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화 그게 자네였어
정말 공사는 삼 일 만에 끝났다.
실제로 할 게 많지 않아서이긴 했지만, 그만큼 강학희의 손재주가 뛰어나서였다.
승압은 하루면 끝이었다.
비데는 정수기 업자가 와서 했고, 자잘한 보수도 금방이었다.
가장 손이 가는 건 주방이었는데 이 역시도 어렵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건 가스 시설이었다.
원래 카페로 쓰던 곳이라 화구가 부족했다.
그걸 강학희가 아는 사람한테 부탁하니 이틀 만에 준비가 끝났다.
새로 들인 건, 커다란 냉장고 두 대뿐이었다. 그걸 중심으로 위치 조정하고 하니 정말 순식간에 처리된 것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이거였다.
촤아아아악.
강력한 물줄기가 주방 바닥을 휩쓸었다. 그러자 먼지와 부스러기 같은 자잘한 게 한꺼번에 쓸려갔다.
“예상은 했지만, 이거 정말 대박이네.”
바로 고압호스였다.
원래 뒤편 주차장에 있던 거였다. 강학희가 세차하기 편하고 뒤쪽 화단에 물 주기 위해 설치한 건데, 관 하나를 빼서 주방으로 돌린 것이다.
앞부분을 바꾸면 분무기 형식으로도 사용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압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반 수도꼭지에서 트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닌 수준.
어지간한 기름때도 확 밀어버릴 정도로 강력해서 속이 다 시원했다.
덕분에 주방 청소는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일단 끝나기는 했는데…….”
시설만 고쳤지, 할 일은 태산이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따로 있었다.
“형, 부탁 좀 해요.”
상대는 강주혁이었다.
사실 간판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
처음에는 진지한 궁서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정이 들더라. 그래서 본점과 같은 걸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원래 있던 카페 ‘날개’ 를 떼고 새로 하기로 한 거다.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 반응이 엉망이었다.
-싫어.
“왜요?”
-간판 나무, 그거 비싼 거야.
“헐.”
잠시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기는 했다.
두꺼운 원목 간판인데, 연한 갈색이 그냥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 글씨에서 느껴지는 힘이 있었다.
그건 강주혁만이 만들 수 있는 것!
“얼만데요?”
-얼마 생각하는데?
“그야…….”
간판집에 견적을 내어보니 삼백만 원을 불렀다. 크기도 크고 안정기에 LED등, 또 사다리차도 불러야 하고 뭐도 해야 한다고, 메인 간판이 그 정도나 든다는 것이다.
“이백이면 안 돼요?”
슬쩍 액수를 줄여서 물었는데, 실수였다.
-누굴 속이려고 그래? 내가 간판만 천 개 넘게 달았다. 그 가격이면 지성 두 글자 값밖에 안 돼.
“아니, 처음에는 공짜로 해줬잖아요.”
-그거 미끼라고!
“예?”
-너 면도기 알지?
“그야 당연히 알죠.”
-회사마다 꽂는 게 다르잖아. 그래서 면도날 팔아먹으려고 면도기 싸게 파는 거야. 이것도 같은 이치지.
들어보니, 처음부터 지성분식이 확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체인점 낼 때마다 간판 주문하겠지 싶어서, 그거 팔아먹으려고 공짜로 해준 거란다.
와! 진짜, 사업 수완 대박이네.
정말이지 살다 살다 이런 형은 처음이었다.
-삼백 내놔. 사실 그것도 싼 거다?
“조명하고 전부 다 해서요?”
-그래.
그날 입금하고 나니, 다음 날 바로 달렸다.
두루 컴퍼니 인테리어 팀이라고 와서 뚝딱뚝딱 하고 가는데 정말 한 시간도 안 걸리더라.
왠지 사기당한 기분이었는데, 막상 달아놓고 보니 흐뭇했다.
특히, 강학희 아버님께서 무척 놀랐다.
“글자가, 힘이 있네! 유명한 서예가가 써준 것 같은데?”
“에이, 설마요.”
“아니라고. 내가 쓸 줄은 몰라도 보는 눈은 있어. 공사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는데 어찌 모를까.”
그러면서 극찬을 하는데,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진짜 세월을 비껴가는 게 저런 글씨란다.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고풍스러운 게 묻어난다나?
제일 황당한 건 이거였다.
“저게 딱 백 년만 지나면 문화재급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까지 장담하니, 차마 아는 형이 써줬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다행인 건 삼백만 원이라 하니, 싸게 잘했단다. 그러면서 다음에 일이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나?
어쨌든 간판 해결하고 나서 홍태구를 불렀다.
지성분식 2호점 정면 사진을 찍고, 내부 인테리어도 꼼꼼하게 촬영할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작게나마 홈페이지 하나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는데 강석이한테 전화가 왔다.
다급하게 말하는데, 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뭐? 산신령이 지혜 납치해 갔다고?”
***
“헐.”
강형우는 눈앞의 건물을 보고 당황했다.
수영사적공원 뒤편의 작은 주택.
우리 집하고 걸어서 10여 분 거리였다.
내 자취방이 아니라 어머니하고 영지, 공지혜가 사는 집하고 말이다.
딱 봐도 오래된 3층짜리 낡은 주택.
주소를 확인해 보니 여기가 맞았다.
“험험.”
강형우는 다시 한번 옷차림을 확인했다.
몇 벌 안 되는 정장 중에서 그나마 깨끗한 건데, 하도 안 입다 보니 주름이 조금 잡혀 있었다.
선물용 과일바구니까지 확인한 강형우는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예, 강형우입니다.”
탕~
곧 바로 오래된 샷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세대주택인 듯 현관문이 두 개 보였고, 그 너머로 계단이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니 공지혜가 보였다.
“오빠, 여기요.”
