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해 뜬다
“형, 뭐 해요?”
-어! 형우야. 나 데이트 중이다.
창주 형 입에서 보기 드물게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 중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딘데요?”
-어. 여기 기장.
“헐. 어쩌다가 거기까지.”
-어, 지우랑 일출 같이 보기로 해서. 여기서 대충 밤새우기로 했다.
어라? 지우 누나하고 단둘이 1박 2일?
강형우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김창주가 선수 쳤다.
-우리 회 나왔거든. 내일 통화하자.
뚜뚜뚜뚜~
그렇게 첫 번째 통화가 끝났다.
이후 강형우는 겸사겸사 안부도 전할 겸 모임에 나올 만한 사람들에게 통화를 했다.
예상대로 혁기 형은 가족 모임 중이었고 현우 형은 여전히 통화가 안 되었다.
주혁 형은 형수님과 함께 회사 망년회 중이었고, 분석이 형은 이런 날 나오면 형수한테 맞아 죽어서 패스했다.
솔직히 부동산 삼촌이나 철물점 사장님을 부르는 건 무리였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사람이 정육점 정재일과 친구 이지애, 그리고 파스타집 정병수였다.
하지만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알콩달콩 커플과 예비부부를 부를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기 있는 전부가 솔로였으니까.
가장 놀라운 건, 덕수 형이었다.
“예에? 소개팅요?”
-어. 그게 다정이가 해준 건데, 전에 일하던 가게에서 알던 친한 언니가 있대.
그러면서 설명하는데, 요즘에도 연락하는 몇 안 되는 지인이란다.
하긴 이제 임신 7개월인가 됐으니 사람이 그리울 때이기는 하지.
게다가 정덕수 형은 김민석과 윤다정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소개팅 1순위는 덕수 형일 수밖에.
강형우는 진심으로 말했다.
“형! 잘해봐요.”
-그래, 고맙다. 너도 파이팅하고.
대체 뭘 파이팅하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됐으면 좋겠다.
통화를 끊고 10초 뒤에 카오톡으로 사진이 왔다.
하얀 줄무늬 백바지에 갈색 가죽 재킷을 입은 산적이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다.
그 밑에 ‘괜찮냐?’ 라고 와서 바로 톡을 보내줬다.
걷어차이기는 괜찮네요, 라고.
곧 다시 전화가 와서 적당한 코트 입고 나가라고 조언해 줬다.
“하아, 다들 봄날이네.”
누가 그러더라, 겨울에 연애를 시작하면 누구보다 오래 간다고.
그건 추워서 딱 붙어 있다 보니 빨리 정이 들어서 그런 거란다. 그래서 이 겨울에 서로 어떻게든 만나려고 난리라는 것이다.
글쎄다.
뭐, 겪어봐야 알지.
강형우는 한숨을 내쉰 뒤, 멤버들을 쳐다봤다.
홍성구는 뭐가 좋은지 헤헤헤 하고 웃고 있었다.
제대하고 처음으로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니 호구가 되어도 좋을 수밖에.
덕분에 인형 뽑기 기계와 펀칭머신에 돈 만 원을 날렸다.
참고로 펀칭머신 1위는 이은주였다. 백오십도 안 되는 키에 무지막지한 괴력을 가진 것이다.
그걸 보고 놀라 하는데 공지혜가 물었다.
“오빠, 근데 누구 온대요?”
“아니, 다들 바쁘데.”
“그럼 태구 오빠는요? 연희 언니랑 오면 딱 좋은데.”
“걔들은… 아니다. 전화 한번 해볼게.”
역시나 바퀴벌레 커플은 두말없이 OK였다. 이걸 예상했기에 마지막까지 주저한 것이다.
사실, 급하게 전화를 한 건 이유가 있었다.
이강석과 백창호가 빠진 게 문제였다. 사람은 7인인데 여유롭게 8인으로 예약을 해놨던 것이다.
횟집도, 호프집도 그랬고, 새벽까지 버틸 수 있게 예약한 노래방 주점도 큰 방으로 잡아놨던 거다.
무엇보다 오늘은 연말이었다.
