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화 여기 원래 뭐였나
“남은 하나는 백이십 평짜린데, 얼마 전에 사람 한 명이 보고 가서 말이야. 그런데 그 어린놈의 새끼가 싸가지가 없어서 일단 거절했거든.”
소장은 그렇게 말한 뒤, 강형우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제야 이평석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터줏대감!
눈앞의 소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이 동네에서 이분을 통하면 안 되는 게 없다나 뭐라나?
“자네가 원하면 백이십 평짜리도 해줄 수 있기는 한데… 더 큰 걸 원하면 알아봐 줄 수도 있고.”
“아니요. 아닙니다. 그렇게 큰 데는 제가 감당 못 합니다. 그냥 작은 사무실 겸 물건 좀 놓고 쓰려고요.”
“그러면 팔십 평?”
“오십 평이면 충분합니다.”
강형우는 다급히 선을 그었다.
솔직히 말이 좋아 오십 평이지, 식당이나 일반 사무실 규격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실제 면적으로 치면 칠십 평대 대형 아파트 면적에 가까운 것이다.
그걸 알기에 말했는데, 소장이 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전화 걸 필요가 없다는 의미 같았다.
“그럼 바로 가보지.”
소장이 일어나자 강형우도 곧 바로 뒤를 쫓았다.
이 층 사무실을 내려오자, 아래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것 같았다. 몇몇 아저씨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댄 것이다.
강형우가 화답하듯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본 소장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재들 짐 다 실었으면 출발하지?”
“아이고, 황 소장님. 갑니다, 가요.”
소장은 그렇게 몰려드는 아저씨들을 물리친 뒤, 온천천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자네 나이가 몇인가?”
“예.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순간 황 소장이 멈칫하더니 강형우를 쳐다봤다. 그러다 지나가는 투로 조용히 말했다.
“험험, 생각보다 적구먼. 한 서른 중반 정도로 봤는데… 고생 많이 했던 모양이군.”
“하하, 제가 좀 노안 소리 듣습니다.”
애써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조금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여간 고맙네.”
황 소장은 방금 한 말이 미안했는지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시했다.
오늘 금사동 공장에서 차가 한 대 출발했는데, 중간에 사고가 났단다. 결국 사무소에서 차를 보내 도로가에서 물건을 다시 옮겨 싣고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강형우가 온 게 하필 그 타이밍이란다.
“원래, 사람 오면 부탁 같은 거 잘 안 해. 근데 나도 일이 끝나야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걸로 입에 풀칠해서 사는 사람인데.”
“예. 맞습니다.”
“전에 왔던 젊은 총각도 도와달라고는 안 하고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했어. 그런데 고작 30분을 못 참고 성질을 내더군. 아니, 내가 일찍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주변 사람들 부탁을 들어주는 건, 서로 같이 잘살자는 거란다.
하지만 본업이 더 중요했다. 일단 내 할 일을 해놓고 놔야 뭘 해도 할 수 있다는 거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거기에 오해(?)도 하나 풀 수 있었다.
아까 짐 나르는 게 일종의 시험인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였다.
오늘 정말 급해서 그런 거지, 실제로는 그럴 일이 거의 없단다.
“하여간 자네 덕에 일이 수월해졌어. 덩치를 보니 힘깨나 쓰겠다 싶었는데, 사십 키로짜리 베어링 박스를 그렇게 쉽게 나르는 거 보고 깜짝 놀랐다네.”
강형우는 화들짝 놀랐다.
어째 좀 박스가 무겁다 싶었다. 아저씨들이 낑낑대면서 한쪽에 매달려 있어서, 그것 먼저 정리한다고 무지하게 열심히 날랐던 것이다.
“그게 사십 키로짜리였다고요?”
“그러니까 시간 많이 잡아먹은 거지. 보통 지게차 쓰기도 하는데, 오늘은 뭔 사고가 많은지, 타이밍이 안 맞았어.”
황 소장은 쓰게 웃더니, 다시 한번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뻐근했던 허리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5분 정도 걷자, 황 소장이 골목 쪽으로 꺾으면서 한 곳을 가리켰다.
“저 끝에 건물인데, 남향이라 채광도 좋고 앞에 주차장도 있다네.”
