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화 국물 맛의 핵심은
지성분식은 강형우 밥줄이었다.
생계였고, 꿈이었으며 가족들의 기대 역시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게다가 정분석을 배신(?)했기에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런데 친구라는 암초에 걸렸다.
“야!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내 편 들어줘야 하잖아. 씨발, 너. 내 친구 아니냐?”
조성기는, 끝까지 자신을 조인성이라 불러 달라면 소리쳤다.
이름 바꿔 부르는 건 쉽지가 않았다.
이십 년 넘게 불러 왔던 게 어떻게 한순간에 바뀌겠는가?
무엇보다 그렇게 호칭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진짜 끝일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내가 그래도 너한테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그 생각은 뭔지 모르겠고. 친구로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충고 하나만 할게.”
“뭔데?”
“새끼야.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강형우는 조성기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
동시에 김밥천왕과 싸우는 게 얼마나 허무한 짓인지를 깨달았다.
자리를 기다릴 필요 없는 넓은 매장.
고급 카페처럼 꾸민 깔끔한 인테리어.
전문요리사가 만드는 것처럼 나오는 화려한 음식.
어여쁜 서빙 알바의 서비스까지.
이건, 지성분식이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딱 하나 이길 수 있는 건 알바 공지혜의 미모 정도?
어쨌든 고민하고 따져 보니 이건 편의점과 이마트, 동네 버거집과 맥도날드가 경쟁하는 꼴이었다.
그걸 미련하게 고집했다가 마음고생만 했고, 괜히 헤매기만 했던 거다.
진즉 깨달았다면 이처럼 편했을 것을.
역시 장백호의 인생 경험이 주는 관록은 대단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라!
절벽을 뚫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버린 장백호, 그걸로 통행세 수익을 늘려 산채를 먹여 살렸다.
그 말대로 굳이 한 길만은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좀 비겁해도 괜찮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남한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상관없는 것 아니겠는가?
때문에 강형우는, 당분간 가게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박첨기에게 통화해서 양해를 구했고 가족들에게는 이번 주말에 이야기할 계획이었다.
새로운 메뉴로 가게를 다시 일으킬 생각이었으니까.
***
“오! 형우 왔냐?”
김창주는 강형우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형, 미안해요.”
“뭐가?”
“그날 일요.”
“됐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는 거지. 근데 성기 녀석이 너 폭행죄로 고소한다고 하던데 괜찮냐?”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싸다구 한 방이 홍태구의 주먹질을 가려 버렸다. 얼굴이 팅팅 붓고 코피 터진 걸 전부 덮어 버린 것이다.
뭐, 진단서 끊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절대 경찰서로 들어가진 못할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 우리 사이는 끝이 날 테니까.
무엇보다 조성기의 아버지, 조원무한테 받은 권한이 하나 있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 조성기는 키보드(?) 사건을 일으켰다.
예전에 같이 PC방에서 게임하는데 조성기가 갑자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채팅창을 보니, 욕이 무지하고 올라오고 있었다.
발컨이니 스틸이니 뭐니 부터 시작해, 아버지 어머니 안부까지 서로 친절(?)하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집안 이야기가 나오고 역사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조성기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 잠시 진정하라고 음료수 좀 부탁했다.
그러다 본 거다.
자기 욕하는 아이디가 바로 뒷자리인 것을.
이 미친놈이 갑자기 키보드를 확 뽑아 버리더니 뒤쪽에 있는 상대의 머리통을 후려갈겨 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키캡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게임하던 손님들이 화들짝 놀랐고, 사발면에 물 붓던 알바는 화상 입을 뻔했단다.
어쨌든 키보드로 폭행당한 상대는 그 자리에서 울어 버렸다.
피해자는 이제 중학생이었다.
다행이 서로 욕설이 오간 걸 이해했기에 적당히 무마할 수 있었다.
그때 강형우는 학생한테 피자 두 판 값을 썼고, 키보드 값을 물어주었다. 그리고 조성기는 아버지한테 끌려가 회초리를 엄청나게 맞았다.
그 사건 이후 조원무가 신신당부했다.
성기가 사람 같지 않은 짓을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말려 달라고. 그걸로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책임진다고 했다.
일명 폭행 허가권이었다.
심지어 아들놈보다 나를 더 믿는다나 뭐라나.
휴우~
그러고 보니 조성기와의 사건은 한둘이 아니었다.
