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시작
“이미 제국은 무너졌다고 봐야 할 것이오.”
제국 최고의 기사인 게이트 후작에 이어, 제국 최고의 마법사이자 재상인 베르그 공작마저도 용맹한영혼의 거침없는 발걸음 앞에 희생당하는 동안 제국의 황제와 황실 가족들, 그리고 그동안 제국을 약하게 만들었던 귀족들은 황급히 황도를 탈출하여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처럼 제국 황제가 항쟁을 포기한 채 피난길에 오름으로써 사실상 제국의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을 향해 당당하지 못한 황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러한 이들 중 유일하게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는 이미 용맹한영혼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몇 차례 양측 간에 교전이 벌어졌지만 이는 진정으로 용맹한영혼의 침략을 격파하기 위한 총력전이 아닌, 단지 황제가 이들의 손에서 더 멀리 도망칠 수 있게 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전투였을 뿐이다.
연패.
적을 꺾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었던 이들이었기에 오히려 더 큰 피해만을 감수해야 했던 제국은 결국 체면이고 뭐고 모든 것을 내던지고는 로엔에 도움을 요청하여 왔다.
“하나 난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국을 도와야 한다니요?”
알마리온의 말에 크게 놀란 카산느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문하였다.
“그렇습니다. 폐하의 말씀처럼 이제 와서 제국을 도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대공.”
여왕의 부군이자, 또한 반정의 무리를 제압한 최대의 공훈자이자 아울러 유일하게 남은 최고위 작위를 가지고 있던 알마리온은 로엔 왕국 유일의 대공이 되어 있었다.
“폐하, 우리에겐 제국을 도와야 할 한 가지 이유가 있사옵니다.”
“한 가지 이유라니요? 그게 무엇인가요?”
“바로 용맹한영혼이라는 존재는 우리 왕국에도 매우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옵니다, 폐하.”
“하지만 그는…….”
도중에 말을 멈추기는 하였지만 카산느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한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용맹한영혼은 비록 양부이긴 하여도 들에핀꽃의 아비가 되는 존재였다.
그 말은 로엔이 원하기만 하면, 설사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저들과 화친을 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울러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듯 용맹한영혼은 유독 알마리온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것을 잘만 활용한다면 로엔 왕국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나 알마리온의 생각은 이들과 전혀 달랐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나 그것은 용맹한영혼이란 존재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옵니다.”
“그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하는 말이라니요?”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가 그동안 소신을 배려하였던 이유는 단지 자신의 용맹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옵니다.”
알마리온의 말이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카산느였다. 아니,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대전 안에 모인 모두가,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와 같이 알마리온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가 소신으로 하여금 그가 정복하지 않은 나머지 게르혼족들을 통합하게 부추긴 것 또한 그가 직접 그와 같은 일을 벌일 경우 너무나도 오랜 시간과 사람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을 뿐이옵니다.”
“으음…… 그렇다면……?”
“그렇사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였을 뿐이옵니다.”
알마리온의 설명에 비로소 용맹한영혼이 진정 원하였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카산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록 나약한 성정을 지닌 그녀였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일들을 겪어 오면서 이제 그녀는 자신이 내려야 할 결정에 대해서 물러서거나 회피하지 않을 때만 최선의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녀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곤 하였다.
“하면…… 군을 정비토록 하세요. 그리고…….”
“폐하! 그 일은 소신을 비롯한 몇 명이면 충분하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면…… 아니! 절대 그걸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만약 대공께서 진정 그라는 존재가 왕국의 평화를 깨뜨릴 위험한 존재라 판단하셨다면 총력을 기울여 그를 공격해야 하지 어찌 대공을 비롯한 몇 사람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인가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알마리온은 왕국의, 아니 자신의 중심이자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런 알마리온을 단 몇 사람만 대동시켜 전장이 한참 격화 중인 제국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이 백작.”
“…….”
카산느의 호명에 안드라스는 난처한 표정이 되어 카산느와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백작께서는 지금부터…….”
“폐하.”
“지금부터 전국에서 병력을 징집하도록 하세요!”
“폐하!”
“그만! 한마디만 더 하신다면 그대를…… 대공을 연금軟禁토록 할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카산느를 잠시 유심히 지켜보던 알마리온이 여전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채 말하였다.
