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분열 (60/70)

분열

“정령 또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 중 하나입니다. 그러한데 어찌 그러한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를 부정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이 땅에서 정령술사들이 왜 공공의 적이 되어 사라져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시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알마리온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정령술사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한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체임버스를 소환하여 왜 처음부터 그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지를 추궁하고 있었다.

“하면 그대는 우리 모두의 뿌리셨던 그분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지금 주장하는 것이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실망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가론 폰 로드에릭 이전에도 마법사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오른 마법사이자, 마법제국을 엶으로써 한때 마법사들을 세상의 주역으로 만들었던 그는 모든 마법의 뿌리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의해 비롯된 모든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진리이자 절대적인 가치였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가론 폰 로드에릭이란 존재는 신과 같은 존재로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신을 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이단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지금 그대들이 하는 행동이야말로 이단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것입니까? 정령은 바로 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그러한 존재를 부정하는 것부터가 바로 신을 부정하는 행위 아닙니까?”

“흥! 우리는 신을 부정하진 않소. 아울러 신의 창조물을 부정하지도 않소. 하지만! 정령술사는, 아니 정령은 이 세상과는 다른 정령계에 속하는 존재들. 그대 또한 신에 의해 다른 계의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모르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천계와 마계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요. 정령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신께서도 허용하신 일이라는 뜻. 따라서 이단이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들이 모두 결정하고 받아들인 것. 그것을 어길 시에는 마법계에서 축출된다는 것을 그대 또한 잘 알 것이오.”

마법계에서 축출을 당한다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하게 더 이상 이들과 동료가 아니란 뜻이 아니었다. 바로 모든 마법사들로부터 공공의 적이 되어 표적이 됨을 의미했다.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마법사들도 이처럼 동료 마법사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지목을 받는 것만큼은 피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파멸될 때까지 결코 이들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모든 이들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후. 그대 쿤테르 폰 체임버스여, 그대는 이단이 된다고 해도 지금의 주장을 계속할 것이오?”

“으음…….”

체임버스 그 자신이야 40이 넘은 나이여도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하나 왕국의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인 체임버스 가문은 그리 작은 규모의 가문이 아니었다.

체임버스 가문 자체가 하나의 마법 학파처럼 되어 버린 지금, 그러한 가문의 수장인 그가 이단으로 지목될 경우 체임버스라는 이름의 그늘 아래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단이 되어 이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것이다.

혼자라면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 가문의 수장으로서 아무 해 준 것도 없는 그들에게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 모두를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체임버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의 선부에 의해 벌어진 일로 인해 그 자신이 비록 신전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있지는 않았어도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의 재판에 필요한 증거를 찾기 위한 수색을 받았으며 또한 조만간 시작될 신관들에 의한 이단 재판에 출석하여 증언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감당하기 힘든 체임버스는 더 이상 일을 크게 벌일 능력도, 배짱도, 용기도 없었다.

“내게……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그대 쿤테르 폰 체임버스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오?”

“그러겠소…….”

“하면 앞으로 어떠한 결정이 내려지든지 그 모든 결정을 그대로 따를 것임을 약속하겠소?”

“그러겠소…….”

“좋소. 그대가 이처럼 순순히 자신의 과오를 모두 인정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하면서 수일 내로 그대 쿤테르 폰 체임버스에 대한 우리 마법계의 결정을 기다리도록 하시오.”

며칠 후. 로엔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연명하여 결정된 체임버스에 대한 징계는 사실상 왕국 제일의 마법사 가문인 체임버스 남작 가문의 파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로엔 왕국 마법총회의 결정에 따라 쿤테르 폰 체임버스를 비롯한 체임버스 남작 가문이 주축이 된, 비록 정식 학파로 인정받고 있진 않았지만 소위 체임버스 마법 학파는 모두 마법계에서 영구 제명이 되어 버렸다.

제명이라는 처벌이 비록 이단이라는 공공의 적이 되어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두 번 다시는 마법계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아니 마법을 사용할 수조차 없는 무거운 징계였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이들은 이내 공공의 적이 되어 왕국의 마법사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또한 마법총회에서는 체임버스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마법 성과물들을 압수하는 조치와 함께 체임버스 가문의 작위를 반납하도록 하며, 그 재산을 압류하였다.

아울러 그의 이름으로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과 귀족 가문에 대해 마법사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문을 보내야만 했다.

이로써 사실상 체임버스 남작 가문은 왕국 내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면 정령술사인 혼테르 후작과 로엔달 백작 등을 모두 척결하자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프리모와 더글러스를 비롯하여 로보와 사뮤엘, 제거와 같은 귀족 파벌의 수장들 모두는 마법계의 탄원을 받아들여 정령술사로 판명된 알마리온과 로엔달을 척결하여야 한다며 신전에 구금되어 있는 메르타니온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고 있는 블리스를 압박하고 나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블리스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이 척결을 요구하는 이들 모두가 왕권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상 국왕을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바로 도르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로엔 왕국의 마법총회의 결정에 따라 왕실의 오랜 지지자인 체임버스 남작 가문이 사실상 파멸되어 버린 상황에서 왕국 최고의 군벌의 소유자인 알마리온과, 왕실의 수호자인 로엔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진정 그러하십니까, 전하?”

더글러스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블리스의 결정이 확정적인 것인지를 되물었다. 이는 명백한 경고이자 협박이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것입니까, 더글러스 후작?”

