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하여간 좋을 때다
“오빠는 역시, 어쩔 수가 없네요.”
“어?”
뭔가 실수한 건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공지혜가 웃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오빠! 우리 여행 와서 먹은 거 다 기억하죠?”
“그, 그렇지. 첫날에 고기국수 먹고, 저녁에 말고기집 가서 코스 먹었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둘째 날은 좀 늦게 일어났다.
별장에 도착한 건 저녁이었고, 주방을 어지럽히기가 그래서 가방에 싸온 걸로 간단하게 야식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햄과 치즈를 잘라 크래커 위에 올려서 와인을 마셨던 것이다.
그러다 분위기가 좋아서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결국 아침은 거르고 점심때 유명한 고기 짬뽕집으로 갔다.
“확실히 그 집 짬뽕이 맛있기는 하더라. 국물이 진하고 걸쭉한 게 아무래도 흑돼지 비계를 끓여서 기름 뽑은 것 같더라고.”
강형우는 다시금 생각이 나는지 군침을 삼켰다.
이후에도 이야기는 한참을 이어졌다.
오후에 한라산 근처를 구경하고, 대형 마트에 들렸다. 거기서 흑돼지 목살과 야채, 같이 구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사 들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다른 식당을 가려고 했는데 주혁 형이 신신당부를 했다. 꼭 해 떨어지기 전에 별장 이 층 테라스에서 고기 구워 먹으라고 했던 것이다.
확실히 추천한 이유가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산을 어스름히 넘어가는 노을이 있었고, 정면에는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그런 경치를 배경 삼아 구워 먹는 오겹살은 확실히 달랐다.
여기에 새우와 버섯, 파인애플까지 곁들이자 진짜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솔직히 흑돼지 목살이, 고급 스테이크 같았다.
“확실히, 오빠가 구워준 고기가 맛있기는 해요. 마치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공지혜가 맞장구를 쳐주자 더욱 신이 났다.
고개를 끄덕인 강형우는 돈가스를 한 입 먹은 뒤, 말을 이었다.
셋째 날은 성산일출봉이었다.
전날 별장에서 일찍 잔 터라 시간은 넉넉했다.
하지만 힘겹게 올라갔음에도 일출을 보지는 못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해가 뜨고도 삼십 여분이 지나서 겨우 햇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길로 내려와서 갈치, 고등어 조림을 먹었다.
가성비가 좋다는 말에 차로 한 30분 정도 갔었는데, 여기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결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만큼 맛도 좋았고, 가격도 적당했던 것이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갈치조림만은 안 된다는 거였다. 손님이 많아서 갈치 고등어 반반만 판단다.
그렇게 맛있게 잘 먹고 우도로 향했다.
내리자마자 짜장면 먹고 욕을 한바탕 한 뒤, 섬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절반쯤 지나서 우도 막걸리에 모듬 해물 한 접시를 먹었다.
바다를 보며 땅콩 막걸리에 해물을 먹으니, 확실히 여행 기분이 나더라.
아쉬운 건 운전 때문에 딱 한 잔밖에 못 마셨다는 것.
당연히 남은 막걸리는 공지혜의 몫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배로 우도를 나와서 먹은 건 성게알 미역국이었다. 제주 정찬이라고 미역국에 생선구이가 나오는 집이었는데, 아쉽게도 특별한 인상은 못 받았다.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감상일 뿐!
“다 맛있더라. 나름 특색도 있었고 신선했어.”
이렇게 공지혜 앞에서는 다 맛있었다고 했다. 행여나 본심을 말했다가 혼날까 싶어서였다.
“와! 오빠, 대단하다. 가게 이름도, 메뉴도 다 외우네요. 그런데, 우리 중간중간에 들렸던 데는 기억해요?”
“어?”
“우리 바다도 갔고, 억새도 보러 갔잖아요. 어제는 노을 보려고 오름도 올랐는데…….”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확실히 가기는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십여 분 정도 올라갔더니 넓은 억새밭이 보였다. 거기서 셀카봉으로 사진도 찍고, 정상까지 갔다가 내려왔다.