“모두 자리를 비켜 주시오.”
“…….”
알마리온의 명에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실 수 있는 것이죠? 어떻게? 저와 두 분 언니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요? 예? 그리고 어머니는 또 어떻고요?”
“…….”
“말씀해 보세요. 당신에게는 우리 네 사람이 그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요? 정녕 그런 것인가요?”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내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이번에도 날 믿고, 내 결정을 따라 줄 수는 없는 것이오?”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아닌 그 누구를 제가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단 말인가요? 하지만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당신도 잘 아시지 않나요?”
그녀의 말처럼 이번 문제는 신뢰의 문제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6서클 마법사인 베르그 공작을 단번에 무찌른 자예요. 뿐만 아니라 제국의 자랑이라고 하는 마법병단이 가지고 있던 마법 물품으로 무장한 마법 전사들까지도 함께하고 있음을 당신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이어지는 카산느의 말처럼 당대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까지 올라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6서클 마법사인 베르그 공작도 용맹한영혼에 의해 순식간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된 전투에서 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마법 물품으로 무장한 마법 전사들의 활약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곳엘 아무런 병력도 끌고 가지 않겠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 당신이 진정 나를, 그리고 두 언니와 어머니를 생각하신다면…….”
간절하다 못해 애절하게 보이는 카산느의 모습에 알마리온은 잠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하나 그는 이내 흔들리는 마음을 다져 잡았다.
“이 길이 당신의 말처럼 우리 모두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면 당신은 믿겠소?”
“아뇨! 절대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러한 결정이 우리 모두를 위할 수 있단 말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없는…… 흑흑!”
감정이 격해진 카산느가 끝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알마리온은 그녀를 품에 안으려 하였다.
하나 카산느는 그런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하였고, 심하게 몸부림을 쳤지만 끝내 그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한 채 그의 품에 갇혀 버렸다.
“당신이 우려하는 일 같은 것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내 장담하리다.”
품에 안기긴 하였지만 여전히 몸부림을 치는 카산느의 여린 몸을 더욱 강하게 안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물론 그러한 그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늘 이렇게 너희 모두를 오라 한 것은 그 아이의 일 때문이란다.”
유르스나르의 부름을 받은 세 여인, 그러니까 들에핀꽃과 일레인 그리고 카산느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요즘도 그 아이와 너희가 서로 각방을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단다.”
3명의 여인 모두 알마리온이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단 몇 명만 함께하여 제국으로 건너가겠다는 말을 꺼낸 후부터는 알마리온에게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로 한 듯 하나같이 그를 피하고 있었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나 또한 그 아이가 다시금 그런 험한 곳에 가는 것만큼은 말리고 싶다는 말을 해 두어야 할 것 같구나.”
자식이 전장에 나아가는 것을 기꺼이 반겨 할 어머니가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유르스나르 또한 아들인 알마리온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삶과 죽음이 가깝게 공존하는 그러한 전장에 나아가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는 평범한 여느 어머니 중 1명일 뿐이었다.
하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세 며느리들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하나…… 난 너희가 그 아이에게 져 주었으면 하는구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그분이 전장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으신가요?”
알마리온의 첫 번째 부인인 들에핀꽃이 유르스나르의 말에 가장 먼저 반발하였다.
한데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는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마치 그녀 자신의 이름처럼 들에 피어난 꽃, 아니 잡초처럼, 그리고 잘 조련된 1명의 전사를 보듯 강인하면서도 날카롭게만 보이던 그녀였다.
하나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강인해 보이긴 하여도, 이제는 전사라는 느낌이기보다는 인상만 조금 그렇게 보일 뿐, 그녀가 한때 초원의 암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대단한 여전사였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헐렁한 복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배가 불러 있는 것이 임신 중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큰애야, 네 말처럼 나 또한 그 아이가 전장에 나아가는 것이 전혀 마뜩지 않지만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에 너희가 이번만큼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따라 주길 바라는 것이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머니? 그분의 이번 결정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니요?”
이번에는 일레인이 나서서 물었다.
“너희도 그 아이가 주술사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하면 이번 일 또한 신의 계시가 있었단 말씀이신가요?”
