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귀 그리고 전진 (58/70)

복귀 그리고 전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립형에 처한 죄인을 사면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그자를 고립형에 처한 죄인과 함께할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전례에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초록 일족의 장로들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족들처럼 분위기가 시끄럽다거나 아니면 서로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거나 하는 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미 지난밤의 일만으로도 이들 일족들에게는 파격을 넘어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니, 그 일은 아직도 진행 중인 일이었다.

한데 아침 댓바람에 마을을 찾아와 유르스나르를 풀어 달라는 알마리온의 요청은 다시 이들을 더욱 충격에 빠뜨렸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설전을 벌이는 초록 일족 장로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알마리온이 이러다가는 아무 결론도 나지 않겠다 싶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이들에게는 이 정도면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알마리온은 그렇게 시간이 많지가 않았기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냐?”

외조모로서 처음으로 본 외손자를 대하던 어제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평소 초록 일족의 대장로로서의 모습과 위엄을 갖춘 살라미스가 손을 들어 다른 장로들의 발언을 중지시키고 알마리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러분이 이해해 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곳에 오래 있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빠른 결정을 바라는 것이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프의 특성을 무시하고 싶거나, 그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 또한 여러 사람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기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는 사정이 있습니다.”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그건 들어줄 수가 없구나.”

알마리온의 요청을 이내 거부하는 살라미스였다. 하나 알마리온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몰랐으면 모를까 유르스나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를 두고 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귀 일족의 관례나 전통, 규정, 관습을 깨뜨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식으로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엘프들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는 저와 같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힘들다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

“전…… 어제 처음 만난 제 어머니를 찾고 싶습니다. 부디 선처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회의장이 침묵에 잠겨 들었다. 담담하지만 애잔함이 솔직하게 담긴 그의 말이 초록 일족의 장로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허허. 충분히 네 마음을 이해할 수 있구나. 하나 네가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또 다른 사정이 있단다.”

“예, 어르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넌 일단 네 어미에게 가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우리가 좀 더 편안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구나.”

“예, 어르신. 그럼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라오니다스의 말에 알마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회당을 나갔다.

“대장로.”

“예, 라오니다스 님.”

“내 한마디 해도 되겠소?”

“예.”

“우리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은, 생명 그 자체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길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가진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다는 것은 대장로를 비롯하여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장로들도 잘 알 것이오.”

신들은 엘프들을 편애했다.

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외모.

지혜의 산물이라고 대변되는 두뇌.

개개인의 능력 또한 그 어떤 지성 종족들에 비해 뛰어났다. 그것도 월등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니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지도 않는 것은 이들 자체가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은 자신의 완성이었다.

만약 이들이 신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능력을 자신들의 완성이 아닌 세상을 탐하는 쪽으로 돌렸다면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이들 엘프들이 지배하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럴 만큼 그 어떤 종족들 중에서도 이들 엘프들의 능력은 뛰어났다. 절대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리고 내 판단에는 이 정도면 충분히 유르스나르 또한 반성을 하였을 것 같소.”

“하지만…….”

“미안하네, 자이네스. 내 말을 더 들어 보겠나?”

“죄송합니다, 라오니다스 님.”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한 이에게 징벌을 내리는 것은 그것을 반성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 첫 번째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지 말게 하기 위함이 그 두 번째 이유 아니겠소?”

“그건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형평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고립형에 처한 죄인은 평생을 그 형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몇몇 장로들이 라오니다스의 의견에 반발을 하였다.

“맞네. 그랬지. 하나 그것이 그렇게 형평성을 따져야 할 일은 아니라고 보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평에 어긋나는 예외를 자꾸 두다 보면 자칫 처음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옳은 말이네, 자이네스 장로. 그리고 난 이번 경우에만 예외나 특별함을 두자는 것이 아니라네. 분명 기존의 제도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고, 이를 개선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라네.”

“음…….”

“그동안 고립형이라는 중죄를 지은 일족이 상당히 오랜 기간 나오지 않아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걸 논의할 수 있는 시기도, 기회도 되었다고 보네.”

