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화 좋다는 거지
짝! 짝!
볼이 살짝 따가웠다. 공지혜의 두 손이 뺨을 가볍게 때린 것이다.
그 직후 나온 말이 이거였다.
“정신 차려요.”
“어?”
“좀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요. 어휴~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요.”
지난 며칠간, 강형우가 눈치 보는 걸 확인하고는 마음을 졸였다고 했다. 평소라면 미리 말하고 쉬자고 하는데 이번에는 너무 뜬금없었다는 것이다.
1박 2일 MT도 너무 갑작스러웠다나?
그래도 그런가 했었다.
여름휴가 이후 서너 달을 쉬지 못하고 일했으니 시기상 그럴 때도 됐다. 게다가 하도 바빠서 단둘만의 약속을 취소하기 여러 번이었다.
그게 미안해서 표정이 어두운 줄 알았단다.
하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갑자기 우물쭈물하다가 뭘 좋아하는지 물었다가, 혼자 고민했다가… 아주 이상한 짓을 여러 번 했다는 것이다.
가게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걸 나만 몰랐단다.
“진짜 바다에 뛰어들 때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난 오빠 사기라도 당한 줄 알았어요.”
맨날 내가 뭐 했네, 사무실 구했네, 계약을 했네, 공사를 했네, 하는 이야기만 들었단다.
하지만 실제로 회사에 와본 적이 없었고 확인한 게 없었다. 그러니 그런 상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여간 놀라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나중에 생각나더라고요. 아니, 그래. 왜 뛰어들고 그래요?”
공지혜는 살짝 말을 얼버무리다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런 뒤, 눈을 부릅뜨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았다.
“오빠!”
“어.”
“똑바로 봐요. 지금 내가 어디 있어요?”
“내… 눈앞에?”
“그래요. 앞에 있잖아요.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딱 앞에, 그리고 계속 옆에 붙어 있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런데 뭐가 걱정이라고 그 난리를 부린 거예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공지혜는 어딜 가지 않는다.
평소에는 본점 출근하고 확인할 거 다한 다음에 또 2호점으로 간다. 필요한 거 주문하고 두 가게의 마감까지 확인한 다음 퇴근하는 것이다.
일요일 역시도 일과가 평범했다.
집 청소하고 살림 정리하고, 세탁기 돌리고 나서야 밖으로 나온다. 그런 뒤 어머니네 국밥집에 들렸다가 오후 늦게나 나를 만나는 거다.
그게 평소의 생활이었다.
그걸 알면서 뭐가 그리 초조했는지…….
공지혜는 뭔가 할 말이 있었는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작거렸다. 그러다 포기했는지 한숨을 연거푸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안 봐도 알지. 또 신원이 오빠나 태구 오빠가 바람 넣은 거죠?”
순간 움찔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유독 그런 느낌이 강했었다.
혹시 내가 미끼를 문 건가?
“안 그래도 오빠들이 이야기하긴 하더라고요. 언니들하고 싸우고, 혼나고 그러면 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요.”
“아니, 왜?”
“주변에 여자가 저밖에 없다잖아요. 어떻게 하면 화 풀어줄 수 있냐고 그러면서, 다음에 일 있으면 자신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들어보니, 아놔~ 다들 사정이 있었다.
홍태구는 일 핑계 대고 술 마시다 늦게 들어가서 싸웠다고 했다. 거기에 비상금까지 들켜서 크게 한바탕했다는 것이다.
그게 결혼 이후, 첫 번째 위기였단다.
진짜 몰랐는데 신원이 형도 그랬다고 했다.
따지면 별거 아닌데, 눈치도 없이 여자 손님들이 주는 명함을 넙죽넙죽 받았단다.
그게 뭐겠는가?
다 신원이 형 꼬시려는 수작아니겠는가?
그것도 모르고 웃으면서 명함을 받아 들었으니, 당연히 질투가 생길 만했다. 은주 형수가 아침 식탁에 간장 한 종지만 올렸다는 것이다.
그게 첫 싸움의 시작이었단다.
어쨌든, 이후에도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공지혜가 중간에서 중재를 해줬다고 했다.
그래서 날 부추긴 거다.
나 혼자 고생할 수 없으니, 친구야, 같이 지옥으로 떨어져 보지 않겠니?
딱 그 심보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사총사 형들도 수상했다. 혁기 형을 제외하고, 다들 적극 결혼 찬성파였으니까.
어쩌면 그 역시도 유부남들이 가지는 공통점이 아닐까 싶었다.
“어째 한동안 수상쩍다 싶었더니,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건지…….”
공지혜는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거기에 흔들리는 오빠도 문제죠. 아무리 장사하는 게 사람 이야기 들어주는 거라지만, 적당히 거를 건 걸러야죠. 일할 때는 딱 부러지는 사람에 왜 그런데 흔들려요?”
“그게…….”
바닷물에 뛰어들어서인지 젖은 옷을 입고 돌아다녀서인지, 머리에 열이 올라왔다.
공지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쉬어요. 몸도 안 좋을 텐데…….”
“어. 근데 지혜야.”
“왜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걸 보니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하지만, 이 순간을 극복해야겠지?
“근데, 그거 대답… 해주면 안 돼?”
“에이~ 진짜 눈치 없기는…….”
공지혜는 벌떡 일어나서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나가면서 한마디를 하더라.
“아까 옆에 있는다고 했잖아요.”
분명 그랬던 것도 같았다.
그럼 이거 좋다는 건가?
