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난 이 아일 인정하지 못합니다, 어머니.”
아마도 말소리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지금 테모스테네스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순식간에 온몸을 싸늘하게 소름 돋게 만들 정도였다.
“테네스! 그게 무슨 말이니? 이 아인 누가 뭐라 해도 네 조카야!”
“어머니에겐 그럴지 몰라도 제겐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더러운 존재일 뿐이에요. 하니 제게 저 아이를 받아들이란 말씀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유난히 자매의 사이가 좋았던 유르스나르와 테모스테네스였다. 아니, 테모스테네스에게 있어서 유르스나르는 언니이자 우상의 대상이었다.
그런 유르스나르가 다음 대의 대장로가 되기 위해 바깥세상으로 나갔을 때 인간들에 의해 원치 않는 험한 일을 당해 순결을 잃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언니인 유르스나르의 인생이 파국으로 끝나 버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너! 네가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너도 두 번 다시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르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뭐라고? 누가 너 따위를…….”
“테네스야!”
“흠! 말이 지나치구나, 테네스.”
테모스테네스의 말에 잠시 분위기가 잔뜩 경직되어 버렸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역시 영혼의 부름을 한 모양이구나.”
알마리온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가 자신을 불렀기에 왔다는 말에 라오니다스는 처음 알마리온을 이곳으로 데려온 지아렌으로부터 들은 말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그것이 아니라면 그 아이가 있는 곳까지 찾아갈 수는 없었겠지.”
“무슨 말씀이시죠?”
“너도 알 것이다. 영혼의 부름이라는 것을.”
“영혼의 부름? 하면 언니가……?”
“아마 그 아이도 그저 이 아이가 보고 싶어서 자신도 모른 채 그랬던 것 같구나.”
언니인 유르스나르가 영혼의 부름이라는 주술 아닌 주술을 사용하여 자신의 아들인 알마리온을 불러들였다는 말에 테모스테네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망친 저따위 반쪽짜리 엘프가 무엇이라고…….’
너무나도 사랑하고 존경했던 언니였기에 그러한 그녀의 삶을 파괴한 알마리온이란 존재가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한데…… 네 모습을 보니 고생이 많았던 것 같구나…….”
“아닙니다.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을 굳이 다시금 입에 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과거로 이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에 알마리온은 그저 지금은 잘 살고 있다고 짧게 대답했다.
“녀석…….”
그런 알마리온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는지 살라미스는 더욱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알마리온의 얼굴을, 아니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네 엄마는…….”
“…….”
유르스나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금 분위기가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너, 아직 식사하지 않았겠구나?”
“예.”
“그래. 그럼 잠시 기다리렴. 내 곧 준비하마.”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손자에게 줄 식사를 준비하려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여전히 못마땅하였는지 테모스테네스는 콧방귀를 뀌어 댔다.
“흥!”
“쯧…… 그렇게 속이 좁아서 어찌 일족을 이끌어 나가려고 그러느냐.”
“제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언니에게 내린 형벌을 면해 준다면 당장 언니에게 돌려줄 지위입니다.”
“쯧쯧,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테모스테네스가 억지를 부린다는 듯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긴 하였지만 슬쩍 알마리온을 살피는 라오니다스의 눈빛이 의미심장하였다.
알마리온도 그런 그의 눈빛을 보며 그가 무엇인가 의도하는 바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구태여 그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든 결국은 그 의도의 종착점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왜 불가능하다는 거죠? 이제 저…… 저…….”
이미 자신의 조카라고 인정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 때문인지 테모스테네스는 알마리온을 부를 마땅한 호칭이 순간적으로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저따위 인간…….”
“그만! 분명히 말해 두마, 테네스!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을 그런 식으로 부르면 난 네게 정말 실망할 것이다. 알겠니?”
“어머니!”
두 모녀가 자신이란 존재를 놓고 서로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자 심히 불편해지는 알마리온이었다.
“난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동안 보인 살라미스가 보인 모습과는 전혀 달리 대장로로서의 위엄이 절로 느껴지는 그러한 모습이었다. 하나 테모스테네스의 고집 또한 쉽게 자신의 뜻을 꺾을 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어머니, 아니 대장로님. 저 테모스테네스는 다음 대의 대장로 후계자로서 정식으로 유르스나르에게 내렸던 결정의 재심을 청구하겠습니다.”
