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
“어리석은 것들…….”
용맹한영혼은 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로엔의 귀족들의 행태를 보며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야 원래부터 제국의 눈에 들기 위해 제국 황제의 발바닥이라도 핥아 댈 자라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후훗!”
“아마도 제국에서 보내기로 한 그 마법병단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믿는가 보지.”
용맹한영혼의 말에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짓는 무거운돌이었다.
“하하하! 그렇다면 지금쯤 아주 난리가 났을 것이네. 하하하!”
마법병단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번에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무거운돌이었다.
“훗! 당연히 그러겠지. 그 마법병단이 지니고 있던 마법 물품들이 이미 거의 모두 도난당한 상태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하하하하!”
결국 용맹한영혼 또한 박장대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한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란 말인가?
“쳇! 도둑질을 명령한 장본인이 너무 통쾌해하는 것 아닌가?”
용맹한영혼이 박장대소를 하자 무거운돌은 살짝 심술을 부렸다.
“하하하, 재미있지 않은가? 제국은 물론 로엔의 멍청이들 또한 지금쯤 허둥거리며 마음 졸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말이네. 크크크!”
“하하하! 그건 자네 말이 맞네. 하하하하!”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두 사람의 눈에는 살짝 눈물까지 맺힐 정도였다.
용맹한영혼이 충분한 힘을 비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국의 국경을 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로엔 왕국이라는 존재가 성가셨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바로 제국의 힘의 근원인 마법병단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은 은밀히 하나의 계획을 세웠고, 얼마 전 그 계획을 실행하였으며 성공을 거두었는데, 바로 제국의 힘의 근원인 마법병단이 보유하고 있는 마도 제국 시절에 제작된 마법 물품의 탈취였다.
마법병단이 보유한 마법 물품들은 그 하나하나가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이러한 마법 물품은 특별히 황궁과 황궁에서 별도로 건축한 특별한 보관 장소에 이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법 물품이 보관된 장소에는 마법사와 기사 들이 철저히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하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언제나 처음의 의도가 끝까지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제국은 이미 부정과 부패, 사치와 향락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빈틈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용맹한영혼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으로 마법 물품들의 탈취를 명령하였고, 그러한 명령을 받은 무거운돌은 마법 물품이 보관되어 있는 관리들에게 그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막대한 재물을 건네주고는 창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마법 물품 모두를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마법병단은 단지 익스퍼트 수준에 올라 있는 기사단에 불과한 상태로 익스퍼트라는 존재가 그리 상대하기 쉬운 존재가 아님은 분명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포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 이제 뒤를 정리하도록 하지.”
“알겠네. 한데 말이네, 그가 움직이게 되면 어찌할 텐가?”
무거운돌이 말하는 그는 바로 알마리온이었다.
“훗! 자네도 잘 알면서 뭘 물어? 그 아이가 움직이려 했다면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이미 움직였을 것이야.”
“그래도 만약에 말일세. 그럴 경우에는 내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겠는가?”
“하하, 그렇게 하도록 하게. 만약 우리가 움직였을 때 그 아이가 움직인다면 그건 내가 그 아이를 잘못 보았다는 뜻이니 말이네. 하하하.”
여전히 알마리온이란 존재에 대해 심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무거운돌을 보며 용맹한영혼은 재미있어했다.
하나 무거운돌은 친구이자 주군인 용맹한영혼의 이러한 태평스러움이 못내 불안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이번에 확실히 로엔 놈들을 뭉개 주고 오기나 하게나. 내 그럼 자넬 위해 크게 술 한잔 낼 것이니 말이야. 하하하!”
“훗!”
용맹한영혼이 왜 로엔을 상대로 철저하게 부숴 놓으라고 하는 것인지 그 의도를 알고 있는 무거운돌이 한마디 하려다가 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그럼 어, 어찌해야 한단 마, 말입니까?”
칼리프 1세는 잔뜩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게르혼족 10만 병력이 단단하게 얼어 버린 강을 건너 전격적으로 왕국을 공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에 북서군 사령관이 된 갈리 후작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게르혼족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지만 워낙 엄청난 병력 차이와 무거운돌의 계략에 휘말리면서 순식간에 북서군은 패퇴를 거듭하며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들려오자 칼리프 1세는 크게 두려움에 빠져 벌벌 떨고 있었다.
“폐하, 비록 지금은 게르혼족들의 기습 공격에 휘말려 아군이 크게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는 하나 곧 전세가 역전될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글러스 공작?”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이 곧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갈 것이옵니다.”
“아! 그러신가요? 한데…… 왜 제국에서 온다던 그 마법병단이란 분들은 아직 소식이 없는 것입니까?”
