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그냥 막막해
서걱, 서걱.
나이크가 뼈 사이를 가볍게 움직였다.
포크가 커다란 살덩어리를 찍더니 바닥의 소스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종착지는 강주혁의 입이었다.
몇 번 입에서 우물거리자 살코기는 금새 사라졌다.
“흠, 제법 부드럽네.”
강주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는 모양이었다.
또다시 나이프와 포크가 움직이고, 한 덩어리가 금새 사라졌다.
“이렇게 연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설명해 봐.”
집에 들어온 강도가 돈 내놓으라고 해도 이렇게 뻔뻔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강형우는 피식 웃으면서 과정을 이야기했다.
핏물 빼기, 초벌 삶기로 불순물을 날린다. 수육 삶듯이 이것저것을 넣어서 냄새를 제거한다.
그걸 진공 포장해 은은한 양념을 넣고 수비드 기계로 돌린다.
마지막으로 소스를 뿌려 오븐에 구우면 끝.
가만히 설명을 들으면서 살코기를 먹어치운 강주혁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겠다. 예상은 했지만 수비드를 쓸 줄은 몰랐어.”
“하하, 제가 이 정도 합니다.”
강형우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강주혁은 피식 웃었다.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데? 수비드는 장시간 조리 기법이고 이건 최소 조건만 맞춘 거잖아.”
“예?”
“수비드 기계 가져다 놓고 달랑 네 시간만 돌리는 놈이 어디 있냐? 프랑스나 이태리 레스토랑 가면 최하 여섯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 이상 쓴다. 재료나 숙성에 따라서 하루 이상 돌리기도 한다고.”
예상치 못한 지적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강주혁은 여전히 신랄했다.
“네가 하는 건 겉핥기에 불과해. 물론 기본적인 건 다 갖췄고, 여기서 그 이상 하는 건 의미가 없지. 하지만 진짜 수비드는 그런 게 아니야.”
피식 웃은 강주혁은 이번엔 뼈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예 거기에 묻은 소스까지 쪽쪽 빨아먹으려는 모양이었다.
“수비드는 쉽게 설명하면, 장시간 저온 조리법이지. 일반적으로는, 두꺼운 살덩어리를 촉촉하고 부드럽게 먹는 방식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어.”
문제는 이 이후의 이야기였다.
너무 차원이 높다고 해야 할까?
육회로 먹거나 육포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이는 게 한우 홍두깨살이었다. 이걸 기본 양념해서 장시간 수비드로 조리하면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식감을 만들 수 있단다.
가격이 저렴한 돼지 허벅지 살과 볼살의 경우 조리만 잘하면 부드러운 소 안심 스테이크 수준으로 연하게도 가능했다.
또, 소세지용으로 쓰이는 돼지 잡육을 뭉쳐서 조리하면 육즙 가득한 햄버거 패티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숙련된 셰프만이 가능한 거지. 결론은 수비드 조리법을 깊이 파고들면 고유의 육질과 식감까지 바꿀 수도 있다는 거야.”
“형,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은데요? 그게 동네 분식집에서 필요해요?”
“정답. 하지만, 알고는 있으라는 거다. 네가 아는 게 전부라 생각하고 방심하지 말라는 거지.”
강주혁은 너무도 뻔뻔하게 말하더니 이번엔 나이프로 소스를 긁어서 맛을 봤다.
“그리고, 이건 사골육수에 굴소스, 우스터 소스, 간장, 설탕을 기본으로 바비큐 소스를 만들었네. 거기에 레몬즙과… 가만, 탄산수인가?”
“헐. 그걸 어떻게?”
“뭘 어떻게야 맛을 봤으니까 알지. 많이 만들어보기도 했고.”
맞다. 사골육수만으로는 소스의 점성이 진해서 몇 번이나 얇게 펴 바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냥 물을 섞으니 묽어지는 것도 있지만 뒷맛이 묵직했던 것이다.
몇 번 먹으면 쉽게 질린다고나 할까?
고민 끝에 라이트한 맛을 위해 사이다도 써봤는데 단맛이 예상보다 강했다.
힌트는, 가게 오픈 이벤트할 때 손님들에게서 받았던 메모였다. 거기에 요즘 탄산수가 유행이라면서 달달한 하와이안 돈가스와 어울릴 거라 적혀 있었다.
해서 써봤는데, 원하던 가벼운 맛이 나더라.
정말이지 그걸 맞추다니…….
“뭘 그렇게 쳐다봐?”
