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각오는 당연히 해야죠
“험험.”
강형우는 애써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들 부다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화장도 안 하던 이은주와 정은혜가 갑자기 백을 찾았고, 순이 이모도 머리를 매만졌다.
그래도 내 편이 한 명은 있었다. 공지혜만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이미 한 번 봤으니 면역은 있겠지.
강형우가 박수를 두 번 치자 그제야 부산스러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자자, 다들 집중하세요. 제가 며칠 전에 말했다시피 당분간 여기서 일을 배울 겁니다. 연말까지 열흘 정도요.”
“오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시간이 됐으니까 일단 식사 준비부터 하죠.”
요즘은 오픈을 11시에 했다.
해서 10시 20분에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가진 뒤 영업을 시작했다.
강형우는 일단 강신원을 데리고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정순이 이모라고, 여기 지성분식 점장님이자 주방장님이에요.”
강형우의 소개에 강신원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순이 이모도 웃으며 악수를 하는데, 갑자기 눈이 하트로 바뀌었다.
“형우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누님~”
“예?”
“아, 누님이 아니라 누나네요. 그렇게 불러도 되죠? 순이 누나.”
“어, 어어. 그, 그렇게 해요.”
그 직후, 순이 이모 얼굴이 진짜 빨개졌다.
생각해 보니, 신원이 형이 서른넷이고 순이 이모가 마흔이었다.
그 정도 차이라면 누나라 불러도 이상하진 않겠지.
하지만 강형우는 그 말이 쉽게 나오는 게 정말 신기했다.
그렇게 순이 이모를 침몰시킨 신원이 형은, 백창호와 인사를 했고 또다시 좌절감을 주었다.
다시 오픈 주방으로 오니 불이 났다.
화르르르륵.
가스 화력을 얼마나 올린 건지 불쇼가 벌어졌다. 거의 천장 닥트 속까지 닿을 정도로 불길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범인은, 이은주였다.
마치 짬뽕을 하는 것 같았다.
커다란 튀김솥을 물수건으로 붙잡고, 끓는 기름에 각종 야채를 볶았던 것.
“아니, 왜?”
“점심으로 얼큰한 짬뽕이 땡겨서요.”
“그, 그래도 그렇지.”
더 뭐라 했다가 저 튀김솥으로 맞을 것 같았다. 그만큼 눈빛이 강렬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물론 며칠 사이에 중식을 몇 번 해주기는 했다.
자신 있는 요리라면서 찹쌀 탕수육과 오향장육, 시간 오래 걸린다는 동파육까지 집에서 가져왔다.
그때는 지성분식 식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노력하는구나 싶었다.
아! 그렇다면?
고개를 돌려보니 강신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불쇼를 보는 게 처음인 것처럼 신기하게 쳐다봤던 것이다.
역시 이은주도 여자였구나.
강형우는 약간 서운함을 느꼈다.
어쨌든 이은주가 짬뽕밥에 오신채 반찬까지 준비하는 사이, 대충 소개가 끝났다.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하는데, 모든 질문이 강신원에게 집중되었다.
당연히 나머지 남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솔직히 신원이 형이 잘생긴 건 맞았다. 게다가 키도 크고 길쭉길쭉한 데다가 나름 관리했는지 근육까지 적당했다.
여기까지면 좋았는데, 첫인상이 중요하다며 정장에 갈색 바바리코트까지 입고 왔었다.
그 옆에 서니, 내 꼴이 딱 그랬다.
왜 짬뽕 시키면 그 안에 둘둘 말린 거 있지 않는가?
맞다. 바로 오징어였다.
지성분식 여자들 전부가 그걸 보는 눈빛으로 나를 봤던 것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강석이 말했다.
“형, 저 모델 꿈 포기할래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에 백창호가 진심으로 어깨를 다독거려 줬다.
녀석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가 보다.
사실, 서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지혜 빼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더라.
***
“다시 말하지만, 주방에서는 무조건 제 말이 우선입니다.”
강형우는 훈련소 조교 모드로 말했다. 눈에 잔뜩 힘주고 목소리도 깔았으며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제가 스톱하면, 무조건 멈추세요.”
“어. 알았어.”
“그렇게 쉽게 알았다고 하면 안 돼요. 이건 정말 중요한 겁니다.”
