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느긋하게 가자
“형우야, 나 좀 살려주라.”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신원이 형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형, 먹으라는 게 아니에요. 맛만 보라니까요?”
“그 맛이 나 죽일 것 같은데?”
“에이, 안 죽어요. 저도 이렇게 살아 있는데.”
강형우가 웃으면서 말했지만, 강신원은 극구 손을 내저었고 당장이라도 도망칠 기세였다.
사실 만만한 게 신원이 형이었다.
강형우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늦어도 6시 전에는 2호점에 도착을 했다.
사장이니까, 항상 제대로 됐는지를 확인해야 했으니까.
그건 신원이 형도 마찬가지였다.
집이 바로 위니 씻고 내려오면 끝이었다. 게다가 주방에서 만든 걸 가져가서 아버지와 동생 식사를 차려주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따지면 지성분식의 주방은, 신원의 형이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른 아침, 공지혜가 출근하기 전까지는 거의 단둘이었다.
그런 걸 강신원이 부담스러워할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좋단다. 음식도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 본점에서 장사할 때의 이야기를 특히 재밌어했다.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종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라나?
그건 강형우도 마찬가지였다.
강신원은 자신도 모르게 백화점에서의 일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줬다.
들어보니 VIP들의 갑질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음모가 있었고 사랑도 있었으며, 신원이 형의 실연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 깨달은 건, 얼굴 잘생겼다고 연애가 다 잘되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어쨌든 그렇게 둘이 붙어 있다 보니, 강신원은 일종의 베타 테스터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극구 사양하고 있었다.
“넌 임마! 샤워하고 거울도 안 보냐?”
“예? 거, 거울요?”
강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고 일어나서 가볍게 운동하고, 샤워하기는 했다. 그리고 대충 옷 주워 입고 본점에 들렸다가 2호점으로 출근했다.
생각해 보니, 그 과정에서 거울을 본 기억이 없었다.
“뭐, 이상해요?”
강형우는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쳐다봤다.
“헐. 이게 누구…….”
얼굴이 팅팅 불어 있었다. 머리만 떼서 던지면 마치 탱탱볼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갈 정도였던 것이다.
“언제 이렇게 불은 거지?”
강형우는 황당해하면서도, 거울을 빡빡 청소했다.
혹시 얼굴이 아니라 거울이 잘못된 것이기를 빌면서.
하지만 아니었다. 팅팅 불은 얼굴은 진짜 리얼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대체 왜…….”
강형우는 잠시 좌절을 맛봤지만, 금방 깨달았다.
“아! 염분.”
맞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냉라면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염분을 필요로 했다. 면도 차고, 국물도 차고, 양념장도 차가웠으니,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더욱 진하게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솔직히 최근에는 무리를 많이 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식사할 때도 따로 냉라면을 만들어서 먹었고, 마치고 공지혜를 바래다준 뒤에도 다시 가게로 와서 만들어 먹었다.
또, 아침 식사마저 냉라면으로 때울 정도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벌써 7월도 열흘이나 지났다. 거의 이 주 가까이 매달렸음에도 생각만큼 진척이 나가질 않았던 것이다.
정말 이러다가 여름 지나서 냉라면이 나올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조급함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거다.
“하아, 호빵맨이 다 됐네.”
강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찬물에 머리와 얼굴을 식혔다.
그렇게 2~3분 정도가 지나자 좀 시원해진 느낌이 들었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는데, 신원이 형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형우야, 이 정도면 충분히 맛있어.”
“예? 이게 맛있다고요?”
“너 혹시, 얼굴이 아니라 혀까지 마비된 거 아냐?”
“그게…….”
생각 해보니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얼굴이 부을 만큼 며칠 내도록 소금을 퍼먹다시피 했으니 혓바닥인들 온전하겠는가?
“어차피 오늘 바쁜 날 아니니까, 들어가서 쉬든가 해라. 아니면 병원 가서 링겔이라도 맞고 누워 있든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야! 너, 임마, 그러다 과로로 죽어!”
“서, 설마요?”
신원이 형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덜컥 겁이 났다. 정말 그 정도로 많이 망가진 건가 싶었던 거다.
“그리고, 너 그 얼굴로 면접 어떻게 보려고 그래?”
“아! 알바 지원자들 오늘 오기로 했죠?”
“그러니까.”
강신원이 한숨을 내쉬자 강형우는 오히려 이때다 싶었다.
“그럼 형이 좀 봐요.”
“뭐? 내가?”
“그럼요. 울 가게 최고 연장자에, 영업직 경력자잖아요. 누구보다 사람 많이 봤으니 눈썰미는 있을 거 아니에요.”
강형우가 엄지를 척척 들면서 추켜세우자, 강신원은 생각에 빠졌다.
전에 강신애가 지인들을 데려온 이후, 그때 있었던 여자들이 지성분식을 두어 번 찾았었다.
딱 봐도 강신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강형우는 그때마다 강신원을 보내 가벼운 인사 정도는 하고 오라고 했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신원이 형은 이전보다는 사람 대하는 게 많이 부드러진 것 같았다. 크게 어려워하는 기색도 아니었고, 가끔은 미희 친구들하고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곤 했었던 것이다.
대인기피증이 많이 나아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왜요? 어려워요?”
“아니, 그건 아닌데…….”
강형우는 피식 웃으면서 강신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강신원 씨, 오늘은 사장 대리로 임명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내쫓아도 되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넌 병원부터 갔다와라. 진짜 얼굴이 말이 아니다.”
표정에 걱정이 뚝뚝 묻어 있으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강형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옙.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
병원을 갈까 말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몸이 붓는 이유는 대충 알고 있었다.