“형, 그 혓바닥이 탐이 나요.”
“야, 야이~ 미친놈아. 나 유부남이야!”
강주혁이 기겁을 하며 손을 휘둘렀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장난치려는 듯 바짝 접근했던 강형우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강주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맛은 합격. 거기에 인테리어가 분위기 잡아주니까 팔아도 괜찮겠다.”
“그럼 형. 이건 얼마 정도 받으면 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전에 가르쳐 줬잖아.”
당연히 기억했다.
원재료 값 곱하기 2에, 다시 1.6를 곱하고, 상황에 따라 +- 10% 적용하면 된단다.
물론 이건 간략하게 계산하는 거였다.
문제는 그 기준으로 해버리면 가격이 너무 올라간다. 손님들의 예상과는 다른 수준으로 나오는 것이다.
“너 원가 얼마냐?”
“그게 계산해 보니까요.”
뼈를 포함한 무게가 1인분에 350g이었다.
대충 서너 덩어리 정도가 나오는데 결코 양으로는 만다고 할 수 없었다.
“대충 1인분에 고깃값만 이천삼백 원 선이고요. 삶을 때 들어가는 재료하고 소스 비용이 천 원 정도 들어가요.”
“정확한 거야?”
“한 5~7% 정도 오차는 있죠. 시세가 수시로 변하니까요.”
“그럼 대충 만 원 선이네? 흐음…….”
순식간에 암산을 끝낸 강주혁은 나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찬가지로 강형우도 고민스러웠다.
“형이 생각해도… 분식집에서 팔기에는 비싸죠?”
“바보냐? 오히려 싸지!”
“예? 싸다고요?”
“내가 아까 그랬잖아? 무슨 분식집에서 폭립을 파냐고.”
“그, 그랬죠.”
“근데 내가 말을 왜 바꿨겠니?”
가만 생각하니 그랬다. 인테리어가 충분하다면서 괜찮을 것 같다고 했던 것이다.
“넌, 하나 가르쳐 주면 딱 그거밖에 모르냐? 뭐, 우직하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게 네 스타일이긴 하지만, 좀 생각을 해라, 생각을.”
강주혁은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폰을 꺼내 들었다.
마침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어, 유리야. 그래 그래. 알았어. 어, 금방 사 들고 들어갈게.”
잠시 통화하던 강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니 형수가 갑자기 딸기가 먹고 싶댄다.”
“예? 거의 끝물인데?”
“아주 둘째 입덧 때문에 죽겠다. 아무래도 아들 같다면서 워낙 별나대. 그래서 딸기가 먹고 싶다나?”
잠시 입덧과 딸기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는데, 강주혁이 서둘러 일어났다.
“미안한데, 형우야. 저녁에 마치면 전화해라.”
“예?”
강주혁은 피식 웃더니 후다다닥 도망치듯이 지성분식을 빠져나갔다.
진짜 붙잡기도 애매할 만큼 순식간이었다.
***
집에 바래다주고 나가려는데 공지혜가 붙잡았다.
“오빠, 온천천 간다면서요?”
“어? 어… 주혁 형네 잠깐 들렸다가 이야기 좀 하고 들어가려고.”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오늘 운동하는 날인데, 영지도 곧 나올 거예요.”
“그, 그래?”
매달 한두 번씩 보지만, 공지혜랑 사귀고 난 이후부터는 얼굴 보기가 껄끄러웠다.
괜히 들킬까 봐서였다.
사실 어머니나 영지한테는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해서 중간에 한 번 어머니 국밥집에 들렸는데, 포기하고 말았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짓궂게 말을 해서였다.
“아이고, 형우 다 컸네. 이제 장가가도 되겠어.”
“형우는, 여자 친구 없어? 김 씨 아줌마네 딸이 올해 스물일곱인데 한 번 만나볼래?”
“스물아홉이면, 바로 장가가야지.”
간만에 얼굴 본다고 막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살짝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아주머니들은 농담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래, 엄마는 형우가 데려오면 무조건 오케이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적당한 여자 있으면 데려와. 너두 내년에 서른이야!”
“요즘은 다들 늦게 간다는데…….”
“태구는 전에 연희랑 인사하러 왔더라. 그리고 동네 형들도 다 결혼한다면서?”
“저도 그전에는 가긴 가야죠.”
그렇게 말하니, 박혜숙이 소곤거렸다.
“적당히 괜찮다 싶으면 덮쳐. 요즘은 혼수로 애 데리고 오는 세상이라더라. 흉 안 되니까 빨리 사고 치고 데려와.”
