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화 무슨 일 있었냐
“아우, 졸려.”
시차는 크지 않았지만 피곤했다. 다섯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때문이었다.
조성기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동생부터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아니, 사람이 살았다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년이, 아버지 집에 갔구나.”
방 세 칸에 거실이 있는 구조였다. 애초에 같이 살려고 그렇게 지은 건데, 희애는 가끔 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해서 방을 최고급으로 꾸며줬다.
핑크 레이스가 달린 킹사이즈 침대에 커다란 원목 책상, 의자도 200만 원이나 하는 걸로 갔다 놨고, 노트북도 가장 비싼 걸로 사줬다.
그럼에도 희애는 싫다고 했다. 자기한테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전에 살던 집이 좋다는 것이다.
“쳇, 아버지도 없는 집이 뭐가 좋다고!”
빠르면 이달, 늦어도 다음 달 초에는 올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짜증이 앞섰다. 어차피 불경을 외거나 지긋지긋한 잔소리만 할 게 분명했으니까.
“에이씨~”
조성기는 베란다를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
담배부터 한 대 태우고 들어와서 샤워할 생각이었다.
틱,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외국보다 좋은 건, 담배밖에 없네.”
피식 웃은 조성기는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 5차선 도로가 보였고, 그 너머로 지하철 표지판이 있었다. 그리고 3, 4층 규모의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옹기종기 붙은 주택들이었다.
일명 ‘담이 없는 동네’였다.
낡은 작은 주택들이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그렇게 불렸는데, 그런 집들이 산 아래 그득했다.
그 때문에 햇볕도 잘 들지 않았고, 늘 곰팡이와 싸워야 했었다.
“정말 좆같은 동네지.”
부산에서 집값 저렴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큰방 두 개짜리 옥탑집이 200에 15만 원 하는 곳이고, 조성기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밤에는 옆집 기침소리가 들려도, 부부싸움을 하고, 도둑이 들고, 경찰차가 와도 다들 모른 체했다.
누가 죽어 나가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면서 며칠 지나면 다들 쉬쉬하는 그런 곳.
어린 조성기에게는 그 좁은 골목길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 폐쇄된 갑갑함 때문에 군대에서 버티질 못했고, 더 넓은 세상인 온라인 게임에 빠져들게 된 거다.
“잊자. 잊어버리자!”
조성기는 담배 하나를 더 물고,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기린빌딩 뒤편의 주택가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세 블록 너머로 재개발 추진 플래카드들이 보였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김용철의 계획은 정말 구체적이었다.
가게들로 버는 돈에 월세를 모으면 대출을 갚는 건 금방이었다. 먼저 보증금으로 대부업체 돈을 갚아서 이자를 낮추고, 그다음에 은행을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기간을 대략 3년 정도 봤다.
이후 부채 청산이 끝난 건물을 담보로 이자가 저렴한 대출을 다시 받는다.
그걸로 뒤쪽 길의 상가를 하나씩 매입하면 된다. 전세금을 끼고 사면 큰돈이 들지 않는다면서, 부동산 구매를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왜냐?
뒤쪽 재개발 지역 협상은 순조로웠다. 길어야 2, 3년이면 전부 밀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대충 2015년 정도면 분양을 시작할 거고, 공사가 진행될 거다.
그 공사장 진입로가 기린빌딩 옆길이었다.
그 라인을 중심으로 식당 장사만 해도 돈 제법 만지는 건 일도 아니란다. 공사장 인부만 하루에도 수백 명씩 다니는데 그게 최소 3년이라고 했던 것이다.
다소 무리를 해서 일층을 식당들로 채운 것도 그래서였다.
호재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맞은편 산동네도 재개발 예정지였다.
대충 계산하면 2020년 정도면 공사가 들어갈 거란다. 상가 수익 들어오는 대로 맞은편 주택지를 매입하면 적지 않은 시세 차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른 중반에 수십억 대 자산가라.”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김용철이 말하기를 50억 이상은 무난할 거라고 했다.
그 돈으로 건물을 사서 월세만 받아도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대 재개발이 끝나면, 기린빌딩의 가격이 올라갈 거다. 상권이 커질 수밖에 없어서 도로변 상가건물의 가치가 훨씬 빠른 폭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크단다.
못해도 30억은 될 거라나.
조성기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김용철은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마음껏 즐기라는 것이다.
젊을 때 해볼 수 있는 거 다 해봐야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처음에는 조금 의심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실제로 김용철은, 같이 일하기 시작하면서 매주 한 번씩 메일을 보냈다. 건물 구입에 관한 서류, 공사 진행 상황 등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게 파일을 추가했던 것이다.
거기에 수시로 사진까지 찍어서 보냈고 재개발 관련 기사와 부동산, 창업 관련 내용들도 빼놓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가게 매상이었다.
매출과 매입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줬는데, 입금액이 매번 정확했다.
그렇게 반년을 함께했으니 어찌 믿음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 난 조인성이다. 이제 인생 한 번 멋지게 사는 거야.”
김용철이 말하길, 서른 중반에 그 정도 재력이라면 띠동갑의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가능하단다.
하지만 그 말만은 무시했다.
돈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니까.
휘이이잉.
갑자기 거센 찬바람이 불어왔다.
추위 때문인지 흐뭇한 상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에휴, 씻고 자자! 내일 일어나면 폰부터 새로 사고 돌아봐야지.”
***
“한 방에 훅 가네.”
안 그래도 저번 주부터 저 기사 때문에 시끄러웠다.
작키스라고, 굉장히 유명한 아이돌 그룹이 있었다.
