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화 비밀 지킬 수 있어요
“오빠, 질투했죠?”
“그, 그게…….”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공지혜한테 묻고 싶은 게 그거였다.
혹시, 성구랑 사귀냐고.
그게 실수로 사귀자고, 가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후자가 본심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랬으니 그 말이 튀어나왔겠지.
“맞네요. 오빠, 원래 안 그랬는데… 그래서 좀 힘들었거든요.”
“뭐?”
“그런 게 있어요.”
공지혜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식전 빵을 집어 들었다.
더 묻지 말라는 그런 의미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강형우는 그래도 이건 듣고 싶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정말 성구랑 뭐 했어?”
“하긴 했죠. 근데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강석이도 뭐 아는 모양인데, 제대로 말 안 하고, 그건 성구도 마찬가지고.”
강형우가 답답해하자 공지혜가 빵을 내려놓고 배시시 웃었다.
“오빠, 연희 언니 친구잖아요.”
“어? 그건 맞는데…….”
순간 살짝 느낌이 왔다.
설마설마했는데, 그걸 들킨 건가 싶었다.
나중에 홍태구한테 들었는데, 이 미친 새끼가 혼인 신고서를 위조(?)했다.
정확히 말하면 연말 망년회에서 오연희한테 결혼하자고 할 때 당당하게 내민 그게, 가짜였다.
양식 비슷하게 작업해서 출력한 거란다. 거기에 자기 이름하고 도장까지 그럴듯하게 찍어서 만든 거라는 것이다.
만약 오연희가 거기에 이름 적고 제출해도 정식으로는 신고가 안 된다나 뭐라나?
정말이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랬으니 다들 진짜인 줄 알고 속아 넘어갔겠지.
어쨌든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오연희가 그걸 보물처럼 지갑에 넣고 다니고 있었으니까.
그건 마치 시한폭탄 같은 거였다. 나중에 들키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공지혜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비밀 지킬 수 있어요?”
“어? 어, 당연하지.”
강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지혜가 목소리를 낮췄다.
“성구 오빠랑 나랑, 태구 오빠 프로포즈 준비하는 거 도와주러 간 거예요.”
“뭐? 진짜? 근데 난 왜 안 불러?”
“그때, 오빠 정신없이 바빴잖아요. 현우 오빠네 치킨집 때문에 가게도 잘 못 나왔고, 쉬는 날은 맨날 약속 있다고 어딜 다녀오고…….”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정말 한두 달 정도는 내가, 내가 아니었다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프로포즈… 라고?”
“예. 다음 주에 한다고, 수영 로터리 근처에 노래주점에 방 하나를 빌렸거든요.”
일종의 예행 연습이었다.
일단, 세 시간 예약을 한다.
홍태구가 오연희랑 데이트하는 사이 홍성구와 공지혜가 한 시간 동안 열심히 꾸민다는 거였다.
천장에 풍선 띄우고, 벽에 플래카드 걸고, 바닥에 장미꽃 뿌리고, 입구에 하트 모양 조명까지 설치하고…….
그 과정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다리던 파스타가 나올 정도였다.
강형우는 명란 크림 파스타를 덜어서 줬다. 그리고 나머지를 가져오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요약하면, 처음 갔을 때는 계획을 세우는 거였다. 어디에 뭘 어떻게 하고, 어딜 꾸미고 하는 걸 같이 의논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디까지 가능한가였다.
한 시간 안에 이것저것 계획한 대로 다 설치할 수 있느냐를 확인했단다.
그 과정에서 못하는 거 몇 개를 뺐다.
또, 양초로 하트 모양의 불을 붙이는 거와 폭죽 같은 거는 가게 측에서 안 된다고 했다.
“태구 오빠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요. 풍선 개수가 너무 많더라고요. 그거 하나하나 다 분다고 어지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
실제로 홍성구는 스무 개 정도 연속으로 불다가 픽 쓰러졌단다. 해서 풍선 개수도 확 줄였고, 그럭저럭 테스트까지 끝냈다는 것이다.
