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민석이 나 줘요
“이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녀석이 중얼거리는데 확실히 많이 성장한 것 같았다.
이전에는 어깨 움츠리고 다녔던 쭈그리였는데, 지금은 뭔가 사람다워진 느낌이 있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반짝반짝 빛이 나기까지 했다.
사실 김민석의 과거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원래 양아치, 깡패 짓을 하던 녀석이었다. 그러다 우리 가게에서 깽판을 쳤고 빚을 졌고, 돈만큼 일을 시키다가 덕수 형에게 스카우트을 가장한 납치(?)를 당했다.
그 과정에서의 추태는 진짜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어쨌든, 이후 조폭들과 싸워가며 밥버거집을 지켰고, 그렇게 일을 하다가 지금의 가게를 맡게 되었다.
그 직후 또 사고(?)를 쳤다. 덕분에 이제 24살에 딸 바보가 되었던 것이다.
뭐, 여기까지는 조금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그런 외형적인 게 아니었다.
김민석은 진짜 옛날 생각이 안날 정도로 새사람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동네 사람들한테 예의 바르다고 소문날 정도였고, 애어른 가릴 것 없이 인사하고 다녔다.
거기에 그친 게 아니라 불과 이 년 사이에 인상까지 좋게 바뀌었다. 항상 웃다 보니 눈꼬리에 주름이 생겼는데, 날카로운 눈매가 무뎌지면서 부드럽게 아래로 휘어진 것이다.
정말 자신이 알던 그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김민석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처음 자취했을 때는 시장 안쪽의 골방이었거든요. 왜 작은 부엌이 있고 그 위에 다락이 있는 옛날 집 있잖아요.”
한집에 다섯 가구가 살았단다. 그러니 당연히 화장실은 푸세식 공용이었다.
그러다 조폭 똘마니 짓을 하면서 허름한 여관을 개조한 원룸에서 지냈단다.
물론 한방에서 셋이 살아야 했기에 침대는 꿈도 못 꿨지만 집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게 그렇게 좋았다나?
이후 형님들 따라다니다 전과를 달았고 그 보상으로 원룸을 하나 얻었다. 거기서 윤다정과 연애를 하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진짜 기분이 뭐라고 해야 하나? 비록 전세지만, 이제 내 집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게 다 형님 덕입니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걸 보니, 이상하게 흐뭇해졌다. 약연이 인연으로, 인연이 사람 하나를 구제한 것이니까.
진짜 이걸 눈앞에서 보면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 기간은 2년인데, 이 동네가 거의 그렇대요. 주인 아저씨도 살고 싶을 때까지 살라고 하더라고요.”
김민석은 애 학교 갈 때까지 여기서 살 생각이란다.
그러면 최소 오 년 이상이었다.
강형우가 보기에도 집은 괜찮았다.
전에 들었는데, 원래는 빌라를 계획했다. 그러다 같은 금액으로 바로 근처에 주택 삼 층 독채가 나왔던 것이다.
해서 바로 계약해 버렸단다.
방 두 칸에 거실 겸 주방, 그리고 옥상의 작은 마당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나?
게다가 도배 장판도 새로 했고, 싱크대와 보일러도 새로 갈았다고 했다. 머지않아 도시가스가 들어온다고 해서 집주인이 이 참에 싹 해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입주가 늦어진 이유 중에 하나였다.
유일한 단점은 지대가 무척 높다는 점.
하지만 사람이 못 다닐 정도는 아니었고, 민석이네 가게 위치를 생각하면 10분 정도에 불과했다.
그때 윤다정이 김민석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적당히 떠들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김민석이 움찔하는데, 윤다정이 환하게 웃었다.
“오빠들,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
집들이라지만 별거 없었다.
선물 사온 거 작은 방에 놓고, 신혼방 구경 잠시 했다가 주방에서 음식 준비를 했다.
윤다정이 차린 건 김치전골 하나뿐이었다. 몸도 생각해야 했고, 딸내미 본다고 바빠서 이것저것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미리 이야기한 것도 있었다.
형들이 누구인가?
자칭 우리 동네, 사총사였다.
그것도 전부 식당 운영하는 사장님들이었으니 각자 적당히 알아서 싸오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식탁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삼 일은 음식 안 해도 될 정도로 푸짐했던 것이다.
혁기 형이 탕수육과 고추잡채, 창주 형이 오뎅탕 재료를 가져왔다.
또, 현우 형은 치킨을 튀겨왔고 덕수 형은 당당하게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
여기에 윤다정이 끓인 김치전골이 더해지니 더 필요한 건 없었다.
곧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중간중간 돌아가면서 음식을 했고, 그때마다 덕수 형이 설거지를 자처했다.
마지막에 강형우가 과일을 깎아서 입가심까지 하고 나니 정말 뒷정리할 게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집들이를 끝내고, 강형우는 사총사 형들과 2차를 가기로 했다.
이게 오늘의 핵심이었다.
“형, 생각 많이 해봤는데, 민석이 나 줘요.”
강형우의 말에, 정덕수는 화들짝 놀랐다.
동시에 세 형들도 강형우를 쳐다봤다.
정덕수와 김민석이 어떤 사이인지를 다들 잘 알고 있었다. 피로 맺어진 형제는 아니지만, 이 험한 세상을 진짜 형제처럼 살자고 했던 것이다.
