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의 전설
“하하하! 어서 오게.”
“하하! 그동안 잘 지냈나?”
알마리온과 레드로는 서로의 손을 굳게 잡은 채 오랜만의 만남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나야 이곳이 훨씬 편하더군. 한데…….”
“자네 어머님이라면 편히 잘 계시다네.”
“아! 그런가?”
모든 것을 버리고 포넬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레드로였지만 한 가지, 어머니에 대한 걱정만큼은 이곳에서도 떨칠 수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인 알마리온에게 의탁한 때문에 한결 마음에 놓이긴 하였지만 말이다.
“한데 자네도 들었는가?”
“왕자님 소식 말이군? 들었네.”
포넬에서도 로엔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록 로엔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왕족이지만 현 국왕의 숙부와 친동생이 이를 위한 특사로 파견된다는 소식에 포넬에서는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막스밀리언 왕자 일행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포넬에서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들의 행방을 찾느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랬었군.”
“사실 그 사건이 있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이미 이곳에서도 포기하고 있는 상태이네.”
“그렇겠지. 하지만 형님께서는 분명 살아 계실 것이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데 형님께서는?”
“다음 도착하는 배편으로 오실 것이네.”
“아! 그렇군. 하면 준비를 좀 해 둬야겠군.”
레드로는 홀로 이곳 포넬에 건너온 이후, 많은 사람들을 곁에 두게 되었다.
유난히 강자를 존중하는 포넬이었다. 아니, 강자는 어디서든 존중받지만 포넬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강하였다.
이는 워낙 오랜 세월을 전쟁 상태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인식이었다.
강자가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곳, 어찌 보면 야만스러운 그러한 세상이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강해지는 것만이 생존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 이를 욕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곳에서 익스퍼트인 레드로는 이곳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었기에 그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상당한 세력을 만들어 놓았다.
“한데 이번에 얼마나 오는 것인가?”
“발락 기사단 절반과 각 부족 최고의 전사들이 대략 8백 명 정도 올 것이네.”
알마리온과 함께 온 부족의 전사들의 수가 2백여 명이었다. 결국 이번에 동원된 병력은 발락 기사단 1백 명과 이스턴 소속 전사들 1천 명이었다.
목표를 고메즈 한 사람으로 한 것치고는 상당한 수의 병력으로 보이지만 포넬의 국왕인 그를 목표로 하였다는 것 자체가 포넬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이는 한 줌 모래밖에 되지 않는 그러한 전력이었다.
“하긴 그 이상 동원할 수는 없었겠지. 그래도 발락 기사단이 온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거기에 내가 마련한 힘까지 보태면 얼추 전력상으로는 3개 천인대 규모는 되겠군.”
“자네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그사이에 그 정도의 힘을 키워 놓았다니 말이네.”
“고생은 무슨. 오히려 이곳에서 다양한 부류의 검사들과 실전을 경험해 보면서 한층 내 자신이 다듬어진 것 같다네.”
“하하하! 그런가? 하면…… 오랜만에 어떤가?”
“하하하! 좋지!”
이미 실력으로는 도저히 알마리온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레드로에게는 자신이 넘어야 할 목표였기에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리처드가 나머지 병력과 함께 포넬 땅을 다시 밟은 것은 알마리온과 레드로가 그를 기다린 지 닷새 정도 후였다.
이들이 예상보다 늦게 도착을 한 것은 또다시 바다의 상태가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면서 조금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사단이나 전사들이나 모두 바다라는 것을 대부분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바다를, 그것도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를 건너오다 보니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다.
특히 기사단이 탈 말들의 상태는 더욱 좋지 않았기에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는 제법 긴 시간 휴식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당장이라도 고메즈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지만 그 또한 지금은 쉬어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알기에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아니, 당장 이들에게 휴식이 필요하기도 하였지만 고메즈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할 일이 있었다.
“그보다 형님께서 지지 세력을 모으시는 동안 전 할 일이 좀 있습니다.”
