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39화 추가 주문요
“혹시 밀면 좋아하세요?”
신원이 형의 선공에, 아주머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부산 사람 중에 밀면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았다.
펄펄 찌는 한여름!
더위를 날리는 데 이만한 음식은 없었다.
살얼음 띄운 시원한 육수에 쫄깃 탱글한 면발, 여기에 시큼한 식초와 매콤한 겨자를 넣으면, 없던 입맛도 싸다구 때려서 돌아오게 만든다.
밀면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느냐?
솔직히 냉면은 비싸고 고고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밀면은 어릴 때 먹던 불량 식품 같은 기분이 있었다.
모범생이 일탈하는 느낌이랄까?
가장 중요한 건, 밀면이 저렴하다는 거였다.
부산에서 제일 싼 집은 연산동 골프장 옆에 있었다.
짜장면이 4,000원인데, 밀면이 고작 2,000원이었다.
그렇다고 맛도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취향에 따라 식초와 겨자를 넣어서 먹으면 나름 훌륭한 한 끼가 된다.
또, 부산에서 직영점 여러 곳을 운영하는 원조 본가밀면집이 있었다.
평균 가격은 3,500원대.
둘이서 밀면 두 그릇에 만두까지 시켜 먹으면 딱 만 원이었다.
이 집은 특히 가성비가 쩔어주는 집인데, 여름에는 못해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손님이 미어터졌다. 게다가 맛도 뛰어나서 몇 년간 근처에 다른 밀면집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부산에는 무수히 많은 밀면집들이 있었다.
유명한 집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냉면의 반값이었고, 매콤하고 달짝하고 시큼했으며, 속까지 시원해지는 맛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특히 숙취 해소를 위해 강석이와 창호와 한 번씩 들리던 해수목욕탕 근처에도 맛집이 많았다.
항상 같은 맛을 낸다는 3,500원짜리 언제나 밀면집에, 진주냉면처럼 육전에 고명이 푸짐하게 올라갔음에도 5,000원 받는 집도 있었다.
또 4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름도 없이 간판이 밀면전문점인 가게도 있었다.
그만큼 부산 사람들은 밀면을 좋아했다. 어지간한 동네마다 밀면 맛집이 있을 정도로 익숙하고 친근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거였다.
부산에서는 여름만 되면, 중국집이나 분식집, 하다못해 국수집에서도 계절 메뉴로 밀면을 판다.
이런 집들은 오히려 맛이 떨어진다. 대부분 공장에서 파는 다시다 끓인 육수를 사다가 추가로 양념만 해서 나오는 것이다.
해서 이런 밀면들은 안 먹느니만도 못하다. 2,000원짜리 밀면집보다 맛에 깊이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부산 사람들에게는 밀면 맛이 무척이나 친근했다.
해서 강형우는 여러 가게를 들려보고 오랜 고민 끝에 이 방식으로 정했다.
일본 라멘집에서 파는 냉라멘 역시 닭육수를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무척 많았으니까.
“저희 가게 냉라면은 밀면 육수를 참고로 했습니다.”
강신원이 그렇게 말하자 아주머니들은 냉라면 그릇을 쳐다봤다.
“확실히 거부감이 없네요. 약간 기름 맛 같은 게 있기는 한데…….”
“맞습니다. 그것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강신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건 본심이었다.
적게 잡아도 강신원이 먹은 냉라면만 백여 그릇은 족히 넘을 터.
그건 강주혁과 함께 개발(?)에 참여해서였다.
아침에 한 그릇, 영업 전 식사 때 한 그릇, 브레이크 타임에도 먹었고 특히 쉬는 날에는 더했다.
아마 맛만 본 걸로 치면 훨씬 넘을지도.
그 때문인지 요즘 뱃살이 더 부풀어지는 걸 느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고요. 간단히 설명하면 닭발과 닭육수를 씁니다.”
강신원이 설명하는 걸, 강형우는 주변 정리를 하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워서 들었다.
실제로, 냉라면은 정말 어마어마한 공이 들어갔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진짜 피 토하는 심정으로 만들었으니까.
사실 현우 형네 통닭집 일을 도운 뒤, 지성분식에서도 같은 거래처에서 닭을 납품받기로 했다. 대량 매입하는 같은 가게로 해주기로 해서, 신선한 닭을 더욱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걸 가위로 똥꼬 부분의 기름기를 제거하고 날개와 끝부분을 잘라낸 뒤, 내장까지 싹 긁어서 세척한 다음 쓴다. 여기에 태운 대파와 마늘, 양파를 집어넣고 삶아서 육수 베이스로 쓰는 것이다.
