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이제 내 가게구나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부동산 삼촌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강형우는, 미리 언질을 받았다.
최근 이 일대에 소형 빌라와 오피스텔이 많이 들어서서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조금 안 동네이긴 하지만 인구가 늘어 수요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권리금이 조금 세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요 아래 집 더하기 마트 주변으로 상권이 더 생기고 있었고, 광안리 쪽에서도 충분히 접근이 가능한 위치란다.
강형우도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었다.
수영역과 광안역 중간 위치.
물론 광안리 상권과는 다르지만, 지역 주민들이 충분히 오고 갈 만한 위치였다. 근처에 광안시장이 있었고 상권도 충분히 발달해 있었으니까.
“그럼 잘 부탁하네.”
강학희가 웃으며 손을 내밀자, 강형우도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그렇게 말한 뒤 강학희가 일어났다. 그리고 강신원의 어깨를 두드린 후에야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제야 강신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사실 우리 아버지는 확실하거든. 할래 말래? 싫으면 하지 마라. 딱 그러는 스타일이야.”
“정말 그러네요.”
“하지만 확실히 할 사람한테는 잘해줘. 지금 같이 일하는 삼촌들도 대부분 그런 경우거든.”
의지만 있다면 돈은 문제가 안 된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면서 열심히만 일하면 많은 편의를 봐준다는 것이다.
그 덕에 사기도 몇 번 당하고 돈도 떼이고 했지만 지금까지 소신을 지켰다고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 아버지한테 신세 안 진 사람이 없다는 거다.
결국 남는 건 사람이라나?
사실 강형우도 좀 애매한 케이스이긴 했다. 서둘 일은 아니었는데 강학희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일이 생긴 것이다.
보증금 삼천만 원에 권리금도 삼천이었다.
월세 백만 원이면 이전 지성분식보다는 두 배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문제는 빠듯한 계약 기간이었다.
있는 거 탈탈 터니 딱 천만 원이 모자랐다.
여유 있게 이천 정도를 대출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철진 기획 팀장 이해일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언제든 들러달라고 했다.
그렇게 확답을 받았는데, 그 이야기가 강학희한테 전해진 모양이었다.
범인은 당연히 강신원이었다.
문제는, 강학희의 말이었다. 돈 모자라 빚내서 장사할 사람이면 안 받겠단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각해 보니, 빚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보증금보다 적은 금액이지만 괜한 문제가 생기는 걸 싫어했던 것이다.
어쩌나 하고 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모자란 돈은 버는 대로 나눠서 내란다.
하는 거 보니 장사 망할 스타일은 아니라면서 언제고 되는 대로 갚으라는 거다.
들어보니 강신원이 중간에서 말을 좋게 해준 모양이었다.
하긴, 열흘을 옆에 붙어서 일을 가르쳤으니 얼마나 힘들게 노력하는 지를 알겠지.
무엇보다, 지은 죄가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지.”
강신원은 그렇게 말한 뒤, 부동산 삼촌하고도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어떻게 할래?”
“뭘요?”
“난 집에 올라가서 식사할 건데, 같이 할래?”
강신원의 제안은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겨우 집주인하고 계약 마무리했는데, 또 집주인 얼굴을 보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가게 가봐야 해요.”
“아! 한참 바쁠 시간이긴 하네. 그럼 비상키 간수 잘하고 비밀번호는 알지?”
“그럼요.”
851205, 입구 도어락의 비번은 바로 강신애의 생년월일이었다.
이제 강신원도 가고 부동산 삼촌만 남았다.
나중에 들었는데 사실 중간에 안 됐을 때 그대로 끝날 뻔했다.
그걸 몇 번이나 연락해서 끈질기게 설득한 게 부동산 삼촌이었다. 그 덕에 강학희가 지성분식을 온 것이고, 여기까지 진행된 것이다.
“형우야, 알지?”
“당연하죠.”
강형우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증금에 월세에 이것저것 다 해서 0.9% 적용하고, 권리금에 대한 것까지 치면 대충 이삼백만 원 선이란다.
하지만 아는 사이에 그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야박하다면서 깔끔하게 백만 원으로 퉁 치기로 했다.