겉으로 보기에는 유약한 모습의 블리스였지만 그는 결코 약한 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들리셨다면 송구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이것은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정식으로 요구한 사항임을 감안하셔야 할 것입니다.”

“더글러스 후작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하. 만약 전하께오서 마법총회의 요청을 거부하신다면 그들이 직접 그들 두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글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거가 그를 거들고 나섰다. 사돈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두 사람은 그동안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보조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 오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제거의 말처럼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이처럼 하나 되어 정령술사인 로엔달과 알마리온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는 것은 이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왕국이 자칫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음을 뜻했다.

‘아아…… 어이한단 말인가! 이미 체임버스 남작 가문이 그렇게 된 상황에서 그들마저도…….’

왕실 최대의 지지자인 체임버스 남작 가문이 사실상 붕괴된 지금, 실질적으로 왕국의 최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알마리온과 로엔달을 내친다는 것은 자칫 이대로 왕실이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일단은 최대한 저들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저들에 의해 왕실은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비록 왕국의 마법총회에서 내려진 결정이라고 하지만 실상 그들 뒤에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귀족 파벌의 수장들이 있었다.

이들은 마법사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그동안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든 정적들을 제거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또한 폰티악 후작마저도 위험해질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후후.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하. 이미 세상에 발표된 대로 폰티악 후작은 혼테르 그자의 장인이 되었음을 모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니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 아직 혼인도 올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제거 백작!”

“그 정도만으로도 이미 두 가문이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혼인을 공식화했다는 것은 설사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한 부부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대우받았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블리스를 궁지에 몰아넣어 갔다. 하나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시작된 싸움에서 무작정 밀린다면 결국 모든 것을 내놓게 될 것이기에 블리스는 마음을 다잡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하나 혼테르 후작은 왕국의 후작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제국의 백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국에서도 그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는 그대들 또한 잘 알 것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제국의 마법계에서도 정령술사라는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나 작금의 상황은 알마리온이란 존재를 그렇게 쉽게 내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특히 지금까지 알마리온이 해 온 일이야말로 제국을 위협하는 용맹한영혼을 제어하는 한 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란 존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해서…… 일단은 제국의 마법총회에도 그와 같은 사실을 통보할 것입니다. 하나 그것과 이번에 있은 마법총회의 결정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반격에는 또 다른 반격이 가해졌다. 지금까지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던 프리모가 블리스의 반격에 다시 한 번 반격을 가하였다.

“그렇군요. 하면 일단 혼테르 후작에 대한 문제는 제국 측이 어떻게 결정을 하는지 두고 본 후에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왜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까, 재상?”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국 측의 결정과 아국의 마법총회의 결정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제국과 왕국의 특수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재상. 게다가 혼테르 후작은 그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이 자리에게 계신 분들이라면 모두 아실 것입니다.”

블리스의 말처럼 알마리온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그에게는 영지의 병력 말고도 그가 정복한 초원 부족들의 수만의 전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에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가 있음을 상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과거 신전에서는 마법사들에 의해 정령술사들이 사냥을 당하자 이를 두고 정령술사는 부정한 존재가 아닌 마법사와 같이 신의 축복과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가 있었다.

“신전의 입장이 어떠한 것이든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신전이 비록 그러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해도, 신전이 실질적으로 정령술사들을 보호해 주거나 이들을 위해 어떤 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한 일은 없었다.

블리스는 이미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들의 요구를 회피할 수 없음을 절감하였다. 하긴 이들이 이러한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철저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니 어지간한 방법으로써는 이들의 요구를 회피하기 힘들었다.

하나 이 정도의 공격 수위라면 일단 한숨을 돌리고 나면 나름 대응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막 할 찰나였다.

마치 그러한 블리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프리모는 블리스를 궁지에 몰아넣을 확실한 수를 툭 던져 놓았다.

“게다가 마법총회에서 이번에 체임버스 남작 가문에서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성과를 정리하면서 아주 재미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상?”

“마법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후후후. 그것이 어떻게 아직도 왕국에 남아 있으며 체임버스 남작에 의해 계속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마법 아이템에 관계된 모든 것을 제국 측에 넘긴 왕국이었다. 따라서 왕국에는 마법 아이템에 관계된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말아야 했다. 그것이 제국과 왕국이 맺은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계속해서 마법 아이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는 것은 제국과의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으음…….”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프리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그를 따라서 자리에 일어났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프리모를 비롯하여 귀족 파벌의 수장들이 자리를 떠난 후 블리스는 함께하고 있던 도르첸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블리스가 영민한 자이긴 하였어도 지금의 상황을 슬기롭게 넘길 묘안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 함께하고 있던 도르첸 또한 이러한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묘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단 폐하의 안위가 우선일 것이네.”

재판을 받기 위해 신전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메르타니온이었다.

그나마 그동안 왕실과 여러 신전들 사이의 관계가 우호적이었는지라, 그리고 이번 일이 귀족 파벌이 공식적으로 고소를 한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메르타니온 국왕이 과거 흑마법사들이 한 것처럼 신의 권위에 도전을 하거나 하는 행위라 보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많았기에 다소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면 혼테르 후작과 로엔달 백작의 문제를 이대로 저들 뜻대로 방치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최악의 경우…… 혼테르 후작은 왕국의 작위와 영지를 포기하면 될 것이네. 저들도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야. 그리고 로엔달 백작의 경우에도 국외 추방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네.”

“으음…….”

