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이제 시작하지.”
“……!”
용맹한영혼의 말에 세찬 격동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무거운돌이었다.
“훗! 그렇게 좋은가?”
격동에 겨워하는 무거운돌의 모습에 용맹한영혼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어찌 좋지 않겠는가? 자네와 나의 평생의 염원을 비로소 시작하는 것인데 말이네.”
“하긴…… 참으로 오래된 염원이었지…….”
“그렇지. 35년 전의 일이니까 말이야.”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눈에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제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들 게르혼족들을 분열시켰고, 그 결과 제국의 국경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늘 제국 측의 앞잡이가 된 부족들과, 제국의 영향을 벗어나려는 게르혼족들 사이에서 수시로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용맹한영혼이나 무거운돌이나 이러한 다툼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이들 두 사람의 목표는 바로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그 한 가지를 위해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지난 35년 동안 준비해 온 일을 시작한다고 하니 그만큼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쉽지는 않을 것이야.”
“물론 그럴 것이네. 그동안 쌓인 것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렇지.”
“하지만 자네 앞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네.”
“하하하! 물론이지.”
“한데 그 아이는 어떻게 하겠는가?”
“누구? 아! 알마리온 말인가? 그 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하지만…….”
무거운돌은 내내 알마리온이란 존재가 신경이 쓰였다. 알마리온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늘 그를 경계하였다.
“훗! 그 아이는 결코 비겁하게 뒤를 공격하는 녀석이 아니야.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그 아이라면 전쟁보다는 자신을 돌보는 일에 더욱 전념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네.”
“…….”
“그보단 어떻게 하면 제국 놈들한테 화끈하게 혼쭐을 내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나. 하하하하.”
“훗! 그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저들에게서 빼내 온 마법 물품들이라면 충분히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네.”
“하하하. 저들에게서 가져온 것으로 저들을 무찌른다…… 그것도 좋지. 한데 말이야, 그 아이에게 마법 아이템이란 것을 좀 얻어 오면 어떨까?”
“마법 아이템을 말인가?”
“그래. 그거 꽤 성능이 좋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그가 그것을 과연 우리에게 줄까?”
“후훗! 자네 나와 내기하지 않겠나?”
“내기? 무슨 내기 말인가?”
“그 아이가 그것을 건네주느냐, 안 주느냐를 놓고 말이네.”
“내기 말인가?”
“그렇지. 어떤가?”
“후후.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한데 무엇을 내걸자는 것인가?”
한 사람은 이미 가질 만한 모든 것을 가진 이였기에 달리 필요한 것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내기를 하자고 하니 내기가 잘 성립될까 싶었다. 하지만 의외로 내기는 쉽게 성립이 되었다.
“내기의 결과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으로 하지.”
“각자가 원하는 것?”
“그렇네. 자네가 이기면 그 아이를 치도록 하지. 대신 내가 이기면…….”
“자네 말에 따르라 이것인가?”
“그렇네. 어떤가?”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내심 알마리온이 마법 아이템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내기에서 지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그분이 마법 아이템을 지원해 달라고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레이트 칸.”
용맹한영혼이 마법 아이템을 원한다는 말에 그가 드디어 제국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직감한 알마리온이었다.
“알겠소. 하면 조만간 준비토록 하겠소.”
“예? 예…….”
사나운주먹은 알마리온이 선뜻 용맹한영혼이 요구한 마법 아이템을 내주겠다고 하자 오히려 멈칫거렸다.
실상 그는 이번에 사자로 오면서 그는 무거운돌에게 한 가지 밀명을 받은 일이 있었다.
마법 아이템을 요구할 때 알마리온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만약 알마리온이 조금이라도 곤란한 내색을 하거나 생각한다거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면 그러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후에 귀환 후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이를 알아보라 한 것은 알마리온의 반응이 어떠한가도 내기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마법 아이템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만 내기를 하려 하였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불리하단 느낌이 들었는지 무거운돌은 알마리온의 상태까지도 내기에 넣자고 하였던 것이다.
