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56화 무슨 병신 짓인지
“헐.”
이걸 복싱 경기라고 치면, 시청률이 나오기는 하려나 모르겠다.
강형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경기를 주시했다.
처음에는 김민석이 우세했다.
스텝 좀 밟더니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하면서 정덕수에게 잽을 날렸다.
의외로 복싱 경험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좌우로 움직이면서 툭툭 치는데, 예상보다 주먹이 빨랐고 나름 정확하게 들어갔다.
하지만 정덕수도 마냥 맞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일단 치명적인 유효타가 거의 없었다. 글러브로 치고, 머리를 흘려 피하고 하면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한 번씩 주먹을 내미는데, 동작이 커도 너무 컸다.
부웅.
보란 듯이 주먹을 크게 휘두르니 누군들 못 피하겠는가?
그 직후 김민석의 잽이 들어갔고, 정덕수는 안면을 허용하고 말았다.
뭐, 딱히 걱정 같은 건 되지 않았다. 저 형도 깡과 악은 보통이 넘었으니까.
그렇게 30초도 안 지났을 때, 탐색전이 끝났다.
먼저 달려든 건 김민석이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정덕수가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 거다.
그 틈을 노려 달려들었는데 이건 뭐지 싶었다.
처음에 날리던 잽은 페인트였던가?
그냥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데 복싱이 아닌 막싸움 수준이었다. 자세가 엉망인 상태에서 그냥 두들기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물론 많이 때리니 유효타가 나오기도 했다.
정덕수는 코너까지 밀리더니 얼굴을 두어 방 얻어맞았다.
배도 몇 대 맞아 몸을 움츠리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막무가내 식으로 주먹을 휘둘렀는데, 김민석이 뒤로 물러서려다가 그만 다리가 꼬이고 말았다.
순간 대포 쏘는 소리가 났다.
쾅.
그 한 방에 김민석이 다운됐다. 위에서 내려 꽂이는 식으로 휘두른 걸 그대로 맞은 것이다.
쿠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쓰러지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관장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카운터를 시작했다.
“원, 투, 쓰리… 세븐, 에잇.”
그래도 깡은 있는지 일어나긴 하네.
김민석은 가까스로 파이팅 포즈를 잡고 일어섰다.
하지만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지 머리를 몇 번이나 털어 냈다.
“이 정도면 거의 끝인데…….”
강형우가 정덕수의 승리를 장담하면서 쳐다봤는데, 맙소사… 체력이 다된 모양이다.
헐떡거리는 게 바로 귓가에서 들릴 정도였으니까.
고작 1분 10여 초 정도?
근데 둘 다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김민석이야 체력 생각 없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정덕수마저 저 상태일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기는 했다.
복싱 글러브는 의외로 무겁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팔 들고 일 분만 제자리 뛰기를 해도 버거울 정도였다. 괜히 복싱 드라마 같은데서 하루 종일 줄넘기를 시키는 게 아닌 것이다.
그만큼 복싱은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그런데 앞뒤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휘둘렀으니 빨리 지칠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경기는 참 졸렬하게 흘러갔다.
김민석이 흐느적거리며 주먹을 휘둘렀고, 정덕수는 그걸 맞았다. 그러면서 반격했고 그렇게 서로를 두들겨 패는 식으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지치니 서로 끌어안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이게 돈 내고 보는 경기였다면, 대부분이 환불했을 거다. 거기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링에 쓰레기가 산처럼 쌓였을 것 같았다.
그만큼 지루하고, 재미없고, 어이없었다.
시합 전의 자신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3분도 되기 전에 저 모양이라니.
그러다 관장이 종을 칠까 말까 고민하는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김민석이 스텝, 아니, 뒷걸음질 치다가 또 발이 꼬이고 말았다.
어째 처음 봤을 때부터 하체가 많이 부실하다 싶더니.
그렇게 잠시 주춤하는 틈에 정덕수가 아예 몸을 던져 버렸다. 훌쩍 뛰어서 크게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그게 빗나갔다.
강형우와 관장이 순간적으로 황당해하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달려든 추진력 때문일까?
주먹이 빗나간 직후 정덕수의 박치기가 작렬했다.
쿠우웅.
이건 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텅 빈 북을 두들기는 듯한 울림이 터졌던 것이다.
강형우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둘 다 그대로 포개져서 쓰러지고 말았다.
시간은 딱 3분이었다. 종치기 직전에 둘 다 기절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 먼저 일어난 건, 정덕수였다.
