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화 결혼하면 좋더라
-야이, 씨벌 놈아~ 일 맡기면 다냐?
“엉?”
-야, 시안을 줘야 작업을 할 거 아냐? 내가 너 때문에 다른 일정 미뤄놔서 얼마나 피 보고 있는데.
안 그래도 연말이라서 정신이 없단다.
부업거리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상황, 혹시나 친구 일 틀어질까 봐 시간 애매한 작업은 거절했단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너 인마, 어디냐?
“집인데.”
-기다려라. 간다.
평소에는 오라고 하면 죽어라 싫다는 녀석이, 이번에는 직접 온다고 했다. 이거 이틀 안에 해결 못 하면 올해 안에 출력 맡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간판하고 같이 맡겨야 하기에 시간도 무척이나 촉박하단다.
생각해 보니 디자인 관련 작업은 전부 홍태구한테 맡겼었다. 그러면서 대충 밑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는데 그걸 까먹었던 것이다.
강형우는 아차 싶어서 다급히 말했다.
“올 때 치킨이나…….”
-야이, 썅놈아~ 배달시켜. 맥주는 사갈 테니까.
그걸로 통화가 끊겼다.
말이 헛나왔는데 그걸 받다니, 정말 무시무시한 놈 같으니라고.
강형우는 간만에 냉장고 주변을 뒤졌다. 갑자기 이강석이 물려준 쿠폰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확인해 보니 무려 열두 개나 있었다.
근데, 전화를 안 받았다.
“쩝, 망했나?”
안 그래도 이 동네 상권은 번개치킨 덕에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그 이후 몇 군데가 새로 생기긴 했는데, 다 고만고만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쉽게도 현우 형네는 배달을 안 했다.
“한 번 확인해 보자.”
인터넷을 뒤져서 새로 생겼다는 치킨집에 전화를 했다. 대충 주소 불러주고 후라이드 양념 반반을 시켰는데, 그 직후 홍태구가 찾아왔다.
“아오, 돈도 잘 버는 새끼가 좀 낮은 데로 이사 가지.”
“안 그래도 계획이 있기는 있는데…….”
문제는 쉽게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공지혜를 생각하면 그냥 이사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준 통장은 아직도 서랍 속에 있었다.
“됐고, 일부터 후딱 처리하자.”
홍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맥주 피처 두 개와 소주 세 병을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술이 얼기 전까지 끝내겠다는 그런 의지 같았다.
무슨 관우 운장도 아니고.
홍태구는 바로 노트북을 펼치고,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그런 뒤 샘플로 뽑아놓은 이미지를 쫘악 늘어놨다.
“일단 네가 생각했던 거하고 비슷한 모양을 골라. 색이나 형태는 바로바로 수정이 가능하니까.”
다행히 미리 가이드라인을 준 덕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형우는 일단 다섯 개를 먼저 뽑아서 비교를 했다. 그래도 회사 로고가 될 거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이거랑 비슷하게 해서 사람 인에, 정성 성 자. 그렇게 한자로 만들면 이상할까?”
“이상할 건 없는데, 좀 그렇지. 그리고 잘 생각해. 한자로 하면 명함 줄 때마다 설명해야 하는데 귀찮아. 본다고 바로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홍태구가 설명하길,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이나 알아보지 젊은 사람들은 한자를 잘 모른다고 했다.
때문에 한자로 된 로고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란다.
“차라리 영문으로 해라. INsung 이게 괜찮을 것 같은데.”
“INsung 이라…….”
“뭐, 의미야 같다 붙이기 나름이고, 별 안에 이렇게 해석도 가능하고. 아무래도 한자보다는 있어 보인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는데, 보다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홍태구는 즉석에서 타이핑을 치더니 뽑아놓은 파일과 비슷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색은 파란색이라고 했나?”
“어.”
“잘 생각했다. 빨간색은 좀 노티가 나거든. 초록색은 시안성이 낮은 편이라 애매하고.”
그러면서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선을 자르고 붙이고를 하는데, 손이 진짜 빠르게 움직였다. 불과 10여 분 뚝딱 한 것 같은데 벌써 모양이 나왔던 것이다.
“순식간이네?”
“당연하지. 그리는 건 오래 안 걸려. 주제나 디자인만 정해지면 금방이라고.”