‘이번 내기는 그레이트 칸께서 이기셨군. 한데 칸께서는 어떻게 이자에 대해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
용맹한영혼이 알마리온을 본 것은 실상 며칠 동안뿐이었다.
한데 그 며칠 동안 본 것만으로도 어떻게 그렇게 알마리온에게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사나운주먹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소렌토에 머물면서 사나운주먹은 알마리온이란 자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으며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의 마력과도 같은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꼭 그들에게 마법 아이템을 넘겨주어야 했습니까?”
“하하. 불안한가?”
안드라스의 말에 알마리온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알마리온이 선뜻 용맹한영혼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워낙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했다.
한데 그러한 것을 상당량, 아니 왕국에서 보유한 거의 전량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이러하니 처음 알마리온과 같은 생각이었던 안드라스 또한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렇습니다. 주군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많은 양을 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네. 자네도 제국의 관리를 지냈으니 잘 알 것이네. 제국이란 곳이 드러나지 않은 힘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를 말이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제국을 모두 장악하게 되면 그다음은 주군이…… 아니, 왕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글쎄…… 아마도…….”
용맹한영혼이 제국을 무너뜨린 후에 그 칼끝을 로엔 왕국이나 알마리온이 장악한 초원으로 돌릴 수 있다는 안드라스의 경고에 알마리온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혹시……?”
“아직은 모르네. 다만…… 아닐세. 자!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알마리온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직감을 한 안드라스가 되물었지만 알마리온은 그에 대한 대답을 피하고는 말 머리를 돌려 왕궁으로 향하였다.
“하하하하! 거 보게. 내가 뭐라고 했나? 그 녀석이 그런 녀석이라고 했지? 하하하하!”
내기에서 이긴 용맹한영혼은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반면 내기에서 진 무거운돌의 표정에는 낭패함이 가득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을 무너뜨려 보자고.”
“후…… 알겠네.”
내기에서 지게 된 것이 조금은 분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오랜 꿈인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검은발족의 공세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하나 주력은 역시 용맹한영혼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였다.
용맹한영혼은 자신이 직접 군을 지휘하여 제국 최고의 기사인 게이트 후작이 지키고 있는 제국의 관문인 타르탄 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훗! 역시 제국 최고의 기사답게 잘 버티는군?”
검은발족의 정예 20만 병력을 상대로 5만 병력을 가진 게이트 후작은 벌써 이십 일째 이들의 공세 속에서도 잘 버텨 오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용맹한영혼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게이트 후작의 능력은 대단했다.
하나 용맹한영혼의 이러한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무거운돌의 심사는 불편하기만 하였다.
실질적으로 군의 움직임 모두를 계획하는 것은 그가 맡은 책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티긴 힘들 것이네.”
“크큭! 알겠네. 내 자네 말을 믿도록 하지. 하하하하!”
그 말을 끝으로 용맹한영혼은 아예 막사를 나가 버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무거운돌이 버럭 큰 소리를 냈다.
“그들을 불러라!”
그들이란 바로 마법병단에서 탈취한 마법 물품으로 무장을 한 검은발족 최고의 전사들을 말하였다.
이들 또한 익스퍼트의 수준에 올라 있는 자들로 하나같이 그 용맹함을 인정받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마법병단에서 탈취한 마법 물품들로 무장을 하여 그동안 은밀히 이러한 마법 물품들을 몸에 익히느라 모처에서 맹렬히 수련을 하고 있었다가 이번 전투를 위해 모두 동원된 상태였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처럼 이들이 전면에 나서자 상황은 순식간에 변하였다.
이들이 착용한 마법 물품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바로 방어력과 공격력이 평소의 능력보다 몇 배나 배가시켜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성벽 위에서 쏟아지듯 떨어지는 바위와, 뜨겁게 끓인 기름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피해도 없이 성문을 단번에 격파하였다.