***
“아오, 머리야.”
공지혜가 준 약 때문인지, 아직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머리가 묵직했다.
가까스로 차가운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들어오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이불 킥을 하고 말았다.
아오~ 병신 같은 놈.
생각해 보니 참 찌질했다. 아무리 경험(?)이 없기로서니 바보짓을 많이 한 것이다.
너무 순진했다고나 할까?
그때, 따뜻한 방바닥에 펼쳐놓은 옷들이 보였다. 세탁기 한 번 돌리고 탈수까지 해서 마르라고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이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였다. 왜 바다에 뛰어든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던 거다.
갑자기 머리가 띠잉 하고 울렸다.
동시에 장백호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호쾌하게 세상을 질타한 사내였다.
머리는 아둔했지만 신념은 확고했고, 의리에 죽고 살았다. 가족과 산채의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무림고수들과 싸웠으며, 그 과정도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그랬기에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런 장백호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슬프고 애절하고, 원한이 얽힌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다 때려 부수고 쟁취했을 인간이었으니까.
이 순진한 장백호는 평범한 관리 딸에게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자신은 산적, 그 여자의 부친은 관의 녹봉을 받는 처지였다.
그래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둘은 마음을 주었고,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자신의 산채로 가서 같이 살자고 고백하려는 때였다.
염황수라 장백호!
이름 그대로 그의 무공은 불의 성질을 가졌다. 내공으로 염화를 일으켜서 상대를 불태워 버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해서 극도로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자연스럽게 내공이 일어나 자신을 보호하게 되어 있었다.
갑자기 물로 뛰어든 건 그 때문이었다.
고백을 기다리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조마조마했기에 갑자기 온몸의 뜨겁게 달구어졌던 것이다.
“헐, 미친…….”
이 순간 그 기억이 떠오르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물에 뛰어든 게 말이 되질 않았으니까.
강형우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피식거리고 말았다.
진짜 무공 수련을 안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제대로 수련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아~ 뭐, 이정도 해프닝으로 끝나서 다행인 건가?”
그렇게 쉽게 넘기려고 했는데, 덜컥 걱정이 들기도 했다.
장백호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 열심히 수련한 건 호흡법 하나였다. 그것도 아주 기초수련에 불과한 거라 그저 심신이 건강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실제로 효과는 좋았다.
근육이 우락부락해지거나, 내공이 몸속을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씩 단전 쪽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남들보다 튼튼한 체력, 그리고 감정 조절이 쉽게 된다는 것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가만? 그래서 이게 기초 호흡법이었던 거야?”
갑자기 아귀가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수련을 꾸준히 하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쉬웠다. 흥분해도 금방 가라앉고, 유혹이나 흔들림에 쉽게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장백호의 무공을 생각하면 기초를 끝낸 이후에나 입문하는 게 맞았다. 말 그대로 한 번 무공을 펼치기 시작하면 남아 있는 게 없을 정도로 다 쓸어버렸으니까.
한마디로 흥분하면, 눈이 뵈는 게 없는 그런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동시에 떠오른 것도 있었다.
막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을 때, 조성기 때문에 한 번 눈이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동안 참고 있었던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진짜 그때는, 조성기를 때려죽인 줄 알았었다.
“헐, 이거… 진짜 위험한 거네.”
잠시 생각하던 강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면서 오늘같이 마음 졸일 일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이제는 호흡도 익숙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그덕에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벌써 스트레스 때문에 몇 번이나 발광하고도 남을 일들을 무수히 겪었다. 그럼에도 호흡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지면 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지.”
강형우는 갑자기 히죽 웃었다.
공지혜의 대답은 적어도 긍적적이었다.
싫다고 거절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다.
안도감이 들자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태구랑 신원이 형한테 약간의 악(?)감정이 생겼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괘씸했던 것이다.
***
2014년 1월 1일.
어쩌다 보니 일출을 다 보게 생겼다.
MT가 무사히 끝나고, 이후 일정은 자유롭게 맡겼다. 놀 사람은 더 놀고,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역시 젊으니까 체력이 좋긴 좋더라.
31일 일몰을 보고, 술집을 휩쓸었다. 그러고도 집에 가기 싫다는 애들이 있어서 해운대로 넘어가 포장마차를 갔고, 다시 광안리로 넘어가 콩나물 해장국집을 찾았다.
그렇게 속을 풀고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다섯 시였다.
여기서 또다시 갈라졌는데, 공지혜가 슬그머니 소매를 잡아당겼다.
둘만 일출을 보러 가잖다.
결국 강형우와 공지혜는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송정으로 향했다.
“후우, 춥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겨울 새벽의 바닷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강형우가 파카를 벗어주려고 하는데, 공지혜는 한사코 거절했다.
자기는 괜찮다면서 오빠나 알아서 잘 챙기란다.
두 사람은 백사장으로 향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동트기 전인데도, 아니,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근처 카페 역시 밤새 불을 켜놨는지 환했고, 어제 말한 풀 빌라 단지 쪽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백사장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오빠. 그거 알아요?”
“뭐?”
“나 이제 스물네 살. 오빠는 서른.”
“어? 정말 그러네?”
진짜 얼마 전까지 그거 때문에 방황(?)하고는 했는데, 일이 바쁘다 보니 잊고 말았다. 새해가 온다는 건 알았지만, 서른이란 나이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원이 형이 말한 서른병, 그게 감쪽같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공지혜가 바짝 다가왔다.
“오빠. 저기, 저기 해 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