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고
“헉! 형님! 형님! 안 됩니다, 형님! 형님……!”
“음…… 여보? 여보! 여보!”
하루 종일 무엇 때문인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 알마리온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며 별다른 말이 없어 궁금하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데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슨 악몽을 꾸는지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몸부림을 쳐 대자 곁에서 같이 잠들었던 일레인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그를 깨웠다.
“헉!”
“당신…… 갑자기 왜 그러세요? 혹시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꾸신 건가요? 예?”
“으음…… 아무래도…… 왕도에 가 봐야 할 것 같소.”
“갑자기 왕도에 가시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혼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레인은 아직 알마리온이 상급의 주술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막스밀리언 형님께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도무지……. 꿈속에서 2왕자 전하께서 보이셨던 것인가요?”
“그렇소.”
“하지만 단지 꿈일 뿐이잖아요?”
“난……. 아니오, 지금은 그걸 설명할 시간이 없소. 한시라도 빨리 왕도로 가 봐야 할 것 같소.”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다가 만 채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옷을 걸치는 알마리온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레인이었다.
“밖에 누구 없는가? 있으면 들어오라!”
“예, 영주님! 부르셨습니까?”
“그대는 지금 당장 모두를 회의실로 모이도록 하라. 어서!”
“예? 예, 영주님.”
잠자리에 들었던 알마리온이 갑자기 다급하게 영지의 모든 관리자들을 소집하자 잠시 무슨 일인가 싶어 눈치를 보다가 알마리온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황급히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예?”
“미안하오. 지금은 그것을 설명할 시간이 없을 것 같소. 자세한 설명은 어머님에게 듣도록 하시오. 그리고 서둘러서 여행 준비를 좀 해 주도록 하시오. 아마도 상당히 긴 여행이 될 것 같소. 부탁하오, 부인.”
“여보…….”
영문을 몰라 당황해하는 일레인에게 제 할 말만 하고는 방을 나서는 알마리온을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번에 형님의 일까지 모두 해결하였으면 합니다.”
“음…….”
회의실로 모인 리처드와 가신들에게 알마리온은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막스밀리언을 찾기 위해 포넬로 갈 것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아울러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 미루어 왔던 리처드의 복수까지도 함께할 것임도 분명히 말하였다.
“이번이 아니면…… 형님의 복수를 도와 드릴 기회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네 예지력으로 말하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음…….”
“형님의 복수가 그를 중심으로 그의 일가라면 이번에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포넬 전체와의 전쟁이라면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야지.”
리처드가 결심을 하였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이 경.”
“예, 주군.”
“발락 기사단을 소환토록 하시오.”
“전체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도 모두 이주시키도록 하시오.”
“예, 주군. 곧 연락을 취해 폰티악 후작님의 영지로 집결토록 하겠습니다.”
이미 발락 기사단은 더 이상 발락 영지만의, 그리고 제국의 기사단도 아니었다.
실상 국경 지역에 나가 있는 발락 기사단은 발락 기사단이면서도 또한 발락 기사단이라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실력 면에서는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발락 기사단의 정수라 할 수는 있어도 이들은 제국에 남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반면 발락 영지에 남아 있는 발락 기사단은 실력으로는 이들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이들은 순수하게 알마리온에게 충성을 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이 비록 실력은 약간 처진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에 남기를 원하는 자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며, 그 차이 또한 그렇게 크게 떨어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떨어지는 실력은 검술이나 기타 마상 창술 같은 것이 아닌 말을 다루는 능력으로, 출신 성분상 말을 자주 접하지 못하였기에 나오는 차이였다.
“그리고…… 그나이제나우 경과 샘, 각 부족에서 최고의 전사들 1백 명씩과 대전사들도 이번에 함께 가도록 합니다.”
“알겠습니다, 주군. 곧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한데 영지군도 동원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영지군은 이곳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영지군이 남아서 할 일이 있단 알마리온의 말에 안드라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알마리온에게 예지능력이 있다는 것은 안드라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영지군으로 하여금 대비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영지의 일이 아닌 왕국 전체의 일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레이 경이 드란 경과 함께 잘 의논하여 대응토록 하십시오.”
“예, 주군.”
“그럼 나머지 분들도 레이 경과 함께 영지를 잘 부탁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주군.”
알마리온과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을 서운해하던 요들이었지만 그래도 가장 힘차게 대답해 주었다.
“그럼 형님…… 준비하십시오. 샘도 준비하거라.”
