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10화 그 이름 강주혁
“나 잠깐, 형우 바래다주고 올게.”
정분석과 함께 아파트 단지를 나왔다. 그리고 온천천을 향해 걸으면서 흡연부스를 찾았다.
“너…….”
“형…….”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꺼냈다.
“먼저 해요. 형!”
“아니다. 많이 힘든 것 같은데, 너부터 해라.”
마침 흡연부스가 보이자 정분석은 담배를 빼들었다.
강형우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서너 갑 정도를 피웠고, 정분석은 두 갑 이하였다. 음식 하는 사람이기에 끊으려고 했지만, 사업적인 부분 때문에 완전히 금연하기는 쉽지가 않아서였다.
“후우~”
가을바람치고는 쌀쌀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이리라.
“그래. 연애사업 문제는 깔끔하게 망한 것 같고, 왜? 가게 장사 잘 안 되냐?”
“그런 것도 있죠. 뭐,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고요.”
강형우는 최근의 일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매출이 떨어졌지만 괜찮다.
전보다는 줄었지만 단골들이 그래도 찾아 주고 있고, 주인아저씨가 좋은 제안도 했었다.
물론 장백호의 꿈을 꿨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해도 믿기야 하겠는가?
“이야. 요즘에도 그런 집주인이 있어?”
“그러게요. 사실…… 천경 어르신이 말을 잘해 준 게 제일 큰 것 같아요.”
“그 도사 어르신이?”
정분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거렸다.
석 달 전, 정분석이 가게에 찾아왔다가 천경 어르신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내가 친한 형이라고 말했더니 얼굴 보자마자 대뜸 나무껍질 한 뭉텅이를 꺼낸 것이다.
“틈틈이 고아 먹어.”
원래 정분석은 약간의 위장장애가 있었다.
수시로 음식 맛을 봐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긴 병이었다.
치료해도 금방 재발했고, 그렇다고 입원하기는 애매한 수준. 그런데 껍질을 우려서 마시자 놀랍도록 속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그게 고마워서 천경 어르신을 다시 찾았는데, 받은 건 명함 한 장이었다.
고마운 만큼, 음식이나 해서 가져다주란다.
확인해 보니까 김해 외곽의 작은 고아원이라나?
“덕분에 좋은 인연을 알게 됐는데, 그분도 참…….”
“저한테는 고마운 일이죠.”
“그래, 고마운 분이긴 하지.”
말투를 가만히 들어 보니, 뭔가 일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장사는?”
“좀 더 해봐야죠.”
강형우의 대답에, 정분석은 잠시 고민했다.
“내가 전에 이런 말 해준 적 있는 것 같은데, 장사는 말이야. 내 음식만 봐도 안 되고, 내 손님만 봐도 안 돼. 마지막으로 내 가게만 봐선 안 돼!”
천천히 이어진 조언은 묵직했다.
맞다. 몇 번이나 들어서 알고 있는 거였다.
이걸 왜 잊고 있었을까?
“너 내 밑에서 나갈 때… 기억하지?”
정분석의 한숨이 그때의 기억을 불러들였다.
***
“야! 강형우. 너 이렇게 배신 때리냐?”
“형! 아닌 거 알잖아요.”
“알기는 개뿔. 금이야 옥이야 키워 놓고 음식 하는 거랑 노하우 다 가르쳐 줬더니 독립하겠다고? 너 같으면 화 안 나겠냐? 회사 일 좀 맡기고, 나 좀 놀려고 했더니 이렇게 도망쳐?”
“에이, 왜 그래요.”
“됐고. 망하면 나 찾아올 생각하지 마라. 돌아와도 니 자리 없다!”
“잘 알죠.”
“성공하면… 잊지 말고.”
“에이, 내가 어떻게 형을 잊어요.”
“잊어, 인마! 배수의 진 몰라. 배수진? 성공하려면 나 잊어야 해! 혼자 모든 걸 해야 한다고.”
“…….”
“그리고, 앞으로는 니가 밥 사라.”
“당연히… 제가 사죠.”
