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105화 설마 아니겠지
“아싸, 걸렸다.”
덕수 형이 웃으면서 나오는데, 홍태구가 당황스러워했다.
영수증 이름은 정덕수가 맞았다. 게다가 번호 역시 익숙한 거라 틀릴 리가 없었다.
“뒷자리 2090, 형… 맞네요.”
홍태구는 그렇게 말한 뒤, 정덕수와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혹시 두 분 아는 사이세요?”
“호호, 그럴 리가요.”
아주머니가 손을 저었고, 정덕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로 모르고 우연이라는 상황으로 정리하려 했지만, 강형우는 마음에 걸렸다.
덕수 형은 딱 한 번, 개업 3일 차에 요즘 만나는 분과 찾아왔다. 그날 한 끼 먹고, 재미 삼아 넣은 건데 이렇게 덜컥 걸렸던 것이다.
역시 운 좋은 사람은 뭘 해도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금 곤란하긴 했다.
사장 아는 사람이 추첨에 걸렸다는 건 두고두고 말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태구야, 이거 캔슬되겠냐?”
귓속말을 하니, 홍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사심 없이, 조작 없이, 공정하게 했음에도 손님들의 시선이 좋지 못했던 거다.
홍태구가 폰을 입으로 가져갔다.
“예. 2등 당첨자 정덕수 씨는 옆의 사장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자격 박탈입니다. 그냥 사장이 술 한잔 사는 걸로 퉁치겠답니다.”
그 발표에 사람들이 웃으니, 정덕수도 피식 했다.
하지만, 그냥 물러나진 않았다. 홍태구의 손을 당기더니 기어이 한마디 했던 것이다.
“억울하지 않게 딱, 십만 원 어치만 얻어먹겠습니다. 괜찮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자 그렇게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후 아주머니가 다시 2등을 뽑았는데, 아쉽게도 당첨자는 여기에 없었다.
“남은 건 대망의 1등. 무려 3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입니다. 이걸로 꼭 백화점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니까 저 옆 마트도 가능하고, 제휴가 되는 외식 식당에서도 쓸 수가 있네요.”
홍태구는 그렇게 말한 뒤, 강형우를 쳐다봤다.
“이걸 여기 사장님한테 쓰시면, 50만 원어치 음식 시켜도 될 겁니다. 동네 친구분들하고 여기서 회식하세요.”
그렇게 너스레를 떤 뒤, 홍태구는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마지막 1등을 뽑으라는 거였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영수증을 뽑으려는 듯 신중하게 통을 쳐다봤다. 그러다 심호흡을 하더니 깊숙이 손을 넣어서 한 장을 꺼냈다.
홍태구는 그걸 받아서 읽었다.
“1등은, 박미희 씨네요. 전화번호 뒷자리는 5513이네요. 혹시 계신가요?”
호응도 없고, 반응도 없는 상황.
강형우도, 사람들도 서로를 두리번거리는데, 옆의 아주머니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이거, 우리 딸인데요?”
“예?”
홍태구가 영수증을 살펴보니 문구 같은 게 적혀 있었다.
“덕문여고 2학년 1반 친구들, 사랑해… 맞나요?”
“예. 우리 딸 맞아요. 박미희!”
“헐.”
정말 우연인지, 아주머니가 너무 좋아했다.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폰을 꺼내더니 바로 전화를 걸었다.
“딸! 뭐 해?”
-어, 엄마. 나 학원 가는데?
“너 혹시 집 앞에 새로 생긴 분식집 가봤니?”
-아니, 왜?
“정말 간 적 없어?”
-어.
“전에 내가 돈가스 맛있다고 했잖아. 진짜 온 적 없어?”
전화기 너머로 잠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어, 없어. 나 다이어트 중이잖아. 그래서 분식집 안 가. 근데 왜?
순간 아주머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덕문여고 2학년 1반 친구들 사랑해. 이거 너 아니라는 거지?”
-아이, 씨~
바로 이어진 육성에 아저씨들이 빵 터졌다.
그 직후 근처 사무실 여직원들이 웃어댔고, 구경하던 아주머니들도 미소를 지었다.
-엄마! 그거 뭐야?
“뭐긴 뭐야! 1등 당첨 영수증이지. 하여간 우리 딸이 아니라고 하니까 상품권은 내가 갖는다?”
-아~ 엄마, 그거… 정말 1등 맞아?
“당연히 농담이지. 우리 이쁜 딸은 다이어트 한다고 고구마나 열 개씩 먹지, 분식집에서 돈가스 먹고 그러지 않잖아.”
