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너지는 성城 (64/70)

무너지는 성城

칼리프 공작의 전사 소식은 포넬 전체를 크게 뒤흔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카렌쪼 지역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까지도 전멸을 당했다는 소식은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

싸늘한 정적만이 감도는 대전이었다. 아니, 들리는 소리가 있다면 고메즈가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행하는 손가락 튀기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모두가 모여 있는 대전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러니까 그에게 의탁하는 자들의 수가 날로 늘고 있다?”

리처드가 복수를 위해 포넬에 온 이후 자신을 지원해 줄 세력을 만들기 위해 접촉을 하였지만, 그가 접촉했던 인물들 대부분은 그와의 만남을 반가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러워하였다.

결국 그의 권유로 그와 함께한 이는 겨우 2명. 그것도 전 왕실의 혈통을 이은 자들로 그리 대단한 세력을 가진 것이 아닌, 겨우 지방의 촌구석에서 간신히 체면이나 차릴 정도의 자들이었다.

하나 리처드가 그동안 카렌쪼를 근거지로 하여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다가 칼리프 공작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진영에 서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

“후후, 그렇단 말이지? 지오반니 공작.”

“예,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지아렌 폰 지오반니 공작은 칼리프 공작과 함께 왕국의 3대 공작이지만 가지고 있는 세력으로 따진다면 가장 약한 측에 들어가는 이였다.

하지만 그는 왕국 제일의 기사로서 익스퍼트에 든 지 벌써 20년이 지난, 포넬의 자랑이었다.

“공작에게 포넬 기사단을 내주겠소.”

“……!”

고메즈의 말에 지오반니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이 났다. 기사단의 이름에 국명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친위 기사단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의 능력은 왕국 내에서 최강의 것이란 뜻이었다.

이는 포넬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는데. 특히 포넬 기사단은 모든 귀족 가문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이들이 선출을 거쳐 구성된 기사단이었기에 가히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존재였다.

그런 포넬 기사단을 내준다는 것은 고메즈로서도 조속히 반군을 제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었다.

하긴 반군이 세력까지 얻게 되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반군의 세력이 결집되기 전에 확실하게 제압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충! 반드시 그들을 제압하고 반란의 수괴인 그의 목을 가져오도록 하겠사옵니다.”

“믿겠소, 공작!”

“혹시 말이네, 포넬 최고의 기사라고 한다면 어떤 이가 있나?”

갑작스러운 알마리온의 질문에 모두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포넬 최고의 기사라면 아무래도 3대 공작 중 한 분인 지아렌 폰 지오반니 공작 전하입니다.”

발몬 남작의 말에 모두가 수긍을 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어떤 자입니까?”

“그분은…….”

발몬 남작이 포넬 왕국 최고의 기사인 지아렌 폰 지오반니 공작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지오반니 공작 전하는 전대 주군께서도 존경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분입니다.”

“그렇군요. 하면 이번에는 작전을 달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가 이번 전투에 나온다는 것인가?”

“그가 직접 나올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고메즈 대공의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우리를 제압하려 할 것이네.”

“하긴 그럴 것이다. 나라도 반군이 더 이상 세력을 얻기 전에 제압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여길 것이니 말이다.”

리처드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이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좀 더 반란군의 세가 더욱 커지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분이 직접 온다면…… 어쩌면 포넬 기사단까지도 함께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음…….”

포넬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일부는 표정 가득 두려움을 담는 이까지 있었다. 하나 그런 표정을 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본 알마리온의 표정에는 묘한 미소가 어렸다.

‘훗! 잘되었군. 그들을 격파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형님을 위해 기꺼이 검을 뽑아 들 것이다.’

알마리온은 오랜 동안 이곳에 머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지난 3개월 동안 그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무리를 하는 일이었다.

하여 그는 최단 시간 내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리처드에게 해 주려 하였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한다면 확실히 전세가 역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 네 사람이 선두에 서야 할 것 같습니다.”

“후후, 좋지!”

“하하, 모처럼 제대로 몸을 풀게 되었군.”

“…….”

알마리온의 말에 리처드와 레드로 그리고 그나이제나우가 반색을 하였다.