“마! 그만큼 많이 벌어서 성공하란 소리다!”
***
“기억… 하죠.”
짧은 한마디였지만, 정분석은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너는 요리 솜씨만 봤을 때 충분히 독립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어. 거기에 야식집 확장할 때 도와주는 걸 보면서 인테리어 감각도 있는 걸 확인했고.”
“그야 뭐…….”
어릴 때 잠깐 만화가를 꿈꿨었다. 그러다 볼 만화책이 없어서 소설을 보게 됐고, 스토리에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은 평범한 독자로 만족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그림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져서 한때는 디자이너를 목표하기도 했다.
지금도 책장 한구석에는 블랙북과 아트미디어, 디테일 일러스트 책자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장사는 그것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야. 이 바닥은 눈치 싸움도 치열하거든. 내 가게가 아니라 남의 가게도 봐야 하고, 경쟁 상대가 생기면 이길 수 있는 무기도 준비해야 해!”
“경쟁… 이요?”
“그럼 음식 장사가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냐?”
그게 아니라는 걸,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맛에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청결도 무척 신경 썼고, 위생도 문제없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손님들이 줄어들었고, 단골들이 빠져나갔다.
그 이유를 열심히 궁리하고 있지만 아직은 답을 못 찾은 상황이었다.
“감시… 라고 하면 그렇고. 한 번씩 오다 가다 네 소식이 궁금해서 좀 물어봤어. 요즘 너무 무기력하게 있다고, 평석이가 말하더라.”
정분석을 통해 소개받은 이평석은 우리 가게에 야채와 식품들을 납품해 주는 형이었다.
가져다주는 물량만 봐도 매출 짐작하기는 쉬운 일.
“좀 더 시야를 넓혀 봐. 그리고… 개미는 개미만의 싸움 방식이 있다고 하더라고.”
“누가요?”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여간 힘내라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전화는 위로해 주기 위한 핑계였나 보다.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미진이한테 차였다 하더라도, 술을 엄청 마셨다고 해도 십 분씩이나 울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정분석도 그걸 알기에 과하게 이야기한 게 틀림없었다. 거절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형. 이제는 안 그래요. 아니 앞으로도 안 그럴 거예요. 요즘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자신감?”
“예. 이상하게 말하면, 일단 하면 전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있잖아요.”
정분석은 피식 웃었다.
“그래, 자신감. 정말 중요하지. 사실 그 사소한 거 하나도 음식에 묻어나거든. 맛이 있다 없다 그런 느낌이 아니라, 생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실제로 정분석이 음식을 가르쳐 줄 때 저런 말을 여러 번 했었다.
내 음식, 먹어 봐라!
다른 건 몰라도 맛에선 자신이 있다! 유명한 가게들과 비교해도 좋으니 먹어 보고 판단해라!
그런 적극적인 마인드로 영업을 했고, 실제로도 크게 성공했다.
그 원천이 바로 자신감이었다.
“요즘 생각해 보니까. 형 말이 대부분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최근에는 조금 감정기복이 있어서, 음식 맛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극복했다?”
“글쎄요? 전부는 아닌데, 이상하게 걱정 같은 건 안 되더라고요. 어차피 음식 장사는 길게 보고 가는 게 맞고요. 이제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정분석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럼. 내 제안은 의미가 없겠네.”
“제안… 이요?”
***
“후우~ 하아. 후우~ 하아.”
강형우는 자켓을 손에 든 채 가볍게 달리고 있었다.
정분석과 헤어진 뒤, 온천천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갑자기 몸에서 후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새벽과 아침에 잠깐 운공을 했고, 오후에 장사하면서 틈틈이 호흡을 이어나갔다.
장백호의 경험과 깨달음 덕분인지, 점점 몸에 익숙해지더니 편안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기초 호흡법은 몸속의 탁기를 제거하는 효능을 가졌다. 그러다 일정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무공의 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내공심법을 본격적으로 수련할 자격이 된다.