구석으로 기어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찬물을 머리에 뿌리더니, 링에 쓰러진 김민석을 보고 피식 웃었다.
“형, 괜찮아요?”
“봐. 내가 이긴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하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형, 반칙패예요.”
“짜식. 원래 남자들은 그런 거 안 따져. 이기면 된 거라고.”
어이~ 형님!
그럴 거면 링은 왜 올라간 겁니까? 예? 그리고 글러브는 무슨 죄요?
막 그 말이 목구멍에 차오르던 순간.
“아욱. 끄으윽.”
김민석이 신음을 내며 눈을 떴다.
그런 뒤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강형우와 정덕수가 링 밖에 있는 걸 확인하더니 갑자기 링 바닥을 두들기는 게 아닌가?
억울하다는 듯 바닥을 치는데, 그건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반대로 정덕수는 피식 웃으며 승자의 환호를 터뜨리고 있었다.
강형우가 어이없어하는데 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멀리서 중얼거리는데도, 똑똑히 들리더라.
“이게 무슨 병신 짓인지…….”
***
“지금 장난해요?”
강형우는 내막(?)을 듣고 나서 어이가 없었다.
복싱은 2차전이란다. 1차전을 달렸는데, 그게 술내기였다는 것이다.
새벽 다섯 시까지, 인당 소주 여덟 병씩 마셨다나?
끝내 김민석이 패배 선언을 하지 않아 그 상태로 해어졌단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퍼질러 자고, 냉수 샤워를 한 다음 시간 맞춰 온 거라는 거다.
당연히 못 나오는 사람이 패배였다.
어쨌든 둘 다 악으로 깡으로 나왔는데, 이미 반 폐인 상태였다. 경기 시작 전에 멀쩡해 보였던 게 전부 속임수였던 것이다.
어쨌든 승부가 갈린 직후, 정덕수가 바로 꾸벅거렸고 김민석이 오바이트를 한 게 그래서였다.
“살다 살다 이런 병…….”
강형우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정덕수와 김민석이 동시에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원래 남자는 그런 거야. 때론 무식하게 보여도 달려들 때가 필요한 법이라고.”
“예. 형님은 그런 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원래 마음이 시키는 걸 하는 진정한 남자거든요.”
그러면서 한참을 떠드는데, 울컥 짜증이 났다.
빡!
김민석의 뒤통수가 마구 흔들렸다.
“이놈이 장난하나?”
“아니 왜요?”
“말끝마다 남자는, 남자는……. 뭐, 남자는 돈 없어서도 티내면 안 되고, 여름에는 쫄티고, 여자 만날 때 똥도 싸면 안 된다고?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새끼가 말은…….”
강형우는 그러면서 김민석의 뒤통수를 마구 두들겼다. 그놈에 남자 타령에 신물이 나서였다.
무엇보다 분노조절 장애를 일으킨 포인트는 이거였다.
남자가 돼서 앞치마 입고, 주방에서 음식하고, 손님들한테 살랑거리고, 그건 좀 아니란다.
거기에 폭발한 거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휘둘렀고, 김민석은 필사적으로 가드를 하며 몸을 마구 비틀어 댔다.
“마! 그럼 내가 여자냐? 주방에서 음식 만들고, 서빙하고, 손님한테 인사하고. 그러면 거시기가 없어지냐고!”
“아우, 형님.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면 뭐? 바지 한번 까 줘? 허리띠 풀어서 한 번 보여줘 봐?”
솔직히 자신은 있었지만, 진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사람 많은 호프집에서 그랬다가는 철컹철컹이 될 테니까.
“와아~ 진짜 괘씸하네. 그래서 그 동안 가게 일 개판으로 한 거잖아?”
강형우는 손바닥으로 때리다가 성질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정덕수가 후다다닥 끼어들었다.
“형우야~ 니가 그럼 사람 죽어! 그리고 물건에 흠집 나면 확 깎아버린다?”
앞에 말에서는 멈칫했는데, 뒤에 말에서는 이상하게 손에 힘이 풀렸다.
강형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 앉았다.
“형도 갑갑하겠어요. 이런 거 어디다 데려다 쓸 데 있다고.”
“야. 그래도 도망 안 가는 게 어디냐? 자기 입으로 남자라 그랬으니 약속은 지킬 거 아니냐.”
정덕수가 그렇게 말하는데, 김민석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그놈의 병신 같은 남자 타령은.