“어.”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훈기가 들었다.
“어, 왔는가?”
건물주님 박첨기 어르신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못 하네.”
“예?”
“자네 다른 가게 하나 냈다면서? 왜 말도 없이 그러나?”
순간 움찔했다.
뭐라 변명하려는데 박첨기가 빨랐다.
“다음 달이면 우리 재계약해야 하는 거 알지?”
“예.”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겁이 났다.
다음 달이면, 지성분식 계약한 지 2년째였다. 가게를 비우든 연장을 하든 임대차 계약서를 새로 써야 하는 것이다.
막말로 건물주가 못 해준다고 하면, 무지하게 피곤해진다.
확장 공사까지 하면서 겨우 지성분식을 안정시켰는데 나가라고 하면 정말 답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쫄아 있는데 박첨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자네 편의도 봐줬고, 해달라는 것도 다 해줬는데… 적어도 몇 마디 말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죄송합니다.”
“장사 잘돼서 확장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나?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거라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가마득히 잊고 있었다.
장사가 바쁜 것도 있었지만, 가끔 가게 들리시던 것도 손님이 많아지면서 발길을 끊으셨다.
해서 안 보면 멀어진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내 실수가 맞았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래, 어떻게 할 텐가?”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강형우가 공손히 대답하자 박첨기는 웃었다.
실로 미묘한 미소였다. 장난꾸러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됐고. 월세 이십 올리겠네. 자네도 그 정도면 적당하다는 걸 알겠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짜 십 년 감수한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 올릴 거라고는 예상했다. 재개발 공사가 들어가면서 인근 집값이 요동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월세까지 꿈틀거렸던 것이다.
50만 원에서 70만 원이면 많이 오른 것 같지만, 시세를 생각하면 오히려 봐준 셈이었다. 요즘 같아서는 월세 100만 원을 달라 해도 줘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박첨기는 고개를 끄덕인 뒤 확정을 지었다.
“그걸로 이 년 가세. 나중에 시간 봐서 계약서 써서 가져오고.”
“예.”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
박첨기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반가운 얼굴.
바로 천경 어르신이었다.
“허허, 이놈! 신수가 훤하구나.”
강형우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면, 강석이 전화를 받고 바로 지성분식으로 향했다. 그 직후 공지혜한테 연락이 왔는데 여기로 오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천경 어르신이 지성분식을 찾으셨단다. 그러면서 사장 나오라고 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다는 것이다.
순이 이모조차 헛갈릴 정도로 외모가 많이 변해 있으셨다나?
공지혜도 깜짝 놀랄 정도였고 했다.
직접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산신령처럼 백발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수염도 가슴까지 자라 있었고, 얼굴에서 느껴지는 인상까지 예전보다 옅었다.
마치 뜬구름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허허, 이놈 보게? 기질이 뿌리 박혔구나.”
“예?”
“제 앞을 못 봐서, 용상 걷어차는 사주라 했더니 아직도 못 보고 있는 건 여전하고.”
천경 어르신은 뜬금없는 말부터 툭 내뱉었다.
솔직히 저런 식으로 말할 때는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무당이나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하지만 혼란스러운 머리와는 반대로 가슴이 먼저 말했다.
“어르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원래 재작년에 오시기로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아니, 해가 바뀌기 전에 오신다고…….”
“허허, 그러긴 했지. 그런데 참 세상 일이란 게 요상하더라고.”
천천히 이야기를 하시는데, 무슨 소설 같았다.
강원도 산골에 심마니 마을이 하나 있다고 했다. 거기서 지내다 부산을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눈이 그치고 길이 열린 게 무려 5월이라고 했다.
“자연의 섭리다 싶더라고.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은 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그대로도 나쁘지 않다 싶었지.”
담담하게 말하는데, 이상하게 듣는 사람이 울컥거렸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무슨…….”
천경 어르신은 이전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내 나이 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래서 산에서 죽을 날 받아놓고 있는데 할 일을 놓친 게 몇 개 있더라고. 그중 하나가 자네였어.”
***
“여기 파전이요.”
공지혜가 넓은 접시를 가져왔다.
거기에 먹기 좋게 지진 전이 있었는데, 파전이라 하기에는 조금 그랬다.
얇은 소고기가 깔린 파전은 본 적이 없으니까.
어쨌든 천경 어르신이 권해서 먹는데, 얘가 음식 솜씨가 이렇게 좋았을 줄은 몰랐다.
“자! 한잔해.”
“옙.”
천경 어르신이 가져온 약초술이었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정말 독하더라.
그렇게 삼십 분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제일 먼저 박첨기 어르신이 기권을 했다. 피곤하다면서 방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다음은 공지혜였다.
졸린 듯 꾸벅 하더니 바로 소파에 기대서 눈을 감았다.
그제야 강형우는 마음이 놓였다. 제대로 대화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경 어르신이 먼저였다.
“쯔, 왜 있는 걸 활용하지 못하누.”
“예?”
강형우는 잠시 망설였다.
설마 장백호의 기억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천경 어르신은 피식 웃었다.
“하긴,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과한 건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근간을 보면 필요한 것, 그래도 다행이긴 하구나.”
대체 무슨 소리인지?
그렇게 고민하는데, 천경 어르신이 술병을 내미셨다. 그러면서 턱을 흔드시는데 손목 아프니 빨리 받으라는 신호였다.
강형우가 술을 받자 바로 잔을 쳤다.
역시 이게 예전의 그 분위기였다.
망해가는 지성분식.
손님 없는 시간에 둘이서 김밥에 라면을 가져다 놓고 이렇게 마셨었다.
그게 이 년도 안 됐는데 벌써 기억에서 흐릿했다.
하긴, 그사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강형우는 입에 술을 털어 넣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천경 어르신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