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화 인생의 은인
“와~ 정말이지. 미치겠네.”
손님들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평일에 300그릇이지만, 주말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손님들 줄이 쫙 서 있어서 최대한 수요를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게 실수였다.
한 솥이 딱 50그릇이었다. 그러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두 솥을 준비했는데, 어느 순간 점심시간에 바닥이 나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다섯, 여섯 솥까지 와버렸다.
“고작 냉라면인데, 이게 뭐라고.”
정말 공들여서 만든 건 맞았다.
육수, 양념장, 그리고 기존에 없던 쫀쫀한 면발까지.
따지면 다른 곳에서 먹을 수 없는 이색 음식이라는 특색까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이렇게 대박 터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휴우, 진짜 때려치우고 싶네.”
“동감.”
강형우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강신원이 적극 지지했다.
지금도 두 사람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했다.
그럴 만한 게, 한여름 주방 온도는 평균 35도 정도였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풀로 돌려도 항상 불을 피워야 했기에 온도가 쉬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열 시간 닭육수 우리는 게 추가가 되었다. 말 그대로 사우나에서 일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본점에서 파는 것까지 만들어야 했으니 거의 하루종일 육수통이 끓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당연히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형, 우리 잠깐 나가죠.”
“그래. 그러자.”
강신원이 두말없이 뒷문을 열었고, 둘은 주차장으로 나갔다.
다행히 8월하고도 셋째 주라, 저녁 바람은 선선했다.
“근데 대박이긴 대박이야. 이제 여덟 시인데 벌써 육수가 다 떨어지다니.”
“그러게요. 오늘은 유독 빠르네요.”
날씨에 따라 판매량이 다르기는 했다.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면 거의 이 시간대에는 한 솥 정도가 남았다.
하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땡볕이 내리쬐는 날에는 브레이크 타임이 20분이나 밀릴 정도로 미친 듯이 팔렸다. 정말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냉라면 전문점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저것만 계속 나갔던 것이다.
제일 끔찍했던 건,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자마자 거의 동시에 냉라면 30개 주문이 들어왔을 때였다. 게다가 식혀놓은 육수가 얼기도 전이라 15분 정도 딜레이까지 되고 말았다.
그때 얼마나 조마조마했었는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다 팔리긴 했네요.”
“그러게. 점심때까지만 해도 남을 줄 알았는데…….”
강신원은 그렇게 말한 뒤 입술을 달작거렸다.
그때 강형우가 담배를 꺼냈다.
“야, 나도 하나 주라.”
“예? 형 담배 폈어요?”
“가끔.”
강형우가 담배를 꺼내 불까지 붙여주자 강신원은 천천히 연기를 들이마셨다.
“후우, 오랜만이네. 다시 일하게 되면서 끊었는데, 팔 개월 만인가?”
“예에?”
“여기 취직하면서 거의 안 폈거든.”
강형우가 손가락을 꼽아보니 지성분식 2호점을 오픈하고 장사한 지가 벌써 칠 개월째였다. 정신없는 나날이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이렇게나 지난 것이다.
비로소 느껴진 게 있었다.
진짜 장사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치열하지 않은 나날이 없었고, 가볍게 넘어가는 날도 한 달에 며칠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외의 일들까지 겹치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휴우, 형우야.”
“예?”
“난 가끔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강형우가 얼떨떨해하는데, 강신원은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나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확실히 너는 못 쫓아가겠더라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주방 안쪽부터 홀까지 꼼꼼히 체크하고, 마칠 때도 가장 늦게 나오잖아.”
“에이, 장사하면 다 그렇게 해요.”
“아니야. 너처럼 하는 사람들… 많지 않아. 거기에 수시로 손님들 반응 봐서 신메뉴도 만들고, 파스타도 과감하게 빼버리고…….”
담배 한 개비가 다 탈 때까지 칭찬이 이어졌다.
강형우는 괜히 부끄러워서 딴청을 부렸지만, 강신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진지했다.
정말 진지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이래도 되나 싶더라고.”
“왜요? 형 잘하고 있잖아요. 요즘은 손님도 안 가리고, 실제로 형 없으면 가게 안 돌아갈 정도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예. 우리 주방 에이스는 형이죠.”
실제로는 이은주였지만, 신원이 형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었다. 주방에서 음식 하는데 필요한 거의 대부분을 만들고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형 무슨 고민 있어요? 오늘따라 유독 그런데요?”
“요즘 생각이 참 많아지네.”
“왜요?”
“아마, 날을 잡아서 그런가?”
무심코 중얼거렸기에, 강형우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무슨 날요?”
“아, 그게… 겨울 전에 결혼하기로 했거든.”
순간 머리통이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마치 뇌를 비벼 빤 것처럼 새하얗게 변한 것이다.
“결… 혼요?”
“아!”
강신원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러니까…….”
“아니, 형… 좀 제대로… 이야기를…….”
강형우 역시 당황했는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강신원이 시계를 쳐다봤다. 그런 뒤 결심한 듯 말했다.
“마치고 한잔할래?”
***
“하아~ 정말~ 진짜~ 너무하네요.”
입에서 연신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배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은주가 왔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강신원의 고백에 강형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신원이 형이 카오톡을 받고 허둥지둥할 때가 있었다. 왜 얼굴이 빨개지나 싶었는데, 그때부터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나도 고민 많이 했거든. 그런데, 은주가 우리 가게 와서부터는 이상하게 감정 조절이 안 되더라고.”
이은주는 다른 사람 모르게 정말 열심히, 적극적으로, 음식 만드는 것처럼 화끈하게 들이댔다. 그 바쁜 틈에도 틈틈이 팔짱을 끼고 매달렸고, 오히려 몇 번이나 덮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강신원은 그 애정 공세에 무너지고 말았다.