평소였다면 이처럼 유르스나르 앞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카산느가 알마리온의 일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하였다.
“그렇단다.”
“어머님께서 어찌 그것을 아실 수 있으십니까? 어머님께서는…….”
“설마? 혹 어머님께서도?”
카산느가 다시금 유르스나르의 말에 과민하게 반응을 하였지만 유르스나르의 말에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던 일레인이 카산느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렇단다. 우리 엘프들…… 그중에서도 나와 같은 하이엘프의 피에는 인간들의 표현으로는 주술사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엘프들 중에서도 혈통으로만 이어지는 엘프가 바로 하이엘프였다.
그리고 이러한 하이엘프들은 모두가 일족의 지도자였는데, 이는 이들이 바로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존재, 즉 신의 권능의 일부를 이어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능이란 바로 인간들이 주술사라고 부르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 또는 신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단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 또는 신의 아이들이라는 주술적인 능력을 타고난 존재들은 어려서부터 남들과는 다른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자라는 과정에서 그러한 자신의 재능을 얼마나 개발하는가는 전적으로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신의 선택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완성해 나가는 것은 자신들만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 아이와 같은 높은 수준에까지 올라간 선택받은 존재는 지금까지 단 1명도 없었단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들은 말이 아니었다면 세 여인 모두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한 일이었다.
하나 지금 유르스나르의 말을 듣는 세 여인의 마음은 그저 불안함만 가득할 뿐이었기에 이러한 말에 대한 자부심을 갖거나 느낄 정도의 여유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얼마 전 난 한 가지 꿈을 꾸었단다.”
이틀 전 유르스나르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알마리온과 세 며느리 그리고 여러 아이들과 함께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의 정상에 올라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굽어보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러한 꿈이 바로 신의 계시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산 중의 산인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은 허락되지 않은 존재에게는 결코 그 정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절대 성역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꿈에서였지만 그러한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의 정상에 모두가 함께 올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무한한 영광인 일이었고, 신으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따라 주었으면 하는 이유란다.”
사람에 따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꿈 하나를 믿고 아들인 자를, 세 여인의 남편인 자를,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인 자를 죽음의 길에 내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유르스나르의 태연함이 그저 놀라울 정도였다.
당연히 들에핀꽃도, 일레인도 그리고 카산느도 그러한 유르스나르의 말에 공감을 하기보다는 반발이 더욱 커졌을 뿐이었다.
하나 그것이 진정 신이 원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해진 길이었는지, 세 여인은 끝내 유르스나르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때 포넬에서 리처드와 함께하고 있던 레드로가 알마리온이 리처드에게 주었던 네 페니테를 가지고 일시 귀국을 하였다.
또한 초록 일족의 대족장이자, 유르스나르의 모친이며, 알마리온의 외조모가 되는 살라미스와 초록 일족 최고의 현자이자 또한 8서클 마법사가 된 라오니다스가 왕궁을 방문하였다.
“받거라.”
살라미스가 외손자인 알마리온에게 건넨 것은 바로 이들 일족이 지난 1천여 년 동안 보관해 온 한 벌의 망토와 한 쌍의 팔찌였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기만 한 그러한 망토였지만 실상 이 망토는 한 가지 전설이 담겨 있는 물건이었다.
또한 한 쌍의 팔찌도 그러했는데 이 또한 처음부터 이들 부족이 망토와 함께 보관하던 것으로 아무런 문양도, 표식도 없는 그저 투박하기만 한 단순한 팔찌였지만 이 팔찌 또한 망토와 함께 사람들의 기억과 기록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진 전설이 담겨 있는 그러한 물건들이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외조모인 살라미스가 건넨 두 가지의 물건을 보자마자 그 물건들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어떤 물건들인지 이내 알아보았다.
또한 살라미스도 자신의 외손자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들은……!”
“그래. 바로 그것이란다.”
“이것들이 일족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었습니까?”
“그렇단다. 그 물건들이 우리 일족의 손에 들어오게 되고, 그것이 또 네게로 전해지게 된 것 모두 신의 뜻일 것이다.”