더글러스가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것은 칼리프 1세가 평민이었던 시절에도 이미 그 소문을 들어 능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말에 칼리프 1세는 조금은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한데 칼리프 1세가 제국이 약속한 마법병단이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인지를 묻자 대답이 궁해진 프리모와 더글러스였다.
“그것은…….”
“흠! 흠!”
칼리프 1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낭패한 표정이 된 프리모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우는 더글러스의 모습에 칼리프 1세는 자신이 괜한 것을 질문하였다는 생각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럼 전…… 아니, 난…… 아니, 짐은…… 다른 볼일이 있어서 이만…….”
칼리프 1세가 이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집무실을 나가 버리자 남아 있는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제국 내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글쎄요…… 이미 몇 차례나 재촉을 하여 보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인지라 답답하긴 본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더글러스의 말에 프리모는 다시 한 번 낭패한 기색이 되었다.
“후…… 어쩔 수 없지요. 일단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할 상황이니 말입니다.”
“그래야겠지요. 어쨌든 다시 한 번 제국 측에 재촉을 하여 볼 것이니 그동안은…….”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운을 빌겠소.”
제국의 자랑인 마법병단이 더 이상 마법병단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여전히 제국이 하루라도 빨리 약속한 마법병단을 보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이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바람이었는지 확인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돌격!”
두두두!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
10만이나 되는 병력이 움직인다는 것은 일견 장관이기도 하지만 막상 이들 앞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미 몇 차례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로엔 왕국군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그러했다.
비록 로엔군이 성을 의지한 채 며칠을 버티고는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대규모 공격을 받자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젠장!”
쾅!
더글러스는 격노하고 있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도대체 지원 병력은 언제쯤 도착한다고 하던가!”
이미 더글러스 또한 지원 병력이 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
“이곳을…… 버린다. 지휘부와 기사단은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간 후 롬 강을 건너도록 한다.”
“하오면 나머지 병사들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우리가 강을 건너려면 저들의 이목을 끌어 줘야 함을 그대는 모른단 말인가?”
“하오나…….”
“훗! 그렇게 걱정이 되거든 귀관은 남도록 하라. 뭣들 하는가? 어서 퇴각할 준비를 하지 않고!”
“예, 전하.”
병사들을 남겨 놓은 채 성에 마련된 비밀 통로를 통해 은밀히 빠져나가기로 결정을 한 더글러스의 결정에 대부분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결정에 반하여 남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남아 있어 봐야 곧 성이 함락당하게 되면 게르혼족의 포로가 될 것이고, 그것은 곧 노예로 전락함을 뜻하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더글러스를 비롯한 군 지휘부와 기사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탈출한 이후에도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아등바등 성을 점령하기 위해 달려드는 게르혼족을 상대하던 병사들과 성안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성이 점령당한 후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미 때늦은 일일 뿐이었다.
이후에도 로엔군과 무거운돌이 지휘하는 10만 게르혼족 전사들 간의 전투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진행되었고, 게르혼족이 강을 건넌 지 1개월 만에 소렌토는 또다시 외적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하이란족을 정리토록 하겠소. 아울러 병력 일부를 소렌토 방향으로 이동시키도록 하겠소.”
용맹한영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해 그동안 방치하여 두었던 하이란족이었다.
하나 이제는 그러한 하이란족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을 한 알마리온은 이들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나 이러한 알마리온의 명령은 가신들은 물론, 그의 진영에 가담한 몇몇 인사들로부터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각하, 소렌토 방향으로 병력의 일부를 이동시킨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만 하이란족을 지금 공략한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하이란족은 용맹한영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완충 지역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을 공격하여 굳이 강성한 적을 직접 마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왕국을 향해 군의 일부를 이동시킨다는 데에는 다들 불만이 없었다.
반정군을 제압하고 정통성 있는 이를 다시금 왕위에 추대하겠다는 대의명분이 이들에게 있었지만, 누란의 위기를 겪고 있는 왕국의 사정을 나 몰라라 한 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랬다가는 오히려 반정을 일으킨 자들을 모두 몰아낸다 하더라도 백성들로부터 누란의 위기에 처한 것은 모른 체하다가 권력만 잡겠다고 광분하는 자로 낙인찍히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기에 왕도인 소렌토로 병력의 일부를 보내는 것은 모두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나 하이란족을 이러한 때에 공략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주군께서 지금 하이란을 공략하시겠다 하는 것도 모두 왕국을 위기에서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이란 공략에 대해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위해 안드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연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이란은 그동안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주긴 하였습니다. 하나 이제는 그들 또한 우리를 분명하게 적대시하면서 정당한 절차로 법통을 이으신 국왕 폐하를 저들 멋대로 폐한 역도들과 결탁을 하고 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이란이 제국과 로엔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알마리온을 공략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 그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우리가 역적들과 그들에 의해 옹립된 가짜 국왕을 타도하기 위해 군을 움직였다가 자칫 뒤를 공격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그들을 이번 기회에 정리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
“또 하나. 하이란족을 공략하는 것 자체가 바로 왕국의 위기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이란족의 근거지는 로엔 왕국의 북중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주군께서 하이란족을 제압하게 되면 자연 용맹한영혼이 이끄는 검은발족과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 자체로 저들에게는 상당한 압박을 주게 될 것입니다.”