강형우는 차마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 사귄 지 열흘도 안 됐으니까.
어쨌든 강형우는 인사만 하고 후다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 공지혜랑 사귄다고 고백했다가는 완전히 난장판이 벌어질 것 같아서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 아니?”
강형우가 그렇게 대답하는데, 공지혜 뒤편에서 강영지가 나타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집까지 왔어? 나 보고 싶어서는 아닐 텐데?”
“그냥 겸사겸사.”
“그럼 겸사겸사 용돈 좀 주고 가지? 요즘 돈 많이 번다면서?”
강영지가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피식 웃은 강형우는 당당하게 지갑을 꺼냈다.
“얼마나?”
“진짜 주게?”
“싫음 말고.”
“그럼 지갑 꺼낸 김에 다 내놔봐라. 우리 오빠 통 얼마나 큰지 보게.”
그 말에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지갑을 펼쳤다.
만 원짜리 두 장, 천 원짜리 네 장이 보였다. 요즘 거의 카드 쓰다 보니 현금을 안 가지고 다녀서였다.
“하하, 영지야. 현금이 없다. 카드 할부 되냐?”
“그럼 그렇지. 됐고. 우리 운동 간다. 따라올래?”
강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영지가 손짓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그러더니 공지혜와 함께 걷다가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강형우는 가볍게 쫓아가면서 물었다.
“학교는?”
“잘 다니지.”
“졸업 할 때 안 됐나?”
“이번에 휴학하고 어학연수 갈 끼다. 단기 육 개월. 호주 갔다가 일본.”
“돈은?”
“걱정 마라. 다 벌어놨다.”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요즘 매달 집에 200만 원씩 주고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이야기하더라.
지금 이렇게 운동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외국 나가서 몸 아프면 죽도 밥도 안 된단다. 그래서 미리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달린다는 것이다.
자세히는 몰랐는데, 왕복 12㎞란다.
집에서 수영강으로 갔다가 과정교 아래로 온천천을 통해 동래까지 왕복하면 그 정도나 된다는 것이다.
“근데 체력은 되나 보네?”
“엉?”
무심코 돌아봤는데, 의외로 속도가 빨랐다. 강영지와 공지혜가 조금씩 올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의 전력질주 느낌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강형우는 여유로웠다.
“나도 운동 꾸준히 하거든.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고.”
공지혜 들으라고 말했는데, 웃는 건 강영지였다.
“적당히 해라. 얼굴도 산도둑놈 같은데 거기서 더 커지면 짐승이다.”
“야. 그래도 오빠한테, 짐승이 뭐냐?”
“뭐?”
순간 강영지가 휙 고개를 돌렸는데, 눈빛이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왜 유학 갈라는 줄 아나? 오빠 때문에 아무도 나 안 꼬신다. 다 무섭다고 도망가더라.”
“에이, 설마?”
“나도 설마인 줄 알았다. 근데 대학 선배들이 오빠 다 알더라. 덕분에 어떤 놈도 내 손목 한 번 안 잡더라.”
“아니, 그게…….”
“됐고. 나 노처녀로 죽으면 다 오빠 탓인 줄 알 거다.”
강영지가 그렇게 쏘아붙이는데, 공지혜는 뭐가 웃긴지 키득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영지야, 그게 아니라…….”
“오빠, 여기 아니에요?”
갑자기 공지혜가 어깨를 치는데, 돌아보니 주혁 형네 집이 보였다. 한 십오 분 정도 달린 것 같은데 벌써 도착한 것이다.
“하여간 우리 운동 할 테니까 볼일 보고, 적당히 마시다 들어가.”
강영지의 당부에 결국 강형우는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지혜는 왜 자꾸 웃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
“미안. 좀 늦었다.”
강주혁은 가벼운 반바지 차림으로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전에 갔던 파전집으로 들어갔다.
막걸리가 나오고 서로 시원하게 한 잔씩 한 뒤에야 강주혁이 투덜거렸다.
“힘들다. 힘들어.”
“뭐가요?”
“전에는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 그런데 애 나오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
“어떻… 게요?”
강형우가 조심스럽게 묻자 강주혁은 갑자기 막걸리 한 사발을 꿀꺽 들이켰다.
“그냥 막막해. 그러니까 너도, 빨리 장가가라.”
딱 보니까, 너도 망하라는 그런 표정이었다.
강형우는 은근슬쩍 걱정이 되었다.
대체 요즘,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