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건 반칙이다.
아니, 동네 떡볶이 집 육수 알아내려고 유명 셰프를 부르다니, 진짜 주혁 형은 해도 해도 정말 너무했다.
사실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몇몇 조건을 바꾸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니 사흘 동안 모든 걸 알려주겠다. 물론 감추는 거 하나도 없이, 우리 직원하고 똑같이 교육 시키겠다고 했다.
양념 비율도, 육수 조합 방식도 빼놓지 않겠다.
메모를 해도 좋고 동영상 찍어가도 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시간을 들일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왜냐?
정말 할 일이 정말 많아서였다.
일단, 회사는 공사 중이었고 3호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주혁 형이 준 과제도 하나 남아 있었고 그 외에도 처리할 일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공부할 게 많았다.
이번 계약(?) 일을 겪으면서 회사 만드는 게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냥 뚝딱 차려서 육수나 요리 재료 납품하면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법도 알아야 하고, 회사의 시스템도 배워 나가야 했다.
회계 장부도 어느 정도 볼 줄 알아야 했으며, 거래처 관리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당연하게도 주혁 형은 흔쾌히 허락해 줬다.
그랬는데, 이런 꼼수(?)를 쓰다니.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일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임경윤이 다시 말했다.
“편하게 임경윤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예? 선생님이요?”
딱 봐도 열 살 이상은 많아 보였다. 그런데 선생님이라니,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제가 배우는 입장이니 당연한 겁니다. 실제로 본사에서도 마찬가지인걸요.”
“아!”
병신같이 까먹고 있었다.
전에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지우 형수가 말하길 임경윤이란 유명 셰프가 황룡 본점에서 요리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돌급의 인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열정이 있어, 주방에 서는 걸 빼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CCTV 이야기도 나왔고, 유투브하고 연결해서 수익을 내보겠다는 사업도 구상 중이라고도 들었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두루 캅을 알게 되었다. 가게 전체에 CCTV를 달고 보안 관련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그건 본점과 3호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미친년 싸대기 사건이 잘 해결되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그럼 뭐부터 하면 됩니까?”
“예?”
“배우러 왔으니 뭐라도 좋습니다. 저, 설거지도 잘하고 청소도 열심히 하거든요.”
임경윤이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이고 나오니,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결국 강형우는 속성 코스를 밟기로 했다.
김민석이 죽어나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일종의 자존심 싸움 같은 거였으니까.
***
자존심은 개뿔!
사람이 이렇게 좋으니, 그런 감정조차 생기지 않았다.
분명 인터넷 찌라시에는 이런 게 있었다.
임경윤 건방지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와서 싸가지가 없더라.
항상 자기 일만 끝나면 여자 꼬시러 다닌다던데.
등등의 악평들이 의외로 많았었다.
그런데 왜인걸?
세상이 이렇게 바른 사람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열과 성을 다해서 배웠고, 그러면서도 선생님이란 말을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강형우는 이 사람의 겸손함에 끌렸다. 그래서 홀리듯이 비법을 가르쳐 주고 말았다.
“아! 그래서 같은 양을 써서 조리했는데도 맛이 달랐던 거군요.”
“예. 그런 거죠.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원물 재료 자체가 다르니까요.”
분명 디포리 한 줌을 넣은 건 맞았다.
하지만 임경윤과 김민석이 우린 것과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다.
이건 창주 형의 노하우였다.
화끈 오뎅은 디포리가 가장 맛을 내는 계절에 대량으로 매입한다. 이걸 잘 아는 곳에 부탁해 해풍 건조를 시켰고, 무려 1년 치를 한꺼번에 사 온도와 습도 조절이 되는 창고에 보관해서 쓴다.
그걸 모르고 그냥 디포리를 사서 쓰면 당연히 맛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루 컴퍼니가 제대로 된 맛을 내는 데 실패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홍합도 방식이 다르죠. 보통은 신선한 해물을 쓰는 게 좋다고 하는데, 오히려 한 번 건조시킨 게 맛이 더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도 창주 형과 자신만이 아는 노하우였다.