“흠…… 그러니까 레이 경은 저들을 직접적으로 공략하기보다는 저들로 하여금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환경을 만들자 이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정리가 되어야 할 존재들이고 또한 장기적으로 보아서도 왕국의 국경을 안정시키면서 검은발족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게 되니 왕국은 그만큼 더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안드라스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모두는 모두 왜 이 시점에서 하이란족을 공략하여야 하는 것인지 그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멕테일러 자작.”
“예, 주군.”
“자작이 왕도로 향하시오.”
“충!”
“체임버스 남작과 드란 경, 웹 경, 그리고…….”
일단 결정을 내린 일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는 알마리온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듯 명령은 일사천리로 내려졌다.
이렇게 영지의 병력을 비롯하여 주변의 성들, 그리고 영지들에서 합류한 병사들 1만 5천에 대한 지휘권을 멕테일러에게 맡기고 그 본인은 안드라스와 그나이제나우 그리고 샘 등과 함께 직접 이스턴족의 전사들 3만을 이끌고 하이란족을 공략하기 위해 움직였다.
“후후! 결국 항복을 하였군?”
로엔의 왕도인 소렌토를 포위한 지 한 달.
결국 로엔의 칼리프 1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일부에서는 절대 항복을 할 수는 없다고 버티는 자들도 있긴 하였지만 더 이상 버티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판단에 끝내 항복을 하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항복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혼테르 영지를 떠난 군이 소렌토에 가까워져 왔기 때문이다.
알마리온군은 대외적으로는 왕국을 침범한 게르혼족을 물리치고 왕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정작 칼리프 1세를 비롯한 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들은 혼테르군의 접근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나마 조금이라도 힘이 더 남아 있을 때에 게르혼족에 항복을 하고 다가오는 혼테르군을 상대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복안이었던 것이다.
“무거운돌 님의 예측이 참으로 정확하였습니다. 하하.”
“예측까지 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
혼테르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무거운돌은 이후부터 적극적인 공세보다는 왕도인 소렌토 전체를 포위한 채 지속적으로 로엔군을 지치게만 만드는 정도로 군을 운용하였다.
아울러 혼테르군의 움직임을 은밀히 소렌토에 전하였는데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하나, 불필요한 힘을 들이지 않고 로엔의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일단 무거운돌 님의 의도대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항복을 받아 내긴 하였지만 그레이트 칸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게 되어서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용맹한영혼이 내린 명령은 로엔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힘을 철저하게 분쇄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당연히 알마리온을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거운돌은 그럴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로엔을 공략하라고 명을 내린 용맹한영혼 또한 그리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훗! 걱정할 것 없네.”
“하지만…….”
“칸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다네.”
“예? 하면……?”
“후후. 칸께서 어디 모르시는 것이 있고 못하시는 것이 있으시던가? 알면서도 내버려 두신 것이시네.”
“하긴…….”
“자! 그럼 가도록 하지. 그동안 우리 위대한 초원의 전사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업신여겼던 자들이 고개를 어떻게 조아리는지 말이야. 하하하!”
“하하하하!”
칼리프 1세를 비롯한 로엔의 권력자들은 치욕스러움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돌은 이들의 자존심을 철저히 구겨 놓을 심산이었는지 처음부터 이들을 굴욕적으로 대하였다.
하나 한쪽은 승리자의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패배자의 입장이었으니, 이러한 모습은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장시간 동안 삭풍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로엔의 국왕인 칼리프 1세와 프리모를 비롯한 4대 공작, 그리고 후작들과 백작 등 고위 귀족들은 차디찬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이들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항복을 하는 동안 게르혼족들은 열린 성문을 통해 소렌토에 당당히 입성한 후 닥치는 대로 약탈을 행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렇게 소렌토를 다시금 거의 폐허로 만들던 게르혼족이 떠나간 것은 혼테르군이 며칠 거리까지 접근을 하였을 때였다.
“음…….”
멕테일러 자작은 저 멀리 보이는 소렌토의 모습에 침음을 삼켰다.
소렌토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이미 거의 무너져 있는 상태였으며 시가 곳곳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쿤테르가 어찌할 것인지를 멕테일러에게 물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히 반정 인사들을 축출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나 멕테일러의 생각은 달랐다.
“당분간 저들은 내버려 둘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멕테일러의 말에 요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훗! 웹 경은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구려?”