신의 뜻이란 오묘하고도 또 오묘하여 그 누구도 그러한 신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네 친구라는 아이가 가져온 네 페니테라는 그 메일 또한 이것들과 본래 한 쌍인 것들. 그 모든 것이 네게 이어졌다는 것, 또한 네가…….”
살라미스는 말을 끊고 외손자인 알마리온을 유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것이 신께서 네게 부여하신 운명. 난 네가 신의 뜻을 온전히 완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감사합니다, 할머님.”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모두의 곁에 되돌아오길 신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마.”
“예, 할머님. 반드시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겠습니다.”
“그래.”
레드로가 가져온 네 페니테와 외조모인 살라미스가 가져온 한 쌍의 팔찌를 과거 라오니다스가 정령의 고향을 파괴한 이후 건네준 한 쌍의 팔찌와 함께 찬 알마리온의 모습은 천 년 전 이 땅 위에 처음 평화를 가져다준 한 사람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였다.
“주군…… 크흑!”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끝내 그나이제나우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훗! 이제야 그댈 온전히 알아볼 수 있겠군요.”
“주군!”
“후훗! 참으로 오랜 세월을 격해 이렇게 경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인연이구려.”
“…….”
“자! 이제 그분이 우리 두 사람에게 부여한 소명을 완수하러 갑시다.”
“예, 주군.”
알마리온과 그나이제나우 그리고 라오니다스. 이렇게 세 사람은 많은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후후! 이제 옛 기억을 모두 찾은 모양이군?”
“그렇네. 참으로 오랜만에 자네의 옛 모습을 보게 되는군.”
천 년이라는 시공을 격하고 다시금 만난 알마리온과 용맹한영혼, 아니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와 가론 폰 로드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블랙 드래곤 프락시텔레스였다.
“그래…… 감회가 새롭군. 내 오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날 긴장시켰던 존재인 그대를 다시금 이렇게 마주할 수 있다니 말이야. 후후후.”
과거 인간으로 유희를 즐기고 있던 중간계에 남아 있던 최후의 드래곤인 블랙 드래곤 프락시텔레스는 늘 하찮게만 여기던 인간들 중에서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존재가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고는 하였지만 그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드래곤.
그런 그였기에 모든 인간들보다 뛰어난 존재로 유희를 즐기려 하였지만 한 동네에서 살게 된 하찮은 인간인 알마리온에게 모든 것이 뒤지자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었다.
결국 그는 친구인 알마리온을 배신하고 그를 함정에 빠뜨려서야 알마리온을 제압할 수 있었다.
아니, 그를 제압하기 위해 그는 인간으로 유희를 즐기면서 스스로 설정을 하여 두었던 한계를 벗어던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만큼 알마리온 폰 폴랑은 대단한 존재였고, 그로 인해 이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동료 드래곤들을 제거하고 오직 자신만이 유일한 초월적인 존재로 남아 있던 프락시텔레스는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것이 그가 이 땅에서 정령술사라는 존재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이유였던 것이다.
또한 대대로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 세상에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들이 나타나지 않게 하라는 유언까지 남긴 이유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지.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마법과 같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거늘 말이야.”
프락시텔레스의 말에 알마리온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훗! 아직도 자네는…… 아니, 이 땅 위에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드래곤인 프락시텔레스 그대는 왜 신께서 그대를 이 세상에서 소멸시키려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군.”
“무슨 말이지?”
“모르겠는가, 마법이란 신을 거스르는 힘이라는 것을? 그로 인해 그대가 신의 노여움을 사고 있음을?”
원래 마법이라는 것이 처음 생겨난 것은 대략 1천5백 년 전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마법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는 존재는 그 누구도 없었다.
한데 알마리온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마법이란 것을 처음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블랙 드래곤인 프락시텔레스라는 것이다.
본시 드래곤이란 존재는 신이 중간계가 천계와 마계로부터 고통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수호자였다.
이들은 신이 자신들을 창조한 의지에 따라 중간계에 존재하면서 천계와 마계로부터 중간계를 보호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오고 있었다.
하나 오랜 시간이 지니고, 신에 의해 천계와 마계가 더 이상 중간계에 개입할 수 없게 되어 버리자 이들 드래곤이라는 존재 또한 필요치 않게 되었다.