“그를 찾아 나설 생각이냐?”
“예, 형님.”
“찾을 수 있겠느냐?”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찾을 수 있다면 찾아야겠지. 알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알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마.”
“죄송합니다, 형님. 대신 이 친구가 형님을 잘 도와줄 것입니다.”
“알겠다. 그럼 다녀오도록 해라.”
“예, 형님. 그리고 이것을 걸치도록 하십시오.”
“그건?”
알마리온이 리처드에게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네 페니테였다.
“당분간 이것을 절대 몸에서 벗지 말도록 하십시오. 제 말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면 오히려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마리온이 하는 말이었기에 쉽게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꼭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형님?”
“알겠다. 그렇게 하마.”
레드로가 붙여 준 안내인과 단둘이서 막스밀리언을 찾으러 길을 떠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한데 알마리온은 막스밀리언을 찾기 위해 육지가 아닌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서는 무작정 남쪽으로 배를 몰게 하였다.
그렇게 바람을 타고 남으로 배를 몰아 이동한 알마리온이 배를 대게 한 것은 이동을 시작한 지 나흘이 되던 날이었다.
“배를 저곳에 대도록 하시오.”
“저곳에 말입니까?”
무작정 배를 대라는 말에 길 안내를 맡은 제이슨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지난 며칠 동안 보아 온 알마리온은 자신의 상식으로는 모든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렇소.”
“예. 알겠습니다, 나리.”
배를 해안 근처에 최대한 접근하여 정박을 한 이후, 알마리온은 안내인과 함께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갔다.
“저…… 어디로……?”
제이슨이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며 물었지만 알마리온은 마치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였다.
메르타니온의 기운을 느끼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상급의 주술사가 되면서 그의 능력은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그는 정령과 주술의 결합을 통해서 정령술사나 주술사, 마법사 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경지를 열어 가고 있었다.
지금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아무리 뛰어난 정령술사더라도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는 정령과의 교감을 나눌 수는 없었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주술사라 하더라도 일정 지역을 벗어나면 아무리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 기운을 느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배편으로 포넬로 오는 도중 정령 마법과 주술을 결합하여 정령을 소환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주술사나 정령술사 들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넓은 지역을 살펴 막스밀리언의 존재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분명 이 부근 어디에 계시다. 한데 이렇게 기운이 약해지신 것을 보아서는…….’
막스밀리언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처음에는 비정상적으로 폭증되었다가 기운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으로 보아서는 그의 상태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쪽이군!’
“이랴! 이랴!”
“어? 나리! 나리! 함께 가셔야죠!”
한시라도 빨리 막스밀리언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급한 알마리온이 말을 몰아가자 제이슨이 그 뒤를 황급히 따랐다.
알마리온이 말을 멈춘 것은 몇 시간 동안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말을 달린 후였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말을 달리다 멈춰 서고는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또다시 말을 달리고 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제이슨은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던 차였다.
“저기군!”
알마리온이 가리킨 곳은 병사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었다.
“나리! 잠시만…… 제길!”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병사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곳을 저렇듯 무작정 달려드는 알마리온의 행동에 제이슨은 욕이 절로 나왔다.
알마리온을 따라 황급히 말에서 내린 제이슨이 검을 뽑아 들면서 허둥지둥 알마리온의 곁으로 달려갔다.
“젠장! 오늘 잘하면 죽겠구만!”
그는 단순히 길 안내역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그를 호위하는 임무까지 레드로로부터 받았기에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이었다.
하나 그는 굳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고 더더욱 죽을 일도 없었다.
“모두 길을 비켜라!”
“으윽!”
“악!”
“크헉!”
갑자기 온 천지를 진동시키는 알마리온의 한마디에 한곳을 향해 몰려 있던 병사들은 물론 제이슨까지도 검을 떨군 채 귀를 막았다.
“모두 길을 비키라 하였다!”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의 소리가 온 천지를 들썩거리도록 울린 후에 그 누구도 감히 알마리온의 앞을 가로막지 못한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그를 힐끔거릴 뿐이었다.