사실 간편하게 하려면 그냥 치킨 스톡을 쓰면 된다.
식자재 마트에 가면 파는 게 있는데, 그냥 끓는 물에 소량만 넣어도 꼬꼬닭면 맛이 나니까.
실제로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닭육수를 낼 때 쓰기도 하고 여러 요리에 두루 첨가한다.
거의 다시다, 미원급의 조미료인 것이다.
하지만 단점이 있으니, 닭육수 맛을 진하게 우려내기 위해 다양한 합성첨가제가 추가된다. 분량 조절에 실패하면 짠맛과 더불어 역한 냄새가 퍼지는 거다.
그 외에도 문제가 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괜히 힘들게 닭을 우려서 육수 내는 게 그래서인 것이다.
또 양념장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일단 라면스프는 필수였다. 말 그대로 냉라면이기 때문에 이게 3분의 1 정도가 들어갔던 것이다.
익숙하고 친숙한 느낌 때문이었다.
여기에 물 대신 갈아 마신다는 배 음료를 기본으로 해서 고춧가루, 고추장에 설탕, 그리고 양파를 팍팍 갈아서 넣고, 다진 마늘과 생강 등등이 추가된다.
또, 다른 가게들이 따라 해도 비슷한 맛을 내기 어렵게 몇 가지가 더해졌다. 돈가스 소스를 만들 때, 한약재 일부가 들어간 것처럼 진피, 즉 깨끗하게 말린 귤껍질을 졸여서 매실청처럼 넣는 것이다.
이게 매콤하고 달콤한 맛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너무 강렬하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맛도 필요했다.
대표적인 게 팔각이었다.
중국집에서 어향 소스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였는데, 이게 계피와 더불어 은은한 한방 육수 맛을 냈다.
쉽게 설명하면 수정과와 비슷한 맛이라고 할까?
이 끈끈하고 은은한 맛이, 매콤과 달콤을 연결했다. 그게 닭육수의 기름맛을 잡아서 깔끔하고 달짝한 느낌을 더했던 것이다.
“저희 가게에서는 직접 닭과 닭발을 우려서 육수를 냅니다.”
강신원은 늘어지는 부분을 건너뛰고 이 포인트만을 적절하게 이야기했다.
그 말에 아주머니들이 놀랐다.
“여기서 직접 우린다고요?”
“예. 보통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끓여서 육수를 빼냅니다. 그걸 베이스로 해서, 맛간장을 조금 섞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솥을 우려서 그대로 쓰면 30그릇도 나오지 않는다.
이걸로 50그릇을 맞추기 위해서는 물을 타서 양을 늘려야 했고, 적절히 간을 하는 게 필수였다.
“그 육수를 살짝 얼려서 슬러쉬처럼 만드는 거죠. 거기에 양념장을 올려서 이 맛을 내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까 양념도 꽤 괜찮았던 것 같아요. 라면 스프 맛이 나는데 과하지 않다는 느낌?”
“어머님, 진짜 섬세하시네요. 보통은 그런 맛을 잘 못 느끼는데, 요리 잘하시죠?”
강신원은 약간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는 척 연기를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유, 주부 십 년 차면 이 정도는 다 알죠. 그렇지?”
“그럼, 나도 라면 맛이 덜해서 딱 좋다 싶더라고.”
“맞아. 밀면 육수에 약간 라면 맛 나는 정도?”
아주머니들은 서로 좋다고 깔깔대는데, 강신원도 맞장구 치듯이 웃었다.
강형우는 그걸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확실히, 이제 신원이 형은 저 아주머니들과는 같이 농담도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저 정도라면 부당한 요구가 있을 리가 없을 터.
이제 블랙리스트(?)에 오른 일부만 정리하면 홀을 통째로 맡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들어보니까 뭐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갔네. 그래서 이런 맛이 난 거네요.”
“그러게. 어휴~ 집에서는 해볼 엄두가 안 나네. 이걸 어떻게 만들어.”
“그러게. 요즘 날도 더워서 애들 해주고 싶은데…….”
역시나 아주머니들은 가족 생각을 먼저 했다.
“그런데 이거 포장 안 돼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몇 번 해봤는데, 맛이 제대로 안 나오더라고요.”
강신원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하다는 제스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름 그대로 냉라면이었다. 때문에 육수의 온도에 따라서 맛의 변동 폭이 무척 컸었다.
강형우는 이것 때문에 머리가 빠개질 뻔했다.