장사꾼 마음은 장사하는 사람이 안다고, 두 테이블은 잡아야 여유로운데 다섯 명이서 그러기는 조금 애매했던 것이다.
“끄응.”
결국 예약 잡고 알려준 가게로 홍태구와 오연희가 왔다. 밑반찬이 깔리고 막 회가 나올 즈음이었다.
하여간 타이밍 좋은 커플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다들 먹고 마시고 하고 있는데, 어느새 하늘이 깜깜해졌다.
그때 홍태구가 사인을 했다. 나가서 한 대 피고 오잖다.
건물 같은 층의 흡연부스로 가니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그 한쪽에서 담배를 무는데 홍태구가 그랬다.
“야, 너 뭐 하냐?”
“뭘?”
“야. 내일이면 우리 스물아홉이야. 이십 대의 마지막이라고.”
“그런데?”
“너 연애 안 해? 아직도 미진이 못 잊어서 그러는 거냐고?”
홍태구의 재촉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관심 밖으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미진이가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알려준 게 홍태구 아니던가?
“미진이 때문인 건 아니고,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까 연애 생각이 안 나더라.”
천경 어르신이 마흔까지는 어렵다고 했던 것도 있었다.
근데 그건 솔직히 구라 같았다.
하지만 억지로 연애하기 위해 여자를 만난다든가 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홍태구가 갑자기 턱을 후려 깠다.
세게 친 건 아니고 툭 쳤는데, 살짝 아플 정도였다.
“정신 차려, 병신아. 너만 모르고 있어.”
“뭘?”
“아오, 입으로 말해줘야 아냐?”
“아니,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아냐? 내가 무슨 관심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답답해 죽을 것 같은데, 홍태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펑 터뜨렸다.
“눈치 없는 놈아. 지혜가 너 좋아하잖아!”
***
분명히 술을 마시기는 했는데, 머리가 머엉했다.
취한 건 아니었다.
그냥 홍태구가 한 말이 자꾸 머릿속을 떠돌 뿐이었다.
공지혜가 날 좋아한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었다.
솔직히 나도 좋아하고 의존하는 것도 많았으며 항상 옆에 있으니 많이 편했다.
하지만 남녀 관계로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여동생이었다.
강영지와 어릴 때부터 함께했고, 꾸준히 십오 년 넘게 봤으며 어쩌다 보니 우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성분식의 창업공신이었다. 모두가 사정이 생겨서 떠났음에도 항상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긴… 하네.”
근데 홍태구의 말대로 날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상황이 그래서, 사정이 그래서 함께했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느덧 횟집을 떠날 때가 됐다. 상이 텅텅 빈 것이다.
강형우는 모두가 2차를 가기 위해 움직이자 금방 가겠다고 하고 잠시 옆으로 빠졌다. 파도치는 백사장을 잠시나마 바라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공지혜가 다가왔다.
“오빠, 뭐 해요?”
“엉? 그냥 간만에… 바다에 왔는데… 보고 싶어서.”
“헐, 어제도 왔는데요?”
“어? 어… 그러네?”
강형우는 머리를 긁적거린 뒤, 고개를 돌렸다.
공지혜는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보는데, 흐음, 아직은 모르겠다.
너무 익숙해서인지, 내가 별생각이 없어서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장백호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도 사람인지라 사랑도 있었고 아끼는 사람들을 많이 잃기도 했다. 인질이 되어 자결한 이도 적지 않았고, 가족 같던 이들이 대신해서 죽기도 했었다.
그 모든 과정을 겪고 깨달음을 얻었다.
아픔은 가슴에 더욱 깊이 묻어야 한다는 걸!
어쩌면 그래서 내가 둔감한 건지도 몰랐다.
장사하면서 수많은 진상 손님들을 만났으면서도 정신이 유지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멘붕을 넘어서 정신 파탄에 이를 상황을 겪었음에도 버티고 이겨냈다.
어쩌면 신원이 형이 나를 보고 안정감을 느낀다는 게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아오, 그게 아닌데.”
“왜요?”
“아니, 그냥.”
강형우는 대충 둘러댔지만, 어느 정도는 확신이 들었다.