시선을 돌려보니 근처에 한창 공사 중인 아파트가 보였다.
또 맞은편에는 작은 공원 같은 게 있었고, 동네도 무척 조용해 보였다.
문제는 건물 상태였다.
그냥 공터에 샌드위치 판넬로 2층까지 올린 거였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깔끔하기는 했지만, 건물이라 하기에는 애매했던 것이다.
“일 층 창고만 서른 평이라네. 이 층 사무실까지 해서 오십 평 잡으면 될 거야.”
계산이 조금 황당했다.
주차장은 당연히 빼는 거란다. 게다가 외벽을 올린 지 일 년 반밖에 안 되는 나름, 신축(?)이라는 것이다.
가장 충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여기가 보증금 이천에 월세가 고작 육십이었다.
***
횡재했다!
이게 첫 느낌이었다.
하지만, 감정만 가지고 일을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강형우는 나름 전문가를 초빙했다.
“어떻습니까?”
“흐음…….”
말없이 건물을 돌아본 강학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세.”
“예.”
강형우는 황 소장한테 받은 전자키를 입구 도어록에 가져다 대었다.
삐빅 하면서 문이 열리자 강형우가 앞장섰다.
이 층으로 올라가자 사무실 문이 보였는데, 강학희는 벽을 두드려 가며 일일이 확인했다.
“화장실이 일 층이고 수도 시설도 밑에만 있군. 끌어오는 건 일도 아닌데, 그거 외에 할 게 없어.”
“예? 손댈 게 없다고요?”
의외의 대답에 강형우는 깜짝 놀랐다.
사실 계약금을 걸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외관이 샌드위치 판넬이라 냉난방이 걱정되었다. 아래쪽 창고에서 음식을 만들고 보관해야 하기에 그게 제일 우선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무실도 어느 정도는 걱정되기는 했었다.
하지만 강학희는 예상과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그냥 판넬 건물이 아니야. 일종의 덧방이지.”
설명하기를 원래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이 맞단다. 외관이 허름해서 판넬을 덧씌운 그런 형태라는 것이다.
“여기 원래 뭐 였나?”
“듣기로 전에 처음에 카센터 했다고 했습니다.”
황 소장이 말하길, 처음부터 그게 들어설 자리가 아니었단다.
위쪽은 철길, 동쪽은 도시고속도로였다. 남쪽은 온천천 때문에 막혀 있고, 유일한 진입로는 아파트 단지 때문에 가려져 있는 상황이었다.
해서 여기서 카센터 하면 망한다고 했다.
하지만 단골도 많았고 앞으로 인근이 개발될 여지가 많아서 괜찮단다. 처음 사장이 그렇게 우기면서 들어왔다가 거지꼴로 나갔다는 것이다.
야심차게 건물 공사까지 했는데 오 년을 못 버텼다나?
이후 몇 번 세입자들이 바뀌고 십 년이 더 지났다.
가장 최근이 아웃도어 할인 매장이었다. 망한 공장에서 땡처리 물건을 떼다가 팔던 회사였는데, 악성 재고 때문에 석 달 전에 정리하고 나갔단다.
“쯧쯔, 구조가 이런데 식당 하겠다는 사람들이 문제지. 애초에 창고 자리에 무슨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강학희는 몇 번이나 혀를 차더니 이번에는 일 층을 돌아봤다.
원래 카센터로 시작했기에 여기 창고가 차를 수리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공간은 넓었고, 딱히 중간을 막고 있는 구조물 같은 건 없었다.
“이 층짜리라서 그런 거지. 위에서 내려오는 하중이 없으니 기둥을 안 세워도 충분하거든.”
전면을 제외하고 외벽이 충분히 두꺼워서 문제가 없단다. 구조적으로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정남향에 직사각형 구조인데, 여기 바닥 공사하고 사무실 인테리어만 하면 되겠구먼.”
강학희가 결론을 내리자 강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 견적만 천오백만 원이었다.
기존에 창고로 썼기에 주방 시설을 들이려면 배수가 가장 중요하단다. 여기에 수도 공사를 해야 하고, 승압에 기타 등등을 더하면 대략 이천만 원 선이라고 했다.
