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63화 한잔해
대한민국 국민 중에 라면 못 끓이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초등학생 정도만 돼도 라면 정도는 다 끓일 줄 알았다. 다만 불이 위험해서 시키지 않을 뿐이었다.
그만큼 라면은 대중화된 음식이었다.
그렇기에 특별한 맛을 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강형우는 그걸 가르쳐 주려 하고 있었다.
정덕수 형과 이야기한 것도 있었고, 그만큼 김민석이 기특하기도 해서였다.
“잘 봐.”
강형우는 제일 먼저 커다란 중식도를 꺼내, 사리면을 삼분의 일 지점을 쿵 찍었다.
“밥버거랑 먹으니까 한 개는 많고 반 개는 적더라고. 1인분에 딱 이 정도가 적당해.”
사리면 3분의 2, 그러니 가격은 200원 이하였다.
그걸 깊숙한 채망에 넣고 물이 펄펄 끓는 냄비에 담갔다.
“시간은 이 분 삼십 초.”
강형우는 타이머를 누르고 국그릇 아홉 개를 늘어놨다.
그런 뒤 집에서 가져온 락앤락 통을 땄다.
“이건 내가 나중에 따로 가르쳐 줄 테니까, 오늘은 이것만 기억해. 애들은 삼분의 이 티스푼, 어른들은 한 티스푼. 오케이?”
“예. 애들은 삼분의 이, 어른들은 한 스푼.”
김민석이 말을 따라하자 강형우는 씨익 웃었다.
동시에 방금 말한 대로 국그릇에 뻘건 양념장을 덜어 넣기 시작했다.
그다음 채망을 확인해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었고, 한 번 들어서 세게 털고 다시 냄비에 넣었다.
“중간에 한 번 흔들어줘야 더 빨리 익거든. 그리고 더 쫄깃해지고.”
강형우는 새벽부터 미리 만들어놓은 라면 국물을 국그릇에 부엇다.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니 약간 밍밍해 보이던 라면 국물이 조금씩 벌겋게 되면서 묘한 기름이 뜨기 시작했다.
띠띠, 띠띠, 띠띠.
타이머가 다 울리자 강형우는 채망을 건저 물을 털어냈다.
그러면서 면 한 가닥을 꺼내 맛을 봤다.
“이 정도면 거의 다 익었어.”
사리면의 특징이 그랬다. 국물이나 찌개에 넣어 먹기에 보통 라면보다 조금 얇았고, 성분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물을 잘 빨아들여 빨리 익었던 것이다.
이 면들을 국그릇에 담고 찬물을 소주 한 컵 정도를 부었다.
그런 뒤, 파 송송 뿌리고 데친 유부를 올리면 끝이었다.
“이거 내가면 될 거야.”
김민석이 시간을 보니, 불과 3분 남짓이었다. 그사이 라면 아홉 개를 동시에 끓여낸 것이다.
“우와, 대박!”
“내가 손이 좀 빠르지.”
강형우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데, 김민석이 엄지를 척 들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퍼지기 전에 가져가.”
“옙. 형님.”
김민석이 라면을 서둘러 가져갔다.
강형우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건 진짜 초 저렴 버전의 라면이었다. 단돈 천 원에 맞춰서 구상한 거라, 내용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인건비나 기타 비용을 포함하면 남는 것도 얼마 안 된다.
그럼에도 이걸 구상하고 만든 건 이유가 있었다.
사실 밥버거 자체만으로도 한 끼는 충분했다.
하지만 한창 성장기 아이들은 많이 먹는다. 게다가 밥버거로 부족해서 사발면까지 사 가지고 왔던 것이다.
원래 식당의 경우 외부음식 반입 금지였다.
대부분 그렇게 했는데, 애들은 일단 예외로 뒀다. 형님네 버거는 라면을 팔지 않았으니 허용해 줬던 것이다.
덕수 형이 말하길 사발면 매대도 가져다 놓을까 싶었지만, 공간이 부족해서 포기했단다.
어쨌든 애들이 먹고 가면, 사발면 쓰레기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럴 바에야 라면을 팔자라는 의견까지 나왔던 거다.
물론 그 말을 한 건 강형우였고.
덕분에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다고 하루 정도를 고민해야 했었다.
곧 라면을 갔다 주고 온 김민석이 다급히 물었다.
“형님. 근데 왜 찬물을 붓는 거죠?”
“원래 바로 삶아서 나가면 면이 계속 익고 있거든. 뜨거운 국물 영향도 있고, 하지만 찬물 조금 넣으면 퍼지는 속도가 늦어져.”
“그래요?”
“그리고, 후후 불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거야. 뜨거운 거 못 먹는 사람들도 많거든.”
그러면서 설명하길, 식당에서 가장 중요한 건 테이블 회전율이었다. 너무 뜨거운 음식을 내어가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손님이 빨리 먹고 나가니까.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바로 농도야.”