“그래, 알았다.”
“예, 주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포넬에 도착하였어야 할 사절단이 도착하지 않았다니요!”
도르첸이 부재중인지라 국왕 파벌에 속해 있는 고위 귀족 중 유일하게 소렌토에 남아 있는 나르담이 좌장座長 역할을 하고 있었다.
블리스는 포넬로 떠난 막스밀리언과 도르첸 등 사절단 일행을 태운 범선이 도착해야 할 장소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이다.
“그것이…… 도착하기로 한 날 인근 해역에서 풍랑이 워낙 심하였다고 합니다. 하여…….”
“그렇다면 수색을 해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이미 여러 날을 수색하여 봤지만…….”
“그랬는데…… 그랬는데 어찌 되었단 말이오?”
“해로를 거슬러 올라가서 수색도 해 보고…… 또 선단을 동원하여 주변 해역까지 모두 수색을 해 보았지만…….”
“으음…… 어찌…… 어찌 이럴 수가…….”
막스밀리언과 도르첸이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다는 말에 블리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개인적으로 따진다면 한 사람은 숙부였고, 또 한 사람은 친동생이었다.
그리고 공적으로 따진다면 한 사람은 블리스 자신의 최측근으로 국정 운영에 필요한 조언을 해 주는 인물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앞으로 왕국의 안전을 책임지게 할 기사로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폰티악 후작을…… 폰티악 후작에게 사람을 보내십시오!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선박을 동원하여 주변 해역을 수색도록 하십시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내가! 내가 어찌 지금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 이미 폰티악 후작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두 분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 중에 있사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하옵니다, 폐하. 하오니…….”
“말씀 도중에 송구하오나…… 폐하, 혼테르 후작이 입궁하여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함멜의 말에 블리스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흥! 혼테르 후작이 말인가요?”
“폐하…….”
알마리온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블리스였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하였던 것도 그랬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알마리온을 좋지 않게 보게 된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하나는 자신이 분명히 적극적으로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위군 사령관 자리를 맡지 않고 그것을 근위군 부사령관이었던 칸 자작에게 맡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한 달 전부터 몇 차례나 속히 소렌토로 귀환하라는 명을 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나타나는 그에 대한 불신임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 블리스의 감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함멜은 걱정이었다. 침착한 성품의 블리스였지만 막상 큰일이 겹치다 보니 자꾸 본모습을 잃고 허둥거리고 성급한 결정을 자주 내리는 것이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침착함만 되찾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현명한 군주가 되실 수 있으시련만…….’
나르담이나 함멜이나 점차 생각을 깊이 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대응을 하는 블리스의 모습에 내심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보자고 하니 보도록 하지요. 들게 하세요!”
“예…… 폐하.”
함멜이 잠시 집무실을 벗어나서 대기실로 향하였다.
“폐하께오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십니다.”
“그 일 때문입니까?”
이미 입궁하여 함멜과의 대화로 자신을 소환한 것을 처음 알게 된 알마리온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문제라면 설명을 드리면 될 것입니다.”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 요즘 지나치게 예민하신 상태인지라…….”
“충고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지요.”
“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알마리온이 블리스에게 예를 다할 때까지도 블리스는 고개를 모로 돌린 채 그를 외면하였다.
“실례지만 두 분……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자리를 비켜 달라는 알마리온의 말에 나르담과 함멜의 눈길이 블리스에게 향하였다.
그리고 블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폐하, 함멜 자작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소신에게 전령을 여러 차례 보냈다고 말입니다.”
“흥!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니 후작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하는군요?”
“폐하, 소신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신하이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충성심은 절대적인 것이옵니다.”
“음…….”
“설사 소신이 폐하께 불측하게도 거짓을 아뢰는 일이 있다면, 그 또한 모든 것이 폐하와 왕실 그리고 왕국을 위한 것이옵니다.”
“진심이시오?”
“그러하옵니다, 폐하.”
“정말로 내가 경의 그러한 마음과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폐하.”
“하면 증명해 보시오.”
마치 어린아이 같은 어리석은 요구였다. 하지만 알마리온은 그런 어리석은 요구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어 전혀 망설임 없이 단숨에 자신의 목을 그어 버렸다.
순식간에 알마리온의 목에서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에 블리스는 크게 놀라며 비명을 지르듯 사람을 불렀다.
“무슨…… 헉!”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르담과 함멜이 황급히 달려 들어왔고, 두 사람은 핏물을 뿜어내면서도 담담한 모습으로 선 채 블리스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기겁을 하였다.
