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141화 해보는 게 어때요
“너 아니었으면, 지금도… 집에 있었을 거야.”
씁쓸하게 웃으며 강신원은 맥주잔을 잡았다.
강형우도 예의상 잔을 들어 짠 하고 쳐줬다.
“사실, 나도 지금 혼란스러워. 내가… 결혼을 한다니…….”
강신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서히 그의 입에서, 과거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분명 같이 음식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너무 달랐다. 마치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신부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그만큼 엄숙했으며 진지했다.
“백화점에서 일하다 그만뒀을 때, 진짜 힘들었어.”
백화점 단골 고객을 상대하는 게 강신원의 일이었다.
단순히 명품 구두만 파는 게 아니라 그에 맞는 코디까지 해야 했기에, 시즌에 따라 각 브랜드의 신상품까지 줄줄이 꿰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 여러 종의 패션 잡지를 외우다시피 해야 했고 디자이너들의 성향까지 공부해야 했다.
그런 노력 때문일까?
연봉은 나날이 올라갔고, 대우도 좋아졌으며 또래보다 진급도 훨씬 빨랐다.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급이 올라가면, 거기에 맞는 고객들을 상대하게 된다. 일명 VIP, 혹은 VVIP라고 일반인들과 다른 쇼핑을 하는 이들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 스트레스는 정말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위장이 헐어서 하루 한 끼 먹는 경우도 많았고, 그 역시도 억지로 넘기는 수준이었다.
또, 원형 탈모도 심해져서 부분 가발을 착용하기도 했으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입원도 해봤단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직원들 앞에서 뺨을 맞고 모욕을 당했다.
지금껏 있었던 일이라 넘기려 했지만 그때가 한계였다. 둑에 구멍이 나면 순식간에 무너지듯이, 인간 강신원은 그렇게 망가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신과를 한 반년 정도 다녔을 거야. 그러면서 여행도 하고 캠핑도 다니고 그랬거든.”
정말 살면서 이렇게 놀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쉬었다.
하지만, 단 하나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바로 사람 만나는 거였다. 대인기피증이 심해져서 불안장애가 올 정도였다는 것이다.
“부산 내려와서 카페 차리기로 결심한 것도 그래서야.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조금씩 익숙해지자고 생각한 거지.”
그래도 초반에는 괜찮았다고 했다.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서 찾아오는 손님들.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서 사진 찍기 위해 오는 학생들도 있었고, 또 여기에는 막 시작한 연인들의 설렘을 자극하는 향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다소 말수가 적은 무뚝뚝한 사장도 그럭저럭 장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참견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라고. 남자 사장 혼자 장사하는 게 서툴러 보인다면서 조언이라고 하는데…….”
한 귀로 흘렸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백화점에서는 절대적으로 갑인 고객들의 말을 단 한마디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 습관 때문에 무시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카페 날개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변화의 가속도가 붙어버렸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되더라고. 그런데도 손님들은 계속 뭔가를 요구하더라.”
강신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잔을 비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성분식도 초창기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덕담을 가장한 요구를 무지막지하게 하고 갔었다.
그때는 강형우도 잘 몰라서 어버버했고, 삽질도 많이 했다.
정수기는 저거 말고 뭐가 좋더라.
알고 보니 영업 사원이었다.
내가 맛집 어디를 가봤는데, 라면 이렇게 끓이면 더 맛있다더라.
주방에서 칼질 한 번 제대로 안 해본 아저씨였다.
장식이 왜 이러냐, 조명도 너무 어둡다. 의자도 불편해서 식사 제대로 하겠냐?
얼뜨기 인테리어 업자였다.
그 외에도 업자에 사기꾼들이 천지였다. 젊은 청년이 장사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뭐라도 건져 먹을 게 없나 찾아온 하이에나들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창주 형과 부동산 삼촌, 그리고 배산회 사람들이 도와줘서 큰 손해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오픈 초창기에는 정말 그랬다.
그 사람들 말만 들어보면 내가 정말 장사를 개판으로 하고 있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서, 곧 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진짜 개새끼들 같으니라고.
자기 장사 아니라고 너무 쉽게 떠들어댄다.
물론 지금이라면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심각했다.
때문에 신원이 형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또다시 맥주를 들이켠 강신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마디 한마디 하는 손님들 얼굴이, 백화점 고객들하고 겹쳐지더라고.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오로지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딱 그런 표정들이었어.”
“사람 마음은 결국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이건 천경 어르신이 해준 말이었다. 정말 마흔까지 여자 만나면 안 되느냐고 언급했을 때 일러줬던 거다.
나이 마흔, 흔히들 불혹이라고 칭한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걸 반대로 표현하면,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름대로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거다.
그럼 그 기준이 뭘까?
바로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자신만의 가치관이었다.
때문에 인상을 봐야 한단다. 살아온 과거가 얼굴에 드러나는 시기가 바로 그때이니까.
강형우가 피식 웃으며 짧게 말하자, 강신원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흠, 맥주 한 잔 더 시켜도 돼?”
“예. 그러세요.”
이미 오백 세 잔을 마셨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곧 종업원이 맥주를 가져왔다.
“열심히 했는데, 한계가 오더라고. 더는 손님들 얼굴을 못 보겠는 거야.”
불안하고, 초조하고,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머리에서 식은땀이 피어올랐다. 어떤 날은 겨우 세 테이블 받았는데 땀으로 등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그러다 결정적인 일이 터지자, 과거에 한 번 그랬던 것처럼 단숨에 무너지고 말았다.
“카페를 접은 게 그래서였어. 손님들이 전부… 귀신처럼 보이는데…….”