강형우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리며 강조를 했다.
“그런데 음식 하다가 스톱 하면 망치는 거 아냐? 타면 어쩌려고.”
“그 음식 그냥 버려도 되요. 사람이 더 중요하지 그게 뭐라고.”
그렇게 말하니, 강신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입가가 미묘하게 떨렸던 것이다.
강형우는 최대한 친절하게 이유를 알려줬다.
일단 주방은 위험하다.
항상 끓는 물과 뜨거운 기름이 있다.
그걸 못 보고 어디 걸리거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평생을 후회하게 된다. 화상 흉터는 쉽게 치료되는 것도 아니었고, 극심한 장애를 남기기도 하니까.
또, 칼을 다루는 일이 많은 만큼 멈추라면 무조건 멈춰야 했다.
그게 습관이 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난다. 재료 썰다가 무심코 돌았는데, 실수로 사람이 썰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 외에도 주방에는 위험한 흉기들이 태반이었다.
볶음용 중화팬은 거의 무쇠였다. 날아오는 칼이나 화살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고, 그걸 증명하듯 무협 영화에서도 종종 그런 장면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무쇠 팬으로 머리 맞으면, 그냥 간다. 저승사자가 어깨동무하자고 찾아오는 거다.
그런 팬과 냄비들이 가득한 게 주방 위쪽의 선반이었다. 함부로 움직이다 실수라도 하면, 목숨 하나가 날아가는 것이다.
그랬기에 주방 동선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항상 조심해야 했다.
해서 멈추라면 무조건 멈춰야 한다.
강형우가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강신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그냥 무심하게 봤는데, 들어보니 그러네.”
“괜히 주방 일하는 사람들이 거친 게 아니에요. 다 이유가 있는 거죠.”
목숨이 오락가락하게 생겼으니 물불을 가리겠는가?
당연히 험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실수가 잦아지면 구타가 이어지는 거다.
아니면 그냥 내보내든가.
“그런데 신기해. 저 많은 그릇하고 접시, 냄비들이 다 쓰는 거라니.”
강신원은 벽 한쪽 빼곡히 쌓인 접시들을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내 일그러졌다.
“저거, 형이 설거지해야 할 접시들이죠.”
“전부?”
“예. 하루에 저만큼 나와요.”
강신원이 질린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당연히 강형우는 식기 세척기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다.
***
“생각보다 체력이 좋네.”
집에만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버티고 있었다. 체력 측정을 겸한 설거지도 무사히 끝냈고 이틀에 걸친 대청소까지 열정적이었다.
문제는, 그 외적인 거였다.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강형우와 공지혜를 제외하고, 편하게 이야기를 못했다. 백화점 근무 경험을 살려 영업용 미소로 대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어색함이 보였던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강신원을 일단 주방 보조로 넣었다.
매일 쓰는 야채를 손질한다든가, 그릇을 준다거나 튀기기 전의 돈가스를 나르는 등의 일을 시켰던 것이다.
일단 잘하기는 잘하는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이은주도 그렇고 정은혜나 순이 이모도 신원이 형 얼굴을 본다고 힐끔거리기 바빴던 것이다.
그러다 아차 하고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 직전에 끌고 나와서 불미스러운 일은 막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해서 강형우는 당분간 오픈 주방에 세우지 않기로 했다. 안쪽 주방에서 기초적인 훈련을 마무리한 뒤에야 보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다들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기하네.”
강신원은 우리고 있는 육수를 보면서 눈빛을 반짝거렸다.
각종 재료들이 바글바글 끓으며 거품이 났는데, 식초를 또르륵 떨어뜨리니 이내 덩어리들이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식초의 성분이 단백질을 뭉치게 하거든요. 이때 채망으로 찌꺼기 같은 걸 걸러주면 맛이 더 깔끔해져요.”
강형우는 설명하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수십 차례 육수 위의 불순물들을 걷어내더니 불을 줄였다.
“여기 뜨는 게 대부분 뼈 사이에 있는 핏물 같은 거예요. 깨끗이 씻어서 한 번 삶아도,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이렇게 오래 우리다 보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식초를 넣으면 맛이 변하는 거 아냐?”
정말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질문이었다.