“소, 속히…… 속히!”
여전히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블리스와는 달리 그래도 전장을 누비던 나르담의 행동이 침착하였다.
“자작! 포션을! 그리고 어서 마법사를 부르시오!”
“예? 예…….”
국왕을 늘 곁에서 호종하여야 하는 궁내부 장관인지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함멜은 늘 최상품의 포션을 지니고 다녔다.
나르담의 재촉에 그는 황급히 포션을 건네주고는 집무실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근위군 소속 기사에게 속히 왕실 마법사를 데려오라 소리쳤다.
“그래도 응급조치도 빨랐고, 또 후작께서 젊고 매우 건강한 덕분에 큰 탈은 없었습니다. 하나 하루나 이틀 정도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폐하.”
알마리온의 상처를 돌본 마법사의 말이었다.
“하면 후작은 괜찮은 것이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후…….”
알마리온이 괜찮다는 말에 블리스는 비로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알겠소. 수고하였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마법사를 돌려보낸 블리스는 알마리온의 눈을 직시하였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명령에 따르지 마시오. 아시겠소, 후작?”
“…….”
“이것 또한 명령이오.”
알마리온이 대답하지 않자 다시금 블리스가 못을 박듯 말하였다. 그제야 알마리온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훗!”
알마리온의 모습에 블리스 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화답을 하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나르담과 함멜은 두 사람이 더 이상 불화가 아닌 화합의 모습을 보여 내심 안심이 되었다.
하나 나르담의 표정에는 단순히 안도감만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에는 또 다른 감정. 바로 질투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후후, 평생을 남들의 그늘에 가려 있었거늘, 이제는 또다시…….’
지모로는 평생 프리모와 도르첸에 가려 있어야 했고, 검술과 전략으로는 더글러스와 폰티악에게 가려 있던 그였다.
한데 이제는 새파랗게 젊은 알마리온에게마저도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절로 분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옷을 갈아입도록 하세요. 그러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폐하.”
피에 젖은 의복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다시금 독대를 하였다.
“하면 전혀 연락을 못 받았다는 것이오?”
몇 번이나 전령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받지 못하였다는 알마리온의 말에 블리스는 어째서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
“후작께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제국의 프랑크 황태자로부터 사람이 왔습니다.”
“으음…….”
프랑크로부터 사람이 왔단 말에 알마리온은 그것이 카산느와 관계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주님과 관계된 일이옵니까?”
“그렇소. 대체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여전히 신전에 틀어박혀 있는 카산느의 상태가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아무리 무감각하다 하더라도 이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 누구로부터 제국에서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기에 답답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건…….”
블리스 또한 알아야 할 일이었기에 알마리온은 그에게 카산느가 프랑크로부터 어떤 일을 당하였는지를 소상히 전하였다.
“그런……!”
알마리온이 전한 말에 블리스는 동생이 여인으로서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하면 프랑크 황태가가 카산느를 원하는 것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런!”
자신의 동생을 한낱 노리개로 여기는 프랑크의 행동에 블리스는 분통이 터졌다.
“그래서 그런 협박을 하였던 것이구려. 한데 후작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하문하시옵소서.”
“혹시…….”
“폐하, 말씀 도중에 송구하오나 태왕비마마께오서 갑자기 용태가 위중해지셨다 하옵니다.”
“뭐라고요? 어머님께서 말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속히 신전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아, 알겠소!”
운명. 그것은 운명이었다. 만약 이때 블리스가 알마리온에게 궁금해하던 모든 것을 물어보았다면 그의 운명도, 그리고 왕실과 왕국의 운명도 모두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운명은, 신이 이들에게 부여한 운명은 그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헬레나가 숨을 거둔 것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나빠졌다는 소식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였다.
메르타니온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그녀는 그 충격이 너무나도 큰 것이었기에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마음의 병을 얻은 후, 신전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막내딸인 카산느가 제국의 황태자에게 강간을 당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녀에게 연이어 막스밀리언과 도르첸이 특사의 자격으로 포넬로 향하였다가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결국 삶의 무게를 끝내 견디지 못하였던 것이다.