육수를 우리기 전, 끓는 물에 가볍게 데치는 것도 그래서였다.
강형우는 이렇게 끓인 멸치 육수와 홍합 육수를 맛보게 했다.
“아~ 확실히 차이가 있군요. 하나하나는 거의 미묘하게 같은데, 섞이니까 느낌이 다르네요.”
“예. 그래서 세 가지 육수를 따로따로 우려서 확인한 다음에 섞는 겁니다.”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김민석의 뒤통수를 두들겼다.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였다.
아무리 맛 구별이 어렵다고 하지만, 종이컵으로 무려 세 컵씩이나 마시는 건 뭐란 말인가?
게다가 분명히 짜다고 이야기했다. 그걸 잊어버렸는지 냉수를 찾았단 것이다.
강형우는 또다시 다음 코스를 설명했다.
마지막 해물 육수까지 우린 뒤, 세 육수를 섞으면 그제야 화끈 오뎅의 맛이 나온다. 응축된 감칠맛이 터지면서 침샘이 폭발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매운맛이 추가였다.
다행히 들은 게 있었는지 임경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청양고추에서 고추씨만을 따로 빼서 이걸로 매운맛을 낸다.
여기에 홍시를 으깨서 붉은 색상을 내고, 호박을 우려서 단맛과 매운맛의 벨런스를 잡는다.
“확실히 심오하네요. 육수와 떡볶이 양념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음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경윤은 그렇게 말한 뒤, 바로 메모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확실히 가르칠 맛이 생기더라.
어쩌면 주혁 형이 그래서 날 갈군 게 그래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강형우도 마냥 가르쳐 주기만 한 게 아니었다.
치이이이익.
끓는 기름이 고추 튀김이 들어가면서 기포가 올라왔다.
잠시 후, 튀김을 건진 강형우는 단면을 잘라 두 사람한테 건네줬다.
맛을 보라는 뜻이었다.
임경윤은 심호흡을 하더니, 고추 튀김을 입으로 가져갔다.
파사사삭. 파삭.
갓 튀겨서 기름 뺀 거라 그런지 정말 고소했다. 게다가 씹는 식감이 보통 수준을 넘었던 것이다.
“선생님,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튀김 옷 사이에서 약간의 저항감 같은 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휴우~ 어렵네요.”
임경윤은 몇 번이나 튀김을 맛보았음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임 셰프님은 탕수육 어떻게 튀기나요? 제가 봤을 때 튀김 식감은 비슷한 것 같은데?”
“하하하, 비슷하면서 다릅니다. 저희는 식용유를 섞어서 기포를 만들거든요. 그걸 두 번 튀기면, 온도 때문에 반죽의 기름이 흘러나옵니다. 그 공간 때문에 바삭하게 되는 거죠.”
“아, 저도 들어본 바가 있네요.”
“그 외에도 전분 차이이기도 하고요.”
임경윤은 자신이 아는 중식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방송에서 표현되지 못한 것들까지도 재밌게 풀어줬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강형우도 얻는 것이 적지 않았다.
특히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 고기 튀김에 대한 여러 가지도 배울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또 있었다.
임경윤은 중식 세프이기도 하지만, 주방을 노련하게 운영하기도 했다. 팀으로 나와서 경연을 하는 데 짧은 시간에 여러 개의 요리를 동시에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건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 단위로, 분 단위로 계산하는 겁니다. 지금 요리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수시로 살피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때문에 주방장은 모든 코스를 다 거치고 올라와야 한단다.
우선 면 삶는 걸로 초 단위의 시간을 몸에 익힌다.
그런 뒤, 튀김부터 시작해 찜, 조림, 볶음의 순서로 완벽히 배우고 나서야 장급의 셰프가 될 수 있단다.
마지막으로 강형우는 두루 컴퍼니에 대해 물었다.