로고를 보니 마음에 쏙 들었다.
IN에 서 있는 사람이 문을 여는 듯한 그림이, sung 위에는 포인트로 별 하나를 추가됐다.
“어때?”
“치킨 배달 왔습니다.”
절묘한 순간에 배달 아저씨가 문을 두드렸다.
강형우는 만오천 원을 주고 치킨을 받는데, 아저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단골이라 서비스로 콜라 큰 걸로 넣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강형우가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이 익숙했다. 쿠폰 열두 개 치킨집 사장님이 맞았던 것이다.
“나름 먹을 만하긴 하네.”
브랜드 치킨집은 아니었지만,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튀기고 바로 가져왔는지 바삭하기도 했고, 양념도 익숙한 그 맛이었다.
“근데 왜 전화번호를 바꿨지?”
강형우는 쿠폰을 꺼내 비교를 했다. 확인해 보니 가게 이름이 달라져 있었다.
“헐, 어째 이상하더라니…….”
쿠폰에는 ‘번개처럼’ 치킨이었다. 그런데 비닐과 박스에는 ‘우리 동네’ 맛치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걸 본 홍태구가 빵 터졌다.
“와, 사장님 장사 진짜 잘하네. 원래 번개치킨 유명할 때, 이 동네 치킨 검색하면 거기가 제일 먼저 나왔거든. 요즘은 현우 형네가 검색 순위 1위다.”
“헐, 센스가 좋은 건지 장사 수완이 뛰어난 건지…….”
검색해서 제일 많이 나오는 치킨집과 비슷한 이름으로 장사를 한다?
이것도 단기 매출에는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는 가게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간판을 바꾸거나 포장재를 바꾸는 것도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홍태구가 말했다.
“야, 요즘 다 그래. 먹고 살기 힘드니까 별의별 수단을 다 쓰는 거지. 아마 저 사장님네 가면 간판은 또 다를걸?”
“에이, 설마?”
“왜, 한 번 확인해 봐?”
홍태구는 그렇게 말한 뒤 지도 검색에 들어갔다.
바로 로드뷰로 골목 사진을 확대했는데… 맙소사, 간판은 ‘쓰모프’ 치킨이었다.
“대박이네. 나 어릴 때 유행했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이야.”
홍태구가 웃는데, 강형우는 씁쓸함을 느꼈다.
현우 형하고 치킨에 대해 공부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쓰모프 치킨의 경우, 유명한 애니매이션인 스머프에서 따왔다. 캐릭터, 혹은 상표권 계약을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파파 스머프 그림이 사라졌다더라.
중요한 건 거의 20년 전부터 희미해진 브랜드라는 거였다.
당시 엄청나게 인기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교천치킨까지는 아니지만, 꿉네나 삐삐큐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
어쨌든 프랜차이즈의 몰락에 휘말리기 전에 사장님 스스로 독립(?)을 한 케이스 같았다. 간판과 이름이 수시로 바뀌고, 직접 배달을 할 정도면 상황이 어렴풋이 짐작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주혁 형의 말이 맞았다.
프랜차이즈 가맹으로 10년을 버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으니까.
왠지 그 냉정한 현실의 한 부분을 본 듯한 느낌이랄까?
“근데, 꼭 한글로 해야겠냐?”
“어?”
“사실 INsung. 그거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
홍태구가 그렇게 말하면서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이 새끼, 갑자기 우리 집으로 찾아온다고 했을 때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다.
알고 보니, 신혼이라 연희가 술을 못 마시게 한단다. 이참에 일 핑계로 도망쳐 나온 것이다.
“내가 작업 끝났으니까 말하는 건데, 너 시안 늦게 줄 거 같더라. 그래서 미리 몇 개 해놓은 거거든. 근데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
어째 작업속도가 빠르다 했더니 이유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따질 입장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쁘긴 이뻤지. 그런데, 단순한 게 좋겠다 싶어서. 그러니까 나중에 브랜드를 만들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처음 생각한 대로 한자 인성(人誠)이 그려져 있었다. 파란색의 동그란 원안에 도장처럼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옆에 한글로, 인성식품 네 글자가 보였다.
희한하게도 이게 묘하게 끌렸다. 홍태구가 장난치듯이 폰트 변환을 했는데, 그냥 이거다 싶었던 거다.
