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소가 귀한 시절이라 했다.
당시에는 공장장 정도나 되어야 가끔 곰탕이나 설렁탕을 먹을 뿐, 말단 사원인 자신에겐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뼈 빠지게 일했지. 헌데 서른 중반에 병이 들었어.”
당시에는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단다. 만성피로에, 조금만 움직여도 무기력해지고 심지어 음식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 시켰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골병이었다.
과도한 노동에 부실한 식사가 겹쳤고, 잦은 출장에 하루 서너 시간도 못 자고 일을 했으니.
“그때 내자가 어디서 들었는데, 사골이 몸이 좋다고 하더라고.”
박첨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는 팔다 남은 잡뼈와 내장 부스러기를 싸게 구해 와서 사골을 우렸다고 했다. 친정집에서 배운 방식으로 밤새도록 찌꺼기를 걸러내면서 말이다.
“고깃국물 덕인지, 내자의 정성 때문인지 석 달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어느 정도 털고 일어나서 큰 병원에 가 보니, 황당하게도 영양실조라 했다.
잘 먹기만 해도 낫는 병!
그걸 몰라서 일 년 넘게 끙끙 앓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다시 건강해졌고, 그때부터 일도 하나씩 잘 풀리더라고.”
피죽 먹고 다니던 얼굴에 기름이 돌기 시작했다. 당연히 박첨기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고, 그러면서 운 좋게 큰 회사로 이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첨기는 물로 또다시 목을 축였다.
“옛날이야기는 그즈음 하고, 사실 진즉 와서 먹어봤어야 했는데, 내 나이가 되니 분식이 영~ 입에 맞지 않더라고.”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지성분식이 메뉴 대부분은 학생들과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간이 맞춰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큰삼촌이 그러시더라. 이 집 음식은 뭔가 다르다. 직접 먹어 보고 평가해 봐라. 그래서 들린 거라네.”
아! 천경 어르신이 일러두신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박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서 놀랐다네. 그리고, 우리 내자가 해 줬던 국물 맛을 기억하게 될 줄은 몰랐지.”
“아!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래서 묻는데… 자네 혹시 가게 내놓을 생각인가?”
박첨기가 웃으면서 묻는데, 비수 하나가 가슴에 팍 박히는 기분이었다.
사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변덕이 들었다.
접을까? 말까?
지금 정리하면 어떻게든 되는데.
다행이 벌어놓은 돈이 있어 은행 대출은 해결했고, 조성기한테 빌린 돈은 보증금 빼서 주면 된다.
아쉬운 건, 잘될 때 번 돈을 모조리 가게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조금씩 인테리어도 바꾸고, 장식도 추가했고, 제일 중요한 건 조리 기구를 다양하게 업그레이드 했다는 것이다.
진공포장기에 전자식 조리기, 칼도 ‘칼있쓰마’라는 전문 업체에 들려 구입했다.
먼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매출이 안 나올 때는 권리금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아니, 중고 가격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이대로 정리하면 지난 시간 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
그렇다고 망해가는 가게를 계속 끌어안고 있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장백호의 말대로 후련할 때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아직 마음을 명확히 못 정했습니다.”
강형우는 일단 그렇게 말했다.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 박첨기는, 천천히 가게를 둘러봤다.
“자네 오기 전에 아주머니가 있을 때하고 확실히 많이 달라졌어. 막눈인 내 눈에도 다른 게 보일 정도니.”
“꾸민다고 고민 많이 했었죠.”
강형우가 머리를 긁적이자 박첨기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 나이 되도록 살면서 터득한, 개똥철학 같은 게 하나 있다네. 들어보지 않겠나?”
“경청하겠습니다.”
박첨기는 자신이 먹었던 사골 떡만둣국 그릇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음식은 정성이지. 그리고 그런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라네.”
“예.”
“다 늙어 깐깐함만 남은 내 입에도 잘 맞는데… 어찌 사람들 입에 맞질 않겠는가?”
강형우는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전에 아주머니가 이 자리에서만 이십 년을 장사했어. 주방 안쪽 방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애들 둘이나 키웠다네.”