-아니, 그게…….
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마도 얼굴이 벌게졌으리라.
강형우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상품권을 내밀었다.
“아까 이 총각이 그러던데요. 이거 줄게요.”
“예?”
“대신에 우리 딸이 반 친구들 데려오면, 맛있는 거 해주세요.”
“그, 그래도 될까요?”
강형우가 당황하는데, 옆의 편의점 사장님이 끼어들었다.
“그래, 강 사장. 그러면 얼추 맞겠네. 요즘 한 반에 서른 명 정도 되지, 아마?”
당연히 지성분식 입장에선 남는 거니, 좋긴 좋았다.
하지만, 요즘 여고생들.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게다가 30만 원이나 되니 지성분식 기둥뿌리를 뽑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강형우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예. 따님하고 함께 오시면, 제가 진짜 맛있는 거 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런데, 그걸 딸이 다 듣고 있었는가 보다.
-엄마! 진짜?
“그래, 그 되지도 않는 다이어트 소리는 그만 하고, 여기 와서 돈가스나 실컷 먹고 가.”
그 말에 동네 사람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그렇게 이벤트 추첨은 잘 마무리되었다. 호응도, 반응도 좋았고 이 일로 의외의 상황도 벌어졌다.
덜컥 메뉴 하나가 정해진 것이다.
***
“끄응,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강형우는 휴일 첫날 우리 통닭에 들렸다가 어쩌다 보니 인테리어를 돕게 됐다.
정말이지 강학희를 부른 건 잘한 것 같았다.
“강 사장, 진짜 이거 떼도 떼도 끝이 없네.”
노가다 어르신 한 분이 강학희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도 그럴 만한 게, 거의 첫 공사였다. 십몇 년 동안 튀긴 치킨 기름 냄새가 벽에 그대로 배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벽지가 한두 겹이 아니었다. 한 번 바르고, 또 바르고, 또 바르고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해놨던 거다.
게다가 벽지 말고 얇은 스펀지 같은 것도 있었다.
“이건 싸구려 단열 벽지네. 이렇게 해놓으니까 냄새가 안 빠지지.”
강학희가 설명하길, 벽지는 종이였다.
하지만 이건 비닐에 가까운 거라 냄새를 빨아들이지 못한단다. 이게 중간에 끼여 있어 가게 안쪽 벽지 냄새가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뭐, 건축에 대해서 잘 모르니 그냥 그런가 했다.
사실 강형우는 처음에 그냥 벽지 뜯고 새로 바를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일반 업자들은 겉에만 슬쩍 작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학희는 그렇게 대충 공사하지 않았다.
“깨끗하게 다 뜯어. 그리고 세척까지 한 번 한 다음에 곰팡이 약 바르고, 벽체에다 미장도 해야 돼. 그 위에 뭘 덮든지 해야 냄새가 안 나지.”
“아우, 번거로워. 왜 강 사장은 어렵게 하려고 그래? 그냥 덮어도 모르겠구먼.”
“모르긴 뭘 몰라? 기름이 튀고, 배이고, 또 튀고 배이고. 그게 십 년이면 벽체를 갈아야지.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이렇게 하는 거 아냐.”
강학희의 말이 맞았다.
벽체를 갈면, 건물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워낙 옛날에 지어진 거라 두께도 얇아서 이번에 하는 김에 보강까지도 해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봐. 여기 단열 벽지 댄 게 그래서야. 두께가 얇아서 이걸로라도 커버하려 한 거지.”
그러면서 얼마 전에 강원도 공사 이야기를 꺼내셨다.
워낙 산속에 있어서, 겨울에는 보통 추운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벽체를 최소 30㎝ 이상 두께로 해야 단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나 북유럽은 외벽 두께 기준이 그 정도나 된단다. 그 이하라면 허가가 안 나오고, 창고로나 쓰인다는 거다.
어쨌든, 강형우는 공사 확인하러 왔다가 졸지에 철거 일을 돕게 됐다.
그렇게 끙끙대는데 저 멀리서 김현우가 나타났다.
“아버님, 저 밑에 식당 잡아놨으니까 식사부터 하시죠.”
“허,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됐나?”
강학희는 시계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인부 두 명과 함께 식당으로 움직였다.
차려진 건 의외로 많았다.
김현우가 부탁해서인지, 벌건 제육볶음에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고, 밑반찬도 열 개나 됐다. 게다가 한쪽에는 소주까지 두어 병 준비되어 있었다.