“다른 장로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오니다스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살라미스가 다른 장로들을 바라보며 라오니다스가 상정한 안건을 정식으로 논의 대상으로 할 것인지를 물었고, 라오니다스의 안건은 장로 회의의 정식 안건이 되어 논의를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장로 회의에 어머니에 대한 사면을 요청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정이 늦어지거나 아니면 아예 거부될 수도 있는 일인지라 알마리온은 어머니를 위해 나름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우선 간신히 비바람 정도만 막을 수 있는 그녀의 거처를 그래도 제대로 된 거처로 만들기 위해 겉옷을 벗고 주변에서 돌과 흙을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그런 알마리온을 보면서 유르스나르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몇 번이나 말리려 하였지만 알마리온은 말을 듣지 않고 괜찮다며 그녀의 거처를 손보는 일을 계속하였다.

정령을 이용하면 손쉽게 일을 끝낼 수도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자신이 직접 어머니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었기에 스스로의 힘만으로 필요한 자재들을 가져다 날랐다.

보통 사람 같으면 며칠을 걸려 해야 할 일들이었지만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능력의 소유자인 그였기에 이 정도 일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한 후 본격적으로 거처를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유르스나르는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자신을 위해 애를 쓰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유르스나르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도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하게 온몸을 감싸듯 느껴지는 그런 충만감까지 느껴지는 행복감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쪽에 서서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껏 행복감에 취해 있던 유르스나르는 식사를 준비한 후, 알마리온이 씻을 물을 길어 왔다.

“이제 그만하고 씻고 식사하자.”

“예? 예, 어머니.”

처음에는 그렇게도 하기 힘들었던 어머니란 말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나왔다.

“웃옷을 벗으렴. 내가 씻겨 줄 테니.”

“아, 아닙니다, 어머니. 제가…….”

“내가 해 주고 싶어.”

갓 태어났을 때 단 한 번 씻겨 준 아들이었기에 그녀는 비록 이미 장성한 아들이긴 해도 다시 한 번 아들의 몸을 씻겨 주고 싶었던 것이다.

“예, 어머니.”

잠시 머뭇거리던 알마리온이 결심을 한 듯 노동을 하느라 더럽혀진 웃옷을 벗었다.

“으음……. 흑…….”

온몸 곳곳에 난 흉터를 본 그녀의 눈에서는 또다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이젠 다 지난 일입니다, 어머니. 그리고 저 배고프네요. 하하.”

“그, 그래. 그럼…….”

알마리온이 등목을 하기 위해 자세를 잡자 유르스나르가 물을 뿌리며 손으로 아들의 등을 정성 들여 닦아 주었다.

“다 됐다. 이제 들어가서 식사하자.”

“예, 어머니.”

“좀 어둡네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실내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알마리온이 초를 켜지 않는 것이 이상하여 말하였다.

“그게, 초를 만들어야 하는데…….”

고향에 돌아온 이후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느라 그 무엇 하나도 자신을 위해 한 것이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버린 아들을 위한 참회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초를 만들려면 아무래도 재료도 없었고, 또 설사 만드는 방법을 안다 해도 그걸 당장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알마리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 아이템을 하나 꺼냈다.

“어머? 그것은 뭐지?”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입니다.”

“마법 아이템? 인간들은 참 재미난 생각을 하는구나. 옛 기록에 보면 마법 물품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더니 말이야.”

엘프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약점이라면 발상의 전환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들은 분명 대단한 능력과 수준 높은 문화 그리고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경직된 사고와 삶을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거의 모든 것이 정체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런 것조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알마리온이 건네준 마법 아이템을 꼼꼼하게 살펴본 유르스나르는 재미난 발상이긴 해도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님을 이내 알 수 있었다.

5서클 마법사인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상당히 조잡한, 단지 기능을 작동시키는 것에만 급급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발상은 재미있지만 그다지 기능은 뛰어난 것은 아니구나. 여러 군데 오류도 있고 말이야.”

“아…… 그런가요? 하지만 이 마법 아이템도 지금은 아주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머니.”

“그러니? 한데 이 마법진을 보니 마법사가 만든 것은 아니구나. 하긴 마법사라면 마법을 수련하고 연구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니 이 정도의 조각 솜씨를 가지긴 어려울 것 같구나.”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마법 아이템 제작의 비밀을 한눈에 꿰뚫어 볼 정도로 그녀의 실력과 안목은 뛰어났다.

‘훗! 역시 마법사시라는 것인가?’