그렇게 성문이 격파당하자 천하의 게이트 후작과 검은발족의 공격이 있기 직전 타르탄 성에 집결한 발락 기사단 또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군, 구스타프 폰 게이트 후작.”
용맹한영혼은 앞에 끌려가 무릎이 꿇린 게이트 후작을 손수 일으켜 의자를 내주었다.
“후후, 그렇군요. 10년 전에 뵙고는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공 전하.”
“훗! 아직도 날 대공이라 부르는가?”
“아니시진 않으니까 그리 부를 수밖에 없겠지요.”
“하하하! 뭐, 그런 호칭 따위야 아무렴 어떻겠는가.”
게이트가 굳이 용맹한영혼을 검은발족의 그레이트 칸이 아닌 블랙 대공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제국의 신하임을 깨닫고 이쯤 해서 물러나기를 바라는 때문이었다.
하나 그런 게이트의 의도를 용맹한영혼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 버렸다.
그런 말장난에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었다면 아예 시작부터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보단…… 내 10년 전에 내가 했던 제안은 어떻게 생각해 보았는가?”
10년 전 용맹한영혼이 제국의 황제로부터 대공이라는 작위를 수여받은 후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두 사람은 처음 대면을 하게 되었다.
그때 용맹한영혼은 게이트 후작을 보고는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제안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도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지금도 소관은 제국의 신하임을 영광으로 알고 있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훗! 하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네다운 것이지.”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아쉽군. 그 아이와 함께라면 아주 좋은 짝이 되었을 것인데 말이네.”
“……?”
용맹한영혼의 말에 게이트 후작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졌다.
하나 용맹한영혼은 그런 궁금증을 풀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중히 보내 드려라.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진정한 사내이자 또한 기사이니. 마지막 가는 길에 한 점 부끄러움이나 치욕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그레이트 칸!”
“또한 그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라.”
“예!”
“그럼…… 잘 가시게.”
“그리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용맹한영혼과 게이트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마지막 심정을 담은 눈길을 교환한 후 모든 것을 체념한 게이트 후작의 눈이 굳게 감기었다.
그런 그를 몇몇 전사들이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것이 이들이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타르탄 성이 함락당하였습니다. 또한 그곳을 지키던…… 게이트 후작 각하께서…….”
“음…….”
게이트 후작의 전사 소식과 타르탄 성의 함락 소식은 실질적으로 제국을 움직이고 있는 베르그는 깊은 탄식을 하였다.
게이트 후작은 그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문의 마법사들뿐이었다.
“이럴 때 마법병단만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어도…….”
“저…….”
“뭔가? 더 보고할 것이 남아 있나?”
“저…… 그것이…….”
“말하려는 것이 뭔가?”
자꾸만 주저하면서 눈치를 보는 부관의 행동에 짜증이 난 베르그가 다그쳐 묻자 그제야 다시금 눈치를 보며 남아 있는 보고를 마저 하였다.
“그것이…… 마법병단의 도난당한 마법 물품이…….”
“그것들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냐?”
“아무래도 저들 손에…….”
“뭐라고? 그것이 저들 손에? 하면 저들이……?”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럴 수가…… 하면 처음부터 그들이?”
갑작스럽게 마법병단이 사용할 마법 물품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 확인되자 제국은 발칵 뒤집혔었다.
한데 그러한 일을 벌인 장본인이 바로 용맹한영혼이라는 보고를 접하자 베르그는 더욱더 절망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그토록 많은 준비를 하였건만 타르탄 성이 그리 쉽게 무너졌다 싶었더니…….”
검은발족의 침공로 중 일 순위로 꼽힌 곳이 바로 타르탄 성이었다.
그런 만큼 타르탄 성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꾸준한 준비를 하여 왔다.
그런 타르탄 성이 공격을 당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돼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보고는 제국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베르그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데 그러한 원인이 이제야 비로소 밝혀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원인이 밝혀졌다 하여서 그렇다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법 물품들이 용맹한영혼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이 그를 더욱더 골치 아프게 만들 뿐이었다.