“너…….”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기 저 인간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건 충분한 근거가 못 된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것이다. 일족이 그 아이에게 내린 형벌은 저 아이와는 관계없이, 그 아이가 우리 일족의 최고의 선인 생명을 귀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것임을 너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흠…… 대장로.”
“예, 라오니다스 님.”
“내가 보기에…… 아주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소만?”
“무슨 말씀이신가요?”
라오니다스의 말에 두 모녀는 물론 알마리온도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엇인가 일을 시작할 모양이었다.
“대장로의 말씀처럼 테모스테네스가 말한 이유는 유르스나르에 대한 일족의 결정을 재심할 근거로는 부족하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큼은 유르스나르에게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소?”
“…….”
라오니다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알마리온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알마리온은 무슨 영문인지 설명해 달라는 눈빛으로 라오니다스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예, 어르신.”
“넌 어찌 생각하느냐?”
“…….”
“난 네가 네 어미를 저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어차피 어머니와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려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온 그였기에 이제 와서 갈등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러했기에 어머니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려는 라오니다스의 행동에 이내 동조하였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란다.”
그 방법이 있는 것인지를 묻자 라오니다스는 그런 대답을 기대했다는 듯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자하게 말하였다.
“네 어미의 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순결을 깨뜨린 죄,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의 존엄성을 해친 죄였지.”
“…….”
알마리온은 라오니다스의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순결이라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몸을 깨끗이 한다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지. 어차피 몸이라는 것도 결국 마음에 의해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는지 알마리온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게다가 네 어미처럼…… 본인의 의지가 상실하였을 경우라면 더더욱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
의지가 상실한 상태라면 그것은 결코 죄를 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이들의 주장 또한 공감이 갔다.
“하나 네 어미가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은 바로 널 그렇게 버린 것이란다.”
“으음…….”
저도 모르게 절로 신음이 흘러나오고 주먹이 불끈 움켜쥐어졌다.
“우리 일족에게 있어서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 아무리 네 어미가 널 인가에 놓고 왔다고는 해도 새로운 생명을 가장 보듬어 주어야 할 어미가 된 여인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였기에 평생 그 죄를 씻으라는 의미에서 고립형을 처한 것이었다.”
평생을 그 누구와도 접촉하거나 말을 나눌 수 없는 형벌.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극도의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네 어미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너란다. 설사 일족의 장로 회의에서 네 어미에게 내린 형벌을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너는 네 어머니가 지금까지 네게 가져왔던 죄책감만큼은 풀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일족이 내린 형벌은 좀 더 논의를 해 봐야 하겠지만 최소한 유르스나르가 져 온 죄책감만큼은 덜어 주고 싶은 것이 라오니다스의 심정이었다.
라오니다스가 유르스나르를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바로 자신의 제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평생을 혼인하지 않고 홀로 지낸 라오니다스에게 있어서 유르스나르는 제자이기 전에 친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유르스나르에게 일족 최고의 형벌을 내려야 했을 때의 그의 심정이란…….
한데 이렇게 유르스나르가 버린 아들이 장성하여 찾아왔다는 말에 최소한 그녀가 멍에처럼 짊어진 죄책감만큼은 덜어 주고 싶어 평소 그답지 않게 끼어들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의 눈이 다시 한 번 알마리온에게로 향하였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어…… 아니, 그분과의 일을 매듭짓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분을 뵙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허허. 어떻소, 대장로?”
“그, 그래. 나와 함께 가자꾸나.”
“예.”
조금 전까지 알마리온에게 줄 식사를 준비하던 살라미스였지만 어느새 그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알마리온과 함께 집을 나섰다.
처음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유르스나르는 여전히 자신이 버린 알마리온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이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가까운 이의, 사랑하는 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 당사자만큼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가 보거라…….”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살라미스가 알마리온에게 가 보라는 말을 건네자 잠시 머뭇거리던 알마리온이 천천히 유르스나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도 유르스나르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자신이 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빌고 또 빌었다.
하루 종일 거의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매일을 이렇게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몸까지 망치는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지만, 유르스나르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족의 품에 다시 돌아온 이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알 수 있었고, 일족의 어른들에 의해 고립형이 결정된 이후 지금까지 매일매일을 이렇게 자신이 저지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이름조차 없는 자신의 아이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지은 죄가 없어지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오늘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의 죄를 빈 후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거처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단지 비바람만 간신히 면할 수 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녀는 누군가 서 있음을 처음 알고는 흠칫 놀랐다. 하나 그녀의 놀라움은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누구? 음…….”
