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화 불렀으면 말을 해야죠
정신이 멍~ 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신원이 형한테 쫓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실수한 건 맞다.
현재 폭립의 맛은 거의 정해졌다.
남은 건 원가 절감을 위한 테스트였고,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족발이나 수육 삶는 데 쓰는 것처럼 된장이나 커피, 과일과 야채 등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신같이, 커피 한 통을 다 넣으라니.”
음식에 대해서만은 철저하게 자신을 따르는 신원이 형이었다. 그랬기에 두 번 물어보고 바로 실행한 것이다.
물론 저번에 시험했을 때, 믹스커피 반 통을 넣기는 했다.
20인분 양의 고기가 들어갔기에 그 정도는 필요하다 싶어서였다.
그랬기에 뭔가 생각이 있겠거니 했단다.
하지만,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만 꾸벅꾸벅하고 있으니 정신 차리라고 내쫓은 거였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신경 안 쓰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자꾸 신경이 쓰였다.
전에 듣기로, 지혜가 날 좋아한다고 했다.
나도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았다.
청춘남녀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이 년을 꼬박 같이 붙어서 살다시피 했다.
일주일에 육 일은 아침 점심을 같이 먹었고, 두 번 정도는 저녁도 함께했다.
출근해서 제일 먼저 보고, 퇴근도 함께였다.
그러니 없는 정도 생기는 게 당연하겠지.
“아니, 정말 그게 다인가?”
그 외에도 공지혜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지성분식에 파리만 날릴 때도 꼬박꼬박 나왔고, 아버님 일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쉬거나 한 적이 없었다.
만약 공지혜가 없었다면, 지금의 지성분식도 없었을 터.
“문제는…….”
강형우는 답답한 마음에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었다.
천경 어르신이 말했다.
불혹에 이르러야 진정한 인연을 만날 수 있다고.
처음 들었을 때는 발끈했다. 나이 마흔까지 연애도 못 한단 말이냐 하고 따졌던 것이다.
나중에, 마지막이라며 뵈었을 때 궁금해서 물었다.
정말 마흔까지 여자 만나면 안 되느냐고!
그랬다가 혼쭐이 났다.
천경 어르신 왈, 자기는 한 번도 마흔이란 말을 한 적이 없단다.
불혹이란, 말 그대로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때였다. 확신이 들기 전에 함부로 여자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너’는 더 그렇단다!
그래서일까?
정말 얼마 되지도 않아서 미진이랑 헤어졌다.
술김에, 큰 감정 없이 시작된 연애라서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서로에게 지친 것도 있지만 말이다.
“단순히 그래서라면,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아.”
강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담배를 물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참 맑고 고운데, 가슴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노망난 어르신이 하는 헛소리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틀린 말들이 거의 없더라.
그게 문제였다.
우선 내 사주에 귀인이 셋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벌써 만났던가, 가까운 시간 내에 찾아온다고 했었다.
그때는 분석이 형이 첫 번째 귀인인 것 같았다.
취직도 시켜줘, 일도 많이 가르쳐 줬다. 게다가 지성분식의 기반인 요리를 꾸준히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서른 중반에 억대 연봉, 그리고 건실한 식품회사 대표였다.
뽀대용이었지만 외제차도 있었고 대출 없이 아파트까지 샀다. 그런 분석이 형을 보면서 성공한 삶에 대한 희망을 꿈꿨던 것이다.
그랬기에 한때는 귀인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귀인 때문이었다.
천경 어르신이 분명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생에서 알던 사이라고.
그때 내 재산을 탈탈 다 털어먹은 사람이 있는데, 이번 생에서는 마구마구 퍼줄 거란다.
거기에 맞는 단 한 명이 바로 강주혁이었다.
겉으로는 툴툴대고 짠돌이 짓도 어마어마하게 하면서 계산도 철저해서, 결코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유독 나한테만 살갑게 대해주고 있었다.
실제로 일하다가 막히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먼저 연락하고는 했으니까.
주혁 형은 귀찮아하면서도 해결 방법 찾는 걸 도와줬다.
물론 절대 답을 바로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이 역시 수련이라면서 힌트 이상의 것은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면 금방 까먹기 마련이라나?
그 외에도 지우 누나한테 들은 것도 있어서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강주혁에게 특혜(?)를 받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앞뒤 사정을 생각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철진 기획 관련 일도 그렇고, 음식 하는 노하우나 손님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장사 철학에 관한 것들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게다가 언제 한 번 지나가면서 한 말이 있었다.
빨리 크란다. 그래야 같이 일 좀 할 것 아니냐면서 닦달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두 번째 귀인은 강주혁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시간상 맞는 건, 공지혜뿐이었다.
처음이면서 끝까지 곁에 있는 사람. 그게 첫 번째 귀인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말하기 어렵다는 거지.”
강형우는 담배를 끄고 한숨을 내쉬었다.
공지혜가 맞든 아니든, 머리가 복잡했다.
왜? 나만 모르고 있었지?
아니, 정말 홍성구랑 사귀는 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방 뒷문이 열렸다.
공지혜였다.
“오빠, 뭐 해요?”
“어? 아니, 그게 사귀자고.”
“예? 예. 그래요. 그리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빨리 와요. 지금 단체 손님 와서 엄청 바쁘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공지혜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뭐가 지나갔냐 싶었다.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도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 아니겠… 지?
***
역시 손님 많고 일이 바쁘니까,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주문받고 입력하고 주방에 확인한 다음 음식을 날랐다.
자리가 비자마자 치우고 상황 봐서 주방으로 들어가 설거지까지 했다.
