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화 그동안 먹은 밥값이야
정말 백 세가 넘으신 게 맞나?
아니면 나, 사기당한 거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손님들이 몰려들면서 다시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저녁 마감하고 나서야 다시 그 일이 떠올랐다.
피식.
이상하게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긴, 장사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도 있는 거지.
가볍게 생각했는데 다음 날, 그 백발노인이 또 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
몇 년 전부터 금연에 관한 규정이 강화되었다.
술집이든 식당이든 내부 흡연은 금지였다.
그때 몇몇 가게에서 장난삼아 적어 놓은 문구가 이거였다.
100세 이상 흡연 가능!
난 그걸 패러디 하듯이 장난삼아 써 놓았다.
<100세 이상 음식값 무료>
솔직히 그때만 해도 백 세가 넘은 어르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백발노인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눈빛은 깨끗했다.
등산로 정상까지도 거뜬해 보이는 정정한 체력에 의외로 검버섯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였다.
솔직히 많이 봐줘야 칠십 정도?
그것도 반올림해서다.
그런 백발노인은 자신보다 열댓 살은 많아 보이는… 정말 꼬부랑 할아버지를 데려왔다.
설마? 백 세 넘으신 다른 어르신은 아니겠지?
다행이 아니었다. 그 할아버지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오셨습니까? 어르신.”
강형우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큰삼촌이 어제 이야기하더라고.”
“예?”
“라면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던데… 요즘 보기 드물게 어른 공경하는 청년이 있다고 극찬을 하시더군.”
강형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이름은 박첨기, 나이는 일흔여덟.
그 외에도 내가 아는 잡다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건 다 필요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이 분식집의 건물주라는 것!
어쨌든 박첨기 어르신이 어제의 백발노인을 큰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
강형우는 어이가 없어서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험험, 이 어르신은 말일세. 우리 아버님이 형님으로 모셨던 분으로…….”
건물주 박첨기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랬다.
6. 25 전쟁 때 아버지를 구했단다. 이후 의형제를 맺었고,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뵈었기에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으며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부하길 신선 같으신 분이니 잘 챙겨달랜다.
당연하게도, 공짜로 먹고 가는 밥값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하여간 있는 사람들이 더한다더니.
그래도 부담이 없었던 것은 그때 한창 장사가 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한 끼 정도는 마음 편히 드릴 수 있었고, 실제로 그냥 챙겨 드리는 분들도 없지 않았으니까.
그날 이후, 네 번째 방문했을 때, 백발노인이 말했다.
“거, 젊은 사장이 사람을 참 못 믿네.”
“예? 뭐가요?”
“눈빛 보면 딱이지. 아직도 내 나이가 안 믿기나?”
솔직히 의심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메고 다니는 낡은 등산 가방.
우습게 생각하고 한 손으로 들었는데 손목 빠지는 줄 알았다.
시멘트 한 포대 정도의 무게, 대략 사십 킬로는 넘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메고 서너 시간씩 등산할 정도였으니 체력이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쉽게 비교하면, 군대에서 완전군장하고 반나절 행군하는 정도라 보면 된다.
환갑 정도의 외모에 튼튼한 체력.
게다가 술도 우라지게 잘 마셨다.
한번은 저녁 늦게 가게를 찾아와서 산에서 캔 약초라며 달여 먹으면 체력에 좋다고 웬 풀뿌리를 건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좋다 하니 감사한 마음에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했다가 졸지에 안주를 만들어야 했다.
나도 술은 잘 마시지만, 백발노인은 괴물이었다.
혼자서 소주 여섯 병 정도 드셨을 거다.
그러고도 무거운 등산 가방을 매고 멀쩡히 잘 걸어가셨고, 가는 길에 배고프다며 해장국에 해장술까지 두세 병 마셨다는 것이다.
이러니 백 세 넘었다는 말이 믿기겠는가?
솔직히 십여 년 전, 이문세와 설운도가 동갑 친구라는 말에 충격 받은 적이 있었다.
이건 그 경우보다 더 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이거 가져왔지. 확인해 보게.”
백발노인이 내민 건 신분증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내가 손을 흔들자 백발노인이 손목을 잡았다.