“…….”
“서, 설마…… 설마…….”
비록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유난히 시력이 좋은 엘프들이었다. 때문에 이런 어둠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알마리온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아니야…… 아니지? 내가 지금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알마리온에게 묻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내, 내가 잘못 보는 것이지? 그렇지? 응?”
“…….”
이번에는 분명 자신에게 묻는 것이지만 알마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마리온을 본 그녀는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서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알마리온의 얼굴을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만질 수 있었다.
“음…….”
그녀의 손끝이 얼굴에서 느껴지자 알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채 신음을 흘렸다.
“흑흑. 정말 너니? 정말 네가 그 아기니? 흑흑…… 흑흑흑…….”
이름조차 짓지 않은 채 갓 태어난 아이를 버린 때문에 무엇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는 것이 이처럼 가슴을 메게 할 줄 알았다면 이름이라도 지을 것을 하는 후회가 또다시 한없이 밀려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네겐 정말 미안해…….”
제법 긴 시간을 떨리는 손길로 알마리온의 얼굴을 쓰다듬던 유르스나르는 돌연 알마리온 앞에 무릎을 꿇고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며 실성한 사람처럼 자신의 죄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알마리온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후……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그리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런 자신의 말소릴 듣지 못하였는지 유르스나르는 연방 자신의 발에 고개를 처박은 채 사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게 되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유르스나르는 마치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양 미친 듯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 유르스나르의 행동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임을 알마리온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선뜻 그것을 행하지 못하였다.
언제나 해 보고 싶었던 말이고, 이런 일이 생기면 꼭 해 보고 싶었기에 수도 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하였던 말이었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도저히 말로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벙어리처럼 입만 벙긋거리던 알마리온의 입에서 결국 침묵이 깨지고 소리가 되어 나왔다.
“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요.”
저도 모르게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어머니. 그 한마디가 이리도 하기 힘이 들었다.
어머니란 말에 유르스나르의 온몸이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 병자처럼 끝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니…….”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 알마리온은 무릎을 꿇어 유르스나르와 눈높이를 맞추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저…… 왔습니다, 어머니…….”
다시 한 번 어머니라는 말과 함께 마치 잠시 어디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아들처럼 행동하자 그제야 유르스나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더 이상 그녀가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이 보기 싫은 알마리온은 자신의 한 손을 어깨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유르스나르의 너무나도 가냘픈 손을 마주 잡아 주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따뜻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 좀 늦었습니다, 어머니.”
“…….”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벙긋거리긴 하였지만 그녀 또한 그것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지 몇 번이나 같은 동작만 반복하였다.
“저 배고픈데…….”
영혼의 부름에 응해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 알마리온은 거의 식사다운 식사를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지난 며칠 동안 지켜보고 서 있을 때에도 알마리온은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은 채, 그녀가 보이는 곳에서 그녀와 함께하였다.
“그, 그래? 가, 가자…… 가서 이 어, 어, 어…….”
엄마란 말이 그리도 목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예, 그래요. 저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 먹고 싶습니다.”
“흑! 흑! 그, 그래……. 가자. 어서 가자…….”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기 힘든 묘한 표정이었지만 알마리온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를.
“너무 초라하지?”
유르스나르가 지내고 있는 곳은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저 바위틈 사이에 나뭇가지와 잎으로 얼기설기 엮어 겨우 비바람만 막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하나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은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데 안으로 들어서자 알마리온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
“미, 미안하구나. 너무…….”
처음으로 아들에게 자신의 거처를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그녀는 창백한 피부를 붉게 물들이며 알마리온을 돌아보며 변명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알마리온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알마리온의 아기 때 모습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사위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유르스나르의 거처는 밤을 밝힐 촛불마저 없었기에 더욱더 어두웠지만 이런 어둠은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을 주지 못하였다.
“…….”
침묵이 이어졌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을 깬 것은 알마리온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유르스나르가 바위에 새겨 넣은 자신의 아기 때의 모습을 손으로 더듬기 시작하였다.
“흑! 미안해…… 그때는…….”