강형우는 가져온 락앤락 통을 열었다.
그런 뒤 젓가락으로 살짝 찍어서 김민석에게 내밀었다.
“맛 봐.”
김민석은 잠시 주저하더니 젓가락을 빨았다.
몇 초 후.
“후우~ 하아아~ 쓰으읍. 이거 후우, 진짜 맵네요.”
“그것밖에 못 느꼈어?”
“아오, 이건 너무 매운데요? 다른 맛은 모르겠어요.”
김민석이 찬물을 연거푸 들이켜자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너 매운 거 잘 먹는다면서?”
“아뇨. 이제 끊었습니다. 절대 안 먹어요.”
너무 단호하게 말하니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하긴, 불돈가스 먹고 그 난리를 쳤으니 쳐다보기도 싫겠지.
“이건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강형우는 재료를 찾아 곧바로 시범을 보였다.
깨끗이 씻은 대파를 일단 불에 태운다.
그걸 적당한 크기로 토막을 내고, 뿌리까지 커다란 냄비에 넣는다. 여기에 통마늘 한 줌과 채썬 양파를 넣고 식용유 반통을 부으면 끝이었다.
이걸 채소들이 거의 시커멓게 탈 때까지 끓이면 된다.
“이렇게 파 기름을 먼저 내는 거야. 그리고…….”
강형우는 커다란 믹싱볼에 매운 고춧가루를 부었다.
그런 뒤, 가져온 검은 가루를 뿌리고 후추도 제법 많이 집어넣었다.
“이건 볶은 멸치하고 표고 버섯을 갈은 거거든.”
“파 기름, 고춧가루에 멸치하고 버섯, 버섯, 버섯.”
김민석이 열심히 메모한다고 중얼거리는데, 영 기분이 이상했다.
찜찜한 건 기분 탓이겠지?
강형우는 잠시 기름이 식기를 기다리며 마늘과 생강을 갈아서 몇 수저를 더 했다.
“여기 위에 거름망을 대고, 이 파 기름을 붓는 거지. 근데 조심해야 한다.”
강형우가 기름을 붓자 살짝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직후 재빠르게 덮고 섞으니 조금 찐득한 양념장이 만들어졌다.
“한 번 맛봐봐.”
“이거… 무지 매울 것 같은데요?”
“아직은 괜찮거든?”
눈을 부릅뜨고 재촉하니, 김민석이 마지못해 맛을 봤다.
“어라? 생각보다 안 맵네요?”
“그래? 그럼 더 골고루 섞어봐. 아직 뭉친 데가 있는 모양이네.”
김민석은 잠시 멍해 있다가 순간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시키는 대로 섞고 다시 맛을 보더니, 갑자기 감전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허어. 맵다. 근데 진짜 매운맛밖에 안나요. 아까 형님이 준 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김민석이 폴짝거리자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숙성이 덜돼서 그런 거야. 이걸 냉장고에 넣고 이틀 있다가 쓰면 돼. 대충 이 정도 양이면, 백 그릇 정도는 나오겠다.”
“오오, 역시 형님. 대단하십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음식 제일 잘 만들어요.”
“내가?”
“예. 그러니까 TV에 나오는 쉐프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처럼 뚝딱 뚝딱 쉽게 만드는데 와아~ 진짜!”
이 녀석이 극찬을 하니 조금 쑥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하면 좋았을 텐데.
“그 쉐프들처럼 깊이 있고, 화려하고 엄청나지는 않은데, 그래도 좀 하는 사람처럼 보이더라고요. 라면 아홉 그릇을 그렇게 쉽게…….”
“뭐라고?”
“그러니까, 형님 실력이… 딱 음식 장사에 전문화되어 있다고나 할까? 마치 라면 끓이는 숙련된 로봇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녀석이 칭찬하는 것 맛이 아니었더라. 그냥 빠른 손놀림을 더 대단하게 봤던 것이다.
강형우는 살짝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너, 요즘 안 맞았지?”
***
“형우야, 고맙다.”
“에이~ 뭘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니가 좀 더 오래 있어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정덕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뭐예요?”
“그동안 일당이야. 많이는 못 넣었다.”
잡아보니 봉투가 의외로 얇았다. 그래서 부담 없이 주머니에 넣었는데, 덕수 형이 살짝 당황해했다.
“야! 안 보냐?”
“뭐, 적당히 넣었다면서요?”
“그래도 그렇지.”
반응이 조금 이상해서 확인해 봤는데, 십만 원 짜리 수표 다섯 장에 오만 원짜리 여섯 장이었다. 무려 팔십만 원이나 준 것이다.
“헐, 형 진짜 돈 많이 벌은 모양이네. 내가 며칠이나 일했다고 그래요.”
“며칠이 중요한 게 아니지. 타이밍이 딱 그랬잖아.”
