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62화 저 잘하죠
“대체 뭘까?”
강형우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이번엔 새벽에 문을 열 때에 맞춰서 나왔다.
이틀을 해보니 최소한의 시스템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하는 것 밥 짓는 거였다. 그런데 업그레이드가 되면서 시작부터가 조금 달랐다.
김민석이 제일 먼저 쌀 포대를 가져왔다.
근데, 열어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민석아, 쌀이 왜 이래?”
“아! 그거 현미예요. 부전시장에서 받아온 건데, 조금 거칠죠?”
“아니, 거친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최소 한 시간 이상은 불려야 밥이 될 정도였다.
색부터가 짙은 갈색이라 논에서 바로 털어온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걸로 밥을 한다고?”
“아! 그게 아니라… 큭큭, 형님도 이건 몰랐나 보네요?”
다른 사람도 아닌 김민석이 킥킥거리는데,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그냥 웃는 건데도 왜 비웃음처럼 느껴지는지.
아직도 분노조절 장애를 일으키는 유전 인자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저희 이거 정미해서 써요. 이쪽으로…….”
김민석이 쌀 포대를 들고 뒤쪽 창고로 가는데, 거기 초등학생 크기의 기계가 있었다.
“이게 쌀 도정기예요. 덕수 형님이 중고로 백오십 넘게 줬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도정기라…….”
강형우는 투박하게 생긴 기계를 유심히 살폈다.
조작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위쪽의 뚜껑을 열어 현미를 붓고, 버튼 한 번 누르면 끝이었다.
촤르르륵, 쏴르르륵.
소리가 이어지고 잠시 기다리더니 조용해졌다.
김민석은 아래쪽 서랍을 몇 번 흔든 뒤 빼내었다. 거기에 껍질이 벗겨진 깨끗한 백미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도정 백미거든요.”
“나도 알거든.”
내 밥상에서 일할 때 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도정해 온 쌀로 밥은 쪄봤지만 직접 껍질을 벗기는 건 보지 못했다.
자재부에서 정미 처리를 다 해서 조리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확실히 좋은 선택이긴 해.”
기본적으로 쌀은 과일하고 비슷했다.
껍질을 벗기면 그때부터 산패가 시작되는데 반나절이면 영양 세포가 조금씩 뭉그러진다. 그리고 이 주가 지나면 수분과 영양소가 줄어들면서 산성화 현상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도정해서 오래 둔 쌀은 그냥 탄수화물 덩어리가 된다는 거다.
때문에 지성분식에서는 쌀을 오래 비축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부전시장 일방통행로 쪽의 정미소를 찾아가 도정한 쌀을 받아 썼던 것이다.
보통 20㎏짜리 다섯 포대 이상 사면 정미는 공짜였다.
소규모로도 파는데, 가격은 더 비싸지만 확실히 돈값을 했다.
밥을 짓고 나면 향부터 달랐으니까.
게다가 영양소가 빠지지 않아 먹고 나면 훨씬 든든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는가?
분명 밥을 많이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허전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무려 두 공기나 먹었는데도 금방 배가 꺼지기도 했다.
그게 다 오래된 묵은 쌀로 밥을 해서 그런 거였다.
진짜 필요한 영양소가 부족하니 몸이 그걸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군대였다.
희한하게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밥을 산처럼 쌓아서 먹었는데도 두 시간이 채 안 가는 거다.
“덕수 형님이 그러던데요. 쌀은 바로 깎아서 먹는 게 제일 맛있데요.”
“나도 알지. 그러고 보면 꽤나 좋은 방식이네.”
지금은 햄버거보다 밥버거가 몇 배나 많이 나갔다.
밥버거의 메인은 당연히 밥이 아니겠는가?
정덕수는 그 핵심을 파악했다.
밥의 맛과 영양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 도정기를 들인 게 분명했다.
이 디테일한 작은 차이가 바로 경쟁력이었다.
갓 도정한 쌀로 지은 밥, 그걸로 만든 밥버거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질 테니까.
강형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김민석이 촐싹거렸다.
“근데 형님, 지성분식에는 이런 거 없잖아요.”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간 표정을 보니, 지금 가게 자랑하는 건지 날 놀리려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긴, 안 맞은 지 오래됐으니 기어오를 만도 하지.
하지만 이제는 여유가 있어 주먹부터 날아가진 않았다.