도르첸의 말처럼 아무리 귀족 파벌과 마법사들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을 상대로 무작정 끝까지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마법사들이 처음부터 실력 행사를 하지 않고 이처럼 자신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귀족 파벌의 수장들을 동원하여 압박을 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이들 두 사람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국 내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의 수를 따져 보아도 불과 100여 명. 이들만의 힘으로는 실상 로엔달이 지닌 힘조차도 감당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이들은 정령술사라고 밝혀진 알마리온이 포넬의 4서클 마법사인 필립 폰 아르몬 자작을 제거한 일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4서클 마법사는 왕국에서도 불과 10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상의 마법사는 왕국에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4서클 마법사를 제거하였다는 것은 그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었고 때문에 직접 실력을 행사하는 것을 처음부터 꺼리는 것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수만이나 되는 게르혼족 전사들이 버티고 있었으니 이래저래 그와 직접적인 충돌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엔달이라 해서 이들 마법사들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로엔달의 경우에도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듯이 왕국 최고의 기사인 더글러스 후작과 쌍벽을 이루는 대가로 알려져 있었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으니 왕실을 압박하여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이들 왕국의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인 셈이었다.

“하니 그보다는 폐하께서 하루속히 무사히 재판을 마치고 복귀하실 수 있도록 자네가 신전과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네.”

“흠…… 알겠습니다. 하면 숙부님께서는 저들과 혼테르 후작과 로엔달 백작의 신변 문제를 협상하는 데 주력해 주십시오.”

메르타니온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블리스의 이러한 결정은 사실상 이 두 사람을 포기하겠다는 의사였다.

“미안하네.”

폰티악은 자신의 집안에서 오간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 일이 크게 벌어지자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중지한 채 은둔을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장인어른. 그보다는 이번 일로 인해 혹 장인어른께도 화가 미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폐하와 자네 부친은 어떠시던가?”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의 안부를 묻는 폰티악이었다.

“신전에 억류되어 있기는 하시지만 두 분 모두 행동에 특별한 제재를 받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러시군. 참으로 다행이네. 아마도 별문제 없이 두 분 모두 무사히 나오시게 되실 것이네.”

“예. 그러시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할 텐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혼례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안 그래도 그 문제를 의논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런가? 그럼 말해 보게. 자네는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는가?”

“그 사람을 영지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자네 영지로 말인가?”

“예, 장인어른. 혼인식을 치렀으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그게 어디 자네 잘못인가? 모두 내가 사람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일인 것을. 오히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자네 부친은 물론 자네에게까지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되어 그게 그저 미안할 뿐이네.”

마법사들을 앞세운 귀족 파벌이 알마리온을 상대로 어떠한 제재를 가하려 드는지 잘 알고 있기에 폰티악은 더욱더 미안한 마음이 컸다.

“게다가 조만간 제국으로 출두를 해야 한다 들었네.”

“예. 제국 마법총회에서 공식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제국 마법총회는 왕국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국의 마법사는 공식적으로도 그 수가 무려 3만 명에 달했으며 왕국의 경우 최고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4서클 마법사였지만 제국 마법총회의 회장이기도 한 베르그 공작의 경우에는 6서클을 바라보는 마법사로 현존하는 마법사들 중에 가장 높은 레벨의 마법사였다.

그런 제국 마법총회에 소환당했다는 것은 자칫 그곳에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장인어른.”

이미 베르그 공작으로부터 비공식적으로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비록 이번에 제국의 마법총회에 소환은 될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지 자신을 처벌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이다.

“혹 따로 연락을 받은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예. 베르그 공작께서 이번 소환은 단지 요식행위에 불과할 것이란 내용을 보내오셨습니다.”

“잘됐군. 정말 다행이네.”

그동안 제국의 마법총회에서 알마리온이 소환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많은 걱정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데 이처럼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별도의 소식이 전해졌다고 하자 내심 크게 안심이 되었다.

“하면 언제쯤 제국으로 가야 하는가?”

“두 달 후까지 출두하라고 전해 왔습니다. 해서 그 전에 그녀를 영지로 데려갈까 합니다.”

사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 소렌토에 있기보다는 혼테르에 있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아 일레인을 혼테르로 데려가려 하는 것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것이 좋을 것 같군.”

폰티악 또한 알마리온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알겠네. 하면 자네 일정에 맞춰 준비토록 하겠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후…… 나야 괜찮지만 아무래도 집사람이 마음 아파할 것이 걱정이네.”

일이 이렇게 벌어지지만 않았어도 비록 남들에게 흉이 보이긴 한 혼례라 하더라도 나름 축복받는 혼인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상황이 이렇게 됨으로써 제대로 된 혼례조차 올리지 못하게 되자 폰티악 후작의 집안은 반초상집처럼 우울하게 변해 버렸다.

“그러지 말고 어차피 백작께서도 신전에 계시니 그곳에서 약소하게나마 식을 올리는 것은 어떻겠어요? 아무래도 이대로 이 아일 보내는 것은, 흑…….”

폰티악의 말을 들은 비앙카는 이렇게 쫓기듯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흠…… 당신 마음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건 경우가…….”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이단 재판을 받기 위해 신전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에게 혼례식을 하자는 것은 아무래도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나 그 마음만큼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에 더욱 마음 아픈 폰티악이었다.

“그런 말씀이 있었습니까?”

“예…….”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반드시 폰티악가의 저택을 찾아오는 알마리온이었다.

“흠…….”

“너무 신경 쓰시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괜한 말씀을 하신 것이에요.”

