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화 신메뉴 출격
요즘 TV를 보면 자극적인 내용이 많았다.
막장 드라마처럼 불륜에 패륜에, 재산 때문에 형제들이 싸우고 욕심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하지만 강형우에게 있어서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집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언제나 마음 편히 올 수 있었고, 반갑게 맞아주는 가족들이 있었으니 나가서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거다.
“집은 걱정하지 마. 엄마가 버는 것도 있고, 영지도 지 앞가림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몰랐던 걸 일러주는데, 강영지는 벌써 등록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능 특강으로 딱 세 명만 족집게 과외를 한다는데 370점 이상이면 보너스를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야, 대단하네.”
“내 배로 낳은 딸년이지만, 참 독한 년이야.”
엄마인 박혜숙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끝이었다.
아침 6시 기상, 과외학생들 숙제 내준 거 확인하고 학업 준비 후 학교를 간다.
점심때는 애들한테 내줄 문제를 만들고, 수업 마치고 빵집으로 출근.
그런 뒤 8시 반에 퇴근해 집에 들렀다가 인정둥이들을 괴롭힌 뒤 다시 과외 하러 간다는 것이다.
집에 오면 새벽 1시.
“너무 늦는 거 아냐? 아무리 영지라도…….”
한마디 하는 순간, 박혜숙이 인상을 썼다.
괜히 지은 죄가 있는지라 강형우는 찔끔했다.
“망미동 개릴라 동생을 누가 건드려?”
“진짜, 그게 언제 적인데… 내가 그때나 그랬지. 졸업하고 뭐, 언제 사고 친 적 있었나?”
“그때 사고가 제일 컸다. 어후, 지금도 생각만 하면.”
박혜숙은 진짜 생각했는지,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조성기 때문에 일진들하고 엮이면서 참 많이 싸웠었다.
그중 형태라는 일진 대가리 놈이 있었는데, 조성기를 괴롭힌 주모자였다.
별명이 유도부 강호동.
결국 녀석과 한판 크게 떴고, 당연히 이겼다.
이후 동네 양아치들과 함께 덤비면서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때 생긴 별명이 개릴라였다.
개처럼 날뛰는 고릴라고 그렇게 불렸던 거다.
하긴, 옆구리에 칼 꼽고 피 뿌리면서 그 지랄을 했으니…….
그렇게 난리친 이유는, 형태 새끼가 우리 가족을 들먹여서였다. 특히 영지를 언급하면서 차마 입에 못 담을 말들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머리 뚜껑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랬다.
내 동생들 건드리면 진짜 패죽여 버리겠다고.
덕분에… 강영지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명의 남자한테도 고백 받지 못했다.
좀 될 만하면 내 소문이 퍼져서 그랬던 거다.
그 때문에 영지가 구박에 상습 폭행(?)을 해도 난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여동생 혼삿길 막는 오빠라니.
세상에 정말 나쁜 놈이 나였던 거다.
“엄마, 그게 십 년 전이다, 십 년 전. 언제 적인데 그 얘기를 하는데.”
“하이고, 난 어제 일 같이 생생하거든. 그날 경찰한테 이야기 듣는데, 내 아들이 맞나 싶더라.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잖아.”
아오, 이런 말 나올 때마다 부끄럽다.
사실 그날 이후, 정말 조신하게 살았다.
당시에는 130㎏가 넘어서 더욱 그래야 했다.
그냥 돌아다니면서 씨익 웃었는데, 졸지에 취직할 뻔했다. 조폭 형들이 양주 들고 찾아와 한 시대를 풍미할 최고의 인재라면서 맡겨달라고 했던 거다.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았다.
야구 빳따가 부러질 정도로.
후우, 생각하니 울컥한다.
울 아버지가 덩치 큰 나 때린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야기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툭하면 형사 형들이 찾아왔고, 사건사고 나면 호출 1순위였던 것이다.
내가 독하게 다이어트 하겠다고 운동한 게 그래서였다.
그런데 근육만 커졌다.
제길.
그 이후의 일들은, 시트콤 한 시즌은 나올 듯한 분량이었다.
사람이 왜 죄 짓고 살면 안 되는 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박혜숙이 뭐라 더 이야기하려는데 마침 구세주가 찾아왔다.
“오빠, 커피.”
“오오, 싸랑한다 영지야!”
“이게 돌았나?”
“그래도 좋다. 영지야!”