맙소사. 이게 무슨…….
키 187㎝에 한때는 체중이 100㎏에 가까운 나였다.
장사하면서 많이 빠졌다지만 그래도 90㎏는 넘는 근육질 체형이었다.
또 학생 때는 싸움도 잘해 운동부 친구들도 꼼짝을 못할 정도였다.
그런 내가 손목을 잡힌 채 마구 휘둘리고 있었다.
턱.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니고, 확인해 보라니까.”
강형우는 당황해하면서도 일단 신분증을 쳐다봤다.
백수한무 (白壽限無).
111101-1XXXXXX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6X 번지
앵? 1911년생?
이거 실화냐?
가만, 올해가 2011년이니 우리나이로는 백하고도 하나다.
순간 멍해 있는데, 주소가 눈에 들어왔다.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절이 범어사다. 대충 보니 주소가 바로 그 근처였다.
어라? 거긴 스님들 말고는 사람이 안 사는데?
게다가 성함이…….
“백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가벼운 읊조림이 어느새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어깨로 리듬까지 타면서.
“커험!”
백발노인의 눈매가 장난이 아니었다. 슈퍼맨 눈에서 레이저 나갈 때의 그 느낌이랄까.
“아, 죄송합니다. 어르신 성함 가지고…….”
“됐고. 내 호는 천경일세. 다들 그렇게 부르지. 자네도 천경 어르신이라 부르면 되네.”
“예? 아~ 예.”
왜 다들 천경이라는 호로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이름을 말한다면 누구라도 아까 전 그 노래가 나오지 않을까.
대답하자마자 천경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순간 손을 슥~ 탁! 하면서 신분증을 가져간 뒤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한 그릇 부탁하네.”
이후 천경 노인은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가게에 들렸다.
그것도 일부러 내가 점심 먹는 시간에 찾아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 갔다.
그러면서 가끔씩 이상한 짓을 하는데…….
어느 날은 관상을 보겠다며 내 얼굴을 붙잡았다.
“혀를 내밀고 헉헉대니 개고생할 상이야.”
“한여름에 불 앞에서 요리해 보세요. 숨 빨리 못 쉬면 사람 죽어나가요.”
“아니, 개팔자라니까. 상팔자가 되는 건 나중이지만.”
도통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리고 열흘이나 지났나?
갑자기 손금을 봐 준다고 하더니 내 손목 관절을 뽑아 버렸다.
“힘이 과했나 보이. 괜찮아, 다시 끼우면 되니까.”
“예? 뭐라고… 끄헉!”
“그나저나 손금 선이 참 굵구먼. 얌생이처럼 가늘고 길게 살 팔자가 아니라, 내 똥 굵다고 굵직굵직하게 싸지르며 살 팔자네그려.”
백 세 넘은 노인이 래퍼도 아닌데, 찰진 비트에 덩어리진 단어가 귀에 쏙쏙 박혔다.
결국 그날 밤은 귀가 가려워 몇 번이나 자다 깨야 했다.
사실, 이 정도까지는 웃으면서 넘길 일이었다.
“자네 사주에 귀인이 셋이나 있는데, 첫 번째는 근시일 내로 찾아올 것 같고, 아니면 벌써 만났던가… 정말 중요한 건 두 번째 같은데…….”
“두 번째요?”
“그래. 전생에서 알던 사이인데 자네 엄청 뜯어간 놈이야. 팬티 속에 엽전까지 탈탈 털어갔어.”
“헐.”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아마 마구마구 퍼다 줄 걸세. 그게 만고의 이치니까.”
뭐, 좋은 소리려니 했다.
하지만 뒷말은 그냥 듣기 힘들었다.
“그리고 여복이 없어.”
“그건 또 무슨…….”
“불혹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없구먼. 게다가 그때 놓치면 평생 혼자 살 가능성이 커.”
살짝 짜증이 났다.
불혹이면 마흔인데, 그때까지 솔로라니.
아니, 애초에 틀렸다.
“저… 여자 있는데요? 저기 카운터에 있는 애가 제 여친이거든요.”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거 뭐시냐. 진정한 인연이란 건 말이야… 커험, 자네 왜 김밥을 도로 들고 가는 겐가?”