이단 재판을 위해 신전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 앞에서 혼례식을 거행하자는 비앙카의 말을 전하는 일레인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혼인을 식조차 올리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녀 또한 내심 불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벌써 그녀의 마음에도 조촐하지만 제대로 된 혼례식을 올리고 싶다는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그대에겐 참 미안한 것이 많습니다.”

“무슨 말씀을……. 전 그저 당신이 제 곁에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가슴이 벅차답니다.”

의외로 일레인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상당히 솔직한 편이었다.

아니, 알마리온이 온전히 자신만의 남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인지 그에 대한 일레인의 감정 표현은 솔직하다 못해 상당히 적극적이기도 하였다.

이번 혼사 또한 일레인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일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혼사는 아예 있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그렇게 일레인을 만나고 그녀 또한 조촐하게 혼례식을 올리고 싶어 하는 것을 확인한 알마리온은 신전에 구금되어 있는 로엔달을 면회하기 위하여 그를 찾아갔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나도 좋을 것 같구나.”

어차피 말이 좋아 신전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라지만 행동에 제약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후…….”

자조적인 표정이 되어 버린 로엔달의 모습에서 알마리온은 그가 요즘 들어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여인의 인생을 파괴하고, 또 자신이 책임져야 될 일들에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만 여겨졌던 것이다.

때로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희생시켜야 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를 위하는 사람들일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했다. 로엔달은 지금까지 그러한 길을 묵묵히 걸어왔고, 그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의 인생에서 그가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큼은 후회가 되고 또 되었다.

“네겐 늘 미안하구나.”

“…….”

“하면 언제쯤 식을 올릴 생각인 것이냐?”

“사오일 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신전에도 미리 알려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 이후에 일단 그 사람을 영지로 데려간 후 제국에 다녀올 계획입니다.”

“그래, 알겠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마.”

“예, 아버님.”

면회를 마치고 알마리온이 신전을 떠나가자 로엔달 앞에는 알마리온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인물이기도 한 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들었나?”

“예, 마스터.”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정리하게. 나흘 동안 말이네.”

“예, 마스터.”

자신이 이곳 신전에 구금되기 직전부터 상황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을 확인한 로엔달은 자신이 마스터로 있는 정령의꿈이라는 조직을 이용하여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은밀히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중 가장 큰 것은 그에게 주어진 영지였고, 어차피 그것마저도 조만간 환수당할 것이 분명했기에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나 그 얼마 되지 않는 것이라도 아들인 알마리온에게 전해 주고 싶어 이처럼 은밀히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흘 후 메르타니온과 로엔달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마리온의 영지로 함께 가기로 결정한 체임버스와 그의 제자인 안톤 그리고 폰티악 후작 가문의 일가친척들만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알마리온과 일레인의 혼례식이 열렸다.

“이건 내가 주는 두 사람의 선물이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받거라.”

“아버님?”

“훗! 이것이나마 널 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감사합니다.”

비록 조촐하게 치른 혼례이기는 하였지만 그나마 이조차도 기대하지 못하였던 일레인이나 비앙카는 내심 흡족한 마음이 되었고, 알마리온과 일레인은 이들의 축복과 환송을 받으며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체임버스와 안톤과 함께 영지인 혼테르로 일단 돌아갔다.

재미난 것은 알마리온이 이처럼 당당하게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들도 그의 행동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

“그래, 반갑구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가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나도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호호. 그래, 앞으로 너희 둘이 저 아이를 좀 잘 돌봐 주렴.”

“예, 어머니.”

일레인과 들에핀꽃이 동시에 유르스나르의 말에 대답하였다. 그런 모습을 알마리온은 흐뭇하게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한데 아이야.”

“예, 어머니.”

“네게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하던데…….”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요즘 불거진 일들에 대해서 들은 모양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

로엔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자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는 유르스나르의 표정에 알마리온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예, 어머니. 전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조만간 다시 멀리 다녀올 곳이 있어서 한동안 자릴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구태여 제국을 다녀와야 한다는 것 같은 상세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에 단지 한동안 자릴 비울 것이라고만 말하였다.

“그러니? 알았다. 그렇게 알고 있으마.”

“아, 그리고 어머님께 소개해 드릴 분이 또 있습니다.”

그제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체임버스와 안톤을 유르스나르에게 소개하였다.

체임버스와 안톤은 유르스나르를 보자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같은 마법사로서 그녀가 감히 자신들로서는 바라보기조차 힘든 높은 곳에 도달해 있는 존재임을 이내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소개할 사람을 모두 소개하고 또 알마리온과 일레인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혼테르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축제가 벌어졌다.

며칠간 영지에 머물면서 처리할 일들을 처리한 후, 제국의 마법총회에 출석하기 위해 그나이제나우와 단둘이 제국으로 향하였다.

“재판 날짜가 잡혔습니다, 폐하.”

“아! 그렇습니까?”

오딘 신전의 최고 신관인 제로니모 대사제가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의 재판 날짜가 정해졌음을 알려 주었다.

“언제입니까?”

“앞으로 한 달 후에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늦게 하는 것입니까?”

한 달 후에나 재판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에 메르타니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과 같은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신전에 틀어박혀 요양 아닌 요양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래도 몇몇 분이 멀리서 오셔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후…… 그렇습니까? 그렇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허허. 이참에 그동안 정무를 보시느라 고단하셨던 몸을 푹 쉬게 하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폐하?”

“허허. 그러려고 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꾸만 마음만 급해지는군요.”

“허허. 그러시겠지요.”