부산에 사는 걸 생각하면 빨라도 사오 년은 걸릴 거라고 봤는데, 고작 하루 만에 효능이 느껴지다니.
“후우, 하아아아~”
강형우는 고개를 숙였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니 개운했다. 동시에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강주혁!
정분석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그 사람의 회사에서 업무제휴가 들어왔는데, 같이 작은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사전에 기본적인 이야기는 해놓았고 오늘이 첫 번째 미팅 날이었다.
갑자기 만날 시간을 늦춘 게 그래서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다. 학교 급식 사업에 진입하려 한다. 같이할 의사가 있는지 알고 싶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직원을 파견해 보지 않겠냐고 했다.
인재를 육성하고 서로간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 그리고 사업 진행 후 안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말이다.
그때 정분석이 떠올린 건, 바로 강형우였다. 그래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장사가 어려운 동생이 있다고 돌려서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 강주혁이 일러주었다.
개미는, 개미만의 싸움이 있다고!
“흐음, 강주혁이라…….”
듣기로 외식업계의 뒷세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식품업 쪽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라나?
일단 겉으로는 연매출 삼천 억이 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안에 유명한 중식 프랜차이즈와 국수집, 그리고 포차 사업까지 진행하고 있었는데, 해외 진출까지 고려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 모든 게 밑바닥에서 시작해 불과 5, 6년 만에 이룬 결과라는 것이다.
놀라운 건, 고작 서른한 살이라는 것!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강주혁!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미치도록.
***
“후아~ 시원하다.”
강형우는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았다.
거울을 보니, 제법 남자다운 얼굴이 있었다.
190㎝에서 약간 모자란 키에 90㎏ 중반대의 듬직한 체구, 게다가 떡 벌어진 어깨는 자신감을 더욱 상승시켰다.
단 하나의 흠이라면 왼쪽 옆구리의 작은 흉터였다.
이제는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로 오래됐는데, 당시 여덟 바늘 정도를 꿰맸던 걸로 기억한다.
“흐음, 그래도 나름 괜찮은데?”
희한하게도 샤워 직후 거울 앞에서면 마법에 걸린다.
어떤 얼굴이든 무조건 잘 생겨 보이는 거다.
강형우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기자 이마까지 깔끔하게 드러났다.
안 그래도 요즘 살이 빠지면서, 모 드라마 조연 배우하고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있었다.
욕 잘하는 세종대왕의 호위무사였던가?
가게 TV에서 잠깐 봤는데, 좀 멋지게 나오기는 했다.
생각해 보니 미진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작년에 추노에서도 나왔던 그 배우하고 닮았다고 말이다.
“하긴, 이 정도면 배우 할 만하지.”
물론 동생 강영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냥 나보고 면도한 임꺽정이란다.
아무래도 안경 하나 아주 비싸고 좋은 걸로 맞춰 줘야겠다. 아니면 눈 수술이라도 시켜 주던가.
강형우는 욕실을 나와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밤 12시였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집까지 와 버렸다.
동래 세무서에서 온천천을 따라 안락교까지 걸었다. 거기서 망미동을 거쳐 집까지 왔는데, 한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던 것이다.
그만큼 고민할 게 많아서였다.
희한한 건, 장시간 걸었음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는 거였다.
오히려 잔뜩 흘린 땀 때문에 개운하기까지 했다.
“일단 애물단지부터 켜고.”
강형우는 츄리닝 바지만 입은 채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발가락으로 툭 하고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우우우웅.
잠시 헤어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녀석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곧 잠잠해지면서 XP 화면이 떴다. 그러다 픽하고 꺼지더니 다시 울면서 재부팅을 시작했다.
삼 년 전, 회사 근처 PC방이 망할 때 싸게 들고 온 컴퓨터였다. 신기한 건 금방이라도 고장 날 듯하면서도 작동은 제대로 된다는 거다.
그 덕에 목숨(?)은 붙어 있었는데, 홍태구가 손봐주면서 업그레이드는 포기하라고 했다.
강형우는 화면이 들어오자마자 인터넷 창을 띄웠다.
“검색, 강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