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화 와줘서 고맙다
2013년 1월 1일.
아침 7시 20여 분부터 조금씩 밝아지더니 반이 넘자 붉은 일렁임이 보였다.
뿌연 구름 때문에 조금은 걱정했는데 그걸 뚫고 해가 솟았다.
정말 빨간, 그런 해였다.
강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매일 뜨는 해인데 이상하게 감정이 울렁거렸다. 이제 겨우 머리가 보일 뿐이었는데 그 열기가 직접 가슴에 닿은 듯한 느낌까지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작년 한 해, 뭔가를 이루었기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강형우는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다들 뜻한 바 이루고, 올 한 해도 행복하기를.’
***
“흐어어어, 속 풀리네요.”
공지혜의 입에서 아저씨들 해장하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트림까지 이어지니 이은주가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러다 강형우를 보더니 숟가락으로 뚝배기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이 집 진짜 맛있네요.”
“당연하지. 내 단골집인데. 팍팍 먹어. 팍팍!”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공지혜를 쳐다봤다.
얘는 말 안 해도 정말 잘 먹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까지 올 만하네요. 처음 택시 타자고 했을 때 좀 그랬는데…….”
마지막까지 반대한 사람이 이은주였다.
사실 광안리에서 제일 유명한 집은 새벽집과 본가였다.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전라도식 콩나물 해장국집인 것이다.
하지만 일출 보고 먹는 건 자살행위였다.
일단 사람이 미어터져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새해 첫 음주를 시작하는 손님들이 많아지면 기약마저 없었던 것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 강형우는 택시를 잡기로 했다.
그사이 홍태구와 오연희, 홍성구는 집으로 가기로 했고 거기에 정은혜가 합류했다. 연신 하품하더니 일출 보고 30분도 안 돼서 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두 패로 나뉘어서 귀가를 결정하고 택시를 잡았다.
무려 택시비 만 원이나 들여서 연산 로터리까지 온 게 그래서였다.
“이 집이 이래 보여도 삼십 년 넘은 집이야.”
연산동 쏭가네 해장국.
예전에 단골이었고, 지금도 생각나면 찾는 집이었다.
이걸 경상도 식이라고 하긴 좀 그런데, 뚝배기에 밥과 콩나물 갖은 야채를 팍팍 넣고 육수를 넣어 끓인다. 그러다 날계란을 넣고 풀어서 내오는 것이다.
전라도식이 깔끔한 갈비탕 느낌이라면, 이건 걸쭉한 육개장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밑반찬도 단출했다.
제일 유명한 오뎅 볶음에 김치, 깍두기, 오이소박이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음식 궁합이 잘 맞는지 공지혜와 이은주는 해장국에 이어 반찬까지 동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올해 첫 손님이라고 날계란을 무려 두 개나 풀어주셨다. 덩치 큰 총각이라고 알아보고 서비스로 넣어준 것이다.
여기에 반주로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진짜 꿀을 탄 것처럼 꿀떡꿀떡 넘어갔다.
하지만 반도 먹기 전에 사라지자 조금 아쉬웠다.
“이모 소주 한 병 더요. 그리고 오뎅하고 밑반찬 좀 더 주세요.”
공지혜가 말릴 틈도 없이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내심 바라고 있던 강형우였기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소주 한 병이 따이고, 잔에 술이 채워졌다.
“근데 너 소원 뭐 빌었어?”
이은주가 기습적으로 묻자, 공지혜가 멈칫했다. 그러다 잔을 비우더니 씨익 웃었다.
“그냥 좋은 거 빌었죠. 아버지 건강하게 해달라고 했고, 집에 큰 문제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 거죠.”
“그런데 꽤 길던데?”
“헤헤, 뭐 그냥 이것저것 더 있었어요. 근데 언니는요?”
“나야 뭐. 남자 친구나 하나 생기게 해달라고 했어. 이제 스물일곱인데 나도 제대로 연애 한 번 해봐야지.”
이은주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강형우는 움찔했다. 안 듣는 척하면서 듣고 있다가 들킨 것 같아서였다.
“험험, 왜 그래? 자, 마셔 마셔.”
강형우가 소주가 차 있는 잔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은주는 피식 웃더니 의외의 말을 던졌다.
“오빠, 나 어때요?”
***
“심란하네. 심란해.”
새해 첫날부터 조짐이 요상했다.