어쨌든 이날 정덕수와 김민석은 의기투합을 했다.
서로 팅팅 부은 얼굴로 마구 마신 뒤, 형님 동생 하면서 좋아하더라.
내친 김에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했던 도원결의를 하자고 하기에 강형우는 극구 말렸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둘 사이에 끼는 건 정말 사양이었으니까.
그렇게 인수인계가 끝났다.
그런데, 조금은 후련하면서도 이상하게 섭섭하더라.
***
“아주 날씨가 사람을 잡네.”
햇살이 쨍쨍한 여름이었다.
낮 평균 기온이 34도란다. 심지어 밤 최저기온이 20도가 넘어서 몇 번이나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러니까 형도 에어컨 달라니까요?”
이강석이 씩씩거리며 투덜거렸다.
사실 그럴 만한 게, 요 며칠 너무 더워서 강석이네 거실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잤다.
마침 김복희 여사님께서는 30년 지기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녀석하고 소주 한두 잔 하고 바로 눈을 감은 것이다.
어쨌든 내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몇 번이나 깼단다.
그게 미안해서 강형우는 딴청을 피웠다.
“와! 진짜 날씨가 사람 잡겠네.”
“그러니까 지금 사라고요.”
“야. 원래 여름에 제일 비싼 게 에어컨이다. 그리고 그건 주인집에서 해 주는 거야. 세입자가 무슨…….”
“칫, 돈도 많이 벌면서……. 하여간 몰라요. 오늘은 우리 집 출입 금지.”
순간 발끈해서 뭐라 말하려다 말았다. 잠을 설친 덕에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았다. 알았다고.”
강형우가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근데 강석아.”
“왜요?”
“야동 좀 그만 봐라. 폴더 이름이 ‘품번으로 하나 되자’가 뭐냐?”
순간 이강석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아놔. 언제…….”
“이틀 전에 너 잘 때?”
“다 봤어요? 아니, 그 전에 암호는 어떻게 풀었데요?”
“너 전에 누르는 거 봤지. 그리고 안 봤어. 내가 네 취향 알아서 뭐하게?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인터넷 검색 몇 번 해 본 게 다야. 근데, 누님들이 참 많더라.”
강형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이강석은 그런가 했다. 그러다 뒷말을 떠올리더니 순간 발끈했다.
“그, 그거… 프라이버시 침해예요. 고소당하기 싫으면 형도 까요!”
“미안한데, 내 애물단지는 영화도 안 돌아가. 버벅버벅 대는데, 숨 쉬고 있는 것도 감사할 지경이다.”
“아오. 그러게 확 바꾸라니까요? 에어컨도 좀 달고요. 이번에 태구 형도 완전 빵빵하게 바꿨던데…….”
순간, 울컥했다.
홍태구는 얼마 전 높은 동네, 넓은 옥탑방으로 이사 갔다. 반지하를 탈출하다 못해 산 정상에 이른 것이다.
집 주인 할아버지가 마음껏 꾸미고 살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정말 그랬다.
27인치 모니터에, 게임 잘 돌아가는 PC에 빵빵한 스피커까지.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녀석 집에는 미니 빔프로젝터까지 있었다.
그걸로 한 번씩 영화 보면서 맥주 마시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가장 충격적인 건 얼마 전이었다. 뜬금없이 방음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왜 그러냐 물어보니, 오연희가 한 번씩 왔다 간단다.
이런 부러운 새끼!
딱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공지혜가 소란을 떨었다.
“오빠! 큰일 났어요. 진짜 큰일!”
“왜? 뭔데?”
“봐요.”
그러면서 뭔가 주는데, 보니까 전기세 고지서였다.
문제는 거기 찍힌 금액이었다.
“이, 이게 몇 자리냐? 일, 십, 백, 천… 파, 팔십칠만 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기세는 평균 20만 원선인데, 여름에 에어컨 틀면 35만 원까지 올라간다.
물론 최근에는 좀 과하게 돌리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87만 원이라니?
이 돈이면 에어컨 달고, 영화 정도는 볼 수 있는 컴퓨터 한 대 정도는 맞출 수 있을 텐데.
“전화 한번 해봐요? 이렇게 나올 리가 없을 텐데…….”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강형우는 곧바로 한전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한 10분 통화를 하더니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우리가 쓴 게 맞대.”
“예?”
“그게… 그러니까.”
강형우는 통화를 마친 직후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