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화 목소리 커요
“현기… 어머니요?”
뜬금없는 이름에 강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희 어머님 친구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젊은 부인이 있는데, 여섯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고…….”
설명을 들어보니 그때 그 아줌마였다. 자기가 지랄해 놓고 경찰이 신고했던, 그 여자와 거의 흡사했던 것이다.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어제 애 놔두고 가출했대요.”
“예?”
순간 뜨끔했다.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 글쎄요? 며칠 전 말고는 저희 가게 온 적이 없는데요.”
“그렇죠?”
강형우는 일단 주문을 받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 뒤 포스기를 통해 주문서를 넣고 주방으로 향했다.
요즘 이은주가 강신원과 이영제, 그리고 히토미한테까지 요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창 바쁠 때는 주방 전체를 진두지휘했고, 한가한 시간에는 하나씩 노하우를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은 힘들어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으면 나중에 편하단다.
어쨌든 주방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강형우는 다시 홀로 나왔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척하면서 아주머니들의 대화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거리가 있어 안 들릴 만도 하건만 신기하게도 요즘은 귀가 꽤 좋아졌다.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가 전부 들렸던 것이다.
“근데 뭐 때문에 싸운 거래?”
“모르지. 며칠 경찰 왔다 간 것 때문이라는데, 무슨 사고 친 거 아냐?”
“그럴 줄 알았어. 그 여자 많이 이상하더라.”
“언니도 그랬어?”
“그럼. 현기 걔가 우리 셋째랑 동갑이잖아. 어린이집 같이 다니고. 그래서 우리 집 데려와서 몇 번 밥 같이 먹였거든? 그런데 빼짝 말라가지고, 반 공기도 못 먹더라고.”
“여섯 살이면 한창 잘 먹을 땐데?”
“그러게.”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떠는데, 생각보다 그 여자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아이고, 남편이 불쌍하다. 애 놔두고 도망치다니.”
“언니는 소문도 못 들었어? 차라리 잘됐지. 무슨 여자가 집안일 손도 까딱 안 하고, 툭하면 배달시켜 먹고, 애 밥도 안 챙기고 그런대. 게다가…….”
갑자기 눈치를 보는지 목소리를 확 낮췄다.
강형우는 슬쩍 테이블 청소하는 척 근처까지 다가갔다.
들어보니, 남자는 건실한 직장인이었는데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것 때문에 힘들어할 때 여자가 먼저 접근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러브스토리였다.
“그 여자가 완전 여우지. 한 달도 안 만났는데 임신했다고 찾아왔대.”
“언니는 그거 어떻게 들었어?”
“우리 손아래 동서랑 동창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듣는데, 충격적이었다.
그 여자 말이, 시부모 죽어서 안 모시고 살아 좋단다.
또, 형제가 없으니 유산 상속도 문제없었고 생명 보험금도 제법 나와서 그걸로 아파트까지 샀다는 거다.
애초부터 그걸 노리고 접근한 거라나?
진짜 몰래 듣는데 갑자기 장르가 스릴러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미친년!”
아오, 깜짝이야.
강형우가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바로 뒤에 최민지가 있었다.
아무래도 다 들은 모양이었다.
“쉿, 쉿.”
강형우가 아주머니들 안 보이게 손짓하자, 최민지는 주방으로 향했다.
어쨌든, 그 여자는 결혼 이후 애 핑계 대면서 돈을 펑펑 쓰고 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다른 남자한테 사기당해서 통장까지 왕창 털렸다는 것이다.
이때 이혼할 뻔했는데, 역시 애가 문제였다.
“남자만 불쌍하지. 애 때문에 다 덮어줬는데…….”
“그런데, 언니? 왜 가출했대요?”
“그야 모르지. 듣기로는 남편이 돈 못 쓰게 하니까 우울증 걸렸다는 말이 있더라고.”
“엄마야, 무서븐 여자네. 해서 다니는 거 보면 쓸 건 다 쓰는 거 같던데.”
“오히려 잘됐지. 이참에 이혼하고 갈라서는 게 애 생각하면 더 좋아. 전에도 아파트 부녀회 나와서 깽판 친 거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나더라고.”
아무래도 사건 사고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누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읍.”