하여 신은 이들 드래곤들에게 일체의 활동을 금하였다. 하나 이들 드래곤들을 곧바로 모두 소멸시키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동안 자신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뜻을 받들어 중간계를 수호해 온 이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렇게 드래곤들이 신의 뜻에 따라 모든 활동을 멈추고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소멸의 때를 기다리며 무료한 삶을 이어 가고 있을 때.
블랙 드래곤인 프락시텔레스는 오랜 세월 한 가지 연구에 몰두하였다.
바로 마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힘인 마법이라는 것을 창조해 낸 것이다.
“훗! 마법이 신을 거역하는 힘이라 했나?”
“물론. 그대도 잘 알 텐데? 마법이라는 것이 순응의 힘이 아닌 역행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역행의 힘과 순응의 힘.
마법이나 정령술이나 기본적으로 마나를 가지고 행하는 수법들이었다.
하나 정령술은 정령이라는, 말 그대로 순응의 힘의 정화라면 마법은 마나 사이에 일어나는 반발을 극대화시켜 전혀 다른 힘, 즉 역행의 힘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크큭! 순응과 역행이라? 그 둘이 본시 하나라는 것을 너 또한 잘 알 것이다.”
프락시텔레스의 말처럼 순응과 역행은 서로 다른 모습이긴 하여도 그 둘이 온전히 다른 것은 아니었다.
순응이라는 것이 있기에 역행이라는 것도 존재하며, 반대로 역행이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순응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후후후! 참으로 어리석군. 신이란 존재가 이처럼 편협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니…… 크하하하하!”
프락시텔레스의 광소가 온 천지에 울려 퍼지자 이들 주변에서 거칠게 일던 광란과도 같은 살육이 일시에 멈춰 버렸다.
“신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다니 더욱 어리석군.”
“크크크큭! 그게 무엇이 어떻단 말이지? 내가 신이란 것의 명령을 받은 너란 하찮은 인간을 상대로 이기면 그것은 신이란 존재가 틀렸음이 증명되는 것이고, 반대로 내가 네놈에게 패한다면 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소멸되면 그만인 것을 말이야. 안 그런가? 크크크큭!”
신의 의지에 의해서 창조되고 신의 의지에 따라 중간계를 수호해 온 드래곤인 프락시텔레스였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신이란 존재를 부정해 온, 아니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마법이라는 힘으로 신이란 존재를 능가하고자 하였던 프락시텔레스였다.
“신을 대신하여 나를 응징하기 위해 이곳에 서 있는 너 알마리온 폰 폴랑. 내가 그댈 상대로 승리한다면 이 세상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프락시텔레스의 검은 눈동자에서 광기의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나 프락시텔레스에 의해 이 땅의 모든 질서가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며 나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세상은 더 이상 신이란 존재는 없을 것이다. 아니! 나 프락시텔레스만이 모두의 우러름을 받는 유일한 신이 될 것이다. 크하하하!”
광기에 찬 프락시텔레스의 행동에 알마리온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그의 광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센 기운에 마찬가지로 한데 뒤엉켜 서로를 죽이던 양측의 군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으로 멀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끝까지 어리석은 생각을 하다니…….”
프락시텔레스의 광기에 젖은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신의 뜻에 따라 신을 부정하고 거역한 프락시텔레스를 제거하는 일만 남았음을 깨달았다.
“신께서 내게 부여하신 고귀한 권능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알마리온의 몸 주변에는 갖가지 형상의 이상한 문양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최고의 정령들을 소환하였다.
“으음…….”
한데 알마리온이 소환한 정령들의 정체를 깨달은 프락시텔레스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마리온이 소환한 최고의 정령들. 그들은 바로 물과 불, 바람과 대지의 정령왕들이었던 것이다.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 불의 정령왕인 샐리온,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 대지의 정령왕인 노아스.
이들 네 정령왕들 중 단 하나만의 존재라도 세상에 재림하여도 세상의 흐름이 뒤엉킬 수 있건만 네 정령왕 모두가 한 사람에 의해 소환되자 이들 네 정령왕들로 인해 모든 것이 혼돈에 빠져들었다.