참 지긋지긋한 새끼 같으니라고.
“고소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세요. 그랬다가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만약 이 이야기가 아버지나 자기 동생한테 들린다면, 집에서 쫓겨날 거다.
조원무의 성격이라면 호적에서 파버릴 가능성도 컸고.
때문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강형우가 웃자 김창주도 피식거렸다.
“하긴 뭐, 그런 걸로 신고하고 그럴 사이는 아니지. 그건 그렇고… 정말 해보려고?”
“예. 고민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계절이 계절이잖아요.”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생각나는 것이 뜨끈한 국물이고, 그중에 대표적인 게 바로 오뎅이었다.
맞다.
강형우는 지금 화끈 오뎅집의 비법을 배우러 온 거다.
사실 몇 가지 메뉴를 놓고 고민하긴 했다.
첫 번째가 요즘 막 유행을 타기 시작하는 밥버거였다.
하지만 쿨하게 포기한 이유가 있었다.
버거집 사장인 정덕수 형이 먼저 그 메뉴에 도전해 보겠다고 해서다.
그다음이 튀김집이었다.
해서 정분석에게 도움을 받았고, 몇 가지 레시피까지 완성했다.
문제는 경쟁자가 너무 많다는 거다.
일단 조가네 떡볶이와 창주 형의 화끈 오뎅이 있었다.
현재 이 일대를 양분하는 맛집이었고, 그 외에도 세 군데나 더 있었는데 매상은 고만고만했다.
한마디로 돈이 안 벌린다는 거다.
그 외에 겨울 인기 메뉴인 호떡과 붕어빵도 있었고, 군고구마도 팔아 볼까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부산하면 어묵 아니겠는가?
“하긴, 나도 겨울 장사가 일년 매출의 절반이 넘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야. 특히 오뎅이 불티나게 팔리거든.”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뭐가?”
“제가 따라 해서 더 맛있으면 어쩌시려고.”
강형우가 눈치를 보는 척하자 김창주가 커다란 스텐국자를 휘둘렀다.
잽싸게 피한 강형우.
피식 웃는 김창주.
“새끼야. 우리 집 오뎅 국물이 너보다 나이 많다. 30년 전통 무시하냐?”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강형우가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 꼬꼬마 시절부터 이 가게 오뎅을 먹었다.
건물이 헐리면서 지금 자리로 오기는 했지만, 그때는 부모님이 했었고 창주 형이 물려받은 지도 10년이 훨씬 넘었다.
그 역사를 생각한다면 걱정은 기우였다.
“헛소리 말고 뒷방 가서 앞치마나 걸치고 와라. 오늘 하루 빡시게 부려먹을 테니까.”
“옙, 사부님.”
강형우는 장난스럽게 경례를 하고 주방 뒤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에 남자 다섯 명 정도가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이곳으로 옮겼음에도, 예전 가게처럼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다.
앞치마를 걸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형네 집에서 술도 많이 마셨는데.”
알코올 첫 경험을 시켜준 사람이 창주 형이었다.
조성기의 왕따 사건 때, 처음 술을 배웠다.
그때 창주 형이 직접 부모님들한테 전화를 돌려서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고 허락까지 받았었다.
토요일 저녁 8시.
일찍 정리한 창주 형은 전에 가게 뒷방에서 우리들을 불러 놓고 소주병을 깠다.
한 명 한 명, 정성스럽게 술잔을 채워 주면서 그랬다.
너희도 나중에 크면 동생들 잘 챙기는 사람이 되라고.
그때는 담담하게 들었지만, 다들 창주 형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우리 친구였던, 동생 창신이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야! 빨리 나와. 해 넘어가겠다.”
“옛썰~”
“핵심은 국물이야.”
김창주가 준비한 건, 멸치와 밴댕이였다.
디포리라고도 불리는 건데 놀랍게도 화끈 오뎅은 일 년 치를 미리 주문해서 창고에 보관한단다.
가장 좋은 계절에 사야 국물 맛이 좋다나 뭐라나.
여기에 대파 뿌리와 무가 잔뜩 들어가고 말린 북어 머리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기본 육수였다.
“맛부터 봐봐.”
창주 형이 내민 종이컵을 받았다.
냄새를 맡아 보니 ‘대동촌국시’라고 유명한 국수집의 국물하고 거의 비슷한 느낌이었다.