정덕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무슨 일인데?”
“사실 전에 이야기한 거 있잖아요. 같이 사업을 해보자고요.”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인 건, 김창주였다. 애초에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게 바로 그였던 것이다.
이후, 정덕수가 웃었고 이혁기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마지막으로 김현우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래 이제 결심이 선 거냐?”
“그건 모르겠는데, 확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사실 고민 많이 했거든요.”
솔직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형들이 한 말은 의외로 단순했으니까.
같이 해보자. 그리고 니가 사장 해라.
투자는 우리가 할게.
이것 외에 다른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몇 번 더 이야기했는데도 그대로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유를 물어봤는데, 황당하게 대답도 똑같았다.
“네 덕에 죽다 살아났잖아.”
그러면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고 했다. 널 믿기에 망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런 진심을 의심한다는 게 오히려 미안했다.
무엇보다 얼마 전까지는 결심이 서지 않았었다. 솔직히 뭘 해야 할지조차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2호점을 성공적으로 인수인계를 하고, 3호점 자리의 상권을 조사하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몇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전에는 막연히 상상하던 것이 실체화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여기에 몇 가지 행운(?)이 작용하니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
실제로 동대표 아주머니의 일처럼, 몇몇 분들이 연락이 왔었다. 자기 동네에도 지성분식 차려주면 안 되겠느냐는 문의를 했던 것이다.
강형우는 우선은 정중히 사양을 했다.
지금은 욕심을 낼 때가 아니었다. 차분히 준비하고 해도 될까 말까인 게 음식 장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게, 그런 건수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거였다.
이렇게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
어차피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그런 생각들로 고민하고 있는데, 공지혜가 한마디 했다.
“오빠. 사업 망해도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할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 적금통장을 보여주는데, 정말 알뜰살뜰하게 모아놨더라.
어쨌든 그런 과정들이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도전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강형우는 네 형들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 회사 차릴 거예요. 그리고 민석이를 관리자로 놓고 싶어요.”
“진짜?”
“예. 생각 많이 하고 결정 내린 겁니다. 아무래도 적임자가 없더라고요. 형들은 형들 하는 게 있잖아요.”
그 지적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강형우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번 일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믿고 맡길 사람이었다.
외모나 능력, 경력 같은 건 나중의 문제였다. 회사를 유지하는 기본이, 신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제 주변에서 우리 가족 빼고, 지성분식 식구들 빼면 형들밖에 없잖아요. 근데, 형들도 다들 바쁘니까 빼고 나면, 제일 믿을 수 있는 게 민석이더라고요.”
현재, 창주 형은 화끈오뎅 3호점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주혁이 형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만약 일을 진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두루 컴퍼니 소속이 된다.
동시에 원래의 의미와 다른 방식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프랜차이즈 시스템으로 전환이 되면서 공장 생산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돈은 많이 벌겠지만, 창주 형의 장사철학과는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하고 독립적으로 하기에는 엮인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반대로 혁기 형은, 중국집 주방을 물려받기 위한 수업 중이었다.
짧으면 오 년, 길면 십 년이었다.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니라 능숙의 과정을 밟아야 했기에 다른 일을 하기에는 어려웠다.
덕수 형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혼하고 3호점 오픈하고, 또 새로운 사업 구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처럼 출소자들을 위한 회사를 하나 차렸으면 한다는 것이다.
뜻은 좋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적지 않았다. 해서 이래저래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현우 형도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장사가 무지하게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한테 시달리느라 여유도 부족했다.
강형우의 말에 김창주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솔직히 인정!”
“어쩔 수 없잖아. 일이 그런 건데.”
여기에 김현우가 손을 들자 이혁기도 한마디를 보탰다.
“나도 바쁜 건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도울 수 있으니까. 말만 해.”
그때 정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민석이 데려가고 싶다는 거야?”
“예. 적어도 그놈은,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야. 그러면 죽지.”
덕수 형이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짜 죽이진 않겠지만, 영혼이 죽을 정도로 팰 거다. 그러니 민석이가 도망갈 일은 없겠지.
사실 동업은 좆같아서 절대 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형들하고 민석이라면 해도 될 것 같았다. 해서 강형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회사를 차리고 싶다고.
***
부우우웅. 우와아앙.
요란한 굉음이 울리는 가운데, 강형우는 눈을 감았다. 초조하기도 했고 식은땀도 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
“오빠, 제주도 가고 싶어요.”
“뭐? 제주도?”
“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아니면 못 갈 것 같아서요.”
공지혜가 한숨까지 내쉬자, 솔직히 뜨끔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데이트도 많이 못 했고 분명 여행도 약속했었다.
하지만 신원이 형, 인수인계가 많이 늦어졌다. 거기에 3호점 문제에, 이런저런 고민들이 겹쳤고, 사총사 형들 설득하다보 니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모든 과정을 알고서도 공지혜가 묵묵히 기다려 줬다는 거다.
그랬기에 강형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결과, 정신 차려보니 비행기 안이었다. 어버버 어버버하다 보니 생전 처음으로 타게 된 것이다.
진짜 좌석은 왜 이렇게 좁은 건지, 고작 4일 여행 가는 건데 짐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주도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답답함 속에서도 강형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공지혜가 너무 좋아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