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136화 면이 좋네
“하하하하, 하하.”
“형,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냐. 아니라고.”
이평석이 목소리가 갑자기 확 줄어들었다.
느낌상 수화기를 떼놓은 것 같았다.
강형우는 이게 뭔가 싶어 혼란스러워하는데, 곧 이평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요즘 세상에 없는 게 어디 있냐?”
“예?”
“됐고. 한 이틀 걸리니까 기다려봐.”
“아니, 그게 무슨… 형? 평석이 형?”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그래서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정말 바쁜지 받지를 않았다.
“헐, 대체 뭐야? 설마, 나 놀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전문 업자인 자신을 시험한 것에 대한 복수였던 것이다.
“에구, 당했네.”
그런데, 왜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거지?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머리 빠개지도록 구상한 냉라면은 거의 완성 직전이었다. 딱 하나 부족한 게 면이었는데, 끝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 못 한 것이다.
해서 즉석에서 꾀를 내어 평석이 형을 도발했고, 성공했다.
지금, 그 대가로 놀림을 당한 것이다.
“하여간 만만하게 볼 수 없다니까.”
강형우는 정말 확실하게 느꼈다.
분석이 형이야, 그 밑에서 3년간 일을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인간적인 면은 둘째 치고, 사업 규모나 하는 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파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평석은 아니었다.
단순한 납품업자가 아닌 건 알고 있었다.
보통 식자재를 취급하는 사람이 유통까지 끼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맞다.
평석이 형은 음식 재료만 날라주는 게 아니라 음료와 주류까지 납품했고, 말만 하면 자판기 같은 것도 알아봐 준다고 했었다.
또, 유통 기한 임박한 특가품 정보도 가끔 전해줬다.
물론 지성분식에서 쓸 일은 없어서 받은 건 없지만, 탄산수나 쿠울피스 역시 그에게 부탁해서 받고 있었다.
“확실히 취급품이 어마어마하네.”
그런데도 쉽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잠깐 꾀를 내었다가 제대로 한 방 먹은 것이다.
“휴우, 그럼 일단 면은 한시름 놓았고, 판매는 테스트 끝나면 바로 해보자.”
강형우는 처음부터 정식 메뉴로 올릴 생각은 없었다. 일단 하루 오십 그릇 한정으로 팔아보고 수량을 늘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형우야, 밥 다 됐다.”
주방 뒷문으로 나온 신원이 형이 불렀다.
강형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폰을 쳐다봤다. 그리고 정보 수정에 들어가서 평석이 형 이름 앞에 한 단어를 더 붙였다.
‘고수’라고.
***
탕탕탕. 탕탕. 탕탕탕.
요란한 칼질 소리가 들리고, 양배추가 처참하게 썰려 나갔다.
그 무덤 옆에 이쑤시개 두께 정도의 당근이 더해졌고 깻잎을 비롯한 각종 야채들이 추가되었다.
강형우는 곧바로 냉면 사발 크기의 그릇 세 개를 꺼냈다.
마침 타이머가 울렸다.
촤아아악.
뜨거운 국물이 싱크대에 쏟아지자 뿌연 수증기가 치솟았다.
강형우는 찬물을 틀고 채반을 흔들어 면을 식힌 뒤, 바로 옆 얼음이 가득한 믹싱볼로 던졌다.
촥촥촥, 촥촥.
거의 손빨래하듯이 잽싸게 면을 씻고 그걸 그릇에 나뉘어 담았다. 거기에 살얼음 육수를 붓고 양념장 한 숟갈을 올린 뒤, 썰어놓은 야채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이후 삶은 계란 반 개를 넣고 깻가루를 뿌리면 끝!
강형우는 쟁반에 그릇을 옮기고 밖으로 나섰다.
현재 브레이크 타임이었는데, 특별 손님이 무려 셋이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최종 심사 위원인 강주혁과 형수님이었다.