제로니모는 조급해하는 메르타니온을 달래 주기 위해 한동안 함께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거닐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딘 신전의 대사제인 제로니모도, 그리고 메르타니온도, 아니 심지어는 단지 흠집 내기 위해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을 이단으로 신전에 고발한 귀족 파벌까지도 이들의 운명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변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역시 제국의 마법총회에서는 더 이상 정령술사를 마법사들의 공공의 적으로 인정치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고, 알마리온의 소환은 단지 그러한 결정을 공식화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였다.

그보다 그를 제국까지 오게 한 것은 실상 다른 이유에서였다.

“하면 황태자 전하께오서 정식으로 공주님에게 청혼을 하셨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일단 황제 폐하께오서 그 문제에 대해 거론 자체를 금한다는 명령을 내리셨기에 더 이상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말을 하는 베르그의 행동을 보니 알마리온은 그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해서 이번에 자네가 공주를 왕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황제 폐하의 허락은 내가 알아서 받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하면 공주님을 모셔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그리고 지금도 잘해 주고 있긴 하지만 자네가 좀 더 분발을 해 주었으면 하는데…….”

베르그는 요즘 도무지 깊은 잠을 들 수가 없었다. 겨울이 되면서 용맹한영혼의 움직임이 멈추기는 했지만, 이미 뮬란족이 살아가고 있는 드넓은 초원 또한 그에 의해 거의 대부분이 장악당하자 제국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의 판단으로는 용맹한영혼이 뮬란족이 살아가고 있는 초원을 모두 통합한 이후 그 칼끝을 자신들에게 돌릴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힘이 쇠잔해진 제국의 입장으로서는 이러한 용맹한영혼의 침입을 막을 여력이 전무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제국의 몇몇 고위 귀족들 중에는 오랫동안 재상을 역임해 온 베르그 공작 대신 이미 제국으로부터 대공이라는 작위를 받고 있는 용맹한영혼, 그러니까 블랙 대공을 제국의 재상으로 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자들이 있었다.

그와 적대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러한 경험이 있듯이 그를 제국의 품에 끌어들여 동화시키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하나 그나마 이렇게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조차도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제국의 귀족들은 그러한 모든 일이 그저 남의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저 애 닳는 이들은 베르그 공작을 비롯한 몇 명뿐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예, 전하.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황궁을 나온 알마리온은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공주의 저택으로 향하였다. 한데 공주를 만나려 하자 앨리나 부인이 난색을 표하며 공주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전하였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공주님께서는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이…….”

말을 자꾸만 피하는 것이 아무래도 무엇인가 크게 좋지 않은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지난번 왕국으로 귀환할 때 알마리온은 카산느 공주의 신변에 크게 위기가 닥칠 것임을 예감하고는 나름 준비를 하여 두었던 것이 있었다.

“칸 남작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앨리나가 허둥거리며 좀처럼 말을 하지 못하자 곁에 있던 총관인 칼로스에게 물었다.

“말하게, 공주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지. 그리고 칸 남작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이야.”

“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칼로스 또한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긴 하였지만 쉽게 대답을 하진 못하고 있었다.

“뭣 하는가! 주군께서 묻지 않으시는가?”

칼로스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곁에 있던 그나이제나우가 칼로스를 윽박질렀다. 그제야 칼로스는 힘겹게 칸에 대한, 아니 그동안 공주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알마리온이 귀국한 이후 카산느 공주는 발락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황실은 거의 연중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행사가 있다 해도 좋은 곳이었다.

때문에 발락에서 얼마 머물지 못한 채 다시 황도에 복귀하여야 했고 그녀가 황도에 복귀한 이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가 다시금 발락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 모든 것이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한 황태자의 농간이었다. 하나 이미 황태자가 카산느에게 마음을 주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베르그는 가급적 두 사람이 함께하는 일을 최대한 억제하려고 하였지만 아무리 그가 노력을 한다 해도 모든 시간을 그녀 곁에서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한데 얼마 전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 때 결국 사달이 나 버리고 말았다.

술이 많이 취한 황태자가 결국 카산느 공주를 강제로 욕보이려 하였고, 이를 뒤늦게 안 칸이 그런 황태자를 만류하다 결국 황태자의 얼굴에 큰 상처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카산느는 결국 무사할 수는 있었지만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지금 그 당시의 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어 지금 방 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은 채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칸 남작은…….”

“그는 지금 어떤 상태이오?”

“친위군에 감금되어 있는 중입니다. 조만간 황실 가족을 위해한 혐의로…….”

“위해라 했나?”

“으음…….”

칸이 황실 친위군의 감옥에 갇힌 것도 모자라 황실 가족을 위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말에 알마리온은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분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당장 공주님의 짐들을 챙기도록 하시오. 왕국으로 귀국을 할 것이니 가능한 모든 짐을 챙기도록 하시오.”

“예? 하지만…….”

“이미 위에서 허락받은 일이니 그대로 하면 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총관.”

“예, 각하.”

“총관은 배편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일단 발락에 들렀다가 왕국으로 향할 것이니 아예 적당한 배를 빌리도록 하시오.”

“예, 각하.”

“그나이제나우 경.”

“예, 주군.”

“경은 나와 함께 다시 재상부로 갑시다.”

“예, 주군!”

막 황궁을 나왔던 알마리온이 다시금 황궁에 나타나고, 그의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는 것을 알고는 재상부에서 일하는 관리들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를 데려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백작도 잘 알지 않는가?”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킨 것뿐입니다.”