식사 준비를 한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이 꺼낸 마법 아이템에 홀딱 정신이 팔려 있는 유르스나르를 보면서 고소를 짓는 알마리온이 일어나 조용히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식사하셔야죠?”

“응? 뭐?”

“식사하셔야죠?”

“아, 참…….”

“훗. 제가 했으니 그냥 드시기만 하시면 돼요.”

“이런…… 미안해서 어쩌지?”

“하하. 아니에요, 어머니. 덕분에 아들 음식 솜씨도 한번 보실 수 있는 것이죠, 뭐.”

“호호…… 그게 그렇게 되나?”

아직은 서로 어색함이 많았지만 그래도 서로 노력하는 것을 아끼지 않아서 그런지 처음보다는 무척이나 가까워져 있었다.

“혹시 이런 것 더 가지고 있니?”

“예, 어머니.”

마법 아이템에 관심을 보이는 유르스나르를 보면서 알마리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5개의 마법 아이템을 모두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고 마법 아이템 제작 방법이 기록된 책까지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것도 보시면 도움이 되시겠네요.”

“음? 이것은……?”

한데 알마리온이 꺼내 건넨 책을 본 유르스나르는 또다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녀가 이렇게 놀란 것은 알마리온이 건넨 책이 양피지가 아닌 종이로 만든 책이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은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만드는 종이와 알마리온이 건넨 종이는 그 질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인간들도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는구나. 한데 종이의 질이 좀 안 좋구나.”

“종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몇 년 전부터입니다, 어머니.”

그나이제나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종이를 만들어 세상에 퍼트리고 있다는 상세한 내용 같은 것은 아예 말하지 않았다.

“아! 그래?”

“예.”

“한데 이것이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만드는 제작 방법을 기록한 책이니?”

“예, 어머니.”

“네게 꼭 필요한 것 같은데…….”

“제겐 원본이 따로 있습니다, 어머니. 그건 필사본이에요.”

“아! 그렇구나. 그럼…….”

‘훗! 마법사들은 종족을 달리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가 다른 엘프들과는 조금 다른 분이신가?’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리고 그 제작 방법이 기록된 책을 건네받은 지금도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이내 호기심을 나타내는 유르스나르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고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마법 아이템을 작동시켜 불빛을 밝히고는 알마리온은 초록 일족의 마을로 향했다. 유르스나르에 대한 일 말고도 그에게는 네 최상급 정령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오니다스를 만나야 했다.

“무슨 일인가?”

마을 근처로 다가가자 처음 알마리온을 제압하여 마을로 데려왔던 지아렌이 그의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라오니다스 님께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장로님께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게.”

“그러지요.”

얼마 후 지아렌과 함께 라오니다스가 마을 밖으로 나왔다.

“내게 볼일이 있다고 하였다고?”

“예, 어르신. 어르신께 청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렇구나. 그래, 무엇이냐? 한데 미리 말하겠지만 네 어미와 관계된 일이라면 내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아무래도 일족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강한 그에게 유르스나르의 신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알마리온과의 만남은 서로에게 좋지 않은 모습임에 분명하였기에 처음부터 이렇게 분명하게 선을 그어 놓는 것이었다.

실상 지아렌이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알마리온이 라오니다스에게 유르스나르에 대한 청탁이나 부탁을 하지 못하도록 이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그 일이 아닌, 다른 일입니다, 어르신.”

“그래? 하면 무슨 일 때문이냐?”

“실은 이것 때문에 어르신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을 하며 알마리온은 자신의 두 손을 내밀어 여전히 자신의 팔목에 차여 있는 정령의 고향을 내보였다.

“흠……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것이냐?”

이미 알마리온을 처음 대하였을 때부터 라오니다스는 그에게서 자연적이지 못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강력한 마법에 의해 초자연적인 존재가 강제로 봉인되어 있음을 말이다.

“봉인을 깨뜨려 주시길 바랍니다.”

“봉인을?”

“예, 어르신.”

알마리온이 봉인을 깨트려 달라고 하자 라오니다스의 입가에는 순간 살짝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역시 내가 잘못 보지 않았구나. 이 아이 참으로 올곧은 아이구나. 그랬기에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겠지.’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보편적으로 인간은 욕심이 많은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한데 그것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가? 아님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아이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가?’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는 알마리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숨겨진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사연이 발생하면서 정령의 고향에 대한 사용법을 잃어버린 지금, 정령의 고향 안에 숨겨진 비밀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실상 네 최상급 정령들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령의 고향이었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비밀스러운 기능이 숨겨져 있었다.