헬레나의 장례식은 그녀가 왕비였다는 신분에 비한다면 조금은 초라하게 거행되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남편인 메르타니온이 이단으로 처형을 당하였기에 그녀의 장례식 또한 조촐하게 거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연이은 왕실의 변고에 왕실은 크게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왕국의 안위를 위해서도 공주님…… 아니, 발락 공작 부인을 조속히 제국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헬라나의 죽음에 따른 슬픔이 미처 가시기도 전이었건만 프리모는 제국의 하인리히의 실종 사건을 가지고 블리스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럴 수는 없소!”
부모에 이어 동생마저 실종된 상태에서 또 다른 동생을, 그것도 어려서부터 모든 형제들 중 가장 여린 마음을 가진 막냇동생을 또다시 제국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오면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이실 생각이란 말씀입니까?”
“그 무슨…….”
“폐하, 언제까지 이러한 일이 비밀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하긴 그의 말처럼 아무리 이러한 일을 비밀로 묻어 두고 싶다 해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지금만 보아도 가장 알지 말았으면 하는 상대인 프리모가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지 하인리히의 실종에 대한 전모를 알아내고는 자신을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공작은 제국의 베르그 공작 가문과는 혈족인 관계…… 아!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블리스를 바라보며 프리모는 비릿한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리석은…… 설사 이 일이 알려진다 하더라도 왕국의 안위에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다니……. 하긴 워낙 큰일들을 연이어 당했으니 이해는 가지만. 후후후. 하지만 이참에 분명히 해 두어야겠지. 두 번 다시 날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후후!’
주변의 정세를 조금이라도 판단할 능력이 된다면 지금 상황으로 보아 제국이 로엔을 침공한다거나 할 처지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블리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국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유는 왕국의 귀족들 중 귀족 파벌에 속하는 자들은 모두 친제국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세력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도 남을 정도이기에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또다시 끌려다녀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또다시?’
답답하고 한심한 현실이었다. 남들은 국왕이라는 자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리인 줄 알고 부러워하고 있지만, 국왕의 자리만큼 외롭고 고독하며 또한 부질없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 요즘 그가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갈등하는 블리스의 모습을 보면서 프리모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만약 이러한 일이 제국의 재상인 베르그 공작에게 전해진다면 그때는 진정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제국의 재상인 베르그 공작은 현존하는 최고의 마법사였다. 또한 대대로 제국의 최고 귀족의 가문이었기에 그 저력이 로엔 왕국 전체를 능가하고 있었다.
또한 베르그 공작 가문의 가신들의 가문들의 힘까지 더한다면 그 힘은 실상 제국의 힘의 절반에 해당할 정도였다.
하니 설사 제국 전체가 움직이지 않고 베르그 공작 가문만 움직인다 하더라도 충분히 왕국으로서는 감당하기 불가능했다.
“그만! 그만하시오…… 공작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으니 이만…… 이만 나가 보도록 하시오…….”
계속되는 프리모의 공격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블리스가 짜증을 부렸다.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조속히 대답을 주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럼 소신은 이만…….”
끝까지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은 프리모의 행동에 머리를 감싸 쥔 블리스의 입에서는 절로 앓는 듯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 여리고 약한 아이를 그곳에 다시 보내야 하다니요! 폐하께서는 저 아이가 그자에게 어떤 일을 당할 뻔하였는지 듣지도 못하셨나요? 그런데도 그런 자에게 그 아이를……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실 수 있는 것이지요? 오라버니는 그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단 말인가요?”
이혼을 당한 후 신전에서 어머니인 헬레나를 돌보던 엘리자베스는 지금은 궁에서 머물고 있다가 블리스가 막내인 카산느를 다시금 제국으로, 그것도 제국의 황태자인 프랑크의 두 번째 부인으로 보내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달려와서 따지는 중이었다.
“…….”
동생인 엘리자베스의 타박에도 블리스는 할 말이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동생을 지켜 주지 못하는 것이 그저 못내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오라버니. 제발…… 그 아이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게 지켜 주세요. 예? 오라버니…….”
엘리자베스는 간절히 애원하고 또 애원하였다. 그리고 블리스 또한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나 블리스는 한 가정의 주인이 아닌, 일국의 국왕인 몸, 그런 그에게는 비록 자신이 직접 통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키고 보호해야 할 백성들이 존재하였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 그 아이에게도 정말 미안하고, 또 네게도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래, 내겐 지켜야 할 더 많은 것들이 있구나. 그것들을 위해서 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단다.”
그렇게라도 정당화시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오라버니…….”
“미안하구나…… 피곤하니 이만 나가 주었으면 좋겠구나.”
“오라버니.”
“그만 나가 주렴. 부탁이다.”