“내일부터 있을 거야.”
“예? 바로 사려고요?”
“생각해 보니까, 하나 장만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아침마다 도정하려면 번거롭긴 하겠지만, 이 정도 수고는 일도 아니지.”
강형우가 당당하게 대응하니, 김민석은 약간 풀이 죽은 듯 보였다.
“그럼 제가 밥 짓는 거 보여 드릴게요.”
그러면서 쌀을 들고 가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 김민석은 잘 모르나 보다. 이 방식을 가르친 게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쨌든 나름 열심히 하는데 조금 달라진 건 있었다.
밥물을 만드는 데 다시마를 좀 더 많이 넣었다. 그리고 강형우가 하는 것보다 오래 우렸는데, 곧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로 도정한 쌀 때문이었다.
쌀알 자체가 탄탄하고 영양과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어서 쉽게 색이 변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오래 놔둬도 괜찮았던 것이다.
“쌀을 깔고요. 배춧잎을 올리고, 또 쌀을…….”
그러면서 뭐가 좋고, 뭐가 어떻고 이야기하는데 일단은 듣는 척은 해줬다.
열심히 하는 게 기특해서이기도 했고, 공부도 많이 한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이렇게 지은 밥에 양념을 하고, 다시 밥통에 넣으면 끝이었다.
“이번에는 국물인데요.”
아침에는 밥버거가 50에서 80개 사이로 팔린다고 했다.
점심, 저녁 장사하고 다른 점은 상당수가 세트를 주문한다는 것이다.
그건 계란말이와 개운한 라면 국물 때문이었다.
“일단 여기 통 하나 가득 물을 붓고요.”
김민석은 제일 먼저 3,000원짜리 대용량 라면스프 두 봉지를 넣었다. 여기에 양파, 대파, 마늘, 북어대가리를 정해진 양대로 넣고 불을 올렸던 것이다.
“한 시간 정도만 우리면 됩니다.”
그러면서 작은 망을 따로 집어넣었는데, 그 안에 매운 고추가 열 개 정도 들어 있었다.
방식은 아주 간단하지만, 이게 무려 100인분이었다. 이렇게 하면 약간 순하면서도 끝이 매콤한 찐라면 국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에 삶아서 데친 유부를 채 썰어서 준비하면 끝난다.
“이제 계란말이만 하면 끝입니다.”
김민석은 자랑하려는 듯 열심히 시범을 보였다.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믹싱볼에 양파 두 개를 다져서 넣고, 당근, 대파까지 잘게 잘라서 투입했다. 여기에 계란 세 판을 채에 걸러서 넣고, 우유와 물을 적당히 넣었다.
여기에 소금과 설탕을 듬뿍 넣고 식초를 또르륵 부은 뒤 휘휘 저었다.
역시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팬에 한 국자씩 떠서 마는 데, 여덟 겹 정도로 마는 데 어째 한 장도 찢어지는 게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오 분도 안 돼서 한 개씩 뚝딱 만드는데 놀랍기까지 했다.
살짝 감탄하는데, 김민석이 씨익 웃었다.
“형님, 저 잘하죠?”
차마 욕은 할 수 없어서 등짝을 가볍게 쳤다.
김민석이 아프다고 낑낑거리는데, 강형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잘한다. 이 새끼야.”
***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사흘을 더 출근했다.
원래 예정보다 며칠 오버가 됐는데, 중간에 하루는 지성분식에 들렸다.
일단 도정기부터 들여놨다.
처음에는 굳이 필요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가는 양이 제법 되니 한번 사서 시험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 평균 40㎏ 한 포대 이상 나가는데, 대충 450에서 500인분 정도였으니까.
가격은 무려 220만 원이었다.
처음에는 저렴한 가정용 제품을 확인해 봤는데 쌀 깎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더라. 결국 업소용 중에서 적당한 걸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쌀집 아저씨가 이걸 추천했던 것이다.
확실히 쌀을 바로 깎아서 밥을 지으니 좀 더 꼬들꼬들하고 향이 더 좋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배가 더 빵빵하다는 느낌도 들었고.
다행인 건, 시행착오가 거의 없었다는 거다.
형님네 버거에서 몇 번 지어봐서 밥물 양만 맞추면 되었으니까.
강형우는 그걸 공지혜한테 가르쳐줬다. 그리고 다시 형님네 버거로 출근했다.
“왜 옮기려는지 알겠네.”