대신 술 한잔 사고, 앞으로 지인들도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부동산 삼촌은 피식 웃으며 먼저 가게를 나갔다. 이런 경험이 적지 않기에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강형우는 가게를 한 번 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제 내 가게구나.”
***
2012년 12월 29일은 토요일이다.
30일이 쉬는 날인데, 1월 1일이 화요일이라 다음 날까지 내리 4일을 쉬기로 했다.
강형우는 계약을 마치고 지성분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따로 회식은 하지 않고, 31일에 모여 망년회만 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아니, 새벽이 되자 눈이 번쩍 떠졌다.
습관적으로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친 뒤 밖으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 오늘 쉬는 날이지.”
이상하게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도 쉬는 날에 지성분식에 나갔다. 주중에 못다 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평소에 확인 못 한 것들을 체크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늦잠을 자는 건 한 달에 두 번.
딱 회식을 할 때뿐이었다.
다들 주 육 일의 강행군이기에 그때마다 화합을 위해 새벽까지 당해(?)줘야 했다.
“흐음, 어쩐다?”
연휴를 생각해 재료도 적게 준비했고, 그 때문에 일찍 마쳤다.
얼려놓은 육수와 숙성 중인 맛간장을 제외하고 어지간한 식자재 대부분을 소모시킨 상황. 게다가 일찍 마치면서 청소까지 마무리 지었기에 오늘은 정말 할 일이 없었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조금은 기운이 빠졌다.
“좀 더 자도 됐을 텐데.”
아쉬웠지만 기왕 일어난 거 어쩌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강형우는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을 간단히 해결한 뒤, 자취방을 나섰다.
그런데 방향이 평소와 달랐다. 지하철역이 아닌 도시 고속도로 쪽으로 향한 것이다.
배화학교를 지나 천천히 내려가면서 굴다리를 아래를 건넜고 동네 골목길을 20여 분 정도를 걸어갔다. 그러자 수영초등학교 뒤편이 보였다.
“느긋하게 걸어서 이십오 분이라.”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어제 계약한 그곳이 나온다.
맞다.
강형우가 향한 곳은 카페 날개, 이제는 지성분식 2호점이 될 곳이었다.
도어록을 열고 들어가자 가게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면에 카운터와 그 너머의 주방이 보였다. 왼쪽으로 여섯 테이블이, 오른쪽에는 무려 열 테이블이 안쪽까지 쫙 늘어서 있었다.
벽에는 여러 장식들이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영화 소품급이었다.
그런 뒤, 주방과 화장실도 살폈고 뒤쪽 주차장과 연결된 통로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러면서 폰으로 사진을 찍고 최종적으로 수리하기로 한 걸 꼼꼼히 체크했다.
당연히 카페로 쓰던 거니 약간 손볼 필요가 있었다.
우선적으로, 한번 크게 당했기에 승압 공사와 시설 일부를 보수할 생각이었다. 또 화장실에 비데도 놓고 주방 동선을 고려해 일부 시설도 손을 봐야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을 이야기하니 강학희가 해주겠단다. 왜 쓸데없이 돈 주고 사람 쓰냐면서, 여기 공사쟁이가 있으니 그냥 맡기라는 것이다.
강원도 공사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내려오면 한 방에 처리해 주겠다나?
솔직히 부담스러웠지만, 무서워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제 건물주 님이 되는 셈이니까.
“하아~ 좋긴 좋구나.”
꿈에도 그리던 2호점 계약을 했다.
속이 시원하면서 동시에 불안했다. 어딘지 모를 갑갑함이 있는가 하면 벅찬 느낌까지 들었다.
이건 진짜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면 모를, 그럴 감정이었다.
내가, 이 정도로 성공했구나 하는 그런 거!
“하, 하하.”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진짜 지난 일 년 반, 하루 평균 네다섯 시간 정도 잤을 거다. 쉬는 날은 쉬는 날이 아니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일이 정말 많았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많았다.
자영업자 600만 시대!
장사는 정말 쉬운 게 아니었다.