장백호의 기억 때문에 정신력이 강해진 건 맞았다.
동시에 감정 일부가 무뎌진 거다.
처음에 여신처럼 느꼈던 강신애도, 불과 십여 분 만에 보통 여자 사람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공지혜는 이뻤다.
한창 쪘을 때는, 별명이 팅팅 불은 한가인이었다. 그만큼 닮았었고 그때도 나름 아저씨 손님들한테는 인기가 무척 많았었다.
이후 꾸준한 다이어트 덕택에 과거의 미모를 찾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몸무게 앞자리 숫자가 달라졌다고 한 이후 몇몇 사내새끼들이 번호를 물어봤던 거다.
당연히 오빠이자 사장으로서 중간에 끼어들어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게 질투였나?
솔직히 모르겠다.
“뭘 고민하고 그래요? 오빠답지 않게?”
“그게… 나다운 게 뭔데?”
“그야 뭐, 오빠는 생각 많이 안 하는 스타일이잖아요. 일단 해보고, 안되면 또 하고, 될 때까지 계속하고.”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무를 뽑았으면 이빨로 갈기라도… 아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따지면 진짜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타입이긴 했다.
“내가 그렇게 미련했나?”
“미련하고 노력하고는 다른 거죠. 애초에 생각만 하고 꼼짝도 안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거 좋은 말이지?”
공지혜는 대답 없이 피식 웃기만 했다.
하긴, 이런 걸로 고민해 봐야 뭐 하겠는가? 아직 내 마음도 정확히 모르는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공지혜가 팔짱을 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다르기는 했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마셨다.
다들 미친 듯 고함을 내질렀고 강형우는 노래방 스피커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그만큼 다들 미친 듯이 놀았다.
그러다 12시 땡 하니까 갑자기 침울해지더라.
“이제 이십 대의 마지막이네.”
하필 홍태구가 그 말을 꺼내자 오연희가 갑자기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책임질 거야, 말 거야.”
“뭐?”
“이럴 때 남자가 딱 부러지게 말하면 좋잖아. 고백도 내가 먼저 했는데, 프러포즈도 내가 해야 해?”
순간, 노래방 분위기가 묘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은주와 홍성구, 정은혜는 마냥 신나 하면서 박수를 쳤다.
반대로 강형우와 공지혜는 조바심이 났다.
최근 홍태구가 그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몇 번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최근 카페 장사는 나름 괜찮게 되고 있었다. 돈가스 메뉴를 추가한 것도 있지만, 홍태구가 노력해서 많은 것을 바꿨던 것이다.
문제는 연희 어머니였다. 이참에 둘이 결혼해서 가게를 맡아주면 안 되겠냐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홍태구는 작가의 꿈을 버려야 했다.
결혼하면 한 집안의 가장이 되니까.
때문에 이전처럼 프리로 일하면서 생활할 수는 없었다.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거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까 보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렸다.
“그래. 같이 살자.”
“진짜지?”
“그럼 가짜겠냐?”
그러면서 이 무시무시한 새끼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있는 건 혼인 신고서였다.
무슨 사직서 들고 다니는 직장인도 아니고, 혼인 신고서를 가지고 다녔다니.
“헐~ 대박!”
홍성구의 입에서 진심이 나왔다. 그런데 홍태구는 한술 더 떴다.
“자! 내 건 다 썼고, 도장도 다 찍어놨어. 이제 너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
그러면서 내미니, 어떤 여자가 안 받겠는가?
그 순간 오연희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홍태구를 끌어안는데,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쩝. 솔직히 부럽기는 하네그려.
***
“후우, 하아~”
차가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강형우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광안리 백사장에는 새해 첫 일출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단순히 해 뜨는 걸 보려는 게 아니라, 새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리라.
그중에 홍태구와 오연희가 있었고, 그걸 홍성구가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은주는 뭔가를 결심한 듯 밝아오는 하늘을 노려봤다.
반대로 정은혜는 금방이라도 잠들 듯 반쯤 졸고 있었다.
마침 고개를 돌리니 공지혜가 보였다. 기도하듯 두 손을 붙이고 있었는데 뭔가 간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해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