“근데 그거… 강석이가 어떻게 알아?”
“성구 오빠랑 둘이 친하잖아요. 본점에서 일하게 되면서 술도 자주 마시고 둘이 놀러도 많이 다닌대요.”
갑자기 공지혜가 말을 아꼈다.
파스타를 크게 한입 먹고, 볼을 부풀려 가면서 우물우물 하더니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면서 먹어보라는 의미였다.
강형우는 그제야 자신이 손도 안 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신기한 걸 느꼈다.
일종의 눈치라고 해야 할까?
하도 오래 같이 지내다 보니, 말을 안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대충 손짓 눈짓만으로도 의미를 파악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강형우는 씨익 웃으며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이게 요즘 유행한다는 명란 크림 파스타였다. 크림의 고소한 맛과 명란의 짭짤한 맛이 어우러져서 환상의 맛을 낸다는 바로 그 음식이었던 것이다.
이 조합은 확실히 신선했다.
맛의 깊이는 파스타 전문점보다는 부족했지만 이 정도면 여자들이 충분히 좋아할 만하다 싶었다.
그렇게 맛을 음미하는데, 공지혜가 말했다.
“둘 다 여자한테 인기 없어서 서로 붙어 다니는 거라고…….”
“컥, 풉. 크허헙.”
강형우는 재빨리 휴지를 뽑아서 입을 가렸다.
다행히 추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 직후, 가까스로 호흡을 정리한 뒤 음료수로 목을 축인 뒤에 물었다.
“그래서 강석이도 들었다는 거구나.”
“예.”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거지?”
“뭐가요?”
“아니, 강석이가…….”
잠시 고민하던 강형우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 됐든 지금 공지혜와 사귀고 있는 건 맞으니까.
“그게 강석이가 조금 이상하게 말하더라고. 마치 내가 좀 열받으라는 식으로? 그러니까… 아!”
아까 공지혜가 그랬다.
질투 같은 거 못 느끼는 줄 알았다고, 그래서 힘들었다는 말을 적당히 뭉개 버렸다.
순간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지금까지 있었던, 몇 가지 말도 안 되던 상황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혜야, 설마… 맞아?”
“예. 고객님. 주문하신 바비큐 폭립 맞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레스토랑 직원의 난입으로 대화가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그걸 들은 공지혜가 빵 하고 터졌다. 직원의 순발력에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이다.
***
그나마 데이트다운 데이트라고 해야 하나?
일단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그런 뒤, 둘은 택시를 타고 경성대까지 나갔다. 가장 가까운 영화관이 있는 곳이 거기였던 것이다.
GGV에 들려 표를 예약했고, 막간의 시간에 오락실을 즐겼다.
문제는 주체할 수 없는 혈기(?)였다.
게임장 같은데 가면 펀칭기 비슷한 게 있었다. 농구공 비슷한 걸 내려서 치는 거였다.
강형우는 쓸데없이 남자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과감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쾅.
순간, 사슬이 끊어지더니 농구공이 날아갔다. 그러다 바닥에 크게 튕기더니 농구 게임기 골대에 걸린 것이다.
강형우는 당황해했고, 직원은 황당해했다.
운 좋게도 기계가 오래돼서 쇠사슬이 약해진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잠깐의 소란 끝에 영화 시간이 다 됐다.
아이언맨3.
공지혜가 말하길, 벌써 관객 수가 780만이 넘었단다. 요즘 최고 인기 작품이라면서 꼭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로맨스 영화라면 질색을 했을 테니까.
어쨌든 둘이서 신나게 영화 보고 나와서 목도 축일 겸 카페로 갔다.
거기서 내린 영화 감상평은 참 단순했다.
결국은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사고 없이 오래 산단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강한 건 여자 주인공이라고 했다.