이은주는 농담이라고 했다.
하지만 홍태구가 한 말 때문인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이제 스물아홉인데 연애 안 할 거냐고.
물론 무슨 생각에서 그런 이야기한 건지는 알았다.
놈은 혼인 신고서, 아니, 인생의 무덤 신고서를 들고 품에 넣고 다녔다. 한마디로 혼자 고생하기 싫으니 같이 죽자는 심보에서 한 말이 분명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연애하고 결혼을 한다 해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에나 생각해 볼 일인 것이다.
게다가 딸린 식구들이 많았다.
일단 영지 시집보내고, 인정둥이가 자립할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사오 년은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 이후라고 마음먹었던 거다.
그런데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
“아오, 생각하지 말자. 할 일이 태산인데 연애는 무슨.”
강형우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 해장술 때문인지 상황이 그래서인지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바로 집으로 왔다.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니 벌써 오후 세 시였다. 내일을 생각하면 더 자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강형우는 PC를 켜고 워드 파일을 열었다.
그런 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공사 날짜가 이십 일 전후라고 했으니까. 그 전에 해야 할 게…….”
지성분식 2호점은 둘째 주부터 조금씩 청소하면 될 것 같았다. 공사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서 마무리하고, 간판을 바꿔 달면 될 것 같았다.
그다음은 구인 광고였다.
일단 주방은 나와 이강석이 맡고, 밑준비와 베이스는 강신원이었다. 사람 마주치기 겁난다 해서 그렇게 정한 건데 생각해 보니 정말 잘한 일이었다.
요즘 신원이 형은 요리책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부산 내려와서 무의미하게 살던 사람에게 드디어 흥밋거리가 생긴 것이다.
“지혜가 홀을 맡을 거지만, 그래도 셋은 뽑아야겠지?”
우선으로 서빙만 셋이었다.
주방 보조의 경우 쉽게 구하기 어려우니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게 포지션을 짜니 나름 괜찮아 보였다.
홀에 문제가 생기면 강형우가 하면 된다.
신원이 형이 일이 생기면 공지혜와 함께 작업하면 되고, 이강석이 아프면 임시로 홍성구나 정은혜를 데려오면 될 것 같았다.
그런 부분에서 이은주와 잠시 합의를 봤다.
월급 십만 원만 더 주면 확실하게 애들 실력을 키워주겠단다.
그 딜이 성공하는 순간, 애들 표정이 안 좋았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사장인데.
“구성은 이 정도면 되는데, 아무래도 메뉴가 걱정이네.”
김밥과 라면은 더 이상 손댈 생각이 없었다.
이미 수차례 조리 과정을 변경했고, 수십 차례 먹어서 테스트까지 끝났다. 수백 번 단골손님들한테 나감으로써 의견까지 경청했던 것이다.
결론은 이건 이대로 가면 된다는 것!
그건 돈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파스타인데… 이게 참 애매하단 말이지.”
미처 몰랐는데, 지성분식 2호점 상권이 아닌 길 건너편에 의외로 파스타집이 많았다.
네 군데 정도가 있었는데, 평균 가격대가 9,000원에서 16,000원 정도였다. 그러니 경쟁이 될 법도 한데 이상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이건 팔면서 결정하자. 지금 고민해 봐야 답이 없으니까. 그다음으로 해야 할 건…….”
강형우는 하나씩 꼼꼼하게 기록을 했다.
이대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전의 일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구체적인 가이드가 있으면 좋았다.
그래야 빠른 수정이 가능하고 손님들한테 대응할 수 있었으니까.
***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무탈이 행복이란 말이 있었다.
정말 열흘 정도가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나갔다.
며칠에 한 번씩 속을 뒤집어 놨던 진상도 안 보였고, 사기꾼들의 방문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영업 시작하고 휴일이 두 번이나 지났다.
지성분식 매출은 여전했다. 평균 200만 원 정도가 무리 없이 올라왔던 것이다.
확실히 메뉴 추가로 고객층을 안정시킨 게 주효했다.
“그나저나 연락이 뜸하네?”
다들 바쁜 건지, 새해 결심이라도 한 건지 도통 전화가 오질 않았다.
특히 이강석과 백창호가 술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작년 마지막 날, 아침을 어마어마하게 먹고 점심에 외출을 했었다. 김복희 여사님을 모시고 용돈 탈탈 털어서 소불고깃집을 간 것이다.