“형님…….”
한눈에 보더라도 막스밀리언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미 그가 걸친 의복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피 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주변에는 이미 많은 수의 시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알마리온이 그를 보고 가장 놀란 것은 막스밀리언의 눈빛이 이전에 그가 보았던 그 맑고 건강하던 눈빛이 아니란 것이었다.
광기. 그의 눈빛에서 알마리온은 정상인이 보일 수 없는 그러한 눈빛을 보았던 것이다.
‘머리에 큰 상처를 입으셨다. 지금 형님께서는 오직 생존을 위한 본능만을 가지고 계시다.’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주술사라는 것도 결국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 자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인간의 몸에 깃든 병을 쫓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기에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만큼은 오히려 주술사가 마법사에 비해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알마리온의 눈에 비친 막스밀리언의 상태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 이성을 상실한 채 오직 본능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철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남아 있는 상태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형님,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크윽! 누, 누구…… 큭!”
말투조차도 이전과는 달리 너무나도 어눌하기만 한 막스밀리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이나 익숙하면서도 편안한 기운을 느끼게 해 주는 알마리온을 보며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지만 그럴수록 참을 수 없이 심한 투통만을 느낄 뿐이었다.
“형님, 지금 형님은 머리에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러니 일단 상처를 치료하셔야만 합니다.”
“상처? 크흑…….”
“제가 모시겠습니다. 절 믿고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형수님과 조카들이 있는 형님의 집으로 말입니다.”
“…….”
계속하여 막스밀리언에게 말을 건네면서 알마리온은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정신 계열 정령을 소환하여 막스밀리언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그를 진정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령의 도움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막스밀리언의 상태는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얌전해졌다.
그런 그에게서 알마리온은 검을 빼내 한쪽으로 던져 놓고는 그의 팔을 붙잡아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 가시지요, 형님.”
“…….”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나 이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이나 그 누구도 알마리온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엄과 그가 보여 주었던 능력만으로도 이미 이들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굴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그대가 잠시 형님을 모시고 있게.”
“예? 예…… 나리.”
제이슨에게 잠시 막스밀리언을 맡긴 알마리온은 몸을 돌려 말하였다.
“누가 책임자인가?”
“…….”
책임자를 찾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하나 모두의 눈길이 한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아 누가 지금 이들 중의 책임자인지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대가 이들 중 책임자인가?”
알마리온의 물음에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제법 화려해 보이는 체인 메일을 걸친 사내가 낭패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다시 묻지. 그대가 이들 중 책임자인가?”
“그, 그렇소…… 아니, 그렇습니다.”
알마리온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자 사내는 이내 말투를 공손히 하였다.
“그대 이름은?”
“발데즈…… 카미온 폰 발데즈…… 남작입니다.”
“남작? 하면 이곳의……?”
“그, 그렇습니다. 이곳 발데즈의 영주……입니다.”
발데즈의 군주인 자신이 아무리 많게 보아줘도 20대 후반 정도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알마리온에게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더듬거리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렇군. 나의 이름은 알마리온. 로엔 왕국의 혼테르 후작이자 제국의 이스턴 백작이다.”
“헉! 지, 진정……?”
알마리온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발데즈는 크게 놀라는 표정과 눈빛으로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알마리온의 말을 들은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눈치를 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페니테의 주인! 진정 그, 그분이십니까?”
테어도오 폰 카즈모 백작과의 승부에서 승리한 알마리온에게 카즈모 백작이 넘겨주었던 바로 그 대對마법 갑옷인 네 페니테는 포넬 왕국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그러한 카즈모 백작을 물리치고 네 페니테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알마리온이란 존재 또한 포넬에서는 모든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레드로가 그동안 쌓아 놓은 세력을 처음 접했던 그날도 그들 모두는 카즈모 백작에 이어 네 페니테의 주인이 된 알마리온을 마치 신성시하듯 경외하였을 정도였다.