강형우는 겨우 놀란 감정을 억누르고 고개를 돌렸다.
최민지가 돈가스를 들고 있었고, 그 뒤에 은선경이 파스타를 가지고 나왔다.
잠깐 이야기 들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된 모양이었다.
강형우는 파스타를 받 아들고 아주머니들 테이블로 갔다.
“주문하신 하와이안 돈가스 두 개하고, 라면 김밥 세트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서비스입니다. 드셔보시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나마 여자 손님들이 제일 많이 찾는다는 크림 파스타였다.
여기에 키위 드레싱에 레몬즙과 통후추를 뿌린 샐러드와 옆 제과점에서 받아 쓰기로 한 커피빵이 더해졌다.
“어머, 이쁘게 나왔네요.”
“호호호. 그럼 앞으로 이렇게 팔 거예요?”
“예. 일단 가격은 육천오백 원 잡았습니다. 손님들 반응 봐서 수정할 수도 있고 그래요.”
강형우는 그렇게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다시 카운터로 돌아온 강형우는 약간 찝찝함을 느꼈다. 그 여자가 가출하게 된 계기가 자기 때문인 것 같아서였다.
사실, 망설임 없이 신고할 수 있었던 건 이병선의 조언 때문이었다.
폭행죄는 무혐의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그 여자가 왜 신고를 했느냐?
일반적으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합의금 명목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거나 정신적으로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서란다.
그 이야기에 열받아서 강형우도 신고를 마음먹었다.
하지만 감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무고와 위증은 처벌이 어렵다고 했다. 재판까지 간 것도 아니고, 단순 기만에 가까워서 현실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적용 가능한 것이 영업 방해였다.
하지만, 이 역시 상대가 배 째라 하고 나오면 어쩔 수 없었다. 공탁금 일부를 걸면 가벼운 벌금형 수준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전과 없는 초범에 가정주부.
여기에 단순 사건이라면 벌금 200만 원 이하였고, 대개 50만 원 정도 나온단다.
그래서 큰 부담 없이 신고한 거다.
골탕 좀 먹어보라는 심정에서.
“그런데 가출을 했다?”
부부싸움까지는 그럴 수 있다 싶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장님.”
“아오, 깜짝이야. 민지… 씨. 기척 좀 내고 다녀요.”
“저도 다 들었거든요. 그거 사장님 잘못 아니에요. 그년이 골빈 년이지.”
“예?”
“제가 그때 그랬잖아요. 지 배 아파 낳은 아인데, 아는 신경 안 쓰고, 지 혼자 다 시키가 처먹었다고.”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게 최민지가 폭발한 이유일 수도 있었다.
미혼모였으니까.
“애 엄마 인성은, 아한테 하는 거 보면 다 나와요. 매니저가 그러는데, 애보다 지 빽부터 먼저 챙겼다고 그라더라고요. 그라고…….”
최민지가 아주머니들을 보는데, 눈빛이 달라졌다.
“내 아는데, 저 어머니들 진짜 좋은 사람들 맞아요. 우리 가게 단골이기도 했었고, 전에 매니저가 그러더라고요.”
지성분식 이벤트했을 때, 백화점 상품권에 당첨됐다.
물론 딸이 걸린 거지만 가져가려면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식 생각하니까 반 친구들 데리고 먹으러 오라고 바꾼 거란다.
원래는 태구와 덕수 형 때문에 생긴 일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인제, 사장님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년이 지 복을 지가 찬 거지. 내 안 봐도 아는데, 딴 남자 만나러 간 게…….”
“쉿. 목소리 커요.”
“아, 죄송합니다.”
“일단 알았으니까, 마침 손님 들어오네요. 안내 좀…….”
“예.”
최민지가 잽싸게 움직이는데, 의아하게도 몸이 참 가벼워 보였다.
신경 쓰였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
“파스타는 접읍시다.”
강형우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지난 이틀간, 단골손님들에게 서비스로 내면서 여러 가지 의견을 들었다.
전체적으로 좋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그건 공짜 음식이기에 나오는 거였다. 육천오백 원을 주고 먹는 건 아니라는 눈빛을 확실히 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성분식 본점과 학군이 겹치는 미묘하게 겹치는 것도 있었다. 여기서 안 해도, 저렴한 파스타 먹고 싶은 학생들은 그리로 가면 되는 것이다.