그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말하길 칼국수가 잘 팔려서 단골들이 적지 않았고, 실제로 가게를 넘기고 이사 갈 때도 더 큰 곳으로 이전하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터가 좋은 곳이니 자신도 잘될 거라고 덕담도 하셨고.
“처음 월세가 이십오만 원이었지. 그러다 오 년 지나서 삼십이 됐고, 다시 십 년을 채워서 오십이 됐다네.”
물가 상승률을 계산하면 많이 올린 건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한 골목 옆에는 월세가 칠십도 넘었으니, 여기가 비싼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장사가 안 된다고 들었을 때, 젊은 총각이 일 년도 못 채우고 나가겠구나 싶었네.”
박첨기는 이 건물 말고도 건물 두 채가 더 있다고 했다.
그는 건물 주인 입장에서 세를 많이 받는 것도 좋지만, 가게가 차 있는 게 더 좋단다. 그런데 유독 젊은 사람들만 장사가 조금만 안 되도 접겠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사정이 있겠지,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은 했다네. 그래서 어지간하면 해달라는 대로 해줬지. 솔직히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 거고.”
진지한 표정과 말투를 보니, 뭐라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박첨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 장사는 길게 봐야 한다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일까?
박첨기는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원할 때까지 월세를 내지 않아도 좋아!”
***
간단히 말하면, 공짜는 아니었다.
어차피 보증금이 걸려 있으니까.
하지만 매달 월세 50만 원을 아낄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거다.
어쨌든 건물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보증금 다 깔 때까지 있어도 좋다.
그 이후에도 계속 장사하고 싶으면 매달 월세만 제때 내면 된다.
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이신가.
물론 나쁘게 생각하면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싶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월세만 매달 천만 원이 넘게 받는 분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제안을 하겠는가?
물론 박첨기는 조건을 걸었다.
계약 연장 시, 장사가 잘되면 아주머니와 협의했던 것처럼 월세를 올리겠단다.
또 하나 옵션이 있었다.
이자라고 생각하고, 한 달에 서너 번씩 들려서 사골 만둣국을 먹고 가겠다고.
맛이 변하지만 않으면, 조건은 계속 유효하다나 뭐라나?
“그나저나, 천경 어르신이 말한 귀인이 건물주 아저씨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하신 건물주님!
결국 이번에도 사골 만둣국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잘 먹었네 하면서 슬쩍 나가시는데, 정신이 없어서 미처 달라고 하지 못했던 거다.
하아~ 이거 원가만 무려 2,200원 짜리인데.
따지면 소소한 투정이긴 하다.
실제로 천경 어르신한테 받은 건 음식값의 수십 배였고, 주인아저씨가 내건 조건도 냉철하게 계산하면 그 몇 배나 이익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잘된 건 잘된 거니까.”
어쨌든 개시가 좋아서일까?
이날 무려 여섯 테이블이나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들이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칭찬까지 하고 가셨다.
“그래, 다시 장사 시작한다고 생각하자! 초심! 초심인 거다!”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오히려 희망이 보였다. 거기에 자신감까지 붙으니 오히려 활력까지 넘치려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릇 세 개나 깨먹었다.
***
“차였구나?”
정분석은 씨익 웃었다.
아무리 친한 형이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놀릴 줄은 몰랐다.
“사실 잘됐지. 음식하다 말고 카오톡 보고, 카오카오 울릴 때마다 폰 본다고 손 베이기도 했으니.”
“그건 잠깐 실수한 거고요.”
“마! 형님이 맞다면 맞는 거다. 세상에 땡초 썰다가 휴대폰 확인하는 놈이 어디 있냐?”
끄응.
갑자기 그때의 흑역사가 떠올랐다.
매운 고추를 다듬던 손으로 폰을 만졌고, 벨이 울리자 습관적으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 결과 입술이 퉁퉁 붓고, 눈이 매워서 한참을 울어야 했다.
“내가 봤을 때, 걔가 좀 과하기는 했다. 남친이 시종도 아니고, 채팅로봇도 아닌데, 무조건 1분 내로 톡을 보내라니…….”
“에이, 그렇게까진 아니었거든요.”