그동안은 군을 지휘하느라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만큼 이번에는 포넬 최고의 기사단인 포넬 기사단을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군의 지휘는…… 발몬 남작께서 해 주시겠습니까?”

“소관이 말씀이십니까?”

군 전체의 지휘를 맡아 달라는 알마리온의 말에 발몬은 당황하였다.

반란군 진영에는 그 말고도 작위가 높은 이들도 몇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주군인 카즈모 백작이 곁에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전군을 지휘하라는 것은 보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불만 있습니까?”

“…….”

대놓고 묻는 알마리온의 행동에 반발을 할 사람은 솔직히 아무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은 군을 지휘할 줄 아는 분이 지휘하여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 아니, 본인이 겪어 본 분들 중에서는 발몬 남작만큼 군을 잘 지휘하는 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명예로운 항복을 하긴 하였지만 발몬 남작의 능력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어찌나 군을 수족처럼 지휘하는지 당시 정령술을 최대한 이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몬 남작이 지휘하는 포넬군을 상대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었을 정도다.

그럴 정도로 발몬 남작의 능력은 뛰어났고,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알마리온은 군의 지휘를 그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숨어 있었는데, 고메즈를 무너뜨린 후 반드시 많은 이들을 곁에 두어야 할 때를 대비하여 그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카즈모 백작.”

“예, 후작님.”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발몬 남작이라면 기꺼이 따를 수 있습니다.”

“주군…….”

피델이 기꺼이 가신인 발몬 남작의 지휘를 받겠다고 말하자 발몬은 더욱더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분들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군의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리처드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군을 지휘하는 이는 알마리온이었기에 군의 작전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그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리처드의 행동이 이상하게만 보였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전장을 지휘한 알마리온의 능력에 모두가 탄복을 한 때문인지, 이제는 그 누구도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거부감을 느끼거나 하는 이들이 없었다.

새로 진영에 가담을 한 자들의 경우에는 간혹 이를 이상히 여기거나 불만을 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이들 또한 이내 앞선 이들처럼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이내 당연시할 정도로 알마리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포넬에서도 전쟁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전쟁 이후에도 그가 보여 준 영웅적인 모습은 이곳 사람에게도 무척이나 인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나와 그나이제나우 경이 중앙에, 그리고 형님과 레드로 자네가 각각 좌우에 서도록 하지요.”

“알았다.”

“그러지.”

“예, 주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한 반발에 부딪칠 중앙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급의 정령술사, 그것도 상급의 벽마저 거의 넘어서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검의 길을 걷는 자들에 비교한다면 마스터의 경지에 거의 도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마법사의 경우에 비교하면 7서클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이제나우 또한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거의 미친 사람처럼 수련을 하고 계속된 실전을 통해서 그나이제나우는 이미 과거의 능력을 거의 되찾아 가고 있었다.

실상 지금 이들 두 사람의 능력은 서로 막상막하의 상태로 누가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박빙이었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의 능력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 중 그 정점에 도달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다.

“훗! 그리고 보니까 말이야…… 이런 경우는 아마도 역사가 기록된 이후에 없었던 일 같군.”

“무엇이 말입니까, 형님?”

리처드의 말에 레드로가 물었다.

“보라고. 너나 나도 그렇지만 알마리온이나 그나이제나우 경 또한 익스퍼트이거나 상급 정령술사 아니냐? 역사상 이런 능력자들이 이렇게 한곳에 모였을 때가 있을까?”

“하하. 형님 말씀을 들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하.”

리처드의 말처럼 한 장소에 이처럼 4명이나 되는 능력자들이, 그것도 그중에 2명은 각기 궁극의 길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과거 그 어떤 때, 어느 시절에도 이러한 일은 있은 적이 없었다.

“훗!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하겠군요?”

레드로의 말에 리처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다면 화끈하게 판을 벌여야겠군? 안 그런가?”

“하하하. 그것 좋지요! 바라던 바입니다, 형님!”

“좋아…… 그럼…….”

“…….”

4명의 사내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그리고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젊은 영웅들의 뜨거운 피가 서로를 더욱 가깝게 다가서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챙!

리처드가 가장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채챙! 챙!

그 뒤로 알마리온과 레드로 그리고 그나이제나우가 검을 뽑아 들었고 4개의 검이 한데 모였다.