그랬기에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형, 이게 몇 리터짜리 통일 것 같아요?”
“그, 글쎄. 대충 이십 리터?”
“보통 냉온수기에 꽂는 게 그 정도고요. 이거 오십 리터짜리 곰솥이예요. 큰 국자로 퍼다 붓지 않는 한 맛이 변할 일은 없어요.”
“하긴, 그렇겠네.”
강신원이 순순히 인정을 하자 강형우가 국자를 들었다.
“한번 마셔봐요.”
“어.”
작은 종지에 육수를 담아주자 강신원이 맛을 봤다.
“어때요?”
“좀 밍밍한 느낌? 그냥 연한 멸치 국수 맛이 나는데?”
“맞아요. 이 상태로 육수가 요만큼 줄 때까지 약한 불에 졸여야 하거든요.”
그러면서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이십 분?”
“아뇨. 두 시간.”
“헐. 진짜 오래 걸리네.”
강신원이 혀를 내두르는데, 강형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시작이거든요.”
그 말을 증명하듯, 강형우는 종일 움직였다.
멸치와 디포리, 각종 야채를 우린 육수에 홍합 육수를 붓고 간을 맞췄다. 그런 뒤, 채에 거르고 다시 물을 붓고 사골 육수를 더했다.
그 번거로운 과정에 강신원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진짜 양 많다. 이게 하루에 다 나가는 거야?”
“아뇨. 이건 사흘 치 오뎅 육수예요.”
“근데, 이거 너무 짠데?”
“그럴 수밖에 없죠. 농축을 시켜야 대량으로 보관이 가능하니까요.”
주방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쓰는 만큼의 육수를 그대로 놔두면 한없이 비좁아지는 것이다.
때문에 진하게 압축해서 보관하고 실사용 전에 물을 타서 농도를 맞추는 거다.
그런 설명에 강신원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의 작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장에 물을 동량으로 섞어서 대량으로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야채와 북어 대가리 등을 넣었는데, 또다시 물어보더라.
“아까는 농축한다면서… 왜 물을 부어?”
“그냥 간장에 재료 넣고 끓이면, 자체 염분이 많아서 맛이 녹아들지 않거든요. 또 장시간 졸여서 재료 속 맛을 다 빼내야 되는데 물 안 넣으면 타요.”
강형우는 커다란 국자로 끓고 있는 간장 통을 탕탕 두드렸다.
“여기 보이죠? 탄 거? 간장 자체가 걸쭉하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요. 양념 갈비 있잖아요. 그거 구워 먹을 때 수시로 판을 갈아주잖아요.”
“어? 어, 그러네.”
“예. 바로 그거예요. 고열에 양념이 타는 거죠. 그럼 쓴맛이 많이 남거든요. 하지만 물을 넉넉하게 부어서 졸이면 그걸 막을 수 있어요.”
강형우의 말이 끝나자 강신원은 잽싸게 메모했다.
이후 저녁까지 그 지루한 그런 과정이 이어졌다.
맛간장은 일주일에 한 번 끓이면 된다. 그걸 이틀 이상 냉장 숙성시켰다가 쓰는 것이다.
오뎅 육수는 사흘에 한 번, 그리고 그 베이스가 되는 사골 육수, 닭육수는 이틀에 한 번이었다. 파스타나 돈가스 소스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자주 끓여줘야 했던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강신원은 졸지에 커다란 중식도를 들게 되었다. 하다 하다 돈가스 고기까지 썰게 된 거다.
그렇게 열흘 간, 기초이자 기본 코스가 끝났다.
강신원의 성과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지성분식 식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간간이 영업용 미소가 아닌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휴우, 이제 끝났네.”
“끝은 무슨 끝이에요? 이제 시작이지. 진짜 본격적인 건 가르치지도 않았다고요.”
“뭐? 더 배울 게 남았다고?”
“저는 지금도 안 쉬고 공부하고 있거든요. 요리하는 거요. 평생 배워야 돼요.”
“헐.”
강신원이 질려 하는데, 강형우가 말했다.
“주방 일하겠다면 그 정도 각오는 당연히 해야죠.”
2012년 12월 29일.
네 사람이 모였다.
강형우와 강신원, 강학희, 그리고 부동산 삼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