그때는 정말 다시는 일을 못 할 것 같았단다. 차라리 사람들 얼굴 안 보고,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직업까지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그게 도망치는 거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형우 네가 가게 알아보러 왔을 때가 딱 그때였거든. 솔직히 아버지는 싫다고 하더라고. 젊은 놈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돈만 깎으려고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강신원이 피식 웃었다.
강형우는 괜히 뻘쭘해서 애꿎은 맥주만 목에 들입다 부었다.
“근데, 정말 몰랐어요. 그냥 인테리어가 좋구나, 분위기 있네, 정도였지. 솔직히 분식집 사장이 고급 자재 쓴 걸 어떻게 알아요?”
“아버지도 그러긴 하더라.”
강신원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인 뒤, 맥주잔을 잡았다.
다시 한 모금을 비우고, 또 한 모금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냥 그런 일인가 싶어서 넘기려고 했다가 호기심이 생기더라고.”
지성분식 본점을 찾아간 것도, 부동산 삼촌을 통해 강형우에 대해 알아본 것도 그래서란다.
결국 강학희는 세를 주는 대신에 황당한 조건을 걸었다.
강형우가 강신원을 고용한 게 그래서였고.
“처음 봤을 때, 인간적으로는 참 끌리더라고. 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별이 가지 않았거든.”
“예?”
“보통 남자들은, 우리 신애 보면 눈빛부터 확 달라져. 그런데 넌 그러지 않더라고.”
“아… 그건…….”
꾸준한 명상과 호흡 수련 때문이었다.
그 덕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감정의 동요가 적었으며, 이성을 지킬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전에 주혁이 형이 말했던 대로 벌써 사람 여럿 패고 감옥에 갔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장사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으니까.
“거기다 네가 그랬잖아. 너만 믿고 따라오라고.”
“그야…….”
걱정과 불안은, 쓸데없는 망상의 반복에서 생긴다.
해서 신원이 형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했던 말이었다.
“전에 민지한테도 그랬잖아. 무슨 일이든 전부 사장 책임이라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 역시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장사가 잘되든, 망하든 모든 책임은 사장한테 있는 게 맞았으니까.
“그 외에도 많았지. 미희네 친구들 왔을 때 네가 무리해서 음식 해준 것도 있었고, 솔직히 민지 뽑을 때도 좀 놀랐거든. 보통 분식집에서 애 엄마는 채용 안 하니까.”
“일만 잘하면 되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너도 장사해 봐서, 아닌 거 알잖아.”
강신원이 정곡을 찌르자 강형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 외에도 많았지. 가게 준비하면서도 그렇게 바빴는데도 통닭집도 도왔고, 밥버거집 상담도 해주고, 나중에는 폭립도 만들었고…….”
강신원의 입에서 지난 팔 개월 동안의 일들이 하나하나 흘러나왔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강형우도 기억 못 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꾸 네 등을 보게 되더라고.”
“예에? 설마…….”
“야. 나 곧 장가간다니까. 남자 안 좋아해.”
“그, 그렇죠?”
“에이, 분위기 망치게…….”
말투와 다르게 한껏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강신원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게, 어느 순간 너한테 자꾸 의지하게 되더라고.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동생인데… 뭐랄까, 오히려 큰형 같은 느낌?”
“하하, 하하하…….”
억지로 웃는데, 등에서 땀이 삐질삐질 나오고 있었다.
“진짜 냉라면 만든다고 네가 고생하는 거 보니까, 난 아직 멀었다 싶더라. 그런 내가 결혼을 한다니…….”
순간, 아! 하는 느낌이 왔다.
마음이 복잡한 건 그래서였다. 아직, 자신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음에서 오는 일종의 자괴감이라고나 할까?
“형, 은주 좋아해요?”
“그러니까 결혼하는 거지.”
“그럼 결혼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강형우가 진지해서인지, 강신원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다른 직장을 알아본다거나. 아니면 은주 따라 그쪽으로 간다거나.”
사실 중식 자격증 땄다고 했을 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은주야 도피성 취직 상태였다.
이제 그 이유가 사라졌으니 언젠가는 보내야 할 터.
만약 거기에 신원이 형이 딸려 가면, 지성분식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게 된다.
물론 내 입장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상황.
다행히 강신원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왔다.
“고민 중이긴 한데, 난 우리 가게가 좋아. 사람들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건, 형우 네가 있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형 …해보는 게 어때요?”
***
제안을 던졌으니, 남은 건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더라?
신원의 형의 스케줄이 지성분식에 맞춰졌을 때였다. 일요일도 하루 종일 머물 정도로, 가게에 있는 게 편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환하게 웃는 걸 보니, 조금 미안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싶었던 것이다.
처음 강형우의 계획은 이거였다.
강신원을 지성분식의 메인으로 만드는 것.
큰 키에 잘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니, 카운터에만 세워놔도 손님들이 밀려들 것 같았다. 장사를 날로 해먹기 충분했던 것이다.
문제는 대인기피증이라는 것.
하지만 그 증상만 고쳐진다면, 충분히 활용도 만점의 인재가 된다.
해서 주방보조 단계를 건너뛰고 지성분식의 핵심인 일을 맡겨 버렸다.
가끔 놓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큰 걱정거리 하나를 덜게 된다. 신원이 형이, 바로 건물주님의 아들이었으니까.
“그건 그거고. 아오~ 계산할 거 더럽게 많네.”
강형우는 지금 매상 정리에 머리가 빠개지고 있었다.
바로 모레가 월급날이었다. 게다가 9월 1일이니 보너스까지 계산해서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급상승한 매출도 문제였다.
냉라면 때문에 아주 금고가 폭발하기 직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