“그럼…… 무운을!”

“무운을!”

챙!

잠시 서로의 무운을 기원한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자리 잡자 알마리온은 그들과 다시 한 번 일일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군을 지휘하고 있는 발몬 남작에게 눈길을 주었다.

“…….”

알마리온과 눈이 마주친 발몬 남작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알마리온 또한 그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것으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이미 사전에 양쪽 진영은 서로 합의한 것처럼 이번 전투의 승패를 양측의 기사들의 대전對戰으로 결정짓기로 하였다.

때문에 양측 모두 기사단이 전열의 선두에 서 있었고, 그 뒤쪽으로 나머지 병력이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전진!”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발몬 남작의 허락이 있자 알마리온은 발락 기사단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춰 지오반니 공작이 직접 지휘하는 포넬 기사단 또한 거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속보!”

워낙 육중한 무게를 지닌 기사들을 등에 태우기도 하였지만 말이라는 짐승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차츰차츰 속도를 높여 가야만 하였기에 양쪽 진영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처음 양쪽 진영에서 이들 기사단이 나설 때만 하더라도 다들 긴장은 하였어도 그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 이들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그만큼 거리가 가까워 빠르게 가까워질수록 이를 지켜보고 있는 양측 병사들의 긴장감 또한 빠르게 최고조로 상승하였다.

“돌격!”

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는 알마리온이나 지오반니 공작이나 거의 동시에 기사단으로 하여금 속도를 최고로 높이도록 하였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양측을 다 해 3백 필이 넘는 말들이 육중한 몸을 달리면서 나는 소음은 실로 엄청났다.

대지가 울린다는 말 그대로 이들이 움직이면서 내는 소음과 그 충격은 고스란히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1만에 달하는 병사들의 귀와 몸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음과 진동이 격렬해질수록 이를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의 긴장감은 최고조를 향해 치달았다.

‘실라이론! 나와 함께!’

충돌이 가까워지자 알마리온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바람의 상급 정령인 실라이론을 소환하여 자신의 몸과 일치시켰다.

실라이론이 그의 몸에 깃들이기 시작하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존재감이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반군이 동원한 발락 기사단보다 두 배나 많은 포넬 기사단이 벌인 젠슨 평야의 전투가.

“바람의 칼날!”

알마리온은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꺼내 보였다. 포넬 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는 지오반니 공작의 능력이 자신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는 것은 이미 이틀 전 양측이 기사 대전으로 전투를 마무리 짓자는 합의를 하는 자리에서 이미 그의 능력을 가늠하여 보았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모두 드러내기로 결심을 한 것도 모두 지오반니 공작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해 한곳을 향해 쏟아부은 알마리온의 정령 마법의 파괴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맞받아치는 지오반니 공작의 실력 또한 전혀 밀릴 것이 없었다.

“이얍!”

노회한 기합 소리와 함께 지오반니의 검에 뿌연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쾅!

히힝!

“으악!”

마치 거대한 폭발이라도 있는 것처럼 굉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그 주변에 지오반니 공작의 곁에 있던 자들이 그 충격에 휘말려 전열에서 이탈하였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격한 충돌음과 함께 말과 사람의 비명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발락 기사단과 포넬 기사단의 첫 충돌의 결과는 양측 모두 절반 정도의 기사들이 전열에서 이탈하였다. 이는 사실상 포넬 기사단의 패배라 할 수 있었다.

한차례 충돌을 마치고 서로 반대편으로 움직이면서 알마리온도, 그리고 지오반니 공작도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기사들의 수가 어느 정도나 남아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좌우를 살피던 지오반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단 한차례의 충돌로 포넬 기사단의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아니, 그가 놀란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정면으로 부딪친 알마리온에게도 크게 놀라고 있는 상태였다.

‘분명 정령술사다!’

살아온 시간이 긴 만큼 지오반니의 연륜은 결코 얕은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도, 그렇다고 자신과 같은 익스퍼트도 아닌 자가 검의 주인이 되는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자신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경우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익스퍼트라고 알려져 있던 저자가 실상은 정령술사란 말이었던가?’