대충 십여 년 전에 해체를 했는데, 당시 인기가 엄청나서 나라가 들썩거렸을 정도였다.
지금 방송에서 그때의 장면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메인 보컬인 강성흔을 비추더니 밑에 자막이 띄웠다.
사기 혐의로 구속!
그게 저번 달 말일이었는데, 방송에서는 계속 떠들고 있었다.
사실 작년부터 기사 나면서 시끄럽기는 했다.
하지만 구속이라니.
“와, 나 어릴 때 작키스 팬이었는데…….”
정은혜가 안타깝다는 투로 말하자 순이 이모가 고개를 저었다.
“허이구, 너도 조심해. 연예인들 허우대만 멀쩡하지 사기꾼들 천지라고.”
“에이, 설마요~ 우리 성흔이 오빠가 그럴 리가 없죠.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사정은 무슨 사정? 구속까지 된 거 보면 뻔한데. 딱 봐도 사기 치다 걸린 거니까 잡혀간 거지!”
두 여자의 아웅다웅에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 공지혜를 쳐다봤는데, 식사로 먹을 김밥을 챙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너무 꼼꼼하게 챙기고 있었다.
책임감도 넘쳤고, 아버지 일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지 체격도 넘치려고 하고 있었다.
이거 앞치마를 새로 사 줘야 하나?
아니면 내 걸 줘?
그렇게 고민하는데 순이 이모가 불평을 했다.
“하여간 사기꾼들 참 많아요. 대통령부터 사기꾼이니 온 동네 사기꾼 천지야 천지. 하여간 잡놈들 같으니라고. 싸그리 잡아서 몰매를 쳐야 없어질 텐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기꾼들이라면 치를 떨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는데, 물어보기는 좀 그랬다.
“아야!”
그 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신음을 낸 건 공지혜였다. 김밥 썰다가 손이 베인 것이다.
그건 지금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괜찮아?”
강형우가 살펴보니 검지 손톱 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마디 살이 일부가 날아간 모양이었다.
“일단 소독부터 하자.”
주방에는 필수적으로 구급약통이 있었다.
초창기에는 강형우가 사용했는데, 최근에는 정은혜 전용이었다.
이걸 공지혜한테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형. 여기요.”
이강석이 구급약통을 주자 강형우가 받았다.
씻기고, 지혈하고, 소독하고, 밴드 바르고 하니 감쪽같았다. 그러면서 공지혜의 표정을 살폈는데 뭔가 울컥 하는 게 보였다.
생각해 보니 아버님도 사기 피해자였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러했다.
원청업체 부장이 공장 확장을 하면 물량을 늘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는 업체랑 하면 이자도 저렴하다면서 공장과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라고 했다.
아버님은 고민했지만, 무려 15여 년 가까이 거래한 사이여서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그게 실수였다.
대출받고, 시설을 늘렸는데 부장이 사라졌다. 직원까지 뽑아 놨는데, 도리어 물량은 줄었고 돈이 안 도니 이자가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대부업체에서 찾아왔고, 담보를 처리하겠다고 통보했다.
아버님은 공장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그 돈으로 빚을 갚아야 집이라도 살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장은 팔리질 않았고 대부업체에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인수자가 나타났다.
제시한 조건은 시세의 절반 수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처분을 했는데,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단다.
공장 구매자의 삼촌이 바로 그 부장이었다.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원청회사와 대부업체 역시 그 부장네 집안 것이라고 했다.
부장을 하청업체 사장으로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사실, 세세하게 말하면 길다.
부장 일당들은 아버님 지인까지 꼬셔서 설득을 시켰고, 거기에 공장직원 일부가 배신까지 했단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겹치니 똑똑한 사람도 속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십 년 운영하던 회사가 날아갔다.
게다가 남은 빚을 정리하려면 집도 처분해야 했다.
신뢰가 깨지고, 믿음까지 배신당한 상황!
당연히 충격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얼마 전의 술자리에서였다.
듣는데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고, 성질이 났던 것이다.
강형우는 공지혜를 달래면서 몇 가지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은 현재 거동이 가능하단다.
고향에 이사 갈 집도 알아봐 놨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작은 슈퍼나 하시면서 지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오빠, 괜찮아요.”
“엉?”
“이제 괜찮다고요.”
“어~ 그래.”
잠시 생각하는 동안 손가락을 계속 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지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서더니 밥 먹자고 했다.
점심 장사전에는 든든하게 먹어야 버틸 수 있다나?
불현듯, 그 생각이 떠올랐다.
뇌출혈로 쓰러진 사람이 한 분 더 있었다.
바로 조성기의 아버지였다. 녀석이 군대에서 자살 시도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아서 쓰러지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강형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깜빡거린 뒤에야 가짜가 아닌 걸 인정할 수 있었다.
눈앞에 조성기가 있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
“나 어떻게 해?”
조성기는 울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사람 많은 호프집에서 다 쳐다보라고 질질 짜고 있었다.
순간 울컥해서 싸대기 한 대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이유가 궁금해서.
사실 아침에 얼굴 보자마자 주먹부터 날아갈 뻔했다.
멱살 잡고 흔들어서 패대기를 친 다음 잘근잘근 밟아 버리려고 했다.
그때 날 말린 건, 공지혜와 이강석이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날 붙잡았고, 마지막에 순이 이모가 찬물을 부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장사가 잘 되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긴 것 같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조성기를 보는 순간, 바로 눈이 돌아갔으니까.
찌질한 새끼!
염치도 없는 놈!
씨발, 쳐 죽일…….
강형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길게 심호흡을 했고, 잠시 후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너… 무슨 일 있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