“5월하고 좀 돼서 일단 가짜로 남자 친구 해주기로 했거든.”
“예? 가짜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강형우도 이은주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강주혁이 부탁하면서 이야기를 해주었으니까.
이은주 아버님은 황룡의 태화점 사장이었다.
같은 서면 상권을 두고 롯데점 사장과 치고받고 서로 경쟁하다가 어느 순간을 계기로 친해졌다. 그러다 술자리에서 사돈 맺자는 말까지 나왔던 것이다.
롯데점 사장한테는 아들이 하나, 태화점 사장한테는 딸이 둘이 있었고 서로 친하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이은주 동생이었다.
은희라고 이미 롯데점 아들하고 몰래 사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밝히지 못했으니…….
웃긴 게,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자신들의 운명이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고 생각했단다. 당시에는 아버지끼리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으니 차마 말을 못 했다는 것이다.
그게 쭈욱 이어진 상황.
이걸 몰랐던 아버지는, 이은주한테 결혼하라고 해버렸다. 그래서 우리 가게로 도망친 것이다.
이후, 이은주 자매의 계획대로 되었다.
동생은 약속한 대로 사고(?)를 제대로 쳤고, 뱃속에 아이를 가진 채로 이미 양가 부모님들한테 인사까지 끝냈다.
그렇게 해피엔딩이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전개가 막장 드라마급으로 틀어졌다.
“무조건 언니부터 결혼해야 한다는 거야. 그게 그 집안의 전통이래, 동생이 먼저 시집가는 건 안 된대.”
“아니, 무슨 그런 개떡 같은 전통이 다 있어요?”
“그러게.”
강신원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생각해 보니 어지간히 속이 탔던 모양이었다.
결국, 이은주는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뻥을 쳤다.
안 그랬다간, 아버지가 아는 주방장 중에 적당한 사위를 고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형이 대신했다는 거죠?”
“어, 같이 집에 가서 인사드리고, 내가 사정이 있어서 당장 결혼은 어렵다고 해달라고 해서…….”
이은주는 그렇게 급한 불을 껐다. 일단 동생 결혼식 날짜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느 순간부터 혼란스럽더라고. 애초에 잠시 남자 친구 역할을 해주기로 한 건데…….”
강신원이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리는데, 강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형, 참 멍청하다.
아니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전에 강석이가 군대 가기 전에 다 불었다.
이미 이은주는 신원이 형을 찍어놓고 있었다. 그 모든 게 하나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물론 집안 이야기는 사실일 거다.
이은주는 그걸 활용한 것이고.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까 은주네 원룸이더라고.”
“예?”
“그게 회식 중간에 필름이 끊겼는데… 그렇게 됐어.”
사귀게 된 게 그래서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강신애의 지원도 한몫했다.
이미 오빠랑 결혼할 사람이라고, 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나?
전에 말실수가 바로 그래서 나온 거였다.
가장 황당한 건, 가게 식구들이 전부 그걸 알았다는 거였다.
“와, 진짜 나만 몰랐네요.”
“그게 어쩔 수가 없는 게… 너 강 실장님하고 친하잖아.”
“주혁이 형이요?”
“어. 당시에는 진짜 위장 연애 중이었거든. 그거 강 실장님 귀에 들어가서 소문이라도 나면 난리가 나잖아.”
“아! 그래서.”
사정이 그러니 일단 이해는 되었다.
강형우는 맥주를 한잔 들이켜고, 강신원을 쳐다봤다.
아직도 혼란스러운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렇게 사귐을 당하다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잠시 생각해 보니 대충 아귀가 착착 들어맞았다. 전에 공지혜랑 데이트할 때, 은주 이야기에서 모호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아버님께서 그러더라고. 중식 할 줄 모르는 사위는 안 받는다고.”
“헐. 아니, 무슨…….”
“어, 한 달 전에 자격증 땄어.”
그러고 보니 최근 식사 중에 유독 중식이 많았다. 뜬금없이 짬뽕밥이 나왔던 것도 그래서란다.
“우와. 진짜 나만 모르고 있었네.”
“미안하다. 사실 저번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
원래 거짓말 못하는 성격이라, 사실을 고백하려니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점점 힘들어졌단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정식으로 인사드렸고, 음식 하는 것도 인정받았거든. 그러니까 바로 날을 잡자더라고.”
“정말 후다닥이네요. 무슨 집안이…….”
“은주 성격이나 음식 하는 거 보면 알잖아.”
너무 정확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긴, 성격 면에서는 우리 가게 누구보다 괄괄하고 화끈했다. 음식 하는 것도 후다닥~ 탕탕탕~ 퐈이어~ 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으니까.
“가만, 그러고 보니까… 그때. 김상일 이사님 오셨을 때,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아! 맞아.”
그제야, ‘니가 그놈이냐?’의 의문이 풀렸다. 저쪽은 한 다리 건너서 다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사건의 전말이 모두 밝혀졌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만 왕따가 된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니 이건 호재, 아니, 횡재였다. 생각했던 계획을 좀 더 앞당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단 축하해요. 저 속인 거, 솔직히 울컥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좋은 일이잖아요.”
“고맙다, 형우야. 이건 진심이야.”
“알아요. 형, 거짓말 못하는 거.”
“아냐. 그래서가 아니라… 넌 진짜 내 인생의 은인이다. 나 카페 접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신원이 형은 진짜 울려 하고 있었다.
순간 울컥하는 느낌이 왔다.
강신원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