알마리온이 익스퍼트가 아닌 정령술사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가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프란시스 왕자는 물론, 저 두 젊은 기사들 또한 이미 익스퍼트의 경지다. 게다가 저 작은 체구의 젊은 기사는…… 나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다.’

난생처음 두려움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지오반니였다. 지금까지 50여 성상을 살아오면서 그가 누군가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은 진정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능가하는 것 같은 알마리온과, 자신에 못지않은 또 다른 익스퍼트, 그리고 자신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기사의 꽃이라고 하는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리처드와 레드로라는 존재는 이미 정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오반니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온몸을 휘감고 도는 공포를 애써 억누른 채 전열을 정비토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하라!”

“전열을 정비하라!”

첫 충돌에서 살아남은 포넬 기사단 단원들 또한 이미 상대인 발락 기사단 내에 4명이나 되는 능력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상대로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지만 기사로서의 자존심, 그것도 포넬 왕국 내에서 최고의 기사단인 포넬 기사단의 단원으로서의 자존심은 결코 굴복을 용납지 않았다.

“돌격!”

다시 한 번 양측의 기사단이 말을 몰아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쾅! 쾅!

이번에는 지오반니의 공격이 먼저였다. 하나 그의 공격은 이내 알마리온에 의해 가로막혔고 오히려 역습을 당하였다.

이들을 시작으로 두 기사단은 한데 뒤엉켜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3백 명에 달하던 두 기사단 중 두 차례의 충돌로 살아남은 수는 80여 명.

양쪽 모두 40여 명씩 살아남아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역시 그나이제나우와 리처드 그리고 레드로란 3명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치열한 근접전이 시작되자마자 이들 세 사람 주변에는 남아 있는 포넬 기사단원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었지만 결과는 불을 보듯 분명할 뿐이었다.

결국 순식간에 남은 포넬 기사단의 단원들은 이들 세 사람의 검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여 대지 위에 쓰러져 갔다.

하나 아직도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알마리온과 포넬 최고의 기사라고 하는 지오반니 공작이었다.

쾅! 콰앙! 쾅! 쾅!

대기를 찢어발기는 것만 같은 날카로우면서도 거친 소음과 함께 두 사람이 움직이는 주변에는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하나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소음과 짙어져만 가는 흙먼지로 보아 두 사람이 얼마나 치열하고도 격렬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후욱! 후훅! 정말…… 정말 대단하군. 그대같이 젊은 나이에 벌써 이러한 경지라니 말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실력으로 따져 본다면 두 사람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막상막하였지만 한 사람은 이제 20대 중후반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미 50을 넘긴 나이라는 데서 오는 차이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솔직히 이제 내 체력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군.”

“…….”

“해서 말인데…… 날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지오반니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마리온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알마리온을 이기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후회 없는, 지난 5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검의 길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고맙군. 카즈모 백작이 그대에게 기꺼이 네 페니테를 넘겨줄 만하네.”

“…….”

잠시 서로 떨어져 잠깐의 휴식을 취한 두 사람은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그럼…….”

“예.”

쾅! 콰아앙! 쾅!

그 잠깐의 휴식이 두 사람에게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다시금 격돌을 시작하자 이전보다 더 큰 소음과 먼지가 일어났다.

‘뭐지, 이 느낌은?’

다시금 검을 나누던 알마리온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그동안 자신을 억압하고 있던 족쇄가 풀리면서 무한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

갑작스레 모든 속박에서 풀려나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게 된 알마리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지금까지 보아 왔던 세상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막연하였던 것들이나 단순하게만 느껴졌던 많은 것들이, 아니 그동안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많은 것들까지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아울러 그동안 모든 커 보이던 것들 또한 마치 시야가 탁 트인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세상을 굽어보듯 모든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것인가?’

알마리온은 지금 자신에게 있은 일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또 하나의 벽을 온전히 넘어섰음을.

그동안 몇 차례의 작은 깨달음을 통해 그는 어느덧 벽을 넘어설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가 지오반니 공작이라는 또 다른 존재와의 결투를 통해 완전히 그 벽을 넘어선 것이다.

“허…… 자네……?”

알마리온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지오반니 또한 알마리온에게 있은 변화를 느끼고는 멀찍이 떨어진 채 경악하는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허허허…… 내 살아생전에 그러한 경지를 볼 수 있다니…….”