천경 노인의 집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생년월일을 물어보더니 손가락을 꼽는 게 아닌가?
“자축인묘, 진사오미… 갑을병정에… 묘시생이라…….”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요? 사주에 급살 맞아 죽는답니까?”
“내 살다 밥상 걷어차는 놈은 봤어도, 용상 걷어차는 사주는 처음이네.”
“예?”
“그런 팔자려니 해. 어쨌든 나이 먹고 돈 걱정은 안 하는구먼. 젊을 때 개고생한 만큼…….”
마지막 중얼거림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일도 며칠 만에 잊어버렸다. 장사가 너무 잘되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
“역시 자네가 끓여준 라면이 최고야.”
강형우는 천경 노인의 말에 회상을 끝냈다.
천경 노인은 스텐 컵을 잡았다. 그리곤 강형우의 잔에 부딪힌 뒤, 한 잔을 쭈욱 들이켰다.
“크하! 좋다.”
강형우 역시 눈치를 보면서 스텐 컵의 소주를 홀짝거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쭈우욱~
그냥 입술만 댔는데 술은 순식간에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직후 엄청난 향이 터졌고 코를 뻥 뚫어버렸다.
후아하~
신음이 끝나기도 전, 뱃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뭔가가 회오리처럼 솟아오르더니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캬하~
감탄사는 자동이었다.
마치 묵은 울화들을 내뱉는 기분이랄까?
“시원하냐?”
“잘 모르겠지만… 좋긴 좋네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고작 한 잔인데, 취기가 오르기 직전의 알딸딸함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속도 편안했고, 라면이 남긴 약간의 느끼함까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천경 노인은 술병을 들었다.
“내 동안의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이 약술에 있다 이거지. 그러니까 한 잔 더 마셔. 힘이 펄펄 날 테니까…….”
“아직 영업 안 끝났는데…….”
말과는 다르게 컵을 잡은 손이 자동으로 내밀어졌다.
다시 잔이 채워지고, 천경 노인이 권했다.
“이거 두 잔으로 안 취해. 아니, 애초에 취하는 술도 아니라네.”
안 취하는 술이 있을 리가?
생각과는 다르게 또다시 잔이 입술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술이 술술 넘어갔다.
세상에 이런 맛이 다 있다니.
“후아하~ 좋다.”
“좋지?”
천경 노인의 눈빛은 재롱잔치 끝나고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들 같았다.
그만큼 순진했고,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때?”
“좋긴 좋은데, 이만 마시려고요. 할 일도 많고…….”
아쉽기는 했지만, 두 컵이면 적지 않은 양이었다. 주방에 서야 하는 이상 자제해야 하는 거다.
천경 노인은 고개를 저은 뒤, 김밥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또다시 술을 따랐다.
“크흐, 좋다. 내가 이 맛에 술을 못 끊어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먹은 천경 노인은 단무지로 입가심까지 했다.
“크험. 늙은 영감 헛소리라 생각하지 말고 들어. 원래 사람이란 말이야.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러다 답답하면 술 마시고 술리대로 사는 거지. 그게 세상의 이치야.”
말이 뭔가 조금 이상했다.
아니, 많이, 이상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갑자기 천경 노인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나온 건, 또 술병이었다.
하지만 술김에 보기에도 좀 전 백년 묵은 도라지술보다 더 특이해 보였다. 병 안에 든 건, 연한 분홍빛을 띤 꽃이었으니까.
“이게 뭐죠?”
“뭐긴? 술이지.”
그냥 꽃으로 담근 술이라 하기에는 뭔가 달랐다.
마치 시선이 빨려든다고 할까?
멍한 표정으로 술병을 쳐다보는데, 천경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커험. 이건 내 선물일세. 그동안 얻어먹은 것도 있고, 자네가 기특해서인 것도 있고.”
“굳이 이러실 건 없는…….”
“떽. 어른이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되는 거야.”
강형우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천경 노인이 술병을 턱하니 식탁에 올렸다.
“그동안 먹은 밥값이라고 생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