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연락 좀 하고 살자
“형, 돌았어요?”
강형우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 이 주, 강신원에게 점장 교육을 하면서 몇 가지 재량권을 주었다. 이은주와 의논해서 꾸미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그 내용만 적당하면 허락해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대체 이 디자인은 뭐란 말인가?
일단 노트북 화면 속의 메뉴판은 핑크핑크했다. 가죽 계열의 고급스러운 지성분식 메뉴판과 다르게 온통 분홍색과 빨간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벚꽃 에디션이라고나 할까?
“아! 이건 아니야. 그냥 가벼운 마음에 저장한 거라고.”
“이거 은주가 골랐죠?”
“어? 어.”
반사적으로 대답한 강신원은 움찔했다. 강형우가 너무도 기습적으로 질문하는 바람에 방어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게 사실은…….”
홍태구가 샘플을 한 박스 가지고 왔는데, 그중에 bar에서 쓰는 메뉴판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은주는 그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냥 사진 찍어서 파일로만 해놓은 거야. 진짜는 이게 아니라…….”
강신원은 다급히 이미지를 넘겼다.
확실히 고급스러운 게 몇 가지 더 있었는데, 일단 무마하려는 느낌이 강했다.
다행히 강형우도 그중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흐음, 형이 보기에는 어때요?”
“난, 이거하고 이거. 아예, 메뉴가 확 띄게 화이트 톤으로 해버리려고.”
“괜찮은 것 같기는 하네요. 일단 이거랑 이거 남기고 나머지는 싹 지우세요. 괜히 눈만 사나우니까.”
괜히 핑크 에디션 메뉴판을 남겼다가는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애초에 싹을 자르는 게 필요하다 봤던 것이다.
결국 강신원은 강형우 눈앞에서 파일을 삭제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장식 이미지들이 보였는데 강형우는 재량껏 허용해 주었다.
사실, 메뉴판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이거였으니까.
“이게 인테리어 이미지 모아놓은 건데…….”
강신원은 이미지 파일을 클릭했다.
순간 화면 가득 채우는 것이 있었으니, 또 핑크색이었다.
“형!”
강형우가 인상을 쓰면서 째려봤다. 이로써 아까의 메뉴판이 단순한 장난이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세상에나 핑크색 가게에 핑크색 메뉴판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 정력이 감소되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 인터넷을 떠돌던 기사 하나를 봤던 탓이었다.
유럽의 어떤 나라가 감옥을 핑크색으로 칠했단다. 그랬더니 특정 성격의 호르몬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게, 폭력성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성욕도 급격히 떨어뜨린다나?
심지어 밑에 댓글 베스트가 이거였다.
남자는 핑크색!
그러니 강형우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이건…….”
강신원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럼에도 강형우는 모른 척 넘어가지 않았다.
원래 지성분식 2호점은 인테리어 자체가 급이 달랐다.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 톤에 가벼운 색상의 원목이 더해져 라인을 만들었고, 그게 묵직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에 각종 소품들이 있어서 흔히 말하는 엔틱 계열에 가까운 형태였다.
한마디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랄까?
그걸 핑크핑크하게 바꿔버렸다. 돈 많이 들어가는 구조 공사나 이런 게 없는 대신, 부분부분을 칠해서 화사하게 바꿔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이은주의 실력은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셀카 정도를 보정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강신원은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 각종 패션 잡지와 화보를 보고 분석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길러진 안목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관련 프로그램들도 조금은 다룰 줄 알았다.
해서, 가게 사진을 찍고 색을 입히고, 러프 스케치 정도를 해서 도안을 짰다.
그 정도만 해도 아버지 강학희가 작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이은주가 여기에 핑크색 마법소녀 필터 같은, 반짝이를 입혔다는 것이다.
물론 강신애의 장난스러운 협조(?)도 있었단다.
살짝 짜증이 났다. 인테리어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장난질을 치다니.
반대로 이해하는 부분도 있었다.