또 무슨 오름이라는 데도 들렸다.
산책하듯 언덕을 잠시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확실히 경치는 좋았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말똥 냄새하고, 성난 말 거시기(?)뿐이었다.
“그게… 기억 다 하지. 어제 일인데…….”
애써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는데, 공지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마치, 형사 앞의 범인이 된 기분이랄까?
“내가 오빠를 몇 년 본 줄 알아요?”
“그, 그게…….”
손가락을 꼽아보니, 제법 오래 거슬러 갔다. 영지가 초등학교 때부터였으니까…….
“처음 본 거부터 치면 벌써 십일 년 됐어요. 오빠랑 같이 일하면서 이 년 반을 붙어 있었고요. 오늘이 사귄 지 200일 돼요.”
“어? 어, 오늘?”
날짜 어플을 써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외우지는 못했다. 게다가 제주 여행 와서 바쁘게 돌아다닌다고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게 미안해서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공지혜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알아요. 오빠 바쁜 거. 그러니까 200일 같은 거 일일이 안 챙겨줘도 돼요. 여기도 제가 졸라서 왔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요.”
“미안.”
“오빠!”
“어?”
엉겁결에 대답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의외로 공지혜는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몇 년을 봤는데 오빠를 모르겠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어찌나 유별났는데…….”
공지혜가 말하길, 저렇게 희한한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단다.
그때 영지랑 같이 먹으라고 떡볶이 사주고는 나중에는 맛이 어땠냐고 물어봤다더라.
그러면서 고추장이 어쩌고 물엿이 어쩌고 떠들어대는 게 무척 신기했다나?
가만 생각해 보니 홍태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현우 형이랑 치킨 염지에 대해 고민할 때, 학생 때부터 튀김이 어쩌고저쩌고 했단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런 쪽으로 유별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언젠가 음식점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더라.
확실히 시기상 비슷하기는 했다.
“나도 이제 알아요. 옆에 있어보니까, 오빠 같은 사람이 성공한다는 걸 안다고요. 하루 서너 시간 자고 쉬지도 않고 음식 만들어보고 먹어보고, 그만큼 노력하는데도 실패하기도 하고……”
공지혜의 입에서 지성분식의 역사가 담담히 흘러나왔다.
성공과 실패, 그리고 다시 재기해서 2호점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었을 때까지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오빠는 뭐 먹을 때, 또 먹는 거 이야기할 때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그건 아는데, 솔직히 질투 나거든요. 나보다 먹는 게 더 중요한 것 같기도 하고…….”
“아냐, 그건 절대 아니다. 당연히 네가 더 중요하지. 내가 약속할게. 앞으로는 안…….”
공지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오빠. 그건 오빠 본능이에요.”
“본… 능?”
“그리고 그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요. 지금 오빠가 하는 사업과 관련된 거니까요. 그리고 그만큼 열심히하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잖아요. 결국 내가 좋아서 오빠 옆에 있는 건데, 이 정도는 이해해야죠.”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동시에 방금 했던 말이 부끄러웠다. 이 상황만 모면하려고 했던 변명 같다고 느껴진 것이다.
“대신 부탁 하나만 할게요.”
“뭐, 뭔데?”
“앞으로 조금만 더 나한테 신경 써줘요. 그래도 여자 친구인데, 돈가스만도 못하다는 건 슬프잖아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니 농담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게 아닌 걸 안다. 정작 가게 일은 공지혜한테 맡겨놨음에도, 상권조사니 뭐니 하며 돌아다니면서 최근에는 연락조차 소홀했던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니 내가 진짜 나쁜 놈이 맞구나 싶었다.
그때였다.
“어? 오빠?”
“어? 왜?”
“코, 코피 나요.”
“엉?”
진짜였다. 뭔가 뜨뜻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으로 점점이 핏방울이 떨어졌던 것이다.
순간, 머릿속으로 천벌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해서 휴지를 뽑는데, 공지혜가 다급히 말했다.