그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짜 메뉴에서 빼려고요?”
파스타를 유독 좋아했던 은선경이 아쉬운 표정을 내비쳤다.
하지만 일전에도 겪지 않았던가?
장사는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해야 하는 법.
“예. 대신, 여긴 폭립을 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
같은 가게라고 꼭 같은 메뉴만 취급하라는 법은 없었다.
상권에 맞게, 고객층에 맞게 변화를 주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인 셈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런 당연한 것도, 현우 형 치킨집을 돕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강형우는 희의 마무리 발언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오늘 회식 아시죠?”
오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백창호였다.
내일 어린이날에 짐 정리를 하고 인천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거기서 부모님과 이틀 쉬다가 논산에 입소하기로 한 것이다.
다들 먹고 죽자고 하는데, 강형우도 빼지 않았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했으니까.
두어 달 사이, 우리 통닭을 해결했고 약속했던 오백만 원도 받았다.
고민하던 파스타도 과감히 정리했고, 폭립 조리법도 어느 정도 완성이 된 상황이었다.
백창호와 이강석이 빠져도 문제없을 만큼 직원 충원도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진상 아줌마들과의 싸움이었다.
황당한 게, 두 달 반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커피 달라는 아줌마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강형우를 들뜨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
“인건비가 정말 무지무지하게 나가네?”
본점은 3월, 6월, 9월, 12월. 이렇게 석 달에 한 번씩 보너스를 주기로 했다.
매출이 줄면서 액수가 일부 줄었는데, 그래도 순이 이모는 다 합치면 300만 원이 넘어갔다.
점장 진급하면서 월급을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상승폭은 이강석이었다.
노예 해방!
동시에 공식 첫 제자라서 월급을 공지혜보다 10만 원 적게 줬다. 그래도 200만 원이 넘는 돈을 처음 받다 보니 감격에 겨워서 울먹이더라.
정은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월급 더하기 보너스, 그리고 주방 보조로 들어가면서 추가된 액수가 무려 210만 원이었다.
문제는 이은주였다.
실력에 맞는 대우, 거기에 강형우와의 딜도 있었다. 무엇보다 본점의 2인자답게 맞는 월급과 보너스를 줘야 했다.
그러니 240만 원이나 되더라.
물론 이은주가 원래 받던 금액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지만, 오히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홍성구 역시 바쁠 때 본점과 2호점을 오가며 고생했으니 200만 원을 맞춰졌다.
그건 백창호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부모님 모시고 맛있는 거 먹으라고 따로 20만 원을 찔러줬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임정은과 박호성의 경우 10만 원만 더 주는 선에서 끝냈던 것이다.
이렇게 인건비만 천사백만 원 가까이가 나갔다.
그랬음에도 강형우가 가져간 순수익은 무려 팔백만 원이나 되었다. 매출이 많이 줄었다 싶었는데도 그만큼이나 남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순이 이모가 잡다하게 세는 비용을 꼼꼼하게 잡아서였다. 특히 식자재를 꼼꼼히 다뤄서 쓸데없이 버려지는 걸 많이 줄였던 것이다.
역시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본점의 경우 오픈 날짜 문제도 있어서, 첫 보너스만 5월에 지급하기로 했다.
일단 이은주를 제외하고, 공지혜는 370만 원이나 되었다.
오픈발 덕에 2호점 매출이 월등히 높았던 게 이유였다.
강신원의 경우 통장에 찍힌 액수를 보고 바로 전화를 했었다. 뭐가 잘못된 게 아니냐면서 오히려 도로 돌려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하기야, 분식집 알바가 300만 원을 받는 게 말이 안 되긴 하겠지.
은선경이 180만 원 수준이었고, 이영제도 200만 원이나 되었다.
그랬더니 툭하면 죽는 소리하던 녀석이 무지하게 빠릿빠릿해졌다. 게다가 이은주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더 열심히 배우겠다고 눈에 불까지 켜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나 돈의 힘은 위대했다.
이제 남은 건, 최민지와 히토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