하긴 슈트 없는 아이언맨은 짜장 없는 짜장면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카페를 갔다가 다시 광안리 백사장을 걸었다.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다만,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전 같으면 어머니랑 영지랑 같이 부담 없이 수다 떨고 그랬는데 단둘이 있으니 조금 어려웠던 것이다.
차라리 가게였으면 덜했을 텐데.
어쨌든, 백사장 끝의 횟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소화도 시킬 겸 30분 정도를 걸었다.
그런 뒤, 집 근처 꼬치집에서 소주 한잔하고 집에 바래다주는 걸로 깔끔하게 끝냈다.
그러면서 조금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원래라면 내가 살던 집이었는데, 이제는 여친 집이 된 셈이니까.
***
“일단 차를 사자.”
첫 데이트에서 절실하게 깨달은 건 그거였다.
이전까지는 크게 불편한 걸 못 느꼈다.
자취방에서 내리막길로 십여 분 정도를 걸으면 지성분식 본점이었다.
여기서 산책하듯 살랑살랑 걸으면 길어야 이십 분도 안 돼서 2호점에 도착한다.
집에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사가 있기는 했지만, 가벼운 야간 운동 정도로 생각하면 가뿐했던 것이다.
그 외 필요한 식자재는 평석이 형이 직접 가져다 줬다.
제일 많이 나가는 돈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육점 친구 재일이가 최우선 구매 고객이라면서 그냥 퀵으로 보내 버렸던 것이다.
하긴, 한 번에 거의 백여만 원 가까이 구매하니 그 정도 서비스는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결혼식이 이번 주말이었다.
정말이지 시간 한번 빠르네.
어쨌든 아침부터 밤까지 가게에만 있었으니, 이런저런 이유로 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딱히 공지혜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강형우는, 차에 몇 번이나 동그라미를 친 다음에 다시 메모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다음이 이사였다.
지금 사는 데는 보증금 삼백에 월세 십오만 원짜리 산등성이 옥탑방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편하게 다니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기겁을 하는 동네였던 것이다.
가로등이 있지만 어두컴컴하고 마을버스조차 힘겹게 올라오는 곳.
무엇보다 집이 오래돼서 이것저것 손볼 게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저번에 돈을 들여서 에어컨도 달고 일부 수리를 했지만 좀 그랬던 것이다.
무엇보다 홍태구가 그리 말했다.
자취방이지만, 좀 꾸미고 살라고. 그래야 여자 친구 데려올 수 있다면서 지금 사는 데는 좀 그렇지 않냐고 했다.
사실 맞기는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다른 형들도 그랬다. 연애하려면 작은 원룸이래도 깔끔한 곳이 더 낫다고.
강형우도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솔로 생활이 길어서인지 그런 부분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그래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잠시 멈칫하던 강형우는 갑자기 이사 이후의 어른(?)스러운 생각을 해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공지혜가 외박하면, 어머니가 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영지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얘가 그런 쪽으로는 감각이 무척이나 비상했으니까.
“휴우. 차라리 당당하게 말할까?”
맞다.
지금 둘이 사귀는 건, 일단은 비밀이었다.
그건 이강석 이 썅놈 새끼 때문이었다.
그때 술자리에서 사내 연애는 안 된다고 술김에 극구 반대했다. 사귀다 깨지면 누구 한 명은 나가게 된다면서 괜한 소리를 했던 게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때 이강석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처럼.
“됐고. 아직 계약 남았으니까, 이사는 천천히 생각하자.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잖아.”
맞다.
정말 급한 건, 폭립이었다.
테스트 삼아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준 게 벌써 소문이 나버렸다. 전에는 뜸하게 물어봤는데, 요즘은 부쩍 언제 시작하냐는 질문들이 자주 들어왔던 것이다.
특히 진상 아줌마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실제로 단골 아주머니 모임에 서비스했을 때, 그걸 가지고 따졌던 손님도 있었으니까.
강형우는 잠시 폰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은 했지만, 진짜 해볼까 말까 했던 게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수였다.
잠시 고민하던 강형우는 강신애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