복잡한 심정이 드는 지오반니였다. 평생을 넘고자 하는 벽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그것도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알마리온이 넘은 것을 보게 되는 그의 심정은 착잡하기도, 참담하기도, 그리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하나 그 또한 경지에 오른 인물답게, 그리고 만인의 존경을 받던 인물답게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아무튼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한 수만 남았군?”

“아마도…….”

“그렇다면 자네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부탁하지. 해 주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영광이었네.”

“저 또한 전하와 함께 검을 나눌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후회 없는 마무리를 하도록 하지.”

“예.”

두 사람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여 마지막 한 수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지오반니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알마리온이 전력을 다할 경우 지오반니는 최후의 공격조차 해 볼 기회가 없을 것임을 알기에 그에게 마지막 수를 양보한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 울렸던 굉음도, 그리고 시야를 가리던 뿌연 흙먼지 같은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오반니가 뭔가 하려고 움직이는 것은 보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

겉보기로는 지오반니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그것은 알마리온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것이……?”

“그렇습니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입니다.”

“가공하군.”

“…….”

“그리고 고맙네.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어서 말이네.”

“아닙니다. 공작님과 같은 분과 검을 나눌 수 있어서 저 또한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훗! 아쉽군. 이왕이면 그대와 같은 젊은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보고 싶은데 말이네.”

“…….”

두 사람의 얼굴에 모두 미소가 어렸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마치 자신의 집에 놀러 왔던 이를 배웅하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처럼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하나 검을 의지한 채 서 있던 지오반니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궈졌다.

“후…….”

여전히 검에 몸을 의지한 채 생을 마감한 지오반니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자신으로 인해 또 1명의 능력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실레스틴 님?”

최상급 정령술사가 된 알마리온은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을 소환하였다.

4대 정령 모두와 친화력이 강하지만 그중에서도 바람의 정령이 가장 친화력이 높았기에 바람의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였다.

한데 그렇게 소환되어 나타난 존재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령의 고향이라는 봉인체에 봉인당해 있던 바로 그 실레스틴의 모습이 보이자 무척이나 반가웠던 것이다.

-어, 바로 나야. 호호호! 그럼 다른 최상급 정령이 올 줄 알았어?

“하지만 실레스틴 님께서는…….”

-호호호! 뭐, 정령왕님께 꾸지람은 지겹게 듣긴 했지만 그냥 적당히 무마되었어.

“하면 다른 분들께서도……?”

-맞아. 보고 싶음 부르지 그래? 그들도 다들 널 그리워하고 있는데 말이야. 호호호.

“하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흥! 이런 일은 화끈하게 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

불의 최상급 정령인 셀레아나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투덜거렸다.

“하하! 셀레아나 님.”

-그동안 잘 지낸 것 같군?

“노에아넨 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 정령들이야 뭐 늘 그렇지. 허허허.

중간계의 시간과 정령계의 시간의 흐름은 서로 같지가 않았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중간계에서 1백 년의 시간이라 하더라도 정령계에서는 열흘 정도의 시간이었으니 이들 정령들에게 있어서 그동안의 시간은 사실 눈 깜짝할 사이일 뿐이었다.

“엘레스트라 님께서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예. 알마리온 님께서도 그간 안녕하셨나요?

“하하. 예. 엘레스트라 님.”

-한데 지금은 회포를 풀기에는 적당치 않은 시간 같군.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하면 제가 상황이 좀 더 편해질 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그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네 정령들을 돌려보낸 알마리온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하긴…… 난생처음 정령이란 존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껴 보았으니 다들 넋이 빠질 만도 하겠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정령이란 존재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 본 이는 사념체인 그나이제나우만이 유일했다.

게다가 평소에는 설사 소환된다 하더라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전혀 없지만, 오늘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일부러 네 정령들 모두 자신의 존재감을 모두 그대로 드러낸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난생처음 정령이란 존재를 접한 인간들로서는, 그리고 이들 네 최상급 정령들의 엄청난 존재감에 짓눌린 인간들로서는 감히 몸을 세우고 고개를 들 수 있는 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들으라! 사전에 이미 양쪽 지휘관들이 합의하기를 이번 전투의 승패는 기사 대전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는바, 이미 모두가 보았듯 기사 대전의 승부는 끝났다.”