아쉬운 건, 임경윤이 아는 부분이 황룡에 한정되어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도움이 되는 게 많아서 시간 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 튀김은 어떻게 이렇게 바삭한 겁니까? 보이기에는 그냥 반죽 묻혀서 튀긴 건데요?”
임경윤은 진심으로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가볍게 웃은 강형우는 당근을 내밀었다.
“여기 튀김 표면에 묻은 거 보이죠. 그 두께로 한 번 썰어보세요.”
임경윤은 반신반의하면서 당근을 썰었다. 거의 이쑤시개 두께로 얇게 자른 다음, 반을 갈라 길이를 맞춘 것이다.
“그다음은 이겁니다.”
“예? 이건… 감자?”
“맞습니다. 이것도 같은 두께로 썰면 됩니다.”
잠시 주저하던 임경윤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머릿속으로 조리 후의 완성도를 그리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반죽에 감자 칩을 넣다니.”
임경윤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 조심스럽게 칼질하기 시작했다.
강형우는 한 번 확인한 다음 김민석이 하는 걸 살폈다.
나름 칼질이 늘었지만, 아직 임경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두께가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 이렇게 만든 칩을 반죽에 넣고요. 이렇게 묻혀서 튀기면 됩니다.”
치이이익.
커다란 고추튀김이 나왔는데, 당근은 확실하게 보였다.
반대로 감자는 보이질 않았다. 반죽과 색상이 비슷했기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강형우가 생각한 아이디어였다.
왜, 감자 핫도그라고, 도깨비 방망이라 부르던 게 있었다. 토막 낸 감자를 묻혀서 튀겨낸 바로 그거 말이다.
강형우는 튀김을 이렇게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서 시도해 봤다.
놀랍게도 튀겨진 감자가 색다른 식감을 만들었다. 반죽이 두껍지도 않은데 더 바삭했던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두께를 맞추지 못하면 반죽보다 먼저 타버렸고, 점성이 묽으면 아예 묻어나지도 않았었다.
때문에 창주 형하고 이걸 맞추기 위해 며칠 내내 머리를 싸매기도 했었다.
“선생님, 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중식에서도 이런 방식은 쓰질 않아요. 진짜 뭐라고 해야 할까? 기존의 상식을 넘어서는 느낌이랄까?”
임경윤이 진심으로 감탄하니 조금 찔렸다. 이건 길거리 스타일을 응용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불과 사흘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임경윤은 그렇게 말한 뒤, 매주 수요일은 황룡 본점에 있으니 꼭 한 번 들러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대접하겠다면서 신신당부까지 했던 것이다.
어쨌든 강형우는 그렇게 미션 하나를 마무리 지었다.
얼마 뒤, 주혁 형이 전화를 해서 알려주더라.
임경윤이 만들었고, 김상일 이사가 꼼꼼하게 맛을 봤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
“허허, 더 필요한 거 없나?”
강학희는 환하게 웃으면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얼핏 보기에는 도면대로 된 것 같았다.
이 층 사무실 두 곳과 연구실은 모니터 화면으로 본 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고, 이제 집기만 들어오면 될 것 같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일 층 창고, 아니, 이제 식품 제조실이 될 공간이었다.
강형우의 요구대로 청소용 고압 호스가 보였고, 또 천장에서 내려오는 수도 호스도 세 개나 있었다.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곤 바닥 공사였다. 애초에 카센터로 시작된 곳이었고, 여러 해 창고로 쓰이면서 찌든 때들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음식 만들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해서 강학희한테 도움을 청했더니, 바닥을 20㎝만 까자더라. 그 위에 시멘트를 덮고 타일을 깔든가 몰딩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버님, 정말 완벽하네요.”
강형우가 엄지를 척 들자, 강학희가 웃었다.
“허허허, 사람이 하는 일인데 꼭 그렇게만 보지 말게. 대신 하자 수리는 다 해줄 테니까,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연락하고.”
그렇게 최종 확인까지 끝낸 강학희는 바쁘다면서 서둘러 떠버렸다. 아직 3호점 공사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강형우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제조실을 쳐다봤다.
여기가, 인성식품의 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