“훗! 실로 대단하군. 내 생전에 정령왕들 모두를 이렇게 한자리에 볼 수 있다니 말이야. 크크크! 한데 어쩌지? 이들 넷으로 인해 신이란 존재가 그토록 떠들어 대던 순응의 질서가 파괴되고 있음이니 말이야. 크하하하하!”
“…….”
마지막까지 광기에 미쳐 스스로를 신격화하려는 프락시텔레스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 나 프락시텔레스가 왜 신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분명히 알려 주리라!”
“어리석은 존재여! 신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임을 분명히 알려 주리라!”
훗날 지상 최후의 전쟁, 신의 심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알마리온과 프락시텔레스와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 아직도 한참 가야 하나요?”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 보는 이로 하여금 귀여움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하여 주는 매우 귀여운 인상의 소년이 알마리온의 목에 목말을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지친 표정으로 투정을 부렸다.
한데 그 옆에서 숨이 차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알마리온의 걸음을 따라잡고 있는 12세 정도 되어 보이는, 전체적으로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또 다른 소년이 투정을 부리는 어린 동생을 나무랐다.
“칫! 지글로, 넌 아버지가 목말을 태워 주고 있잖아? 그런데도 힘들다는 거야?”
“힝…… 제롬 형 미워! 만날 나한테만 뭐라고 하고!”
“뭐야? 이 녀석이…….”
“그만! 둘 다 그만해. 신성한 이곳까지 와서도 투닥거리는 것이냐?”
목말을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정을 부리는 막냇동생인 지글로와 그런 동생을 나무라는 동생인 제롬의 모습에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걷고 있던 16세 정도 되어 보이는 푸른하늘이 나름 묵직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이들 3명의 소년들은 알마리온과 들에핀꽃, 일레인 그리고 카산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알마리온이 프락시텔레스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제국으로 향할 당시 이미 만삭이었던 들에핀꽃에게서 태어난 푸른하늘은 열여섯 살이란 나이가 되었고, 일레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인 제롬은 열두 살이, 그리고 카산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인 지글로는 다섯 살의 나이였다.
이처럼 알마리온과 3명의 여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알마리온의 모습 또한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들 네 부자는 지금 오직 허락된 자들만이 오를 수 있다는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다 왔구나.”
프락시텔레스와의 최후의 결전을 끝내고 그의 허물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의 정상에 올랐던 알마리온은 이후 두 번째로 이 산에 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사랑하는 3명의 아내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과 함께.
“와!”
“오!”
“…….”
지난 며칠 동안 척박하기만 한 산에서 생활하며 꾸준히 산의 정상에 오른 이들 네 부자는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의 모습에 절로 탄성과 함께 알 수 없는 경외감 같은 것이 샘물 솟듯 솟아올랐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는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자연의 위대함과 그러한 위대한 자연을 창조한 신이란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보이느냐?”
“예, 아버님.”
“이 세상이 앞으로 너희 세 형제가 다스려 나가야 할 세상이란다.”
들에핀꽃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인 푸른하늘에게는 초원의 이스턴족을, 일레인에게 태어난 둘째인 제롬에게는 리처드의 복수를 도우면서 얻게 된 공작의 작위와 영지를 비롯하여 대공이라는 작위와 함께 혼테르를, 카산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인 지글로는 카산느의 뒤를 이어 로엔 왕국을 통치하는 왕자의 신분이 주어졌다.
“아…….”.”
“…….”
알마리온의 말에 푸른하늘과 제롬, 그리고 아직은 그저 장난을 치기에 바쁜 지글로의 입에서는 다시 한 번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은 너희가 아님을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위대하신 신이시며, 그러한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임을 말이다.”
“예, 아버님.”
“반드시 명심하거라. 너희는 지배자가 아닌 보호자일 뿐이라는 것을. 저 땅 위에 살아갈 모든 존재들이 너희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보호자에게 올리는 고마움의 표시임을.”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또한 명심하거라.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의 아이들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이 땅의,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그날이 패망의 날임을.”
“분명히 기억하겠습니다, 아버님.”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지만 이들 네 부자의 눈과 마음에는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들의 눈과 마음이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우러러보는 눈과 가장 낮은 이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낮은 자의 눈과 마음이 가득할 뿐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