“모르지는 않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힘들다네.”

황태자의 몸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아무리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용납되기 힘든 일이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입니까?”

칸을 구해 낼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자신이 임의적으로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듯이 말하는 알마리온의 행동에서 베르그는 문득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허…… 내가 또 다른 호랑이를 키운 것인가? 이 어린아이에게서 어찌 내가 두려움을 느낀단 말인가?’

6서클을 바라보는 베르그였다. 한데 그런 자신이 알마리온에게서 두려움을 느끼자 자신이 혹 하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연이어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 용맹한영혼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초반에 그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을 때에도 베르그는 별것 아니라며 방치하였다가 결국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사실 그가 6서클을 바라보는 대마법사라는 것은 그 개인적으로는 대단할 수는 있지만 제국의 살림을 맡고 있는 재상인 그가 마법에 빠져 있는 동안 제국의 살림은 그만큼 주먹구구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뛰어난 마법사일지는 몰라도 뛰어난 재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꼭 문제를 크게 만들어야 하는가?”

“전하, 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처를 해 주십시오.”

“힘들 것이네.”

“소관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그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는 제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버려야 할 일은 버려야 하는 것을 모르는가?”

억지로 칸을 구하자고 하면 못 구할 것도 없었다. 황태자가 강제로 카산느를 겁탈하려 했으니 황태자 또한 그 문제에 대해서 뭐라 할 입장은 아니었다. 하나 구태여 억지를 부려서 문제를 크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 공작 전하께서 그를 풀어 주신다면 소관 전하께 큰 신세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후…… 알겠네.”

큰 신세를 졌다는 알마리온의 말에 베르그는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애초부터 이런 상황이 오길 원했던 것이다.

베르그가 그동안 알마리온을 껴안기 위해서 들인 노력은 상당했다. 실상 제국 내에서 알마리온은 이미 베르그 공작 측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었지만 사실 베르그는 알마리온이 결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그에게 빚을 지게 만드는 수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칸을 황태자 위해죄로 구금한 것도, 그리고 특별히 그를 심문하거나 재판을 열어 처벌하지 않은 것도 모두 알마리온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이를 지연시킨 것이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최대한 힘을 써 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칸이 다시금 복귀를 한 것은 사흘 정도 후였다.

“고생했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남작이 아니었다면 공주님께서 큰일을 당하실 뻔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큰일을 해 주었습니다.”

“공주님께서는…….”

공주의 안부를 묻는 칸의 말에 알마리온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지난 며칠 동안 알마리온이 그녀를 위해 나름 여러 방법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정신적인 충격이 큰지라 쉽게 그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그래도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이 많이 위안이 되었는지 상태가 이전보다는 조금은 좋아진 상태였다.

“이번에 공주님을 모시고 왕국으로 귀환을 할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각하.”

“그렇지요. 그리고…… 내 칸 남작에게 은밀히 할 말이 있습니다.”

“소관에게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

은밀히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칸은 긴장을 하며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렸다.

“실은 얼마 전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지금 왕국 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들은 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였다.

“하면 폐하와 마스터께서 지금 신전에 구금되어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두 분의 신변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으음…….”

예감이 좋지 않다는 알마리온의 말에 칸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장에서 함께하였을 때부터 알마리온의 예감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잘 맞는다는 것을 경험한 칸이었다.

알마리온이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에게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틀 전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그 두 사람의 운명에서 곤란함을 느끼긴 했어도 특별히 위험하단 느낌을 받은 일은 없었지만 이틀 전부터 갑자기 그 두 사람의 운명에 암운이 가득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하면……?”

“최대한 서둘러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발락에 들러 그곳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아무래도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판단된 알마리온은 일정을 바꿔 서둘러 왕국으로 귀환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알겠습니다. 곧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또 하나…… 그들을 모아 주십시오.”

알마리온이 그들이라 지칭한 이들은 자신과 같은 정령술사들로 구성된 정령의꿈이라는 비밀결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메르타니온의 명령과 은밀한 지원을 받아 정령술사인 로엔달에 의해 결성된 이 조직은 지금도 근위군 속에 정체를 숨기거나 아니면 왕궁 곳곳에 신분을 위장하여 잠입해 있기도 하며 또 일부는 아예 왕궁과는 별개의 곳에서 여러 다양한 신분으로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알마리온이 이들을 소집하려는 이유가 바로 메르타니온 국왕의 신변에 무슨 이상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자 그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라면……? 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폐하나 마스터의 명령이 있지 않고서는 그들 전체를 소집할 수 없습니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지금으로써는 일단 귀국을 하여 폐하나 마스터의 명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조만간 배편이 구해지면 모두 함께 귀국을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를 하여 주십시오.”

“예, 각하.”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배편이 쉽게 구해지지 않아 모두의 애를 태우다가 배를 구하기 시작한지 20여 일이 지나서야 간신히 왕국으로 갈 배편을 구한 이들은 그날로 제국을 떠나 왕국으로 복귀하였다.

하나 이들이 왕국에 복귀하여 듣게 된 소식은 모두를 크게 당황케 하는 소식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와 아버님께 이단 판정이 나다니요?”

막스밀리언의 말에 알마리온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부터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의 운명에 암운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 위함이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단 재판을 위해 열두 신전에서 재판 신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이들 두 사람이 이단을 범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소렌토에 있는 열두 신전의 신관들 또한 같은 견해였다. 하나 이단 재판은 각 신전에서 이것만을 전담하는 재판 신관들이 따로 있었고, 그들의 견해는 모두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설사 과거에 있은 흑마법사들과 같은 극악한 목적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이들 두 사람 또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인정되어 두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하, 하면…… 두 분은 어찌 되시는 것입니까?”