일단 휴식이 없었다. 그리고 짜고 자극적인 걸 며칠 내도록 먹어서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새벽 수련을 게을리해서다. 밤새 생각한 걸 출근해서 만들고 싶어서 건성으로 넘겼던 것이다.
“확실히, 초조하긴 초조했었나 보다.”
강형우는 평상에 앉아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집중했나 싶을 정도로, 깊게 빠져들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몸에서 땀이 송골송골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티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였고 일부는 평상 바닥에 뚝뚝하고 떨어졌다.
“호오오~ 흐으읍.”
잠시 후, 강형우가 눈을 떴다.
천천히 숨을 안정시킨 뒤 일어나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잡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 머릿 속까지 목욕한 것처럼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하, 하하. 맞네. 왜 쓸데없이 집착했던 건지…….”
간단히 결론을 내리면, 냉라면 안 해도 된다.
그거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 벌고 있었고, 그거 안 한다고 지성분식이 망할 이유도 없었다.
“조금만 느긋하게 가자.”
한 이틀 정도는 직원들 보조하는 정도로만 해야겠다.
먹는 것도 자극적인 걸 피해서 혀에 누적된 짠맛도 뺄 생각이었다.
이후, 알바 두 명을 더 돌려서 여유롭게 장사하면 이렇게 다급하게 매달리는 일은 줄어들겠지.
“그래. 냉라면, 8월에 시작하면 어때? 제대로 완성하는 게 중요하지.”
강형우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냉수에 샤워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었다. 방이 너무 크게 보였던 것이다.
“하긴, 강석이도 창호도 군대 갔고, 요즘은 은혜도 회식 마치면 집으로 바로 갔으니까.”
이 자취방이 이렇게 허전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애들이 툭하면 치킨에 소주 들고 올라왔고, 인정둥이는 걔들과 함께 여기서 강남스타일 말춤을 췄었다.
그 이후에도 강형우가 자든 말든, 애들은 신경도 안 쓰고 모여서 놀았다.
그랬는데…….
“올 사람이 없네.”
서운하면서 뭔가 무상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다 아차 싶은 게 떠올랐다.
“가만, 가게가 이 년하고 다섯 달이나 됐으니까. 여긴 삼 년이 다 되어가네?”
내 밥상을 그만두고, 지성분식 본점 공사 전에 여기 자취방으로 이사 왔다. 2년 살다 연장했으니 당장 다음 달에 이사 가는지 마는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흐음, 어떻게 한다?”
크게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김복희 여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살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살라고 했으니까.
게다가 강석이 일 때문에 월세도 안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강형우는 그러지 않았다. 따로 강석이를 통해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보냈던 것이다.
문제는 이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부쩍 커졌다는 거다.
바로 공지혜 때문이었다.
“일단 한 번… 물어는 보자.”
***
며칠 여유 부린 덕인지, 몸이 정말 가벼웠다. 그래서 또, 냉라면을 만들었다.
“형우야~~~~”
강신원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 끝나고 월요일 아침부터 냉라면이 터억 나왔으니까.
“형, 진짜 괜찮아요. 이제 전체적인 벨런스 잡는 요령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살짝 맛만 보면 돼요.”
“정말?”
“예. 설마, 제가 형을 죽이겠어요? 앞으로 부려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살려둔다니, 정말 잔인하구나.”
강신원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선뜻 손이 안 가는지 몇 번이나 망설이는 게 보였다.
구세주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형우야, 나 왔다. 물건 확인해라.”
바로 평석이 형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주방 뒤편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잠시만요.”
강형우가 문을 열자마자 박스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대파, 마늘, 양파, 무, 생강에 배추까지.
이평석은 하나하나 수량을 부르고 강형우는 물건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형, 이거… 많이 무른 거 아니에요?”
“야, 장마 끝난 지가 언젠데. 그리고 나만 반품 받아주잖아. 써보고 아닌 건 빼놔.”
“그런데 과일이 좀 비싼데요?”
“대신 가물어서 당도가 높아. 보기에는 이래도 내가 좋은 걸로 골라 왔으니까 써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음에 가격 빼줄게. 근데, 너 오늘 유독 까탈스럽다?”
이평석의 지적에 강형우는 뜨끔했다. 물론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지만, 너무도 눈치가 빨랐던 것이다.
“에이, 무슨. 근데 형 안 더워요?”
“덥지. 7월이고 아침인데 벌써 28도다. 낮에는 어딜 다니지 못해.”
“식사는요?”
“입맛 없어서 찬물에 밥 말아서 후루룩 먹고 나왔다.”
역시나 강형우가 기대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평석은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깜빡였다.
“형, 잠깐만 기다려요.”
강형우가 움직이고, 강신원이 예상하는 그림이 나왔다. 냉라면 한 그릇이 뚝딱 테이블에 올라갔던 것이다.
“뭐냐?”
“서비스죠. 드셔보세요.”
“그래. 뭐, 공짜라니까.”
이평석은 의심하는 눈초리로 냉라면 국물을 마셨다.
“오~ 이거 시원한데?”
“최대한 그릇에 얼굴 붙이고, 면하고, 야채하고 같이 씹어봐요.”
강형우가 손짓하자 이평석이 그대로 따랐다. 샐러드와 면을 휘저어서 바로 입으로 가져간 것이다.
후루룹, 후룹. 후루루루룹.
경쾌하게 면발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울렸고.
우적, 우저저적. 우움.
마구 마구 씹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잠시 후.
“후아. 맛있네. 정말 시원한 게, 속이 다 뻥 뚫린다.”
“그렇죠?”
“어. 근데 이거 가게에서 팔 거냐?”
이평석이 묻자 강형우는 살짝 연기에 들어갔다.
그에게서 원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