작은 골목식당에 불과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음식 만들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하루하루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무엇보다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시작했음에도 부족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이건 누가 알려줘서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나가면서 깨달아야 하는 거였다.
솔직히 벌기야 많이 번다.
한 달에 최하 600만 원, 진짜 박 터지면 1,400만 원 가까이를 가져간다.
평균으로 잡으면 900에서 1,000만 원 사이였다.
그만큼 많이 벌지만, 나가는 것도 무지하게 많았고, 그 금액 이상으로 힘든 게 많았다.
사장 혼자 지고 가야 하는 의무와 외로움!
그건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공감받기도 어려웠다. 아무리 떠들어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거의 이 년을 일했다.
중간에 사고도 많이 났고, 어이없는 실수도 벌어졌다. 그러다 많은 사람들도 만나게 됐고 객기에 쓸데없는 짓까지 하고 말았다.
또, 초중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 다시 군대를 갔다 와 취직을 했다. 그 모든 시간을 합친 만큼 하루하루가 치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경험들은 좋은 자산이었다.
“꼭 새 출발 하는 기분이 드네.”
강형우는 카운터 옆의 의자에 앉았다.
폐가 찢어질 것처럼 길게 숨을 내쉬고 호흡을 멈췄다. 그렇게 몸속의 탁기를 남김없이 내뿜었다 싶을 때 다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단순한 숨쉬기였지만 머리가 맑아지고 복잡한 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피식 웃은 강형우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지금껏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2호점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건 적어도 실패는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
“이게 연휴가 맞나?”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이 생겼지만, 여유는 개뿔!
정말이지 바빠도 너무 바빴다.
쉬는 첫날은 분석이 형 집에 들려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러다 짐승 같은 조카들하고 놀아주게 됐는데, 정말 몸살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저녁은 간만에 가족들과 함께였다.
분위기는 딱 네 글자였다.
여인천하!
강영지와 공지혜가 이미 다 알아봤단다. 그래서 어머니 박혜숙을 모시고 광안리에서 킹크랩을 먹었고 후식으로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그 직후 피곤한 박혜숙을 택시 태워 보내고 다시 해운대로 넘어가 포장마차를 습격했다.
여기서 끝이면 좋으련만,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다시 수영 로터리로 넘어와 해물 뚝배기 집으로 향한 거다.
이 긴 과정에서 강형우가 한 건 카드 긁은 거 딱 하나였다.
그렇게 휴일 첫날을 보내고 둘째 날.
아침부터 집주인 마님 김복희 여사님께서 호출을 하셨다.
생일도 아닌데, 아주 한 상 거하게 차리셨다. 올 한해 우리 강석이 돌봐줘서 고맙다면서 백창호까지 불러서 먹을 요량으로 이것저것을 내왔던 것이다.
간만에 보는 소갈비에 미역국, 계란에 부친 소시지에 햄볶음까지 딱 애들이 좋아할 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콩나물 해장국이 참 정성스러웠다.
결국 강형우는 성의를 거절하지 못해 무려 밥을 세 공기나 먹고 말았다.
진짜, 먹기도 참 많이 먹었다.
분석이 형과 형수님께선 자주 안 온다면서 섭섭하다 하시며 억지로 먹였고, 강영지와 공지혜도 오늘 같은 날 먹어야 된다고 입에 음식물을 꾸역꾸역 집어넣어 줬다.
마지막으로 김복희 여사님까지도 좋아하시니 마지못해 쓸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후아, 고작 이틀인데 삼 키로나 쪘네.”
진짜 이렇게 멕이는 고문이라니.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저녁에 망년회 풀코스가 남아 있었다.
***
“헐~”
강형우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어제 킹크랩을 우적우적 씹던 공지혜가 맞나 싶었다.
미용실을 다녀왔는지 머리도 많이 바뀌었고 평소 보지 못한 짙은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게 공지혜뿐이면 모르겠는데, 정은혜도 한껏 꾸몄고 이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남자가 홍성구랑 나 둘뿐이라는 거였다.
이강석과 백창호는 점심에 뭘 잘못 먹었는지 배탈이 심하게 났다. 좀 괜찮아지면 나오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시체 상태라는 것이다.
결국 강형우는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