“정화의 형이 내려졌다…….”

막스밀리언 또한 침통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내려진 처벌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정화의 형이란 이단으로 지목된 자들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자들에게 내려지는 극형이었다.

“두 분 모두 사회적으로 모범을 보여야 할 신분이면서도 목적을 위해 금지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그런 극형을 내린 이유라고 하더구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후후…… 했다. 하지만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더구나.”

“으음…….”

재판 신관들은 왕실로부터 지나친 판결이라며 이의신청을 받았지만 아예 그러한 이의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만큼 이들의 의지는 확고부동하단 것을 그대로 내비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정작 더 당황한 것은 바로 두 사람을 이단이라 고발한 귀족 파벌이었다.

그들 자신도 단지 이들 두 사람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 정도만 원하였다가 신전의 재판 신관들이 이런 극단적인 판결을 내리자 일이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 커져 버리자 당황한 것이었다.

“하면…… 형은 언제 집행이 되는 것입니까?”

“열흘 후다…….”

“으음…….”

열흘. 어렵게 찾은 아버지인 로엔달과 이 세상에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불과 열흘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말에 알마리온은 순간 휘청거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전 이만…….”

“그래. 그만 가 보거라. 그리고 정말 미안하구나.”

따지고 본다면 로엔달 또한 왕실의 중흥을 위해 결국 희생당하게 된 것이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나이제나우 경, 경은 속히 영지로 돌아가서 어머님과 아내들을 모셔 오도록 하시오.”

“예, 주군.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테일러 상단에서 이들을 소렌토로 데려오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급해진 그는 그나이제나우까지도 영지로 돌려보냈다.

“너와 네 어머니에겐 정말 미안하구나.”

“아버님…….”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것 받거라.”

로엔달은 마지막까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서는 알마리온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정령의꿈이라는 비밀결사의 마스터를 상징하는 반지였다.

“이미 폐하께서도 널 다음 대의 마스터로 인정하셨다. 앞으로 네가 나를 대신하여 이 나라의 왕실을 지켜 주는 기둥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구나.”

끝까지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 하는 로엔달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셔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 그러냐?”

“예, 아버님.”

“그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일로 고통받았을 유르스나르에게 사죄를 하고자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막상 그녀가 오고 있다는 말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이들 부자에게 허락된 면회 시간은 불과 10분. 그나마도 알마리온이 그의 직계가족이었기에, 그리고 어찌 보면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이 벌인 일의 피해자에 해당하는 존재였기에 특별히 허락된 일이었다.

보통 이단으로 판정을 받은 죄인에게는 일절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신전을 나오자 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령의꿈이란 조직의 서브마스터인 그가 로엔달로부터 마스터를 상징하는 증표를 인계받은 알마리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터.”

정령의꿈이란 비밀단체의 조직원들 중 알마리온이 안면이 있는 사람이 몇 있었다. 지금은 근위군에 소속되어 있지만 한때 제1의용군에서 함께 적을 상대하였던 이들이었다.

“왕궁과 왕실을 보호하는 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십시오. 특히 귀족 파벌의 동향을 철저히 감시토록 하십시오.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불순한 움직임이라도 포착된다면 즉시 알리도록 하십시오.”

“예, 마스터!”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의 처형일이 다가오고 오딘 신전 앞의 너른 광장에 두 사람의 처형을 위한 형구들이 준비되자 왕국 전체는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미안하오.”

이제 불과 하루 후면 형장에 설 로엔달과 유르스나르가 20년이 넘는 세월 만에 다시금 한 공간에 있었다.

“…….”

자신의 운명을 비틀어 버린 로엔달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차마 용서해 달란 말은 하지 못하겠소. 다만…….”

“…….”

“그 아이를 잘 부탁하겠소.”

마지막으로 사죄의 말과 함께 알마리온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드리워졌다. 하나 의외로 그 침묵을 깬 이는 유르스나르였다.

“그게…… 할 말의 다인가요?”

“……?”

“그댈 참으로 많이 원망했었습니다.”

“으음…….”

“그대를 비롯하여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든 모든 존재들을 저주하였습니다.”

“…….”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 어찌 원망하고 저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유르스나르의 말에 로엔달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루하루 원망하고 저주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그러다 얼마 전…… 그래요, 어느 날 문득 기억나는 것이 있더군요.”

“…….”

“그대…… 그대의 얼굴이 기억이 나더군요.”

“으음…….”

무엇인가에 의해 강한 충격을 받고 기억을 잃은 유르스나르였다. 그러다 근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금 기억들을 되찾았지만 반대로 기억을 잃었던 1년이라는 시간의 기억을 다시금 잃어버렸다.

그러다 바로 며칠 전 그 잃어버렸던 1년의 기억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1년의 시간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비참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더군요. 그대가…… 날…… 날,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는 것을요.”

“으음…….”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유르스나르는 알고 있었다. 로엔달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 주었는지를.

비록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지만 로엔달은 그런 자신에게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였고,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그리고…….

“그래서…… 그래서 이제 그댈 용서하려고 합니다.”

“으음…….”

“어찌 되었든 그댄…… 내게 그 아이란 선물을 주었으니까요.”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오. 정말 그대와 그 아이에게는 죄만 짓고 가는구려.”

“아시나요?”

“……?”