맛이 진하게 농축된 것이, 약간 비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뎅 국물 한 통에 이거 두 국자다.”
생수와의 비율은 거의 5 대 1 정도.
그렇게 생각해도 많이 연한 편이기는 했다.
“여기에 우리 가게만의 비법이 들어가는 거지.”
창주 형은 팔팔 끓고 있는 솥을 가리켰다.
“어… 이거 색깔이 다른데요?”
“당연하지. 나만의 육수니까.”
김창주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가게 밖을 둘러봤다.
“뭐해요?”
“누가 들으면 안 되거든. 안 그래도 요즘 수상한 인간들이 기웃거려서 말이야.”
피식 웃은 김창주는 목소리를 확 낮췄다.
“담치다.”
“예?”
“쉿. 그러니까, 담치를 우려서 낸 육수라고.”
부산 말로는 담치, 일반적으로 홍합이라고 알려진 조개가 맛의 비밀이었다.
김창주가 또다시 종이컵을 내밀었다.
색상은 재첩국보다 진했고, 어떻게 보면 우유 느낌까지 들었다.
“크아~ 이거 완전 해장국인데요?”
“맞아. 속 푸는 데는 그만이지. 어쨌든 이거 두 국자를 더 붓는 거야.”
이제 생수 5에 육수가 2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나가 더 들어가는데… 이건 고급 비밀이라 안 가르쳐 줄 거다.”
“예?”
강형우가 놀란 표정을 짓자 김창주가 투덜거렸다.
“마! 다 가르쳐 주면 난 뭐 먹고 사냐?”
“에이~ 그래도…….”
“아주 튀김 몇 개 가르쳐 주고, 뽕을 뽑으려고 하네?”
“혀어어엉~”
강형우가 웃으면서 애교를 부렸다.
김창주는 기겁을 하면서 물러나더니 국자를 방패 삼았다.
“확, 마! 깜짝 놀랐네. 이 곰 새끼가 동물원에서나 그럴 것이지, 너 사람 앞에서 그러면 새끼야! 총 맞아 죽어!”
“에이, 가르쳐 줄 때까지 안 멈출 겁니다.”
190에 가까운 덩치가 몸을 비비 꼬면서 전진하는데, 김창주는 진심으로 겁을 먹었다. 자신도 모르게 마구 국자를 휘둘러 댔던 것이다.
“알았다. 알았다고.”
그제야 강형우는 동작을 멈추고 초롱초롱한 눈빛만을 남겼다.
“너 진짜 그러면, 웅담 빼버린다.”
“술 많이 마셔서 벌써 썩었습니다. 팔리지도 않아요. 그리고 저 우려봐야 곰탕도 안 나오거든요.”
“아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김창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이거는 말이야…….”
***
“심오하네.”
처음에는 황당했다.
오뎅 국물도 과학이란다.
그러면서 일장 연설을 하는데, 진짜 배워 보니 그럴 만했다.
전체로 치면 생수 5에 육수가 5였다. 밴댕이 육수가 2, 홍합 육수가 2였다.
마지막 1은 놀랍게도 해물잡탕이었다.
새우와 꽃게 네 마리를 끓이고, 말린 문어가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건, 감초였다.
약방의 감초라고 말하는 바로 그거였다.
이게 은은한 단맛과 감칠맛을 내면서, 해물육수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단다.
그렇게 바짝 우린 걸 면포로 세 번이나 걸러서 맑은 국물만을 뽑는데, 이게 오뎅 국물에 더해지는 것이다.
“궁금하겠지. 왜 육수를 따로따로 내는지.”
김창주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컵 네 개를 꺼냈다.
멸치 육수, 홍합 육수, 해물잡탕 육수.
마지막으로 그걸 전부 섞은, 어묵이 들어가서 우려진 육수를 따로 담았다.
강형우는 그걸 하나씩 신중히 맛을 봤다.
각각의 육수는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멸치 육수는 국수 말아 먹으면 좋을 것 같았고, 홍합 육수는 그냥 해장이었다.
해물잡탕 육수는 놀랍게도 라면이 땡겼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그 모든 걸 섞은 거였다.
제법 맛있는 어묵 국물 수준 정도였다. 다른 음식은 생각 안 났고, 오히려 오뎅의 맛과 잘 어우러진다는 게 우선처럼 느껴졌다.
문제의 해답은 정말 의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