가라고요. 휴가~”
“팔 개월 뺑이 치고 왔는데… 또 일하라고요? 와~ 진짜 형,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두 녀석이 투덜거리는데, 강형우가 딜을 던졌다.
“일당 10만 원. 딱 삼 일만 더 도와주라.”
순간 이강석과 백창호가 갈등하는 게 보였다.
오늘 일한 것까지 치면 40만 원이었다. 그 돈이면 남은 기간 동안 가까운 데라도 며칠 다녀올 수 있었고, 실제로도 지갑 사정이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솔직히 휴가 나온 군바리가 돈이 어디 있겠는가?
다 부모님한테 용돈 받아서 노는 거지.
하지만 마냥 그러기에는 휴가가 너무 길었다. 열흘이나 됐으니 방구석에만 찌그러져 있다 가기에는 억울했던 것이다.
“고민 길면 일당 떨어진다. 9만 원.”
“예? 아니, 그럼 누가 해요?”
“와~ 형, 진짜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하네요.”
“알았어. 8만 원 줄게.”
강형우가 웃으면서 말했는데, 놀랍게도 이강석과 백창호는 더욱 다급해졌다. 어느 정도 일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서였다.
“좋아. 마지막으로…….”
“아, 형~~”
“진짜~”
거의 말을 막다시피 떠드는데, 강형우가 손가락을 두 개 들었다.
“일당 12만 원. 할래, 말래?”
“합니다. 해요.”
“알았다고요.”
대답을 듣자마자 강형우가 고개를 돌렸다.
“녹음했지?”
“그럼요.”
공지혜가 폰을 꺼내서 확인하는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강형우는 단숨에 마무리 짓겠다는 듯 말했다.
“계좌 안 바꿨지? 바로 입금한다?”
“예?”
“서, 설마?”
이강석과 백창호가 당황해하는데 강형우는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버렸다.
“계약 위반 시, 강석이 너는 어머님한테 전화할 거고… 창호 너는 은혜 월급에서 깔 거야.”
“와, 진짜… 악덕 사장!”
“형~ 그러다 진짜 지옥 가요!”
두 녀석이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르는 거 없어. 방금 입금 완료했거든.”
“헐.”
“와! 사악하다. 사악해.”
“대신, 이 형님이 쏘잖아. 자~ 마음껏 마셔라. 마음껏.”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마이크를 잡았다. 간만에 고함을 한 번 지르고 싶어서였다.
동시에 이강석과 백창호가 달려들었고, 그 틈에 홍성구가 마이크를 뺏어버렸다.
확실히 이놈들은, 이럴 때는 누구보다 손발이 잘 맞았다.
그렇게 나름 즐거운 회식이 이어지는 사이 강형우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꺼내었다.
지성분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
“사장님. 진짜죠?”
“그럼.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랴? 다음 달부터 10만 원 더 올려줄게.”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마 주방 보조 하라고 꼬실 때였을 거다.
“제가요?”
“그래. 일한 지 석 달 됐고, 열심히 하니까 더 올려주는 거야. 그렇게 알고.”
“형님, 감사합니다.”
녀석이 슬슬 자리를 잡아갈 때였다.
가게가 자잘한 사건 사고에 휘말렸음에도, 지각 한 번 없이 뚝심 있게 주방을 지켜줘서였다.
“저, 사장님. 입금이 잘못된 거 같은데요?”
“뭐가?”
“그게… 이백이 넘게 들어왔는데…….”
아마 정직원이 되고 첫 보너스를 줬을 때였을 거다.
그때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보너스 달이라고 했잖아. 많이는 아닌데, 그거 들어간 거라 보면 돼.”
“진짜, 맞는 겁니까?”
“아, 맞다니까? 아니, 사장이 맞다는데 왜 그래?”
“그게요. 믿기지가 않아서요. 전에 고깃집에서 불판 갈 때, 진짜 열심히 해도 백이십 못 받았거든요.”
기억하기로 이날 처음으로 들은 말이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통장에 이백만 원이 넘게 들어온 적이 처음이라고 했다. 심지어 하루 네 시간 자고 알바 두 탕 뛰었을 때도 백팔십이 최고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지금까지 목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형님, 혹시 가게 자리 있어요?”
“왜?”
“제 친구가 알바 구한다는데, 혹시나 해서요.”
이때는 이미 주말 알바까지 다 구한 상황이었다.
본점도 2호점도 여유 있게 돌아가고 있어서 굳이 사람을 더 구할 이유가 없었다.
“글쎄? 본점도 그렇고, 자리가 다 차서.”
“그, 그렇죠?”
“근데, 괜찮은 친구들 있어? 일은 좀 하니?”
“그건 아닌데요. 친구들하고 술 먹고 우리 가게 이야기했는데… 그냥 물어보더라고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는 표정을 보니 슬쩍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아마 자랑질을 좀 했겠지, 나 이만큼 많이 벌어간다고.
그랬으니 친구들이 부탁했을 거다.
“3호점 오픈하면, 나랑 같이 일할래?”
“예?”
“주방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물론 메인은 내가 볼 거지만… 어때? 같이 안 해볼래?”
그 제안을 했을 때, 녀석은 방방 뛰며 좋아했다. 드디어 마녀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다며 두말않고 이랬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무조건 따라가겠습니다.”