해서 약간만 손보고 이걸로 정하기로 했다.
“야. 그건 그렇고 3호점 간판은 어떻게 할 건데? 간판 사장님이 보고 갔는데, 그 나무판 무지 비싼 거래. 글자 파는 것도 저렇게는 못 한다 그러더라고.”
“진짜? 그 정도야?”
“마~ 컴퓨터가 만능인 줄 아냐? 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거든.”
홍태구가 설명하는데, 역시 주혁 형이 장인이긴 장인인 모양이었다.
그냥 기계로 파는 게 아니란다. 전문가들이 도안을 그리고 수작업으로 해야 나오는, 그런 깊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상하게 연락하기가 꺼려졌다.
그러다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났다.
“근데, 본점에 메뉴판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뭐? 그걸 또 왜?”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고민하는 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순이 이모가 메뉴를 바꾸잔다. 앞으로 인부들이 더 많아질 거니, 가게 철거되기 전까지 거기에 맞춰서 최대한 팔고 싶다는 거다.
그건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강형우가 2호점에 집중하는 사이 다달이 매출이 떨어졌으니, 점장으로써 미안하고 답답했단다.
믿고 맡겼는데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나 뭐라나?
따지면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장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바꾸겠다?”
“어~ 어차피 반년도 안 남은 거, 손해만 안 보면 이모 하고 싶은 대로 해주고 싶…….”
“아니, 그게 아니라. 간단하잖아.”
“뭐?”
“그니까 본점은 지성식당 정도로 대충해. 어차피 철거할 거라면서?”
“그게… 그렇기는 한데…….”
강형우가 멍해 있는데, 홍태구는 오히려 손뼉을 쳤다.
정말이지 이 녀석이 기발한 건 알고 있었다. 디자인이란 게 아무나 못 하는 거고, 작가 지망생도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홍태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병신아, 본점 간판. 3호점에 옮겨 달면 되잖아!”
***
괜히 애매해서 일부러 연락을 안 했다.
근데, 주혁 형이 먼저 전화가 왔다. 전에 못 해준 이야기 제대로 해주겠다며 술 한잔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난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쨌든 조금 찔렸지만, 실제로 바쁜 건 맞았다.
홍태구와 일 이야기를 했고 3호점 간판과 회사 간판에 명함까지 그날 하루 일사천리로 해결해버렸다. 아울러 우리 김민석 부장님, 명함까지도 말이다.
그것만 끝낸 게 아니라 다른 하나까지도 얼떨결에 결정되고 말았다.
홍태구가 그랬다.
“새꺄, 결혼하면 얼마나 좋은지 아냐?”
“진짜 그렇게 좋냐?”
“당연히 좋지. 네가 안 해봐서 그래.”
“야! 했으면 니 이야기 듣고 있겠냐?”
“어? 그렇기는 하네. 근데 결혼하면 정말 좋다!”
여기서 홍태구가 심호흡을 했다. 그래서 더 궁금해서 다급히 물었다.
“아니,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데.”
“야, 말 마라. 집에 오면 밥도 차려주지, 고생했다고 다리도 주물러 주고, 술 마시고 싶다면 안주도 차려줘. 그리고 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 봐라. 홀아비 냄새 안 난다?”
여기서 진짜 솔깃했다.
이놈의 자취방은 아무리 청소하고 환기를 해도 묘한 냄새가 났다. 방향제를 왕창 뿌려도 정체 모를 꿉꿉함이 있었던 것이다.
“진짜 그런가?”
“당연하지. 청소에 설거지에, 하여간 손 갈 게 없다고.”
홍태구가 으스대면서 말하는데, 살짝 의심스러웠다.
그런 내 표정을 봤는지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
“하여간 좋아. 그리고 해보고 후회하란 말도 있잖아.”
“그런데 이 경우는 아닌 것 같은데?”
요즘에는 돌싱이 큰 흠은 아니었다. 이혼률이 높아서 그런지 의외로 주변에 많았던 것이다.
특히 백순일과 최민지의 결혼 이야기도 처음에만 놀랐지 그렇게 큰 충격이 아니었다. 살다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었고, 그런 사람들끼리 다시 결합하는 것도 드문 경우가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내 경우가 특이하다는 거였다.
홍태구는 그걸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