또한 필립 폰 아르몬 남작, 아니 후작이라는 포넬 최고의 마법사를 제압한 것은 물론, 연이어 카즈모 백작과 이후 카즈모 백작의 가신이자 오랜 지기였던 발몬 남작을 제압하여 영예로운 항복을 받아 낸 것.
그리고 또 다른 영웅인 서머셋 백작을 일방적으로 격파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둠으로써 포넬에서도 폰티악 후작과 함께 젊은 기사들의 영웅으로 자리 잡게 된 알마리온이었다.
그런 알마리온을 이렇게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이 이처럼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보이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이들에게는 더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네 페니테의 주인이었던 카즈모 백작의 영지에 속한 곳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날 아는가?”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이곳은 바로…… 테어도오 폰 카즈모 백작 각하의 영지의 일부입니다.”
잠시 원망의 표정이 되긴 하였지만 발데즈의 표정은 이내 다시금 그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
강자가 모든 것을 갖는 곳. 그곳이 바로 포넬이었고, 그 나라에 살아가고 있는 모두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이곳이…… 카즈모 백작님의 영지의 일부란 것이오?”
“그렇습니다.”
“음…….”
오랜만에 카즈모 백작의 이름을 듣기도 하였지만 막상 이곳이 그의 영지의 일부라는 말에 알마리온 또한 감회가 새로웠다.
“하면…… 발몬 남작은? 그는 어떻게 되었소?”
“발몬 남작 또한 이곳에서 멀지 않은 주군의 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렇소?”
“예, 그렇습니다.”
“그렇구려. 어쨌든 저분은 내가 데려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이것은…… 저분으로 인해 해를 입은 자들에 대한 보상금이니 받도록 하시오.”
“아!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포넬에서는 강자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듯, 강자에 의해 입은 피해는 모든 것이 약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받도록 하시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니.”
“정히 그러시다면……. 하온데 어디에 계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발데즈의 질문에 알마리온은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카렌쪼라는 곳에 있소. 내게 볼일이 있다면 그곳으로 오도록 하시오.”
“카렌쪼…… 알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각하를 뵈어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수고하시오. 가시지요, 형님. 갑시다.”
“…….”
“예, 나리.”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오랜만입니다. 발몬 남작.”
“인사드리십시오. 이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주군. 그리고 이분은 전대 카즈모 백작님의 뒤를 이은 피델 폰 카즈모 백작님이시며 저의 주군이 되시는 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혼테르 후작 각하. 피델 폰 카즈모라고 합니다.”
이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알마리온이 기억하고 있는 테어도오 폰 카즈모 백작의 모습을 많이 닮은 소년이 복잡한 시선으로, 하지만 행동만큼은 정중하게 알마리온에게 먼저 인사를 해 왔다.
“내가…… 알마리온 폰 혼테르 후작이네. 그분의 모습을 많이 닮았군.”
“그렇습니까?”
“그렇군.”
“하온데 각하께서는 로엔의 왕자님의 소식을 듣고 오신 것입니까?”
아무래도 분위기가 서먹할 수밖에 없자 발몬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겸사겸사입니다.”
“하오면 또 다른 볼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포넬의 태양을 바꿀까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마리온의 말에 발몬은 물론 피델 또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포넬의 태양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현 고메즈 국왕을 제거하겠다는 뜻이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원래의 태양이 아니니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미 앞선 왕조의…….”
차마 자신의 입으로 앞선 브리스톨 왕가의 혈통이 모두 끊겼다는 것을 말하지 못한 발몬이 말끝을 흐렸다.
“과연 그럴까요? 만약 브리스톨 왕가의 혈통이 남아 있다면 그댄 어찌하겠나?”
알마리온의 눈이 어린 카즈모 백작의 눈을 직시하였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왕 만난 자리였고 아직 어린 카즈모 백작에 대해서는 몰라도 발몬 남작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건…….”
알마리온의 물음에 피델이 발몬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 어린 그로서는 이런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다.