“그건 너만 모르는 거지. 회사 회식할 때 니가 어떤 추태를 부렸는데.”
“그냥 좀 일찍 들어간 거 가지고…….”
강형우는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이제와 들어 보니 조금 과하기는 한 모양이다.
노래방에서 3차를 달린(?)다고 벨소리를 못 들었다.
5분 뒤 전화가 왔는데, 미진이가 울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어떤 년하고 같이 있기에 자기 말을 씹냐면서!
문제는 그게 영상통화라는 거다.
스피커를 통해 음악 소리가 묻힐 정도로 욕설이 울려 퍼졌으니 모두가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금방 화를 풀기는 했지만, 한 번씩 미진이가 울컥할 때마다 난감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솔직히 집착이 과한 부분은 있었다.
자기가 외동딸이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설마 세상의 모든 외동딸들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 주차하고 있을 테니까, 넌 옆에 마트 가서 술이나 좀 사와라!”
“예.”
소주 여섯 병을 사고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올라갔다.
온천천 로얄 아파트.
여기 40평대가 오억 정도 할 거다!
분석이 형은 대출 한 푼 없이 아파트를 사 버렸다. 게다가 BMW를 몰고 다녔고, 곰 같은 형수와 짐승(?) 같은 조카들을 셋이나 키우고 있었다.
연 매출 이십억이 넘는 알짜 회사 대표.
동시에 유명 야식 가게도 지금은, 일곱 개나 운영했다.
말 그대로 정분석은 인생의 롤모델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형처럼 성공하고 싶었다. 열심히 해서 인정받고 나만의 가게를 운영하고 싶었다.
그게 지금의 내 마음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이 형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던 것이다.
***
IMF 때,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던 시절, 집안 형편을 생각해 대학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무조건 대학은 나오란다. 그 이후에 니 인생을 살아도 되니까 졸업장은 따라고 했다.
다행이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그럭저럭 적당한 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 석 달이 지났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보험사는 보상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뤘고, 지인의 도움 덕에 일부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가계가 기우는 건 당연한 상황.
결국 나는 대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입대를 했다.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용케 취직할 수 있었다.
무지개 공단.
지하철 1호선 종점에서 버스 타고 20여 분을 들어가야 하는 곳에 첫 직장이 있었다.
출퇴근은 엄두도 못 냈기에 숙소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공돌이로 살았다.
주야 3교대, 말만 그럴 뿐 거의 5일을 잔업해야 했다. 2교대 보다 더해서 거의 16시간을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때문에 쉬는 날은 피로에 쩔어 하루 종일 잠만 자야 했다.
유일한 낙은 식사시간이었다.
겨우 50여 명 규모의 공장이라 식당 운영을 외주로 줬는데 음식이 아주 때깔 나게 잘 나왔다. 그래서 두 그릇씩 먹었고, 운 좋게도 그 모습이 급식회사 사장님 눈에 띄었다.
“너 마음에 든다. 내가 키워줄게. 같이 일하자.”
공장 생활에 지쳐 있어 잠시 고민도 했었지만 그 말에 선뜻 따르기가 힘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사장 형을 약간 무시했었다.
허름한 스타렉스를 끌고 반찬통이나 나르던 형이었다. 설거지 거리와 먹다 남은 음식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걸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나를 좋게 본 것이 고마워서 친해지게 되었다.
형은 계속 나에게 같이 일하자 말해주었고.
그러다 간만에 시간이 되어 밖에서 따로 만나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밤늦도록 마신 뒤 숙소로 돌아가려니 버스도 끊긴 것 같아 조금 난감해하던 차에 형이 잠깐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잠시 뒤.
뽕뽕!
근사한 차 한 대가 앞에 섰다.
마크가 BMW였다.
차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크고 고급스러워 보였고, 순간적으로 차 주인이 부러웠다.
그때 운전석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으신 분이 내렸다.
그러면서 정분석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사장님, 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정분석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곧 대리기사님께서 일하던 공장 근처 숙소로 차를 몰았다.
솔직히 충격받았다.
이 형 차… 원래 짬 스타렉스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