정덕수는 새 가게 오픈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인테리어 업자가 공사를 잘못하는 바람에 다시 뜯어고쳤고, 디스플레이 장식까지 꼼꼼하게 신경 쓴다고 며칠 개고생했던 것이다.
김민석과 윤다정에게 본점을 맡겨놓고, 서포트만 한 게 그래서였다.
하지만 두 사람만으로는 일이 버겁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강형우에게 매달렸다.
여유 될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결국 강형우는 딱 칠 일을 채웠다.
거기에 단돈 천 원에 파는 라면을 만들어줬고, 따로 김민석에게 이것저것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그게 정덕수가 원하는 것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중간 지성분식에 나가는 바람에 열흘이나 걸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전부 니 덕이다. 내일 쉬는 날이니까, 오늘 다 같이 회식 하자.”
“소요? 돼지요?”
“형우, 니가 사면 소고 아니면 돼지지.”
강형우는 일부러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정덕수가 크게 웃더니 등을 팡팡 두드렸다.
“소 먹자. 소! 소처럼 미련하게 일했으니 소 먹어야지.”
“대신 한우요.”
순간 정덕수가 동상이 되어버렸다. 그대로 굳어버리더니 땀까지 삐질 흘리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정덕수가 손을 내밀었다.
“야. 그거 도로 내놔라.”
시원섭섭하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나름 즐거운 회식 자리였다.
덕수 형과 술잔을 기울인 뒤, 앞을 쳐다보니 김민석이 고기를 잘라서 윤다정의 밥그릇에 올리고 있었다.
확실히 놀라울 정도였다.
그 성질 더러운 지랄 맞은 커플이 이런 장면을 연출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딱히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직접 겪어보니 윤다정은 이름 그대로 정이 많았다.
형님네 버거를 감싸고 있던 알 수 없는 분위기가 거기서 시작된 것이다.
덕수 형만 애들을 아끼는 게 아니었다.
윤다정은 단골 학생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다.
어떤 시간에 들리는지, 뭘 주로 시키는지도 알고 있었고 때로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야기하면서 이런저런 메뉴들을 추천하기도 했었다.
이걸 케미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김민석과 윤다정이 만드는 알콩달콩한 분위기가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아까부터 좀 수상쩍었다.
“자! 중대 발표를 하겠다.”
정덕수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서 손을 들었다.
그러자 김민석이 각자의 잔에다 술을 따랐다.
“일단 내일 하루 쉬고, 며칠 동안 본점은 닫을 거야. 그러니 너희들도 이제 2호점, 아니, 이제 본점인 배산역점으로 나와라.”
“그럼 지금 가게는요?”
“그건 배산역점이 안정된 이후 다시 오픈할 거야.”
정덕수는 그렇게 말하며 김민석의 잔을 쳤다.
“그리고, 생각 많이 해봤는데… 원래 본점은 너희 둘이 맡아서 해줬으면 좋겠다.”
“예?”
“그러니까. 배산역점을 시작하면 지금처럼 바쁘지는 않을 것 같거든. 한 절반 정도가 줄지 싶은데… 그 정도면 두 사람이서 충분히 해나갈 수 있을 거라 본다.”
김민석과 윤다정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 못 하고 있었다.
그때 강형우가 씨익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미 덕수 형하고 약속된 행동이었다.
“너희들이 본점 사장이라는 거지.”
정덕수가 말하길, 월급 사장이 아니었다.
기본 최저 월급이 있는 대신 순수익의 일부를 나눠서 갖는 식으로 하잔다.
김민석은 얼떨떨했고, 윤다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그럼 제가 사장이 된 겁니까?”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된다고. 뭐, 아직 실감하진 못하겠지만,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어.”
정덕수는 그렇게 선을 긋고는 잔을 들었다.
“자, 오늘 같은 날은 마셔야지.”
“아… 예.”
김민석이 다급히 잔을 들고 짠을 쳤다. 그리곤 신나게 마신 뒤, 윤다정을 쳐다봤다.
“야~ 한잔해.”
“난 사이다나 마실래.”
“에이, 한잔해야지. 이 주에 한 번 하는 회식인데.”
김민석이 자꾸 권하는데, 윤다정은 끝까지 거절했다.
평소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민석아, 싫다는데 계속 권하는 건 아니다.”
“아니~ 형님, 얘 술 잘 마셔요. 소주 다섯 병은 거뜬하다고요.”
김민석이 웃으면서 술을 따르더니 또다시 윤다정 앞에 놓았다.
“야아~ 마시라니까. 괜찮아. 오늘은 내가 덜 마시면 된다고.”
윤다정이 표정이 흔들렸다.
미묘한 갈등 같은 게 보였는데, 강형우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날 무척 고민하게 만들었던 누나가 저런 적이 있었다. 여섯 살 연상으로, 분석이 형 여동생이었는데 저 일 이후로 한동안 서먹해졌던 것이다.
강형우는 그때가 떠올라서 다급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