“됐거든.”
강영지는 그러면서 피식 웃더니 커피를 놓고 옆에 앉았다.
“설탕 추가했다.”
“땡큐.”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커피를 마셨는데 드럽게 뜨거웠다.
저절로 인상을 찌푸려지는데, 강영지가 훅 들어왔다.
“장사 망했다매?”
“컥.”
“지혜가 파리도 안 날린다던데?”
“아직 안 망했거든? 망했으면 걔부터 잘랐지.”
“하긴… 그래서 뭐, 바꾼다면서?”
갑자기 강영지와 박혜숙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아니, 당장이라도 군침이 흘러넘칠 기세였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지성분식 오픈 준비하면서 엄청나게 음식을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베타 테스터는 가족들이었고, 다들 맛있다고 무지하게 잘 먹었다.
딱 거기까지면 좋았는데…….
세상일이란 게 참! 뜻대로 안 되더라.
이후 이것도 만들어 봐라, 저것도 만들어 봐라 하면서 노예처럼 부려졌던 거다.
“다른 건 그대로고, 오뎅으로 뭐 만든다.”
“그래? 언제?”
“몇 가지 테스트만 끝나면… 바로 팔려고.”
“그럼 알지?”
당연히 음식이 완성되면 부르라는 말이었다.
대답은…… 뭐, 별수 있나?
***
“다 됐다.”
강형우는 완성된 음식을 눈앞에 두고 감동을 느꼈다.
커다란 냉면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뽀얀 국물 아래 밥 한 덩어리가 있었고, 그 위에 청초 홍초가 꽃처럼 올라갔다.
그 옆에는 주먹만 한 무가 보였고 고명(?)으로 오뎅 세 개가 곱게 잠들었다.
“크흐, 이거 만든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한 건지.”
차라리 라면을 일만 개 끓이라면 웃으면서 끓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메뉴 개발하는 게 그만큼 힘들었던 거다.
화끈 오뎅의 국물을 고대로 재현한 뒤에도,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다행인 건 그나마 방향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
때문에 적절한 양과 육수비율에만 신경 썼고, 겨우 나흘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강형우는 숟가락을 들었다.
후루룹, 후룹.
역시나 예상 이상의 맛이었다.
뜨뜻하고, 찐득하고, 개운했다.
거기에 약간의 칼칼함이 더해졌고 마지막에는 감칠맛까지 감돌았다.
젓가락을 들어 오뎅을 하나 집었다.
우물우물.
많이 퍼지지 않았기에 탄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 뒤 밥을 먹고, 맛이 잔뜩 배인 무까지 씹으니 입안에서 맛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후우우~ 하아아~”
순식간에 뚝딱 비우고 나니 포만감이 확 차올랐다.
강형우는 타이머를 확인했다.
다 먹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분 30초.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된다!”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업종이 겹치지 않아야 한다.
바로 옆 김밥천왕이 따라할 수 없어야 했고, 판매도 용이해야 했다.
어차피 저렴한 가격 때문에 상당수의 학생들은 김밥천왕의 고객이 된 상황.
지성분식의 고객층을 더욱 늘려야 하는 거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오뎅이 아닌 눈앞의 국밥이었다.
일명 어묵국밥!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는 전설의 메뉴였다.
이 음식의 유래가 어떻게 되느냐?
당연히 오뎅 공장에서 시작 되었다.
사실 부산하면 오뎅이고, 오뎅하면 부산이었다.
국내 유통의 80% 가까이가 이 도시에서 만들어지니까.
어쨌든 오뎅국밥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몇 십 년 전, 모 공장 직원들이 난로 위 주전자에 오뎅을 넣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깐 쉴 때 하나씩 빼먹고 하다 보니 나중에는 국물이 찐득해진 것이다.
거기에 밥 넣고 청양고추 넣어 칼칼하게 말아먹던 게 오뎅국밥의 시초였다.
대충 3, 40년 전쯤 되는 것 같다.
당시 유행을 타면서 자갈치 선술집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그게 택시 기사들한테 퍼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짧은 시간에! 저렴한 가격으로! 뜨뜻하고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랬기에 아주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퍼졌다.
감전동 택시회사에서 버스 차고지로.
그게 하단시장에서 시작되어 괴정시장을 거처 구덕운동장 옆까지 진출했다. 그러다 구포시장에 생겼고 지금 미남역, 당시 시외버스터미널 쪽까지 확장된 것이다.