이름은 신유리라고 하는데, 정말 임신 육 개월이 맞나 싶었다. 약간 푸짐한 원피스로 가리고 있었지만 배가 나온 티가 거의 나질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한 명은,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를 가진 어르신이었다. 반백의 머리카락 덕분인지 중후함이 바로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강형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예전 희망국수 방송에서 뒷모습만 나왔던, 음식 장인이었으니까.
특히 그가 오자마자 이은주는 바로 굳어버렸다. 우리 지성분식 최고의 요리 전문가가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한 것이다.
그냥 이은주가 처음에 딱 한마디 하더라.
스승님이라고.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형, 바빠요?”
“나야 항상 바쁘지. 왜?”
“그게, 신메뉴 하나가 추가됐는데요. 시간 되나 싶어서요.”
잠시 텀이 있었는데, 그게 추진력을 얻기 위한 쪼그려 앉기였나 보다.
“야! 너 폭립 한 지가 이제 한 달 넘었는데, 또 무슨 신메뉴야~~~”
옆에 있던 공지혜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폰을 반사적으로 귀에서 떼지 않았다면 고막이 나갈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다행히 휴대폰 스피커는 터지지 않았다.
“그게요. 어쩌다 보니…….”
강형우가 냉라면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려는데, 강주혁이 막았다.
“지금 바쁘니까… 아니, 아니다. 마침 잘됐네. 언제 되는데?”
“예?”
“오라면서?”
“그게…….”
“오후에, 브레이크 타임 때 맞춰서 가마 준비해 놔.”
“예? 너무 빠른 거…….”
“됐고, 삼 인분.”
“아니, 형?”
뚜뚜뚜뚜~~
정말이지 통화는 순식간이었다. 오픈 전에 전화한 게 바로 오늘 일정으로 잡혀 버린 것이다.
다급히 뭐라 하려는데, 하필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장사 열심히 하고 브레이크 타임이 돼서야, 다시 주혁이 형 생각이 났다. 그래서 폰을 들었는데, 무작정 가게로 들어온 것이다.
“흐음.”
부산 중식업계에서 손꼽히는 장인이었다.
이은주가 몰래 주방으로 들어와 살짝 귀띔해 줬는데, 김상일 이사님이라고 두루 컴퍼니 최고의 실세였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 하면, 황룡 체인의 대부분의 요리사가 김상일 밑에서 수업받았다고 보면 된다. 주방에 설 자격이 되는지를 그가 테스트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부산의 중화 요리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가 파문을 결정하면, 이쪽 업계에서는 아예 발도 못 붙인다나?
막상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말 무섭게 보였다.
하지만…….
“허허허, 허허, 이거 걸작인데?”
김상일이 가게가 떠나갈 듯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직후 강주혁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 알았다고.”
“이사님, 오늘은 맛만 보러 온 겁니다.”
“공적인 자리 아니라면서?”
“그게 공적인 자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강주혁이 그렇게 말하니,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히 강형우는 저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고민하는데, 공지혜가 슬쩍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오빠, 긴장했나 봐요?”
“어? 왜?”
“이거…….”
공지혜가 쟁반에 가져온 건, 김치와 단무지, 그리고 요즘 밑반찬으로 내기 시작한 부추 무침이었다.
어차피 폭립이나 돈가스는 한 상 차림이었다. 그러니 더 나갈 건 없었는데, 김밥이나 라면, 덮밥의 경우는 달랐다. 한식에 가까웠기에 기본 밑반찬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도 김치와 단무지는 평석이 형한테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어 추가한 것이 부추 무침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시사철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고, 한 번 나가는 데 고작 50원 꼴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했습니다.”
강형우는 바로 밑반찬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본 사람은 신유리였다.
“오빠, 맞죠?”
“어, 맞대. 커험, 큼큼. 일단 좀 먹어봐. 요즘 입맛 없다고 그랬잖아.”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애가 까탈스러운 거죠.”
신유리가 웃으면서 배를 매만졌다.
이 순간 강형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칼에 수십 번 찔려도 돈 받기 전까지는 끄떡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강주혁이었다. 그만큼 전신에 뻔뻔 철판을 깔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얼굴을 붉혔던 것이다.