로드에릭은 정령의 고향을 정령술사가 아닌 자가 사용할 수 있는, 심지어는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없어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될 수 없는 자들까지도 정령의 고향 안에 봉인되어 있는 네 최상급 정령들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숨겨져 있었다.

그가 이런 방법을 남겨 놓은 것은 당연히 자신의 후대를 위함이었다. 하나 아무리 좋은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가 지금은 단 한 명도, 심지어는 정령의 고향을 가지고 있는 알마리온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라오니다스가 갈등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숨겨진 기능을 알마리온에게 알려야 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 것인가였다.

‘어쨌든 확실히 기록에 남아 있는 그 가론 폰 로드에릭이란 자의 능력 또한 대단하구나. 이런 물건을 만들어 내다니 말이야.’

8서클 대마법사인 라오니다스였지만 알마리온이 내민 팔찌, 그러니까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이 어떻게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두 종족뿐이었다. 바로 엘프와 인간이었다.

하나 이 두 종족은 그 종족의 특성처럼 같은 마법이라도 구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었는데, 엘프들의 마법이 안정성과 함께 완벽성을 추구한다면, 인간의 경우에는 그 무엇보다도 파괴력을 추구하고 있었다.

“내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넌 네가 말한 그 물건에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는지 모두 아는 것이냐?”

“이 안에 봉인되어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비밀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단 말이구나.”

“예, 어르신. 하지만 설사 제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상관 없습니다. 전 이 안에 봉인되어 있는 존재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진심이냐?”

“그렇습니다, 어르신.”

“그 안에 봉인된 분들이 널 이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도 말이냐?”

“…….”

라오니다스의 말에 알마리온은 그저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

“허허, 알았다. 그럼 그것을 풀어서 내게 주거라.”

“예, 어르신.”

정령의 고향을 풀어 건네주자 라오니다스가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나중에 널 찾아가마.”

나중에 찾겠다고 한 것은 봉인을 깨기 전에 그에게 마지막으로 봉인되어 있는 정령들과 작별을 할 시간을 만들어 주겠단 의미였다.

“예,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돌아가 보려무나.”

“예.”

라오니다스가 알마리온을 찾아온 것은 정령의 고향을 그에게 맡긴 지 사흘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알마리온도, 그리고 이들 네 정령도 나름 많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이분들을 보내 드려도 되겠느냐?”

“예, 어르신.”

“그럼…….”

라오니다스가 정령의 고향의 봉인을 풀기 위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쨍!

“우웃!”

“큭!”

봉인을 파괴하는 주문이 모두 끝나자 정령의 고향이 산산이 부서졌고, 아울러 그곳에 봉인되어 있던 네 최상급 정령들의 존재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8서클 대마법사인 라오니다스조차도 이들 네 최상급 정령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존재감을 감히 감당하기 힘들어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쳇! 막상 헤어지려 하니까 좀 그러네.

-그러게 말이다. 그동안 제법 정이 들었는데.

-만남이 있음 헤어짐도 있는 법.

-…….

정령의 고향 안에 봉인되어 있을 때는 단지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네 최상급 정령들이 봉인이 깨어지면서 이들 최상급 정령들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던지라 그 엄청난 중압감에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경외감.

지금 이 순간 알마리온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은 바로 경외감이었다.

절대에 가까운 이들 최상급 정령들 위에 또 다른 미지의 존재인 정령왕들과, 그러한 절대적인 존재들을 창조한 신이란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들자 알마리온은 자기 자신에 대한 또 한 번의 성찰省察의 기회가 찾아들었다.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네 최상급 정령들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다들 방해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알마리온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본 이들 네 정령은 하나씩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의 모습을 기억에 남기려는 듯 잠시 지켜보다 조용히 정령계로 돌아갔다.

알마리온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다시금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것은 무려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앞선 작은 깨달음과 마찬가지로 이번 일로 인해 그의 능력에 변화가 있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변화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이은 깨달음과 성찰로 인해 그는 어느새 상급 정령술사의 한계점까지 도달해 있었다. 아울러 그의 주술사로서의 능력 또한 이제는 최고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니?”