“후…….”
블리스의 집무실을 나온 엘리자베스는 이 일을 어떻게 카산느에게 알려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분명 그 아이가 이 소식을 들으면 자결을 할지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더 이상 힘들지 않게 할 수가…… 아! 그렇지! 그분이 지금 소렌토에 계시지?’
어떻게 하면 동생인 카산느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고 불행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엘리자베스는 문득 알마리온을 떠올렸다.
“그래! 그분이라면…… 넌 지금 즉시 사람을 혼테르 후작님께 보내 내가 좀 뵈었으면 좋겠다고 전해 줘.”
“예? 혼테르 후작님께 말씀이신가요?”
“그래. 어서!”
“예…… 공주님.”
엘리자베스의 부름을 받은 알마리온이 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연락이 전해진 지 몇 시간 후였다.
“어서 오세요.”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공주님.”
“예. 실은 후작님께 부탁을 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오시라 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만나고자 했을 때부터 그녀가 무슨 일로 자신을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후작님이라면 분명 그 아이를 더 이상 슬프지 않게 해 주실 수 있으실 것이에요.”
“음…….”
알마리온 또한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본인 또한 그럴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왕실의 결정, 그리고 블리스의 결정 또한 따라야 하는 그러한 입장이었기에 더욱 곤란했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아이는 후작님만이 구해 줄 수 있어요.”
“…….”
“그 아이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그 아인…… 그 아인 분명…… 흑! 흑!”
아비인 메르타니온을 닮아 선이 굵은 외모를 지닌 엘리자베스는 그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호방하여 여장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애잔하게 여겨지는 동생의 일에서는 대범함이 아닌 여느 여인네들처럼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님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정말인가요? 정말로 그 아이를 구할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예. 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하면 영원히 공주님은 남들 앞에 모습을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예? 그게 무슨……?”
알마리온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엘리자베스는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주님께서 이 세상 분이 아니게 된다면 제국의 황태자 또한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공주님.”
“음…….”
알마리온이 제시한 방법. 그것은 바로 카산느 공주란 존재를 죽음으로 위장하자는 것이었다.
“하긴…… 그래요. 어쩌면 그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일 수 있을 것 같군요.”
“…….”
선택은 국왕인 블리스가 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차라리 그편이 모두를 위해서 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예, 공주님.”
“그렇다면…… 그 일은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어요.”
결심을 한 엘리자베스는 그길로 알마리온과 함께 블리스를 찾아갔다.
“정말 그것이 가능한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렇다면…… 그렇게 해 주시오. 그 전에…… 내 후작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끝까지 지켜 주시겠습니까?”
블리스의 이 말은 카산느를 알마리온의 아내로 맞이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리해 주시겠소?”
“폐하…….”
“알고 있습니다. 이미 후작에게 2명의 부인이 있음을 말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아이를 끝까지 보호해 주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후작뿐이군요.”
“으음…….”
“그래요. 후작님께서 그 아이를 끝까지 맡아 주셨으면 해요.”
곁에 있던 엘리자베스 또한 블리스와 함께 알마리온에게 카산느를 책임져 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였다.
“그리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폐하.”
결국 두 사람의 끈질긴 청으로 알마리온은 카산느를 자신의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음……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소?”
정령의꿈이라는 비밀결사 내의 인물들로 하여금 이번 일을 끝까지 맡길 생각이었다.
“예, 마스터. 믿을 만한 이들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칸 경만 믿겠습니다. 반드시 공주를 내 영지까지 그 누구도 모르게 모셔야 할 것입니다.”
“예, 마스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부재중인 때에 왕실이 많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와 왕실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알마리온으로서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실종된 막스밀리언을 찾고 또한 리처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기에 마음이 무거울 뿐이었다.
‘어찌 이리 불안하단 말인가?’
보통의 경우라면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경우 미리 예지몽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거나 하게 되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단지 불안감만 계속 들 뿐 모든 것이 안개처럼 뿌옇기만 할 뿐이었다.
“한데 왕자님을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칸 또한 알마리온이 어떤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충분히 겪어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꿈속에서 본 막스밀리언은 분명 생존해 있었다. 다만 계속된 어둠 속을 헤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마도 지금 그의 신변에 큰 이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의 신상에 무슨 큰 변고라도……?”
“아직은 분명히 알 수가 없군요. 아무튼 공주님의 일을 잘 부탁하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하였듯이 폐하와 왕실을 보호하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