지성분식의 에어컨은 24도로 맞춰놨다.
하지만 손님들이 들락거렸고 주방 온도도 있어서 실제는 26도 전후에 가까웠다.
여기에 맞춰서 냉육수의 온도는 2~4도였다. 이 정도로 맞춰야 살얼음이 5분 이상 유지되고 다 먹을 때까지 시원했던 것이다.
강형우가 냉라면을 어려워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거였다.
만들고 조금만 지나면 맛이 달라졌으니까.
왜일까?
꾸준히 고민하다가, 강주혁의 말을 떠올렸다.
전에 빵구 비어를 갔을 때 그랬다.
여름엔 시원한 맥주라고, 제일 맛있는 온도가 딱 2도라고 했었다.
겨울에는 4도가 맞고.
그러면서 생맥주만 30년 따랐던, 장인의 경험에서 나온 온도라고 말했다.
강형우는 긴가민가하면서도 그 온도에 맞춰 육수와 양념장, 그리고 간의 비율을 전부 바꿔 버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엄청난 개고생과 노력이 들어갔다.
어쨌든 기준을 정해놓고 했더니, 정말 제대로 된 맛이 살아났다.
강주혁과 음식 장인이라는 김상일에게서 단 하나의 나쁜 말도 들리지 않았던 게 그래서였다.
그 정성과 노력을 알아본 것이다.
강형우는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요리는 과학이라는 것을.
***
“씨벌.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해서…….”
강형우는 후회 막심이었다.
처음 냉라면을 만들 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순이 이모의 조언대로 여름 한정 메뉴를 추가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됐다.
“여기 냉라면요.”
“저희도 냉라면 네 개 주세요.”
정말이지 손님 절반 이상이 냉라면을 주문했다. 분명 계절 메뉴라 생각해서 하루 50그릇 한정으로 시작했는데, 손님들 요구가 빗발쳐서 생산(?)량을 늘려야 했던 것이다.
하긴, 계절이 계절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싶었다.
낮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은 데다 습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따뜻한 사골 육수 메뉴는 아예 나가지도 않았고, 돈가스 판매 역시 주춤했으며, 그냥 라면은 하루 열 그릇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냉라면은 정말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지금 2호점에서만 하루 300그릇이 넘게 나갔다.
본점까지 치면 거의 450그릇 수준.
때문에 강형우와 강신원은 거의 하루종일 닭육수에 매달려야 했을 정도였다.
“오빠, 냉라면 추가 주문요.”
“얼마나?”
“3번, 7번 테이블까지 치면 여섯 그릇이요.”
공지혜의 말에 강형우는 육수를 확인했다.
“네 그릇 이상은 안 나와. 손님한테 이야기하고 다른 메뉴로 바꾼다고 하면 음료수 서비스 드려.”
“알았어요.”
공지혜가 홀로 가자 강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그냥 냉라면 때문에 주방이 마비될 정도였다.
“하아, 무슨 밀면 전문점도 아니고…….”
강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냉라면 덕분에 가게는 미어터지고 있었다. 강주혁의 조언대로 가격을 5,000원으로 올렸음에도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던 것이다.
그 원흉 중에 한 명이 단골 박미희였다.
미희 어머님한테 맛보여 드린 다음날, 친구들을 이끌로 우르르 몰려왔다. 자칭 지성분식의 골수 팬임을 자처하며 당당하게 시식(?)을 요구한 것이다.
강형우는 피식 웃으면서 요구를 들어줬다가 아주 된통 뒤통수를 맞았다.
미희가 블로그를 통해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버렸다.
덕분에 냉라면 개시 삼 일 만에 유명 맛집이 되어버렸다. 오픈발이 한창일 때보다 손님들 줄이 더 길어져 버린 것이다.
그 이유가 정말 황당했다.
원래 여름만 되면, 부산 사람들은 3대 밀면이니 5대 밀면이니 하면서 싸운다. 서로 어디가 최고다 하면서 자기 입맛이 맞다고 우기는 것이다.
이런 가게들 대부분은 평균 6,000원 선이었다.
그런데 박미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지성분식이 거기보다 맛있고 시원하면서 저렴하기까지 하다고 글을 올렸다.
한마디로 싸우자는 소리였다.
여기에 어떤 병신 같은 맛집 블로거랑 댓글 배틀이 붙어버렸다.
결과는 맛집 블로거의 패배였다. 몰래 와서 세 번이나 시켜먹은 뒤, 박미희의 말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그 여파 덕에 지성분식은 마비가 올 정도였다.
강형우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