알마리온이 열흘 동안이나 되는 시간을 자기 성찰을 하고 깨어나자 유르스나르는 자애스러운 목소리로 아들이 지난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아들을 걱정하며 물어 왔다.

“하하. 예, 어머니. 배가 무척 고프네요.”

“그래? 그럼 어서 가자꾸나.”

“예, 어머니. 음? 한데 그쪽은 마을 쪽이지 않습니까?”

“네가 깨달음을 얻는 동안 네 덕분으로 이 어미에게 내려졌던 일족의 징계가 풀렸단다.”

알마리온이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장로 회의에서 유르스나르에 대한 처벌을 조정하였다. 이는 이들이 엘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파격이라 해도 좋을 일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네 덕분이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일족의 어른들께 청원한 것도 그랬지만, 봉인되어 있던 그분들이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어미의 형량을 줄여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단다.”

봉인되어 있는 최상급 정령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에 자연과 신의 위대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동안 초록 일족은 봉인에서 풀려난 네 최상급 정령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아야만 했다.

바로 알마리온의 어머니인 유르스나르에 대한 선처의 부탁이었다.

영원히 자신들을 구속할 수 있음에도, 그리고 자신들을 예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고 있음을 라오니다스로부터 어느 정도 언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속박에서 풀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그에게 달리 해 줄 것이 없던 이들은 알마리온이 이곳에 온 이유인 유르스나르의 징계에 대한 재고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럼 그분들이…….”

“그래. 그랬단다.”

“흠…… 그분들께 빚을 지게 되었네요.”

무슨 대가를 받고자 그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지난 천 년 동안이나 인간의 욕심에 의해 봉인당한 채 이용당했다는 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그러고 싶었던 것뿐이다.

한데 이처럼 자신에게 큰 문젯거리를 해결해 주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래. 원래 그분들은 중간계의 일에는 절대 간섭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일을 해 주셨다는 것은…….”

정령들은 본시 중간계의 일에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없다는 신이 정한 법칙이 존재하였다.

때문에 소환자에 의해, 소환자의 의지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은 가능해도 소환자의 의지가 아닌 일에 대한 개입만큼은 그 아무리 사소한 일도 절대 금물이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존재는 그에 대한 가혹한 신의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때문에 그들이 유르스나르의 일에 관여를 한 것은 그들로서는 절대 금기를 어기게 된 것이니 어떤 신벌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알마리온은 자신을 위해 신벌을 받게 된 네 최상급 정령들에 대해 너무나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데…… 일족의 장로님들께 드린 말이…… 사실이니?”

“어머니와 함께 가고 싶다는 말 말씀이신가요?”

“그, 그래…….”

“예, 어머니. 앞으로는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습니다. 어머니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말씀입니다.”

“…….”

알마리온의 말에 다시금 커다란 눈에 하나 가득 눈물이 고이는 유르스나르였다.

“내가 밉지도 않니?”

“밉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리웠습니다. 하니 이젠 제 곁에 계셔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 그래…… 그렇게 할게. 네가 날 내쫓을 때까지 네 곁에 있을게. 그것이 이 엄마가 바라는 유일한 것이란다. 흑흑.”

또다시 울음보를 터뜨린 유르스나르를 알마리온은 자신의 품에 안았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정말 사랑합니다.’

초록 일족 모두의 배웅을 받으면서 두 모자가 길을 떠난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한데 떠나는 알마리온의 양쪽 팔에는 이미 깨져 버린 정령의 고향이 아닌 또 다른 한 쌍의 팔찌를 차고 있었다. 바로 초록 일족 최고의 마법사인 라오니다스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 물품으로 저주 마법을 피할 수 있는 기능과, 다양한 치료 기능이 인챈트되어 있는 매우 귀중한 마법 물품이었다.

“왔냐?”

“주군을 뵈옵니다.”

“그레이트 칸을 뵈옵니다.”

근 한 달 만에 복귀를 한 알마리온을 모두가 반겼다. 유르스나르를 혼테르의 성에 머물게 하고, 마침 그곳에 모신 레드로의 어머니인 이멜다와 들에핀꽃과 함께 지내도록 한 후 이스턴에 복귀한 것이다.