“일단 맛부터…….”
강주혁이 젓가락으로 면을 건지는데, 신유리는 폰으로 사진부터 찍었다.
앉아서 찍고, 서서 찍고, 그릇 돌려서 찍고.
그럼에도 강주혁과 김상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음식에 집중한 것이다.
강형우는 그 광경을 보면서 시트콤을 떠올렸다.
어쨌든 곧 시식이 시작되었다.
후루룹, 후루루루루룹.
세 사람이 동시에 면발을 빨아들이니 정말 소리가 요란했다.
강주혁은 국물을 마시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신유리를 쳐다봤다.
“어때?”
“헤헤, 전 좋아요. 안 그래도 요즘 시큼한 게 당겼는데요. 흐음, 맛있어요. 정말로.”
신유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이후 강주혁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냉라면에만 집중했다.
후룹. 후룹.
강형우는 먹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긴장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릇이 정말 깔끔하게 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해치운 사람은 김상일이었다.
직책이 식품부 감사 이사라고 했던가?
주로 하는 일이 주혁 형이 아이디어를 내고, 회사 최고 기밀인 사람이 맛의 밸런스를 잡는다. 그걸 판매용으로 조절해서 만드는 일을 한단다.
동시에, 각 지점을 돌면서 맛이 유지되는지를 확인하는 게 일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요리도 잘하고, 중식계의 장인이고 또, 맛을 감별하는 데 최고의 전문가였다.
그런 김상일이 한마디 했다.
“생각보다 괜찮군.”
조금 아쉬웠다.
맛있다거나 좋다거나 하길 바랬는데, 고작 괜찮다고만 했으니까.
정작 기대한 말을 해준 건 형수님이었다.
“맛있어요, 진짜로. 우리 오빠가 집에서 해준 것처럼 제 입에 딱 맞네요.”
“감사합니다. 형수님.”
강형우가 고개를 숙이자 이번엔 강주혁이 말했다.
“색감 합격. 육수도 괜찮고, 특히 면이… 좋네.”
“그래요?”
“자가 제면 하면 좋겠는데, 분식집이니 어쩔 수 없지.”
역시나 날카로운 건, 여전했다.
사실, 쫄칼국수 면을 맛보고 나서 딱 이거다 싶었다.
굵기는 가는 짜장면인데 뚝뚝 끊어지는 게 아닌 쫀쫀함이 살아 있었다. 그렇다고 쫄면처럼 너무 탱글탱글한 것도 아니었고, 잘못 삶은 냉면처럼 질기지도 않았다.
처음 원했던 대로 두깨감이 있으면서 탱글한 면발.
딱 그거였던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평석이 형이 정말 구해다 주었다.
전라도 쪽의 공장에서 식당에 납품하는 제품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온라인으로도 팔고 있다고 했다.
특이한 게, 정식 명칭이 쫄쫄 짜장면이었다.
그러니까 그 동네에서 쫄면으로 만든 짜장면이 유행해서 개발된 제품이라는 것이란다.
해서 삶아서 먹어보니 만족도가 무려 90%였다.
그게 아쉬워서 평석이 형을 졸랐는데, 자기도 저거 이상의 제품을 구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가 제면이었다. 말 그대로 가게에서 직접 밀가루와 전분을 섞어 반죽해, 원하는 대로 뽑아내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결국 강형우는 쫄쫄 짜장면을 받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단가는 무려 650원.
고급 우동 사리급의 가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소규모 생산이라서 그렇단다.
나중에 판로가 확장되고 생산 라인이 늘어나야 가격이 내려갈 수 있다나?
“근데, 확실히 이건 부산에선 없는 면이기는 하네. 중요한 건 익숙한 밀면 식감인데 두꺼워. 그게 국물이 닿는 면적을 늘려서… 딱 좋아!”
강주혁은 그렇게 평가한 뒤, 김상일을 쳐다봤다.
어떠냐는 그런 의미였다.
김상일은 피식 웃더니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평가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