“…….”
하나 발몬은 그러한 피델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그가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리겠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그분이 누구이신지 뵐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자리에 계시지 않네. 하지만 그분의 이름은 말씀드리지.”
“…….”
“그분은 바로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 왕자님이시네.”
“아!”
“음…… 그분은?”
“세상에서는 이미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후 쭉 나와 함께 계셨소. 그대들도 알 것이오. 아이언마스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계시는…….”
“아!”
“그럼 그가?”
지난 전쟁 중에 아이언마스크라는 존재 또한 이들 포넬군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다.
한데 그러한 아이언마스크가 바로 세상에는 죽은 것으로 알려진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 왕자였다는 사실에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그분이 정녕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피델의 물음에 알마리온이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저 또한 그분과 함께하겠습니다.”
피델이 결심을 하고는 나름 다부진 표정과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카즈모 백작 가문 또한 고메즈에 의해 가문의 근간이 흔들린 피해자에 속하는 쪽이었다.
이는 고메즈가 포넬의 권력을 잡은 이후, 자신에게 위협적인 세력이 될 수 있는 자들의 세력을 꺾어 놓기 위해 벌인 로엔과의 전쟁에서 카즈모 백작 가문은 가문의 수장은 물론, 가문의 힘 중 절반 이상이 상실되면서 그저 그런 평범한 가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많은 유력한 가문들이 이처럼 카즈모 백작 가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리처드와 레드로는 주로 이러한 가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날 따르겠는가?”
“으음…….”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칼리프였다. 브리스톨 가문의 혈통을 끊은 후 딸에게 전해진 왕위를 여왕으로부터 넘겨받아 포넬의 국왕이 된 고메즈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칼리프 폰 에인세 후작, 아니 공작이었다.
“훗! 이제 사라진 왕실과의 밀약 따위는 잊은 것인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칼리프의 모습에 프란시스는 비웃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아닙니다, 왕자님.”
“뭐가 아니라는 것이오, 후작? 아니, 공작?”
“소신이 여왕 폐하와 한 약조는 반드시 지킬 것이옵니다. 하오나 현 국왕은 그리 간단한 자가 아니옵니다.”
“훗! 그것이 망설이는 이유인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왕자님.”
“하면 그대는 약속을 잊은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군?”
“왕자님!”
“됐소.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오. 오늘의 일을 두고두고 말이오.”
그 말을 끝으로 리처드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 리처드의 모습을 보면서 칼리프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정적政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세력의 힘을 대부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물론 오히려 대공이었던 시절보다 더욱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상태로,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적대하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지금 고메즈를 타도하겠다고 돌아온 리처드의 행동이 칼리프는 어리석게만 느껴진 것이었다.
“…….”
리처드가 돌아간 후 칼리프는 고민했다. 지금 이 상태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 체하여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었다.
“역시…… 그를 버리는 것이…….”
한참을 고민하던 칼리프는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도 리처드를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상 고메즈의 최측근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한 고메즈에 이어 가장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지만 실상 칼리프는 고메즈의 끊임없는 경계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고메즈의 계속된 감시로 인해 칼리프의 행동반경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내가 프란시스 왕자를 만난 것도 이미 국왕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지.”
지금은 비록 고메즈가 왕위에 올라 있고 포넬의 모든 국정을 장악하고 있지만, 고메즈에게는 그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될 만한 후손이 없었다.
칼리프가 원하는 때는 바로 그때였다. 앞서 포넬의 권력을 장악했던 대공들이 그러했듯이 자신 또한 고메즈의 사후 포넬의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는 지금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이번 일이 기회가 될 수도 있겠군.”
리처드가 복수를 하기 위해 되돌아왔다면 무작정 되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가 아는 리처드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도, 그리고 경망스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 무엇인가 준비를 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어도 분명 고메즈의 세력을 그만큼 깎아내리는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고메즈에게 알려는 줘야겠지. 그래야 뭔가 행동을 취할 것이니 말이야.”