신원이 형과의 술자리 이후, 이은주와 따로 이야기를 했다.
들어보니 이해가 되더라.
거의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집안일을 돕다보니 우락부락한 남자들 사이에서 자랐다.
게다가 중국집 주방은 무척이나 질서가 엄격했다.
불맛을 끌어올리기 위해 화력이 어마어마했고, 기름도 항상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여기에 커다란 중식도들이 날아다니면서 각종 식재료들을 무지막지하게 썰어댔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그랬기에 호통은 기본에 욕은 옵션이었다.
물론 요즘에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은주도 그것 때문에 약간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스스로의 여자다운 부분에 대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형우는, 그래서 둘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해줬다.
따지면 신원이 형도 여성적인 섬세함이 많았으니까.
뭐, 이런 장난도 그래서 나온 거겠지?
강형우는 그렇게,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됐고요. 다음 거 보죠.”
“어, 이건 진짜 제대로 나온 건데…….”
스페이스바를 클릭하자 화면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건 강형우의 예상조차 뛰어넘는 버전이었다.
“메탈?”
“맞아. 아는 형이 금속공예를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사진 받아서 사이즈 맞춰서 넣었는데 괜찮아 보이더라.”
강형우는 화면을 앞뒤로 넘기면서 이미지를 확인했다.
황금색 선으로 그어진 악보에 각종 음표들이 보였다.
또, 은색의 높은음자리표 도형도 보였고, 연한 핑크색 메탈이 괘종시계의 형태를 이룬 것도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조형물은 짙은 갈색의 벽과 무척이나 잘 어우러졌다.
마치 영화에서나 봤던 분위기랄까?
대성당의 견고함에, 다채로운 색상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더해진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형, 이거 비싸지 않아요?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재료비만 내고, 들고 가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오히려 전시회 끝나서 처치 곤란이라나?”
사정을 들어보니 다급히 연락할 만했다.
이 조형물들은 제법 크기가 있었다.
작업실에 넣자니 부피가 문제였고, 창고를 빌리자니 비용이 문제가 된 경우란다.
결국 재료비라도 건지려면 떨이 처리를 하는 게 오히려 남는 거라서, 백방으로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아버님한테는 물어보셨어요?”
“아직.”
강신원이 고개를 젓는데, 강형우는 느낌이 왔다. 앞으로 이어질 계획을 생각하면 이게 딱이었던 것이다.
“형, 이건 이대로 진행하고요. 그 형님이라는 분한테 연락해서 일단 견적부터 물어보세요. 가격만 적당하면 제가 계산할 테니까요.”
건물주는 강학희지만, 공식적으로 가게 주인은 강형우였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투자는 장기적으로는 지성분식의 격이 올라간다.
무엇보다, 이 장식들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
-이 새끼야. 연락 좀 하고 살아라.
아니나 다를까.
분석이 형은 버럭버럭 화를 냈다.
그럴 만한 게, 분명 자주 전화했다 싶었는데 최근 통화내역이 두 달 전이었다.
아니, 저번 주에 하긴 했는데 그마저도 답답한 마음에 분석이 형이 먼저 연락한 거였다. 이번 추석 때 집에 들르냐고 확인차 했던 것이다.
쩝,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하여간, 내일 우리 집에 안 오면 너 진짜 혼난다. 안 그러면 와이프한테 내가 혼나고.
“헐, 그게 그렇게 돼요?”
-됐고, 잔말 말고 꼭 와라.
분석이 형은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참 고맙고도 미안한 형이었다. 평석이 형을 통해 가게 돌아가는 것도 세심하게 살필 만큼 말이다.
그만큼 해준 것만 해도 충분한데, 아직도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셋째 주에 접어든 지금,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가게 뒤편의 주차장 한편에는 인테리어에 쓸 자재들이 차곡차곡 재어져 있었다.
강학희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연휴 마지막부터 준비하겠단다. 길어도 사나흘이면 공사가 끝난다는 것이다.