“한 잔, 괜찮으십니까?”
“허허, 좋지.”
“예.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김현우는 바로 강학희와 인부들에게 소주를 채웠다. 그리고 찌개를 먹기 좋게 덜어서 앞에 놓고, 그제야 강형우에게 술잔을 받았다.
“대충 일정이나 잡으려고 했더니 일이 됐네.”
맞다.
오늘부터 바로 공사할 계획이 아니었다. 뭘 얼마나 해야 하는지 보려고 벽지를 뜯었다가 갑자기 철거로 이어진 것이다.
인부 두 명도 그래서 부른 거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
강학희의 말에 인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치우는 일인 줄 알았는데, 오전 내내 벽을 뜯었으니 힘들기도 할 거다. 게다가 장비가 필요한 상황이니 특별히 더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술잔이 두어 잔 오가고, 곧 소주병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삼일절 날 공사 시작했으니,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다시 강학희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밥을 더 덜어왔고, 부족한 반찬까지 담아 왔다.
그사이 강학희가 슬쩍 물었다.
“저 친구가 그 효자라는 친구가 맞나?”
“예, 참 착한 형입니다.”
“흐음, 확실히 예의 바르기는 하네.”
공사 전에, 살짝 그 이야기를 꺼내긴 했다.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신, 요즘 보기 드물게 착한 형이라고, 잘 좀 봐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이 좀 드신 분들이라 그게 잘 먹힐 것 같아서였다.
예상대로, 강학희의 눈에 호의가 많이 보였다. 그러니 이제 믿고 공사를 맡겨도 될 거다.
“그래, 효도 잘하고, 사람 착하고 성실하면 된 거지.”
강학희는 그렇게 말한 뒤, 김현우에게 몇 번이나 술을 먹였다.
어쨌든 그렇게 조촐할 술자리가 끝나고 강학희와 인부들이 먼저 들어가셨다.
강형우와 김현우는 쓰레기봉투를 큰 걸 사서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정말 이렇게 많이 붙였을 줄은 몰랐는데…….”
김현우는 한쪽에 쌓아놓은 벽지 뭉텅이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이거 기억난다. 소주 회사에서 준 달력인데, 야하다고 뒤집어서 붙인 거야.”
그 말에 살펴보니 정말 벽지보다 두꺼운 게 있었다.
야하기는 개뿔.
90년대 미스코리아가 입었을 듯한 파란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그걸 입은 여자가 커다란 소주병을 끌어안고 있는 그런 사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가슴 부위에 손 때(?)가 많이 타 있었다.
강형우가 그걸 보는데, 김현우가 피식 웃었다.
“그거 동네 아저씨들이 장난친다고 그런 거야. 그런데 어머니가 애들 교육에 안 좋다고 확 찢어버린 거지. 더 웃긴 건…….”
희한하게, 뒤로 가면 갈수록 사진들이 더 야해졌단다. 겨울로 갈수록 살색이 더 많이 보였다나?
결국 그 달력은 하루 만에 벽지가 되어버렸단다.
“하긴, 그때는 그럴 때였죠.”
강형우가 피식 웃는데, 김현우는 묘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벽지의 두께에서 가게의 세월을 느낀 모양이었다.
괜히 감상적이 될까 봐 강형우는 서둘러 움직였다. 쓰레기를 담고, 정리하고, 당분간 안 쓸 물건들을 차곡차곡 박스에 집어넣었다.
이건 집으로 가져갈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치우는데, 강형우는 서랍 구석에 비닐 하나를 찾았다.
“어? 이건 뭐예요?”
“뭔데?”
“아니, 무슨 연습장 같은데… 어머니가 박하사탕을 좋아하셨나 봐요?”
진짜 박하사탕 봉지 안에 수첩이 들어 있었다.
강형우는 혹시나 싶어 그걸 꺼내서 펼쳤다.
“아, 어머니가 쓰던 매상 장부네. 예전에는 그거 손으로 다 써서 했거든. 그런데 아직 남아 있었나?”
김현우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강형우는 수첩을 여러 번 살폈다. 혹시나 뭔가가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조리법 같은 게 적혀 있었지만, 옛날 방식이었다. 물 얼마에 반죽 얼마, 얼음 몇 개를 넣는 것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왜?”
“글쎄요? 그러니까 별건 아닌데 왜 자꾸 눈이 가는 건지 모르겠어요.”
수첩을 보니 이상한 끌림 같은 게 느껴졌다.
동시에 묘한 향도 말이다.
강형우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