브리스톨 가문과의 마지막 약속을 깨기로 결정한 칼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메즈를 만나기 위해 궁으로 향하였다.
“이미 그는 내가 이곳에 왔음을 고메즈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계획보다 일찍 움직여야겠다.”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형님.”
칼리프의 배신으로 자신의 존재가 드러났음을 확신하고 있는 리처드가 계획보다 일찍 거사를 시작하자고 하였지만 의외로 알마리온은 그럴 필요성이 없단 말을 하자 모두가 이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의 지형을 보니 나가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유리한 지형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곳에서 버티다 결정적일 때 치고 나가는 것이 유리합니다.”
“하지만…….”
“그리고 지금은 세가 너무 부족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형님을 위해 기꺼이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흠…….”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니 조급하기보다는 그들이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유리합니다, 형님.”
“알았다.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그대로 따르도록 하마.”
이미 전장을 함께 전전하면서 알마리온의 능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확인한 리처드는 전적으로 알마리온의 의견에 따랐다.
“그리고 말론 경.”
말론 경이란 바로 알마리온의 가신이 된 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예, 주군.”
아직 치기 어린 모습이 가득한 샘이 나름 힘차게 대답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오히려 주변에 모여 있는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게 만들었다.
“마법 아이템은 충분하겠지?”
“예, 주군. 그분께서 도움을 주셔서 충분히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샘이 말하는 그분이란 바로 유르스나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엘프인 그녀가 인명을 살상하는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는 일을 돕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꺼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들인 알마리온을 위해서 그녀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심을 다해 마법 아이템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에 쿤테르와 정령의꿈에서 보호하고 있던 단단한머리 또한 영지로 데려가 그곳에 지내게 하면서 그로 하여금 마법 아이템의 제작의 기술을 전수토록 하고 있었기에 이제 마법 아이템은 더 이상 포넬만의 자랑거린 아니었다.
“그나이제나우 경.”
“예, 주군.”
“경이 말론 경과 함께 이 주변 지역을 돌면서 적절한 곳에 마법 아이템을 설치하도록 하시오.”
“예, 주군.”
“또다시 패하였다는 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고메즈는 계속되는 패배 소식에 좀처럼 화를 참지 못하였다.
칼리프에게서 리처드가 자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는 어쌔신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 하였지만 그것도 여러 차례 실패를 하여 그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가 다시금 포넬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나라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그는 서둘러 병력을 보내 리처드를 제거하려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이미 수차례 리처드를 공격하였지만 참패만을 거듭하면서 고메즈는 오히려 안팎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
분통을 터뜨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고메즈의 행동에 대전 안에 모인 포넬의 주요 귀족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한 사람을 은근히 바라보았다. 바로 왕국의 3대 공작 중 한 사람이자 고메즈의 최측근인 칼리프였다.
“폐하, 잠시 고정하시옵소서.”
“내가 지금 고정하게 되었소!”
“폐하! 폐하께오서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를 하시던 그러한 분이옵니다. 아니시옵니까?”
“흥!”
칼리프의 말에 고메즈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모로 돌려버렸다.
“폐하, 소신이 판단하기로 그들이 지금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옵니다. 따라서 그것만 차단한다면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한 가지라? 그게 무엇이오, 공작?”
자신의 말에 고메즈가 관심을 갖자 칼리프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금 자신들의 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 세를 모으기 위해 한곳에 머물면서 일단 폐하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한편, 그것을 바탕으로 세를 형성하려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쩌잔 말이오?”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카렌쪼는 지형이 험한 곳으로 왕국 내에서도 유명한 곳이옵니다. 이런 지형을 이용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쉽게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따라서…….”