아니, 골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국의 운명이 절망감만이 더욱더 들 뿐이었다.
제국의 황도가 저 멀리 아련히 보이는 곳에서 베르그 공작이 직접 이끄는 제국군과 용맹한영혼이 이끄는 검은발족이 대치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제국군이 승리를 거둔다면 가장 큰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용맹한영혼 측이 승리를 한다면 제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하나 대부분의 예상은, 아니 제국군을 지휘하는 베르그 공작이나 베르그 공작 가문의 마법사들, 그리고 지휘관들은 이미 자신감을 크게 잃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뇌부의 모습에 병사들 또한 크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처럼 당장 창칼을 앞에 둔 지휘부와 병사들 모두가 위축되어 있다는 것은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이미 절반쯤 승부가 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오.”
“그렇군. 그동안 잘 지내셨나?”
전투를 앞두고 양측의 최고 지휘관인 용맹한영혼과 베르그가 마주하였다.
“그대가 그대의 세상에만 머물렀다면 아마도 난 편히 이 세상을 마쳤을 것이오.”
“훗! 이곳도 나의 세상이라면 어떻겠는가?”
“음…….”
“내가 존재하는 그곳의 모든 것이 바로 나의 세상인 것이지. 후후후!”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면 아마도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용맹한영혼이었기에 그 누구도 이러한 말에 반발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베르그 또한 그의 이러한 말에 반발심이 일기보다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항복하게. 이게 그대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 뒤에 서 있는…… 자네가 그렇게도 걱정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도 최선의 결정일 것일세.”
“허허. 그럴 수 없음을 그대 또한 잘 알고 있지 않소?”
“왜 그럴 수 없다고만 생각하는 것인가?”
“그건 내가 제국의 재상이기 때문이오.”
“지금의 제국이 없어진다 해서 달라질 것이 뭐 있단 말인가?”
“많이 다르오.”
“훗! 세상에 그대들 민족만 존재한다고 여기는가?”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우리 민족이 그대들 말처럼 야만인이라서?”
“…….”
“그대들은 우릴 늘 야만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가 가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네. 그렇지 않은가?”
“…….”
용맹한영혼의 말에 베르그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맞는 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말을 반박할 말도 찾지 못하였기에 베르그는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한 가지 약속을 하지.”
“무엇을 말이오?”
“그대가 항복을 하면 설사 나의 편에 서서 나를 위해 앞장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난 그대를 해치지 않을 것이네.”
“음…….”
“하나…… 만약 그대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을 한다면, 난 그대가 그토록 위하고 아끼는 이 제국을 철저하게 무너뜨릴 것이네. 자네 같은 자라면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 것이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용맹한영혼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이후부터는 그는 철저하게 제국을 파괴하고, 자신들에게 반하는 제국의 백성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짓밟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정녕…….”
“정확히 하루의 시간을 주지. 만약 그 안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 또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볼 것이네.”
“으음…….”
“마지막으로…… 그댄 할 만큼 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군.”
그 말을 끝으로 용맹한영혼은 말을 몰아 진영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허허…… 그릇의 크기부터가 너무나도 다르구나.”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는 용맹한영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베르그는 이미 제국의 명운이 다하였음을 절감하였다.
그는 자신이, 자신이 이끄는 군이 결코 용맹한영혼이나 그가 이끄는 군을 상대로 이길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너지면 이 제국의 명운 또한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제국의 축인 황제와, 황태자를 비롯한 황실의 인물들이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 이 일을 어이해야 할꼬…… 이 일을…….”
베르그의 노안에서는 어느덧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왜 시간을 주는 것인가?”
베르그와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온 용맹한영혼으로부터 하루라는 시간을 주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무거운돌이 힐책을 하였다.
“후후. 왜일 것 같은가?”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 묻는 것 아닌가?”
“아니, 자네는 잘 알고 있을 것이야. 안 그런가?”