“…….”

알마리온의 목소리가 평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어찌하겠는가? 결과에 승복하겠는가, 아니면…….”

알마리온에게서 그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할 정도의 엄청난 위엄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약조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포넬 최강의 기사단인 포넬 기사단이 전멸하였고, 포넬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인 지오반니 공작 또한 전사하였다.

거기에 난생처음 접하는 최상급 정령들과 그러한 최상급 정령들이 내뿜는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이미 완전히 기가 꺾인 진압군들은 알마리온의 말에 이내 투항을 하였다.

“그럼 그대들 또한 이제부터 포넬 왕국의 적자이신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 전하의 칼과 방패가 되겠는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7천에 가까운 진압군 병력이 일제히 리처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그렇게 하여 반군의 세력은 순식간에 몇 배나 커지게 되었다. 아울러 칼리프 공작에 이어 왕국 최고의 기사인 지오반니 공작 그리고 왕국의 자랑거리인 포넬 기사단의 패배 소식은 어느 편에 설지를 결정을 못 내리던 이들에게 분명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만드는 분수령이 되었다.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반군 세력과 고메즈를 중심으로 하는 진압군의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 것은 포넬의 왕도인 말린 외곽에서였다.

지오반니 공작이 이끄는 포넬 기사단과 7천여 병력이 패배하면서 갑자기 전세가 역전된 고메즈의 세력은 최후의 결정으로 친위군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혈족들과 귀족들의 병력까지 총 2만 5천의 군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리처드를 따르는 병력은 그동안 많은 귀족들이 그와 뜻을 같이하고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2만이 채 되지 않았다.

하나 그 사기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반란군 측이 우위에 있었는데 이미 세상에 최상급 정령술사라고 모든 것이 알려진 알마리온과 익스퍼트임이 알려진 리처드, 레드로 그리고 그나이제나우란 존재는 병사들의 사기를 오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자가 여전히 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형님.”

알마리온의 말에 리처드는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끝까지 버텨 보겠다는 심산인가?”

“마지막 노림수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미 수일 전부터 고메즈가 어떤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 알았지만 그러한 사실을 굳이 이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었다.

‘최후의 영광은 내가 아닌 형님께서 스스로 만드셔야 한다. 그래야만 포넬 왕국이 온전하게 형님의 것이 된다.’

그가 이 고메즈의 마지막 노림수를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굳이 이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던 것은 한 가지 이유, 그것은 바로 리처드가 스스로의 힘으로 마지막을 장식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록 명분은 리처드가 자신이 이어야 했던 왕위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실상 반군의 중심은 리처드가 아닌 바로 알마리온 그 자신이었다.

‘아무리 형님이 포넬의 왕위를 되찾는다 하더라도 로엔과 포넬은 가깝고도 먼 나라. 그렇다면 이들에게 쉽게 로엔을 넘볼 수 없게 만드는 것 또한 평화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아무리 리처드가 왕위를 되찾고 그가 노력하여 로엔과 포넬 사이의 관계가 좋아지게 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분명한 인식을 심어 주게 된다면 그만큼 양국 사이에는 충돌보다는 평화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알마리온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동안 감추었던 자신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꺼내 보였던 이유였으며,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어 갔던 이유였으며 고메즈의 마지막 노림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던 이유였다.

“후후, 노림수라…… 무엇인지 알 만하군.”

“아마도 고메즈 그자는 헤겔 공작 가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리처드의 말에 발몬 또한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말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헤겔 공작은 포넬 왕국 3대 공작이며, 왕국최남단에 위치한 헤겔 지역의 패자를 두고 하는 말로, 실상 포넬 왕국의 3대 공작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통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실상 공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긴 하여도 헤겔 지역은 대대로 해적들의 본거지였고, 지금도 이들은 그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었다.

이는 마치 제국에서 용맹한영혼이 강성해지자 대공이라는 작위를 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개입을 한다면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발몬의 말에 많은 이들이 긍정을 하였지만 알마리온은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잘되었군. 이참에 그들까지도 세력을 확실히 꺾어 놓을 수 있겠군.’