칼리프의 계획은 그의 차분하고도 냉정한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군을 동원하여 카렌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한 후 물자 부족에 시달릴 리처드의 군세를 힘들게 만든 후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메즈는 그런 칼리프의 계획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란이라는 것은, 그것도 전 황실의 혈통을 이은 자가 주축이 된 반란이라면 최대한 신속하게 제압을 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폐하, 신 또한 반란이라는 것을,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니고 전 왕실의 혈통을 이은 존재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란을 제압하는 데 오랜 시간을 둔다면 그만큼 폐하의 존엄에 큰 상처를 받을 것임을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전술에 이르기를 지형이 험한 곳에서 많은 병력을 운용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다 하였사옵니다.”
지형이 험한 곳일수록 공격하는 쪽보다는 방어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반란군이 주둔하고 있는 카렌쪼는 완벽하게 방어자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이러한 지형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여전히 득세를 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물론 여기에 마법 아이템이라는 강력한 무기까지 있었기에 더욱 유리하게 상황을 전개할 수 있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반란군 또한 마법 아이템으로 무장을 하고 있어 공격이 더욱 어려운 지금 최선의 대책은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주변을 완벽히 포위하고 때를 기다리자는 칼리프 공작의 의견이 가장 합당하다 사료되옵니다.”
“신 또한…….”
당장 자신들에게 병력을 끌어모아 반란군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고메즈의 성화에 마지못해 병력을 모으고 있던 귀족들이 이때다 싶어 칼리프의 의견에 찬성을 하고 나섰다.
그런 귀족들의 내심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고메즈 또한 지금 당장 그들을 공격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이번에는 네놈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후후후.’
일단 귀족들의 바람대로 움직일 것이지만 고메즈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좋소. 모두가 같은 생각이라면 그 길이 최선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일 것이오. 해서…… 에인세 공작.”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이미 칼리프는 고메즈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메즈의 요구는 그 또한 바라는 바였기에 기꺼이 응할 생각이었다.
“그대가 군을 지휘하여 그대의 계획대로 실행토록 하시오.”
“명을 받자옵니다, 폐하!”
고메즈는 고메즈대로, 그리고 칼리프는 칼리프대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속내를 드러내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하나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신들의 논의가 이미 그대로 알마리온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이제 적을 공격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알마리온의 말에 모두가 반색을 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둠으로써 사기가 한껏 오르긴 하였지만 소위 정의를 위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이 한곳에 머물면서 방어만 한다는 것은 그 목적이 맞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나름 다들 불만이 싹트고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그러한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방어에만 전념하였다.
“목표는 적의 사령관인 칼리프 공작이란 자입니다.”
“음…….”
칼리프 공작이 목표란 말에 이를 반겨 하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리처드였다.
“너무 강한 상대 아닙니까?”
첫 목표가 왕국의 3대 공작 중 1명이자 고메즈 국왕에 이어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칼리프라는 말에 모두가 우려를 나타냈다.
“그를 굳이 첫 목표로 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려하시는 것처럼 그가 가장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
모두가 알마리온의 말에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세가 적습니다. 하지만 사기도, 힘도 지금이 최고조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직 분명한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마리온의 말은 이해가 되었지만 과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전력으로 포넬 왕국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지략 또한 왕국 내에서 알아주는 그를 상대하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그런 자를 쓰러뜨린다면 분명 확실하게 편을 갈라서겠지.”
“그렇습니다, 형님.”
“하지만 정말로 그를 상대할 수 있겠나?”
레드로는 그래도 이곳에서 지내면서 나름 리처드의 일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칼리프란 자가 어떤 이라는 것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알마리온이 그를 첫 공격의 목표로 결정한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걱정 말게나, 친구. 그는 이 근처에도 오지 못할 것이니 말이네.”
이처럼 장담하는 알마리온의 모습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지만 그동안 보아 온 알마리온이라면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거나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행동에 웃음을 지어 보이며 동조하였다.
“훗!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네. 알겠네. 하면 언제 움직이면 되겠나?”
레드로가 강한 신뢰감을 보이자 그에 의해 뭉쳐진 자들 또한 자신들이 충성을 맹세한 레드로의 뜻에 따라 알마리온의 계획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뭐라고 했소? 그럼 그들이 카렌쪼를 벗어났다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주군.”