“그간 별일 없었습니까?”

“예, 주군.”

알마리온이 부재 시에는 모든 것을 대리케 되어 있는 안드라스가 그동안의 일들을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다음 목표로는 콜빈족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콜빈족이라면 왕국의 국경에 접한 부족이 아니지 않소? 그곳을 선택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콜빈족을 다음 공격 목표로 정했다는 안드라스의 설명에 의문을 드러냈다. 콜빈족은 알마리온이 처음 계획한 것과는 꽤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안드라스의 설명을 들어 보니 그가 콜빈족을 목표로 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콜빈족은 로엔 왕국과 이들 게르혼족을 가르는 국경인 두렌 강에서 동북쪽으로 20일 정도를 쉬지 않고 밤낮으로 이동을 해야 접할 수 있는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한 부족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그저 그런 규모의 고만고만한 부족들이 대략 10개 흩어진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원래 콜빈족에서 분리되어 나간 이들 부족들은 평소에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자신들의 뿌리인 콜빈족을 중심으로 뭉쳤다.

지금까지는 이들 부족들이 특별한 위협을 느끼지 않아 평소처럼 오히려 서로에 대한 경계를 하는 데 더 신경을 썼지만 이스턴족이 탄생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 생기자 과거의 경험처럼 콜빈족을 중심으로 뭉쳐 이스턴족을 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머리부터 제거하자 이것이군?”

“그렇습니다, 주군. 물론 양동작전을 펼쳐 나머지 부족들이 콜빈족을 돕지 못하도록 하여야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하면 출전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소?”

“이미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주군의 복귀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미안하군요.”

이미 모든 출전 준비가 끝난 상태이고 자신의 복귀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알마리온은 자신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너무 많은 이들을 기다리게 하였다는 것에 대한 사과를 하였다.

“그럼 군은 어떻게 구성하였소?”

“주력은 주군의 지휘로…….”

주력은 알마리온의 지휘로 적막한초원이 지휘하고 있는 3천, 쿠란족 전사 3천 그리고 얄란족 전사 1천, 총 7천의 병력으로 콜빈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리처드의 지휘로 요들이 지휘하는 7개 부족의 전사들로 구성된 3천과 꿈꾸는달이 지휘하는 메코이족 1천, 빛나는별이 지휘하는 1천의 차트란족 전사로 구성된 5천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스턴은 안드라스와 하얀이리가 그 나머지 병력으로 지키기로 하였다.

하나 이 두 무리가 동시에 작전을 펼치는 것은 아니었다. 알마리온이 지휘하는 주력이 정해진 때에 콜빈족의 경계로 최대한 은밀히 이동을 한 후, 주공과 조공이 동시에 콜빈족을 비롯한 다른 부족들을 공략한다는 전략이었다.

“한데 주력과 조력의 전력의 차이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알마리온의 지적처럼 주력과 조력의 전력 차이가 상당히 심했다. 하나 안드라스는 그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어차피 콜빈족을 제압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요체입니다. 나머지 10여 개 부족들은 콜빈족이 무너지게 되면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의 생각은 그들과 굳이 전투를 벌이지 않고 항복을 받자 이것이오?”

“그렇습니다, 주군. 싸우지 않아도 될 적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지요. 물론 저들이 항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겁을 줄 필요는 있지만 말입니다.”

“옳은 지적이오. 구태여 불필요한 전투를 벌일 이유는 없는 일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단 콜빈족과 나머지 부족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일차적인 목표는 모두 달성하게 됩니다.”

알마리온과 안드라스가 계획한 1단계 목표의 핵심은 바로 로엔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게르혼족을 모두 이스턴이라는 이름 아래 둔다는 것이었다.

안드라스로부터 모든 설명을 들은 알마리온은 더 이상 자신이 손을 볼 것을 찾지 못하자 모두를 돌아보며 최종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사흘 후 주력이 먼저 출발을 하고, 약속된 날에 조공을 맡은 형님께서도 병력을 움직여 주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예! 주군!”

“예! 그레이트 칸!”

사흘 후, 출전을 앞둔 휴식을 마치고 7천 병력으로 구성된 주력부대가 먼저 이스턴을 떠나는 것으로 다시금 그의 이름이 초원을 떨치게 만드는 정복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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