“만약 그들이 오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굳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니 말입니다.”

“하긴…….”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면 코웃음부터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알마리온이었기에 그 누구도 그의 말에 토를 달거나, 이를 불신하는 이가 없었다.

이미 그만큼 그의 능력은 모두에게 깊이 인상을 주었고, 그를 넘볼 수 없는 존재,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처럼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그가 리처드가 아닌 자신이 포넬의 국왕이 되겠다고 나선다 하더라도 아마 그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럼 전 며칠 동안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혼자서 되겠느냐?”

“혼자가 차라리 편합니다, 형님.”

“알았다. 그럼 그들을 네게 맡기도록 하마. 그사이 이곳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예, 형님.”

알마리온이 고메즈의 마지막 노림수인 헤겔 공작의 병력을 처리하고 다시금 복귀한 것은 단 사흘 만이었다.

떠날 때의 모습처럼 다시금 돌아왔을 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이웃집에 마실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평온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 들려오기 시작한 소문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벌였는지를 알게 된 많은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인간의 범주가 아닌, 신격화할 정도였다.

이처럼 칼리프 공작에 이어 지오반니 공작, 그리고 막대한 보상을 약속한 후 헤겔 공작을 끌여들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마저도 모두 패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압군 측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특히 알마리온이라는 존재는 이들 진압군으로도 하여금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그가 지휘하는 반군이 점차 다가오자 진압군 진영에서는 다수의 이탈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병사들 몇이 탈영을 하기 시작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세를 분명히 느낀 귀족들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진영을 이탈하는 일들이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친위군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도 이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탈을 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기에 안팎으로 문제가 많았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발몬이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전하, 저들은 지금 심각하게 동요되고 있는 상황이옵니다. 따라서 저들의 구심점만 제거한다면 구태여 최후의 결전을 벌이지 않는다 하여도 저들로부터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구심점을 제거한다? 하면 고메즈 대공을?”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만 사라진다면 구심점을 잃은 저들은 자연히 흩어지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항복하거나 할 것이옵니다.”

“하나 잔당이 남게 되면 골치 아픈 일 아니겠소?”

“지만 자작님의 생각처럼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사 전투를 벌이고 승리한다 하더라도 잔당은 남게 될 것이옵니다.”

“발몬 남작의 생각이 상당히 좋은 생각 같습니다, 전하.”

레드로의 말에 리처드는 슬쩍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을 묻는 것이었다.

“…….”

그런 리처드에게 알마리온은 살짝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긍정의 뜻을 내보이자 리처드도 결심을 내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의지를 모두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알마리온과 리처드, 레드로 그리고 그나이제나우 네 사람은 은밀히 왕궁으로 향하였다.

해가 어슴푸레 져 가는 무렵. 4명의 사내가 왕궁을 향해 다가왔다. 한데 이들의 모습은 이곳 왕궁이 마치 제집인 듯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뭐지?”

왕궁을 경비하던 근위 병사들이 다가오는 네 젊은 사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일을 걸친 모습을 보아서는 모두 기사가 분명한데 이 시간에, 그것도 기사라면 국왕의 곁에서 호위하기 위한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장에 나가 있어야 할 기사가 궁 앞을 어슬렁거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컥!”

“으악!”

다가오는 4명의 기사들, 아니 리처드와 알마리온, 레드로, 그나이제나우의 앞을 가로막으려 하던 근위 병사들을 순식간에 제압한 이들은 단숨에 성문을 열고 궁 안으로 진입했다.

“으악!”

“누구…… 컥!”

앞을 가로막는 존재라면 그것이 누가 되었든 앞에서 길을 여는 그나이제나우의 검에 의해 쓰러졌다.

비록 대부분의 기사나 병사 들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 나간 상태이지만 그래도 왕궁에는 적지 않은 수의 기사와 근위병 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들 네 사람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자들이 없었다.

“저쪽이군요.”

“그래? 훗! 쥐 새끼처럼 도망을 가고 있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이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빠르겠군.”