“한데 그러한 소식을 왜 이제야…… 설마?”
칼리프는 리처드가 이끄는 반군 세력이 근거지인 카렌쪼를 벗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상황이 돌변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나 그보다 그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 것은 반군이 근거지인 카렌쪼를 이미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이 이처럼 뒤늦게 전해진 것이었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오나……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주군.”
“음…….”
칼리프가 우려하던 상황. 바로 반군들을 포위하고 있던 병력이 이미 그들에 의해 전멸을 당하였거나 그들 쪽으로 전향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드러났음을 확인하자 그의 표정은 한껏 굳어졌다.
“어느 쪽인가? 전멸인가, 아님 이탈자가 나온 것인가?”
“후자의 경우입니다, 주군.”
“하면 이탈자가 누구인가?”
“카즈모 백작입니다.”
“으음…….”
유난히 처음부터 반군의 제압에 적극적이었던 카즈모 백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대 카즈모 백작인 테어도오가 로엔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전장에 나갔던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이후에도 고메즈의 견제로 인해 백작 가문의 힘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약화된 카즈모 백작 가문이었다.
그런 카즈모 백작 가문은 이번 일을 기회로 옛 영광을 재현하고자 함과 동시에 고메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출전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고메즈 또한 두고 보겠다는 심산으로 그의 요청을 수락한 것이었다.
“카즈모 백작 진영을 통해 배후에서 다른 진영을 공격해 간 통에 모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그 나머지도 대부분 포로로 포획되는 바람에 소식이 늦게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주군.”
“음…… 하면 일단 이곳에서 주둔을 하면서 나머지 병력이 오길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칼리프 공작이 이끄는 전력은 6개 천인대 규모였다. 그에 반해 반군의 세력은 변절한 카즈모 백작군까지 계산한다 하더라도 겨우 3개 천인대 규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을 멈추고 또 다른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결정을 하자 내심 불만이 많았다.
하나 칼리프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반군을 제압하기 위해 이동 중인 다른 병력이 올 때까지 진을 치고 기다리기로 결정을 하였다.
“역시 자네 말처럼 저들은 진을 치고 있군, 그것도 이미 우리가 함정을 만든 바로 그 자리에 말이네. 후후.”
칼리프가 진을 치고 있는 곳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알마리온과 리처드, 레드로 그리고 카즈모 등 반군의 지도부가 칼리프 공작이 이끌고 온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네. 이 인근 지역에서 저 정도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실상 적이 어느 곳에 진을 칠 것인지를 정확히 미리 집어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장소에 미리 함정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실상 이번 전투는 이미 싸우기도 전에 반군 측의 승리라 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시작하도록 하지.”
“그러지.”
적진을 살피는 것을 마친 알마리온 등이 부대에 복귀를 한 후, 이들이 한 일은 그저 휴식을 취하면서 곧 있을 전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말론 경.”
“예, 주군.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부대가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준비를 마치자 알마리온은 더 이상 기다릴 것 없다는 듯이 샘에게 미리 설치하였던 마법 아이템을 작동시켰다.
쿵! 쿠앙! 쿠쿵! 쿵! 쿵!
연속된 폭발음과 화염 그리고 각종 마법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달빛조차 없던 그믐밤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진압군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던 발락 기사단이 기치창검旗幟槍劍을 한 채 이미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는 진압군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또한 진압군 진영을 넓게 포위하고 있던 또 다른 부대들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돌격하였다.
포박된 상태로 리처드 앞에 끌려와 무릎이 꿇린 칼리프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하였다.
“내 그대에게 분명히 경고하였을 것이다. 약속을 배신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임을.”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없소…….”
“그럼.”
챙!
리처드가 검을 뽑아 드는 모습에 칼리프는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포넬 왕국의 최대 실세이자 국왕인 고메즈의 최측근인 칼리프 공작은 그렇게 패자의 멍에를 쓴 채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