홍태구도 마찬가지였다.
추석 연휴 전에는 미친 듯이 바쁘지만, 끝나면 한가하다고 했다. 그래서 메뉴판이나 내부 홍보물도 이틀이면 충분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자잘한 게 있으나 인테리어 할 때 조금 손보면 금방 끝이었다.
강형우는 하루 종일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연휴였다.
그리고 강행군이 예고되어 있었다.
“삼촌!”
쿵쾅쿵쾅.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곰 같은 조카 셋이 튀어나왔다.
원하는 건 역시 선물(?)이었다.
강형우는 바득바득 싸온 소갈비 세트와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조카들을 맞았다.
“이야, 벌써 고등학생이냐?”
“2학년입니다.”
첫째가 손가락 두 개를 들자, 둘째와 셋째도 따라했다.
벌써 중학교 3학년, 2학년이란다.
강형우는 잠시 망설이다 지갑을 열어 오만 원짜리를 꺼냈다.
“아직 학생들이니까, 아껴 써.”
첫째만 더 주기도 애매해서 각자 한 장씩 줬다.
물론 저 돈은 형수한테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도 내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서부터 형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애들은 그저 신났다면서 좋아했다.
아무래도 다음에는 운동기구 하나를 선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간단한 안부가 오가고, 언제나 그렇듯 술상이 펼쳐졌다.
형수는 간만에 내가 온다고 잔뜩 솜씨를 부렸는데, 대체 이걸 다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큼직한 소갈비 찜이 턱하니 식탁 가운데 있었고, 그 옆에는 곱창전골이 있었다. 유명한 굴다리집 사장님한테 배워온 레시피란다.
또, 각종 전에 생선찜, 탕국에 오색 나물까지 보이니 마치 잔칫날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마시고, 수다를 떠는데 분석이 형이 눈치를 줬다.
“나, 잠깐 바래다주고 올게.”
“아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요?”
“애 바쁜 거 알잖아. 그리고… 흠흠, 할 이야기도 있고.”
결국 형수는 피식 웃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진짜 오 분도 안 돼서 뚝딱뚝딱 오단 도시락이 완성되었다.
“장사한다고 음식 준비도 못 했을 텐데, 이거 가져가서 먹고 좀 자주 와!”
“예, 형수님.”
그렇게 배웅까지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자 정분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 무슨 고민 있어요?”
“고민은 무슨, 일이 잘되서… 너무 잘되서 죽을 지경이다.”
“예에?”
뭔가 싶어 황당해하고 있는데, 정분석이 갑자기 씨익 웃었다.
“올해, 잘하면 매출 신기록 나올지도 몰라.”
“헐. 진짜요?”
“그래. 2학기부터 학교 급식 두어 개를 더 받았는데…….”
처음에 동네 분식집으로 시작해, 배달 전문으로 가게를 확장했다. 정성과 정성을 더해 무수히 많은 단골들을 만들었고 그걸로 연이어 지점을 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산 회사가 ‘내 밥상’이었다.
이후 주혁이 형이랑 사업 제휴를 했다고 들었는데, 대박이 터졌단다.
“벌써 학교 급식만 여섯 개야. 이것저것 다 따지면, 매출만 사십억 정도?”
“오! 형, 축하해요.”
강형우는 진심을 담아 손뼉을 쳐줬다.
피식 웃은 정분석은, 강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형. 또, 형네 회사 들어오라고요?”
“어? 어떻게 알았냐?”
놀라는 표정을 짓는데, 연기가 너무 어색했다. 그냥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은 잠시 걷다가 온천천 근처의 흡연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어쨌든, 네 덕에 일도 잘 풀리고 해서 고맙다.”
“예? 뭐가요?”
“모르면 됐고.”
분석이 형이 피식 웃는 걸 보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각자 담배를 물고 두어 모금 빨았을 때, 분석이 형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너. 다른 일 좀 안 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