그렇게 효도하나 했더니, 두 녀석이 더 많이 우걱우걱 먹었다. 그러다 과식으로 탈이 난 것이다.
정말 미련한 놈들 같으니라고.
어쨌든 연휴 내내 끙끙 앓다가 출근 전날 저녁에야 겨우 회복이 되었다.
그때 의사 님께서 말씀하시길, 평소에 술 많이 마셔서 그런 거라고 했다. 장 트러블의 원인이 과한 음주라는 것이다.
해서 한 달 정도는 조심하란다.
덕분에 강형우는 왕따 아닌 왕따인 상황이 됐다.
“간만에 형들하고 연락해 봐?”
창주 형은 장사하고 연애한다고 바빴고, 혁기 형네도 마찬가지였다. 덕수 형은, 소개팅 여자랑 잘되고 있는데 맨날 약속이 있단다.
“하아, 이때 아니면 못 노는데. 정작 술 마실 사람이 없네.”
이 사람들이 새해 결심을 금주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 보름이 됐을 때, 의외의 문자가 왔다.
이상분 여사 사망.
빈소: 강안 큰 병원 장례식장.
주소: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로 49X
문자를 받자마자 당황했다.
발신인이 현우 형이었으니까.
***
“와줘서 고맙다.”
현우 형이 웃으면서 이야기하는데, 괜히 마음이 아팠다.
그냥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며칠을 울었는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다.
강형우는 공지혜와 함께 향을 피우고 절하고 나왔다.
“형우야, 식사는?”
안내한 사람은 김창주였다. 정덕수, 이혁기와 함께 상주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다.
“저희는 먹고 왔어요.”
“그래? 그럼 저쪽 자리에서 간단하게 마시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예.”
강형우와 공지혜는 안쪽 자리에 먼저 앉았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절반 정도가 배산회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시장분들이었다.
거기에 친구로 보이는 이들 대여섯 정도가 전부였다.
강형우는 몇 번 자리를 옮기며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데, 공지혜 뒤쪽의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오늘 하루만 한다며? 내일이 출상 맞어?”
“어, 그라지. 어차피 친척도 없고, 올 사람들도 거의 다 왔는디 뭐 하러 더 해.”
그 말에 같은 테이블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도, 아들 하나는 잘 키웠제. 치매 석 년이면 효자도 돌아선다는디 오 년이나 살았잔혀.”
“진짜 참 효자여. 장사하면서 홀어머니 모시고 그래 고생했으니 앞으로 복받아야지. 아마, 이 씨가 그래서 간 거 같아.”
“어허! 이 아제가 상갓집에서 못할 말이 없네.”
“우리가 이 씨를 좀 봤나? 이십 년이 넘어. 이십 년이! 이 씨 성격이면 아들 발목 잡는다고 벌써 그랬을 건데. 그놈의 병이 뭔지.”
갑자기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어르신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많이 아쉬워하는 투였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강형우도 일부는 알고 있었다.
현우 형 부모님은 처음부터 통닭집을 한 게 아니었다.
시장 구석에서 소주방을 하면서 이것저것 팔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손님들이 제안을 했단다. 이 동네 통닭집이 없으니 한번 해보면 괜찮을 거라고.
열흘 정도 고민하던 아버지는 그 길로 거제시장 통닭집을 찾아갔다. 부탁하고 사정을 해서 몇 달 공짜로 일하면서 배워 왔다는 것이다.
그게 망미시장 통닭집의 시작이었다.
“하여간 그때가 좋았지. 우리가 많이 팔아준 것도 있지만, 자네 부인, 이 씨가 소개시켜 줬잖어.”
“허이구, 남 말하네. 이 씨가 외상 안 받았으면 넌 장가도 못 갔어. 미친놈아. 선보는 날 통닭집 데려오는 병신이 어디 있냐?”
“그때는 돈이 없었으니까 그랬지. 선은 잡혔지. 사장은 월급 떼먹고 도망갔지. 울 엄니는 마지막 기회라고 꼭 잡으라고 하지. 그러니, 생각나는 집이 거기밖에 없더라고.”
어르신들은 웃으면서, 농담을 하면서, 과하지 않게 추억을 떠들어댔다.
그건 강형우가 모르는, 누군가의 역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