후다닥 한 끼를 때우려는 듯 아침부터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테이블이 많지 않아 다들 합석해서 먹는 분위기였다.
그러다보니 시장 바닥 같은 어수선함이 느껴졌다.
덕수 형 입장에서는 그게 미안했겠지.
가만히 지켜보는데, 윤다정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청소를 하면서 몇 번이나 자리가 좁아서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고, 며칠 뒤 길가에 2호점이 오픈한다는 홍보까지 빼놓지 않았다.
확실히 일 잘하는 걸 보니, 괜히 김민석이 괘씸해졌다.
어디서 저런 참한 처자를 꼬셨는지…….
“우리 다정이 예쁘죠?”
“와, 깜짝이야! 야. 너는 사람 좀 놀래키지 마라.”
“왜요?”
“갑자기 대머리가 불쑥 튀어나오는데 누가 안 놀라냐?”
강형우가 투덜거리자 김민석은 씨익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이 정도는 해줘야 임팩트가 있죠.”
“됐고, 재료 떨어진 거나 체크해서 덕수 형한테 전화해 줘. 슬슬 장보러 나갈 때니까.”
“옙. 형님.”
김민석이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강형우는 천천히 손님들을 살폈다.
대부분 밥버거 세트를 먹고 있었다.
안에서 먹고 갈 때는 포장지에 싸지 않고 그냥 접시에 나갔다.
그걸 숟가락으로 잘라서 먹고, 라면 국물을 호루룹 마시는데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들 맛보다는 서둘러 배를 채우려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강형우가 물끄러미 지켜보는 사이 새벽출근 손님들이 거의 빠졌다.
시간은 7시가 조금 넘은 상황.
그때 윤다정이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이제 악동들이 올 시간이었다.
“민석아, 전화했냐?”
“예. 덕수 형님이 장만 보고 금방 오신대요.”
“그럼 체인지.”
강형우가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고, 김민석이 바깥의 조리대로 나왔다.
미리미리 밥버거를 세팅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애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는데 다들 초등학생들이었다.
제일 큰 애가 6학년 김상수였고, 그 밑으로 상재, 상우, 상진이였다. 그다음은 상재와 상우 친구들이었는데, 얘들도 무려 다섯이나 됐다.
이 애들은 부모들은 다들 맞벌이를 했다. 그래서 아침 굶고 가기가 일수였는데, 덕수 형이 그게 안타까워서 하나씩 맛보라고 주면서 단골이 됐던 것이다.
그러다 한번 시비가 붙었단다.
왜 애들 꼬시냐면서 상재 어머니가 찾아와 닦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덕수 형은 한마디 변명도 없이 무조건 사과만 했단다.
사흘 뒤, 상재 어머니가 다시 찾아왔다.
미안하다면서, 애들 아침도 못 먹이는 게 마음 아팠는데 그래서 반응이 거칠었다고 사과하고 갔다.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계산하는 조건으로 애들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아침 먹이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간곡히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게 상재 형제들을 시작으로 한두 명씩 늘더니 이제 아홉 명이나 되었단다.
“나는 오늘 왕버거 먹을 거다.”
“난, 참치마요.”
“바보야. 제육이 제일 맛있어. 고기잖아. 참치는 고기 아니야.”
“왜 참치가 고기 아니야? 물고기잖아.”
“치, 울 아빠가 그랬어. 통조림은 고기가 아니래.”
이렇게 아홉 명이 동시에 들이닥쳐 한마디씩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윤다정이 웃으면서 손뼉을 크게 쳤다.
“자, 다들 조용. 여기에 먹고 싶은 거 적어서 가져와요.”
“예. 누나.”
상수가 대표로 메모지를 받아 들고 아이들끼리 의논하는 사이 강형우도 움직였다.
잠시 후, 밥버거 9개 주문이 들어왔다.
김민석이 그걸 만드는 사이, 애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소처럼 가방에서 사발면을 꺼내더니 비닐을 벗기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윤다정이 미리 그걸 막았다.
“얘들아. 오늘은 사발면 먹지 말고 기다려.”
“왜요?”
“누나가 공짜로 라면 끓여줄게.”
“정말요?”
“그럼.”
그렇게 애들을 달래는 사이 밥버거가 나왔다.
그 직후 김민석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강형우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제 천 원짜리 라면 끓이는 법을 가르쳐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