“…….”
최근 들어 무거운돌은 친구이자 주군이며 또한 자신의 우상이기도 한 용맹한영혼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자주 있었다.
이번 일도 그러했다.
자신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행동은 곧바로 결판을 내고 황도로 진격해 들어가 황제를 비롯한 황실의 피를 이은 자들 모두를 처형하여 신속하게 제국의 구심점을 없애는 것이었다.
하나 용맹한영혼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고 있지를 않은가.
물론 무거운돌은 용맹한영혼이 왜 굳이 주지 않아도 좋을 시간을 주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와 황실 가족들이 피난을 떠나게 되면 자연 전쟁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국은 더욱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용맹한영혼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설사 제국 황제와 황실의 혈통을 이은 자들을 재빠르게 제거한다 하더라도 제국 내의 숨겨진 저력은 결코 이민족, 그것도 자신들 스스로가 야만인이라고 여겼던 초원의 부족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크게 반발하려 들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심점인 제국의 황제가 쫓겨 다닌다면 이러한 숨겨진 저력은 오히려 어느 순간 이전까지는 각개격파를 당하게 될 것이었다.
이는 제국의 황제란 인물의 편협함 때문으로, 그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증오와 반감만이 가득 찬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제국의 황제라면 아주 다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제국을, 그리고 황실을, 황제를 버리고 떠나 버린 자들을 쉽게 다시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고, 설사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하나 그것은 결국 더 큰 힘을 만들지 못한 채, 마치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모래처럼 스스로 가진 것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결과만 만들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국은 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더욱 잔인하게 짓밟히게 될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난 자네란 사람을 늘 봐 왔지만 요즘처럼 자네가 낯설게 느껴진 적은 없었네.”
“훗! 난 여전히 자네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일 뿐이야.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자네가 난 더 이상하군.”
“…….”
“내일…… 저들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네.”
“…….”
“난 좀 쉬고 싶으니 나머진 자네가 알아서 해 주게.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막사를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거운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국 이리되었군?”
“숙명이지 않겠소?”
“하긴. 아쉽군.”
“…….”
“게이트 후작도 그렇고 그대도 그렇고 끝내 어리석은 선택을 하니 말이네.”
“그대에게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소.”
“그런가? 훗! 하면 최소한 후회는 없겠군?”
“후회라……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찌 후회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도 베르그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리고 이곳에 남은 모두에게 이것이 최선이라고 다짐하고 다짐시킨 자신의 결정이 진정 모두에게 최선이길 바랐다.
“한데 대충 보아도 어제보다는 많이 줄었군?”
눈길을 돌려 주변을 둘러본 용맹한영혼은 제국군의 군세가 어제보다는 상당히 많이 줄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훗!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만하군.”
단 하루 사이에 병력이 상당히 줄어든 것은 다름 아닌 탈영 때문이었다.
한데 실상 이처럼 한눈에 보아도 병력이 줄어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막지 않았던 게로군?”
“…….”
백성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지 희망이 없기 때문에 병사들의 이탈을 방치한 것이었다.
“어쨌든 난 어제 분명히 경고하였을 것이네.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무너뜨려 주겠다고 말이네.”
“잘…… 알고 있소.”
“그럼 시작하지.”
“쉽지는 않을 것이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베르그의 표정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니 단 한 가지 일념만을 갖게 된 그의 표정은 오히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훗! 이제야 그런 표정을 볼 수 있게 되었군. 하나 너무 늦었음이야.”
베르그의 표정에서 그의 심경을 모두 읽은 용맹한영혼은 한 줄기 아쉬움이 느껴졌다.
앞선 게이트 후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위인이라 할 수 있는 또 한 사람이 이렇게 안타까운 끝맺음을 하여야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결말을 맺어 줘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아픔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
“감사하오. 그럼!”
훗날 플레툰 폰 베르그라는 한 노영웅의 짧지만 긴 위대한 투쟁의 대서사시가 만들어진 전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