“나의 이름.”

“무엇……이오?”

“초록의 딸. 그리니아의 아이. 유르스나르랍니다.”

“초록의 딸. 그리니아의 아이. 유르스나르……. 기억하겠소. 그리고 훗날 그대에게 반드시 내가 지은 죄를 갚도록 하겠소.”

“죄송합니다. 이제 면회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

“…….”

면회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들어온 신관을 따라 수감되어 있는 방을 나서던 유르스나르가 몸을 돌려 한참을 로엔달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모습을 각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시간이 되었습니다.”

“…….”

이단으로 판정을 받은 이들에게는 형을 집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참회의 의식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 첫 번째 의식이 그동안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참회의 목욕이었다.

이후 신전에서 내주는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는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후 이들은 죄를 지음을 참회하기 위해 머리에 가시나무로 만든 참회의 관을 쓰고, 스스로 형구를 지고 형장으로 나아가야 했다.

아마도 다른 죄인들 같았다면 몰려든 군중으로부터 야유와 온갖 오물 세례를 받았겠지만 죄인의 한 사람은 왕국의 국왕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왕국 최고의 익스퍼트로 소문난 사람이자 또한 근위군 사령관이며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던 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동원된 병사들의 위압적인 모습에 그런 것인지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그저 수군거리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이들 두 사람을 향해 야유를 하거나 오물을 투척하는 이들이 없었다.

하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이들은 신관들에 의해 이단으로 판명된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극악한 사람들로 인식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형장에 도착한 이들은 다시 한 번 재판 신관들에 의해 죄목이 낱낱이 공표되었다.

“폐하, 이제 죄인들의 처형을 명하시옵소서.”

“…….”

아직 정식으로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메르타니온이 이단으로 형이 확정되고 그 형벌로 정화의 형을 받게 되자 그동안 임시로 국정을 이끌어 가던 왕세자인 블리스가 대행 체제를 그만두고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즉위식은 나중으로 미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폐하! 저들은 신의 권능에 도전을 한 죄인들일 뿐이옵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마셔야 할 것이옵니다.”

재판 신관들이 다시 한 번 블리스에게 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강요하였다.

“……!”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아비를 불태워 죽이라는 명을 내리길 강요하는 재판 신관을 노려보던 블리스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납빛으로 하얗게 죽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재판 신관을 노려보던 블리스의 원한과 분노에 찬 시선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프리모를 비롯한 귀족파로 옮겨져 그들 모두를 바라보았다.

‘잊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반드시…… 반드시 되돌려줄 것이오! 설사 이 왕국이 무너진다 해도 반드시!’

상황을 이리 만든 모두를 하나씩 바라보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한 블리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비인 메르타니온에게 향하였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미욱한 이 자식이 능력이 모자라 아버님을 끝내 이렇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크흑!’

‘아들아, 반드시 기억하거라. 이것이 힘없는 군주의 최후이니라. 그리고 부디…… 부디! 두 번 다시 약자가 되어 이런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아버님. 두 번 다시 왕실이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는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허허…… 그래. 널 믿는다, 아들아…… 그리고 네 어머니와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

‘예, 아버님.’

메르타니온의 고개가 끄덕거리자 블리스의 고개도 그에 응하였다.

“형을…… 형을…… 집행하시오……!”

“예, 폐하. 형을 집행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다!”

“형을 집행하라!”

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형리들이 미리 준비한 불을 장작더미에 붙였다.

이미 바짝 말라 있는 장작에 다시 기름까지 뿌려 놓은 상태였기에 이내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기둥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크흑!”

“……!”

강한 의지를 지닌 메르타니온이었지만 생살을 파고드는 열기에는 결국 견디지 못한 채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그에 반해 로엔달은 이미 하반신을 집어삼킨 거친 불길 속에서도 단 한마디의 비명도 내지르지 않은 채 오직 한곳에만 시선을 주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 모두를 존재케 하여 주신 절대 권능의 신께 간절히 비옵니다…….”

차마 로엔달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겠는지 로브의 모자를 깊이 눌러쓴 유르스나르는 그것도 모자라 두 눈을 꼭 감은 채 하얀 손이 창백해지도록 꼭 움켜쥐고는 망자를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유르스나르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알마리온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그녀의 가녀린 몸은 바닥에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으아아악! 아악! 크아악!”

생살이 타들어 가면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인해 메르타니온에게서 터져 나온 처절한 비명이 광장 전체를 울렸다.

그 처절하고도 처참한 비명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린 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아니, 단 한 사람. 알마리온만큼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로엔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로엔달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텅 빈 공허함만이 그의 눈에 담긴 유일한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메르타니온의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기 시작하였다. 하나 아직은 형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정화의 형은 온몸을 불태워 재가 될 때까지 형이 계속되는 참혹한 형벌이었다. 하지만 죄인의 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일단의 형은 사실상 끝이 난 셈이었다.

블리스를 위시한 왕실 가족들이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났고, 그 뒤를 도르첸 등을 비롯한 국왕 파벌이 뒤를 따랐으며, 이들의 눈치를 살피던 귀족 파벌 또한 모두 떠나갔다.

“가시지요, 어머니.”

“흑흑…….”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던 알마리온 또한 끝내 울음을 터뜨린 유르스나르를 부축하며 가족들과 함께 형장을 떠나갔다.

하나 아직도 형장에서는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의 주검이 여전히 검은 연기와 함께 시뻘겋게 날름거리는 불길 속에서 재로 변해 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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