게다가 무슨 날인지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정말 허리 끊어질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후아, 마감이다.”
마지막 주문 이후, 강형우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강신원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왜요?”
“아니, 이거… 괜찮게 나온 것 같아서.”
강신원이 가리킨 건 수비드 기계에서 나온 돼지 등갈비였다.
바쁘게 손님 받는 사이 끓였던 육수통에서 건져내 서너 시간을 익혔던 모양이었다.
“어라? 색이 진짜 괜찮네요?”
아무래도 커피 믹스 한 통의 효과 같았다.
강형우가 웃자, 강신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정말 잘 나왔지? 이거 바로 먹어볼까?”
“그건 아니죠. 숙성해야죠. 그게 우리 가게 조리법이니까요.”
진공 포장된 팩을 상온보다는 낮고, 냉장실 온도보다는 높게 하룻밤 더 보관한다.
그걸 최종적으로 예열된 오븐에 구워서 나가는 방식이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게, 오전부터 초벌 작업해서 수비드 기계에 넣으면 거의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최소 서너 시간 잡고 데우기를 하면 거의 마칠 시간이 다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간에 뭔가를 하기도 어려웠다.
해서 강형우는 좀 더 공부를 했다.
책을 보니, 진공 팩 상태에서 하룻밤 저온 보관을 하면 외부 육질을 더 쫄깃하게 할 수 있다더라.
어차피 공기 중에 노출만 되지 않으면 세균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테스트해 보니 정말 그랬다. 하룻밤 숙성이 식감을 한층 끌어올렸던 것이다.
“그럼 이건 내일 아침에?”
“예. 영업 전에 우리끼리 한번 먹어보고, 최종 테스트 해보죠.”
한 번에 조리하는 양은 딱 20인분으로 한정했다.
현재 그 정도가 지성분식이 소화할 수 있는 양이었다.
10인분은 여기서 먹고, 나머지는 본점에 보내 맛을 보게 한 뒤 감상을 듣고 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해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맛의 평균치를 잡을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형.”
“왜?”
“그게…….”
강형우가 뭐라 말하려는데 갑자기 주방 안으로 이은주가 들어왔다.
“사장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 무슨 일인데?”
“그게, 사정이 생겨서 내일 집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한 이틀 정도 못 나올지도 몰라요.”
이미 주혁 형한테 집안 사정에 대해 들은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석 달이 훌쩍 넘었네그려.
“일단 알았어. 내일 주방은 내가 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애매하다 싶으면 본점에서 홍성구를 불러도 된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강형우는 흠칫 했다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지혜는 카운터에서 매상을 정산하고 있는데, 거기에 집중하는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럼 전 마무리하고 퇴근할게요.”
이은주가 그렇게 말한 뒤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 조곤조곤한 협박 소리가 들렸고 이영제가 후다다닥 열심히 청소를 시작했다.
강형우가 다시 강신원을 보는데, 이 형도 많이 피곤해 보였다.
혼자서 종일 돈가스 두드리고 소스 만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도,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들어가요. 어차피 급한 건 없잖아요.”
“어? 어, 그렇지.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자.”
“예. 정리하고 나오세요.”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홀로 향했다.
확실히 다들 숙련되어 있어서, 청소도 거의 끝이었고 정리도 다 되어 있었다.
강형우는 한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퇴근하세요.”
말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순식간에 지성분식을 빠져나갔다.
강형우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조명을 전부 끈 뒤에 입구 문을 닫았다.
삑삑삑~
도어록이 잠기고 고개를 돌리니, 공지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지혜야, 할 말이 있는데?”
술을 마시자고 해야 하나? 아니면 카페라도?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공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로등 조명 탓일까?
확실히 이렇게 보니 예쁘기는 예뻤다.
공지혜는 여자치고는 큰 편이기는 했다. 키도 170이나 되었고, 꾸준한 다이어트 덕분인지 전성기 시절의 외모가 돌아오고 있었다.
현재는 볼살이 조금 통통한 한가인을 닮았다고나 할까?
“오빠, 불렀으면 말을 해야죠?”
“아, 그게… 아까 낮에 한 이야기 있잖아.”
“예? 뭐 했어요? 하도 바빠서 기억이 안 나는데?”
공지혜가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김이 팍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 그래? 기억이 안 나?”
“예. 그리고 오늘은 저 먼저 들어갈게요. 알잖아요. 영지랑 같이 수영강 가는 날.”
일주일에 두 번씩, 다이어트를 겸해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센텀 쪽으로 가서 수영강변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걸 알기에, 차마 붙잡기 애매했다.
“어… 어, 그럼 잘 가.”
“예. 오빠. 내일 봐요.”
공지혜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더니 정말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으로 향했다.
순간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지? 아까는 착각이었지?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카오톡이 울렸다.
[근데 오빠. 우리 오늘부터 1일?]
***
신메뉴 개시.
하루 20인분 한정 판매합니다.
강형우는 입구 왼쪽과 오른쪽 벽에 가장 잘 보이도록 포스터를 붙였다. 홍태구를 통해 POP 전문가를 소개를 받아 무려 30만 원을 주고 의뢰한 거였다.
아기자기한 그림이었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실제 사진보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더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이제 메뉴판에도 추가했고, 홈페이지에도 올려놨는데… 과연 몇 사람이나 찾을까?”
이게 제일 고민이었다.
커피 사건(?) 이후, 열흘 정도를 더 테스트했다.
맛은 합격, 색감도 좋았고, 마지막으로 식감까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제 남은 건, 손님들의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