가장 우려하던 냉난방은 굳이 손댈 게 없다고 했다. 콘크리트 건물 외벽에 두꺼운 판넬을 더했으니 충분하다나?
“그럼 공사는 언제부터 진행하면 되겠는가?”
“저야 빠르면 좋긴 합니다만, 아버님께서 시간이 어떻게 되시는지…….”
“허허, 나야 뭐 놀고 있는 처지니 당장 해도 좋네.”
강형우는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회사 보증금 이천에 공사비 이천, 여기에 3호점 보증금까지 계산하면 얼추 가진 돈이 딱 맞게 떨어졌다.
그 외 기타 잡다한 건, 추가로 잡으면 될 것 같았다.
강형우는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다음 주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
일이 풀리려니 술술 풀렸다.
강형우는 사무실 자리 계약부터 서둘렀다.
놀랍게도 건물 주인이 황 소장님 친한 동생이라고 했다. 그 덕에 공사 기간 이후, 정식 입주할 때부터 월세를 계산하기로 했던 것이다.
여유 기간은 삼 주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황 소장님이 한마디를 더 거들더라.
연말부터 계산하면 재수 없다고 내년 1월부터 하란다. 새해 시작부터 하는 게 맞다고 우겼던 것이다.
결국 건물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지방에 내려가 살고 있어서 실제 관리를 황 소장님이 대신해 주고 있었으니까.
3호점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강형우가 이런저런 걸 알아보고 중간에 여행까지 갔다 왔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자 오히려 급해진 건 동대표 사모님이었다.
나름 지인들에게 지성분식 이야기를 흘렸고, 긍정적인 도움까지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강형우가 꼼짝도 않고 있으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마침 연락하려는 차에 먼저 연락이 온 게 그래서였다.
강형우는 깨끗이 세탁한 정장을 입고 동대표 사모님을 만나러 나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강형우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동대표 사모님은 살짝 당황해했다.
“어머, 사장님 맞아요?”
“예. 맞습니다. 그때는 복장이 좀 그래서… 하하하.”
한창 주방에서 일하다 나왔으니, 당연히 앞치마 차림이었다. 게다가 칼 들고 나왔다가 아차 싶어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왔었다.
거기에 땀까지 절은 모습이었으니, 공지혜가 준 물수건으로 대충 닦았음에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택배 회사에서 엉망이 된 정장도 세탁소에 맡겼다가 찾았고, 간만에 사우나 가서 때 빼고 광까지 냈던 것이다.
또, 미용실 가서 머리도 하고 면도까지 깔끔하게 해버렸다.
“일단 앉으세요.”
사모님의 권유에 강형우는 재빨리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자꾸 부탁을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미처 연락 못 드린 건 제 불찰입니다. 최근에 일이 좀 바빠서 소홀했습니다.”
평석이 형이 그러더라.
좀 배운 집안 사람들 하고 말할 때는 단어도 골라 써야 한단다.
너무 무식하게 보이면 안 된다나?
해서 강형우는 몇 번이나 연습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간의 이야기를 짧게 꺼냈다.
2호점을 점장에게 인수인계를 했고, 작은 사무실을 하나 얻었다고.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런 것도 모르고 제가 실례를 했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일어나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왔다.
다시 맞은편에 앉으면서 보니까,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조금은 수줍게 웃는데 편안한 느낌까지 들었던 것이다.
사실 강형우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거였다.
이 사모님의 첫인상은 무척 고상했다. 말투도 조곤조곤 부드럽게 말했고, 의외로 강형우의 사정을 잘 들어주었던 것이다.
수많은 진상 손님들을 겪으면서 쌓인 경험이 그랬다.
사람이 참 괜찮다!
딱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모님은 커피에 설탕을 넣고 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전에 이야기하면서 너무 저희 쪽 사정만 강요한 것 같더라고요. 사장님도 일이 있으실 거고, 계획도 잡으셨을 건데, 너무 일방적인 건 서로에게 좋지 않잖아요.”
대화의 첫 시작이 예상과 달랐다. 언제, 어떻게를 물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해서 강형우는 애써 준비했던 말을 잊어버렸다.
사모님의 먼저 제안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