그랬다.
그랬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 이거였다.
“저, 갑니다.”
그러면서 앞치마를 벗어놓고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서 가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동안의 과정을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이별이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운 남녀도 이렇게는 안 헤어질 정도로 냉담했던 것이다.
“아~ 씨발!”
강형우는 벌떡 일어나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도, 꿈이 너무나 생생했다. 마음 접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이영제와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하긴,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칼로 딱 자르듯이 그렇게 끝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침 11시에 출근해 같이 식사를 하고, 점심 장사를 시작했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어느 새 3시.
브레이크 타임에 잠시 쉬면서 늦은 점심을 먹고, 5시가 되면 다시 저녁 장사에 들어간다.
그런 뒤, 정신없이 손님을 맞다 보면 슬슬 재료가 부족해진다. 거의 8시 반 넘어서 마무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9시가 넘으면 퇴근이었다.
그렇게 거의 일 년을 같이 보냈다.
부부라 할지라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 어려웠으니 생각대로 감정이 정리가 되질 않는 것이다.
“이영제, 이 씨… 하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실 궁금한 건 너무 많았다.
신원이 형이 말했던 위치는, 목은 좋았다.
지성분식 2호점을 얻기 전 조사할 때만 해도 보증금과 월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1층 상가의 경우 평균 오천에 이백 수준이었다. 조금 허름하고 작은 데를 얻으면 모를까, 대부분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비싼 권리금이었다.
광안 지하철역에서 광안리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
때문에 최소 자릿세만 이천만 원대였다. 여기에 시설 권리금과 영업 권리금이 붙으면, 어떤 가게들은 억대까지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 분식집을 차린다?
글쎄다. 나 같으면 무조건 사양이었다.
재산이 몇십억씩 있거나 건물주라면 모를까, 저런 곳에서는 장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만… 왜 신원이 형이 그런 말을 한 거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뭔가 짚이는 게 없다면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단순히 레시피 북을 훔쳐봤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때였다.
“흐음~”
바로 옆에서 신음이 들렸다. 공지혜가 잠결에 몸을 돌렸고, 팔로 가슴을 더듬었던 것이다.
화들짝 놀란 강형우는 그제야 방 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헐~”
어제 과음하기는 했는데, 설마 또 이런 패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침대 밑에 이강석이 있었고, 그 옆에 백창호와 정은혜가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꼭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확실히 너무도 많이 본 광경이었다.
“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랬던 것 같았다.
분명 3차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강형우와 이강석, 백창호는 집이 같았고 여기에 술 취한 공지혜와 찰떡 정은혜가 달라붙었다. 방에서 한 잔만 더하고 자자면서 족발집에서 남은 안주를 포장해 왔던 것이다.
역시나 한쪽 구석에, 빈 소주병이 여섯 개나 보였다.
그 너머로 먹다 남긴 족발들이 있었고.
“진짜, 지겹다 지겨워.”
푸념처럼 내뱉고 난 뒤, 정반대의 느낌이 들었다.
왠지 정겹다는 기분이랄까?
생각해 보니 거의 팔구 개월 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이영제의 꿈을 꾸고 나서인지, 희한하게도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형우는 공지혜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밥상을 들고 주방으로 나섰다.
해장국은 끓여야 할 것 같아서였다.
***
“충성. 병장 강인우.”
“병장 강정우. 13박 14일 휴가를 명받았습니다.”
인정둥이가 경례를 하는데,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제 봤던 광경과 똑같았던 것이다.
물론 그 두 사람 중 한 명은 현재 주방에 있었다. 이강석이 점심 준비한다고 간만에 돈가스를 튀기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백창호는 브레이크 타임을 만끽하겠다고 테이블 구석에서 졸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정둥이가 인사를 하니… 기분이 참 희한했다.
“잘 왔다. 동생들아. 이제 민간인이 다 됐구나.”
강형우가 두 팔을 벌려 인정둥이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놈들이 완강히 거부했다.
“형님, 우리도 다 컸습니다. 이런 사랑~ 징그럽습니다.”
“맞습니다. 남자 새끼들 드글드글한데 있다 나왔는데, 남자 품이 그립겠습니까?”
그러면서 피하는데, 방법이 있었다. 강형우가 지갑을 꺼내 든 것이다.
“형님! 전 이미 자본주의의 노예입니다.”
“저도 이제 군바리 때 벗기고, 세속에 물들고 싶습니다.”
인정둥이는 열정적으로 강형우의 품에 안겼다.
그걸 본 공지혜가 피식 웃더니, 종이 가방 하나를 들고 인정둥이의 등짝을 두드렸다.
“누나, 이거 뭐예요?”
“혹시 우리 선물?”
인정둥이가 종이 가방을 열어보는데, 공지혜가 말했다.
“집에서 니들 갈아입을 옷 가져왔거든.”
“오오, 역시 준비성이 철저하신 우리 누님.”
“감사합니다. 당장이라도 군복 벗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역시 누님이 최고.”
인정둥이가 엄지를 번쩍 쳐드는데, 공지혜가 웃었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 일 시작해야지.”
그런 공지혜를 보면서 강형우는 빵 터지고 말았다.
역시나 이렇게 닮아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