“그러게, 아침에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괜히…….”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컸나 보다. 가게 안의 커플들이 전부 쳐다봤던 것이다.
갑자기 얼굴이 확 하고 뜨거워졌다.
***
“끄아아, 피곤하다.”
강형우는 기지개를 켠 뒤 폰을 확인했다.
시간이 벌써 11시였다.
“헐. 미쳤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시간까지 자다니,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기는 했다.
돈가스집에서 코피를 수습하고 난 뒤, 둘은 동문시장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공지혜의 분위기가 확 바뀌더라. 점심때의 일을 전부 잊은 것처럼 씩씩하게 돌아다니는데, 쫓아가기도 버거울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둘은 동문시장을 누비면서 간식도 먹고 선물도 사기 시작했다.
말고기 육포에 감귤에 우도 땅콩, 그리고 정체불명의 초콜릿과 여러 종류의 과자들까지. 그걸 지성분식 본점과 2호점, 그리고 집 앞으로 택배 보내고 나서야 공항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이후 비행기 타고 김해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았고 공지혜를 내려다주고서 바로 자취방에 돌아왔다.
그런 뒤, 제주도 여행 사진을 다 보낸 뒤에야 기절하듯 잠들었다.
“끄으응. 진짜 몸살 나겠네.”
강형우는 공지혜한테 바로 톡을 보냈다.
평소에는 가게에서 하루 종일 봤기 때문에 잘 안 했는데, 앞으로는 빼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당분간 혼자 돌아다닐 일도 무척 많았던 것이다.
강형우는 후다닥 일어나 몸을 풀었다. 그리고 적당히 땀이 나자 바로 샤워를 하고 서둘러 옷을 입고 나왔다.
점심 약속 때문이었다.
“흐음.”
강형우는 고민에 빠졌다.
부동산 삼촌과 점심을 먹고,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사무실 겸 공장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강형우는 안내받은 곳을 둘러볼 때마다 사진을 찍어서 일단 공지혜에게 보냈다.
하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서둘 일은 아니니까. 내일도 한 번 돌아보도록 하지.”
“예. 그런데 의외로 많이 없네요?”
“당연하지. 이 근처에서는 많이 없어. 저기 저 수영강 건너편이나, 송정 아니면 복천동 위쪽이나 가야 네가 말한 크기가 나와. 따지면 여긴 시내잖아.”
부동산 삼촌은 그렇게 말하면서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점포세, 상가 같은 건 큰길가만 돌아다녀도 하루에 수십 군데가 나온다고 했다.
원룸도 물량이 넘쳤고, 셋방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무실 겸 공장은 조건이 까다로웠다. 단순히 창고나 부지를 얻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까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강형우가 내건 조건이 있었다.
주변이 시끄럽지 않고 깨끗할 것!
그건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정한 거였다.
해서 부동산 삼촌이 여러 곳에 연락해 매물들을 소개받았는데 적당한 게 없었다.
“오늘은 형우 너네 동네 근처라서 그런 거지. 내일은 좀 더 멀리로 알아보마.”
그러면서 미안해하는데, 이유가 있었다. 오늘 다른 손님하고도 약속이 있어서 더는 같이 돌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원인은 강형우가 늦잠을 잔 것에 있었지만.
그렇게 지성분식 본점 쪽으로 차를 돌리는데,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저 삼촌, 이 근처에서 내려주면 안 돼요?”
“어? 왜?”
“그게, 오늘은 사우나나 하고 들어가려고요. 아무래도 여행 갔다 와서 그런지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아요. 아우.”
강형우가 너스레를 떠는데, 부동산 삼촌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좋을 때다.”
“아이, 그런 게 아니라…….”
“저 앞에 해수탕에 내려주면 되냐?”
“옙. 감사합니다.”
부동산 삼촌은 진짜 많이 바쁜지, 강형우를 내려주고 빠르게 사라졌다.
강형우는 잠시 손을 흔들다가 방향을 바꿨다.
가끔 피로를 풀러오던 해수탕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 너머에 온천천이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