하지만 성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제대로 된 요리가 아니라면서 싸구려 취급받았고, 고작 분식집에서 말 그대로 끼니만 때우는 정도로 격하된 거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나자 보기 힘든 음식이 됐다.
얼마 전까지는 동래 시장 안쪽에 딱 한 가게에서 했었는데, 그집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더는 찾기 힘들게 됐던 것이다.
“오빠! 저 왔어용.”
“어? 지혜 왔어?”
알바 공지혜.
동생 강영지의 친구이자 우리가게의 마스코트였다.
얼굴은 한가인인데, 문제는 와이드 비율이라는 거다.
키 170㎝에 60㎏ 후반대라는데 굳이 묻지는 않았다.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고.
왜냐?
강영지가 그러더라, 아직 80㎏은 안 넘었다고.
그럼 뻔한 것 아니겠는가?
사실 공지혜의 전성기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다.
그때는 베이글이라 불릴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는데 어느 순간 폭식을 하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강영지가 말하길, 대학교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단다. 그 덕에 휴학을 했고, 현재는 학원 다니면서 지성분식의 알바를 하고 있었다.
공지혜는 빈 그릇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신메뉴?”
“그럴 리가?”
“맞죠? 제가 생각한 거?”
“어. 벌써 다 먹었지.”
강형우가 툭 내뱉자, 공지혜는 맞은편에 턱 걸터앉았다. 그리고 수저를 뽑아 들더니 장엄하게 외쳤다.
“자앙구운! 그럼 신메뉴, 한 그릇 부탁하오~”
저게 동생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이상한 쪽으로만 물든 것 같았다.
이 세련된 분식집에서 감히 사극 톤이라니.
“뭐, 실험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강형우는 피식 웃으며 오뎅국밥을 말아왔다.
사실 조리법은 정말 간단했다.
스뎅 그릇에 밥 넣고, 매운 고추 올린다. 거기에 잘 익은 무 한 덩어리 담고, 뜨신 국물을 부으면 끝이었다.
옛날에 처음 먹었을 때 가격은 지금 기준으로 고작 이천 원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추가가 가능했다.
무려 80년대였다. ‘무한 리필’의 시초가 이거였던 것이다.
사실 사장들이 밥 하고 국물 더 줬던 거지만, 어쨌든 곱빼기도 그 가격 그대로였다.
강형우가 이 음식에 꼽힌 건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 구경 간 자갈치 시장.
관광객들이 들리는 코스는 회 센터와 남포동 영화광장 맞은편이었다.
거기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방송에 안 나왔던 생선구이집들과 꼼장어집들이 가득했다.
딱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갈치 시장이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뭐가 나오느냐?
수산시장에 생선을 공급하는 공장과 창고들이 나온다.
관광객이나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정말 업자들이 일하는 그런 회사들이 즐비한 것이다.
다른 말로 새벽시장이라 불리는 곳.
실제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그런 동네였다.
여긴 골목골목 마다 오래된 맛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중성에선 좀 멀지만, 생선을 수십 년 취급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그런 진한 집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때 골목 한구석에서 먹었던 게 오뎅국밥이었다.
당시 오뎅 하나 오십 원 했다.
그걸 세 개 넣고 밥을 말아주는데 삼백 원 했고 시장 할머니가 예쁘다면서 한 개를 더 넣어 줬다.
믿진 않겠지만, 어릴 때는 귀여웠다.
험험.
어쨌든 오뎅국밥은 지금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나 기억하는 음식이었다.
“오! 때깔난다.”
공지혜가 호들갑을 떨며 폰을 꺼냈다.
“안 먹고 뭐 해?”
“당연히 사진 찍어야죠. 우리 가게 신메뉴인데.”
그러면서 젓가락으로 고추 고명을 움직이더니 그럴듯하게 플레이팅을 했다.
쩝, 내준 것보다 맛있게 보이기는 하네.
공지혜는 서둘러 사진을 찍은 뒤, 어마마마와 강영지와 함께하는 톡방에 올렸다.
그 즉시 톡톡톡톡, 울렸는데 내용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일단 먹어 봐. 감상 좀 들어보자.”
“알았어요.”
공지혜는 숟가락으로 살살 섞더니 나름 조신하게 먹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조물조물.
후루룹, 후룹, 후루루룹.
어머나! 얘 좀 보게?
그냥? 마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