“솔직히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면 당장 저들 모두를 잡아들일 수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소. 보이긴 그렇게 보이오.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들은 함정을 파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오.”
“함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멕테일러의 말에 다들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오는 도중에 만난 백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소렌토에는 이렇다 할 병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그럴 것이라 생각하오?”
요들의 말에 멕테일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소렌토를 탈출한 피난민들의 말을 신뢰하느냐고 묻자 모두가 더욱 이상히 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것들 모두가 꾸민 것이란 뜻이오.”
“꾸미다니요?”
점점 더 모를 소리만 하자 다들 멕테일러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유독 한 사람, 쿤테르만큼은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탄성을 내질렀다.
“아! 역시…….”
“무슨 일입니까?”
쿤테르가 감탄한 눈빛으로 멕테일러를 바라보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걸 어찌 아신 것입니까?”
“몇 가지를 추측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답일 것입니다.”
멕테일러와 쿤테르의 대화에 더욱더 궁금증이 커진 요들이 끼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자세히 보게. 무너진 성벽을 말이네.”
쿤테르의 말에 한센과 요들 등은 무너진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는지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벽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을 것이네.”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영문을 모르자 쿤테르가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라는 말을 하였다.
“아! 그렇군! 하하. 정말이지 대단한 관찰력이십니다, 자작님.”
“훗!”
“쳇!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러시는 겁니까? 그냥 쉽게 좀 알려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뚫어지게 성벽을 살피던 한센이 감탄을 하면서 그것을 단번에 간파한 멕테일러의 관찰력에 대해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자 요들은 자신만이 소외된 것 같아서 투덜거렸다.
그런 요들을 잠시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던 한센이 무엇 때문에 멕테일러가 피난민들의 증언은 물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 모두가 거짓이라고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벽을 잘 보게.”
“도대체 성벽의 무엇을 잘 보라는 것입니까?”
“웹 경의 눈에 저 성벽이 어떤 형태로 무너진 것 같은가?”
“무너진 형태라니요? 그거야…… 아!”
한센의 말에 다시 한 번 무너져 있는 성벽을 살피던 요들도 무너져 있는 성벽의 형태가 동그랗게 파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인위적이면서도 아울러 무엇인가 단번에 강한 충격이 가해져 그리된 것임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훗! 이제 알겠나? 저 성벽은 무너뜨린 것이 아닌 터뜨린 것임을?”
한센도 그렇고 요들도 그렇고 이미 포넬과의 전투에서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일이 있었기에 그나마 빠르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 하면 저들에게 마법 아이템이 있다는 것입니까?”
“허허. 저것은 마법 아이템이 아닐세.”
“그럼 무엇입니까?”
“저것은 마법사들이 만든 폭죽을 터뜨린 것이네.”
“폭죽이라면 불꽃놀이를 하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것으로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쿤테르의 말에 요들이 다시 한 번 놀라며 반문하였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처음 그러한 흔적을 발견한 멕테일러만이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자작님께서는 저런 것을 언제 보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체임버스 남작. 20년 전쯤에 영지의 마법사가 실수로 축제 때 사용할 폭죽을 터뜨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하면 그 폭죽을 많이 터뜨린다면 저렇게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네, 웹 경. 물론 많은 양을 사용해야 하지만 양만 충분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네.”
“그렇다면 굳이 마법 아이템 같은 것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훗! 저런 폭죽을 만드는 것 또한 무척이나 힘든 일이네. 그리고 아마도 저것들은 폐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끌어모은 폭죽들을 한꺼번에 터트려서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네.”
“아!”
상황을 모두 파악하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군의 최고 지휘관인 멕테일러에게 집중되었다.
“일단 군을 이곳에 주둔시키고 임시로 요새를 구축하도록 하겠소.”
“하면 공격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소, 웹 경. 일단 이곳에서 주둔하면서 병력의 일부를 움직여 이북 지역을 장악하는 데 힘쓰도록 할 것이오.”
이들 혼테르군이 소렌토로 향하면서 동북 지역은 대부분을 접수하였다.
“하긴…… 아마도 지금쯤이면 게르혼족의 진격로 근처의 모든 곳들이 쑥대밭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드란 경과 가즈라엘 경이 병력과 식량 같은 것을 챙겨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난민들을 수습하고 비어 있는 영지를 접수하고, 치안을 확보하도록 하십시오.”
“예, 자작님.”
한센과 쿤테르의 제자인 안톤에게 게르혼족의 뒤를 따르면서 힘들어할 백성들을 수습하고 치안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멕테일러는 다시 전령을 불러 알마리온에게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서신으로 작성하여 보냈다.
그리고 병사들로 하여금 진지를 구축하여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로엔 왕국은 잠시나마 남과 북으로 갈라져 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