왕궁이라면 속속들이 그 지리를 꿰고 있는 리처드였다. 때문에 알마리온이 정령을 통해 알려 주는 고메즈의 움직임을 앞지르기 위해 방향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도주를 하는 고메즈를 잡기 위해 이동하던 이들 두 무리가 서로 맞닥뜨린 것은 궁에서 일을 하는 하인들이 드나드는 조그만 성문 근처였다.

“후후후…… 어디들을 그렇게 급히 가시나?”

“으음…… 네놈이 결국……!”

“아…….”

리처드와 맞닥뜨리게 되자 고메즈를 비롯한 그의 일가의 표정은 하나같이 공포에 젖어 들었다.

리처드 본인도 그렇지만 그와 함께 있는 또 다른 3명이 직감적으로 요즘 포넬 왕국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는 소문의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이들 중 유독 1명만큼은 다른 이들과는 다른 의미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그와 혼례를 올린 고메즈의 딸인 셀리나 여왕이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하나 리처드는 그녀를 일별조차 하지 않은 채 오직 원한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고메즈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항복하겠는가?”

“후후? 항복이라? 크하하하하! 감히 내게 항복하란 말을 하다니…… 크크크크!”

항복하라는 리처드의 마지막 권유에도 고메즈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놈! 감히 나 포넬의 국왕인 필리프 폰 고메즈에게 항복을 권하는 것이냐!”

“훗! 포넬의 국왕이라? 하하하! 우습군. 포넬은 예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바로 브리스톨 가문의 것이었음을 모르는가?”

“크크크! 브리스톨 가문의 것이라? 크크! 네놈이야말로 웃기는 말을 하는군.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브리스톨 가문이 진정한 포넬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단 말이냐?”

“후후!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크크. 아무나라…… 과연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희 브리스톨 가문이라는 것도 실상 뿌리조차 알지 못하는 것들 아니더냐? 크크크.”

“……!”

따지고 본다면 브리스톨 가문도 순수한 혈통은 아니었다. 이미 몇 차례 내란을 통해서 브리스톨 가문은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고 그 과정을 통해서 브리스톨이라는 혈통은 그 순수성을 확신하기 힘들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그런 고메즈의 말에 리처드는 잠시 움칫하였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훗! 그래도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지.”

“…….”

“바로 브리스톨 가문이 포넬의 왕가라는 것. 그리고 난 이제 그것을 되찾고자 한다.”

“…….”

“마지막으로 권하지. 항복하겠는가, 고메즈 대공?”

“훗! 거절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고 싶진 않군.”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군.”

검을 곧추 잡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고메즈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섰다.

하나 이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리처드 한 사람조차 상대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이들 앞에 나선 레드로와 그나이제나우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으악!”

“컥!”

순식간에 20여 명에 가까웠던 기사들이 붉은 피를 대지에 흩뿌리며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아아…….”

“으으…….”

난생처음 그런 잔인한 주검들을 보아서인지 고메즈의 처와 여식들은 그 자리에서 혼절을 하여 버렸고, 나머지 아들들과 사위들 또한 저마다 깊은 절망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옴짝달싹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래도 한때 권력의 정점에 섰던 고메즈만큼은 여전히 담담한 눈빛으로 리처드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어쨌든…… 대공, 그대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할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려?”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쨌든 최하의 신분에서 최고의 신분으로 오를 때까지 고메즈는 모든 것을 제 혼자의 힘만으로 이룩한 입지전적인 그러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내가 알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설사 내가 익스퍼트가 아닌 검의 주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이자를 상대로 복수하진 못하였을 것이다.’

검의 주인은 분명 대단한 경지이긴 하여도 그 홀로 수만의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고메즈는 마법 물품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이후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왕국의 모든 것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다른 의미에서 그대 또한 강자임을 인정하겠소.”

“훗! 그런가? 그래도 마지막은 구차하게 끝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군.”

그의 인생의 시작은 구차하고 비참하였다. 하지만 최소한 그의 마지막만큼은 더 이상 구차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기 위함인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고메즈의 표정은 평안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럼 부탁하네.”

“그러겠소.”

앞으로 한 걸음 나선 고메즈가 마지막을 부탁하며 두 눈을 감자 리처드가 검을 쥐고 그의 뒤로 걸어갔다.

“잘 가시오.”

“…….”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최고의 신분까지 올랐던,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그의 최후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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