“아니요. 이젠 모두 지난 일입니다, 어머니.”
“아니야. 정말 이 어미가 네겐 너무 큰 죄를 지었어. 흑흑흑!”
“예. 어머니 말씀처럼 어머니께서 참 큰 죄를 지으셨어요.”
“흑흑흑!”
알마리온의 말에 유르스나르의 울음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하지만 어머니, 그래도 어머닌 제 어머니입니다. 제가 어머니 아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흑흑…… 흑흑흑!”
“이제 그만 우세요. 23년 만에 절 만났는데 그렇게 울기만 하실 것입니까?”
통곡을 하듯 우는 유르스나르의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아 주며 말하였지만 여전히 북받치는 감정으로 인해 좀처럼 유르스나르는 진정하지 못하였다.
“한데 어머니, 저 여기 오는 동안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저 정말 배가 많이 고프거든요?”
“흑…… 아! 미, 미안하구나. 미안…… 자, 잠시만…….”
그제야 다시금 허둥거리며 아들에게 줄 식사를 준비하려 했지만 유르스나르는 이내 다시금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이, 이를 어째…….”
“왜 그러세요?”
“그, 그게…….”
고립형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일족과 떨어져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해야 하는 형벌이었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초록 일족 최고의 형벌인 자살형으로 형의 수위가 높아지게 된다.
이는 고립형을 받은 이를 도운 자도 다르지 않아서 고립형을 받은 죄인을 돕는 것이 들킬 경우, 이 또한 고립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을 홀로 해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고립형을 언도받게 되면 아주 기본적인 도구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였으니 당연히 모든 물자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르스나르는 이미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였기에 더더욱 먹을 것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제가 사냥을 해 오겠습니다.”
“아니, 아니. 이 어, 어미가…….”
“하하. 저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어머니. 그런 일은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그래도…….”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얘…….”
뭐라 말리기도 전에 이미 밖으로 나가 버리는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녀는 든든함과 안온함이 느껴졌다.
“잘했어. 정말 잘한 거야…… 잘했어, 알마리온. 넌 잘한 거야.”
밖으로 나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듯 달려온 알마리온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애를 써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킨 알마리온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가운데서 식삿거리를 위한 사냥을 하려고 할 찰나였다.
-부탁이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셀레아나 님?’
울뚝불뚝한 성격이긴 해도 평소 먼저 나서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던 불의 최상급 정령인 셀레아나가 갑자기 의념을 보내왔다.
-이제 우릴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
갑자기 정령계로 자신들을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으면 한다는 셀레아나의 말에 알마리온은 의문이 들었다.
자신도 이들 네 최상급 정령이 얼마나 정령계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마리온이 이들 네 최상급 정령을 억지로 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능력으로도 이들 최상급 정령들을 돌려보낼 방법이 없었기에 늘 이들 네 최상급 정령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였다.
한데 갑자기 평소 잘 나서지 않던 셀레아나가 나서서 자신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말을 하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법을 찾는다면…….’
-방법이 있다.
알마리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셀레아나가 말을 가로챘다. 그만큼 그는 조급했다.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아까 그 노인네.
‘혹 라오니다스 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그 노인네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분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못 느꼈냐?
솔직히 알마리온은 라오니다스가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자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아무리 내 감정이 흐트러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마음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바로 자신 곁에 그렇듯 강자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 그저 부끄럽게만 느껴지는 알마리온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분께 한번 부탁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예. 물론입니다.’
네 최상급 정령들이 봉인되어 있는 정령의 고향을 해체하여 그동안 정이 들 대로 든 네 최상급 정령들을 정령계로 돌려보낸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가 서운해하는 것은 그동안 이들과 들었던 정 때문이었지 이들 최상급 정령들에 대한 소유욕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알마리온 님.
거리낌 없이 대답을 하는 것에 감동을 받았는지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다른 세 최상급 정령들 또한 저마다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 왔다.
그런 네 최상급 정령들의 감사 인사를 받는 알마리온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이들이 다시금 자유로워진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함께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무리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있어도 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 또한 하였다.
어쌔신을 고용하여 정적을 제거하는 일은 그다지 드문 일이 전혀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이거나,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만 할 때에 가장 먼저 생각하고 고용하는 것이 바로 죽음의 상인들, 즉 어쌔신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냥을 마치고 다시금 유르스나르의 거처로 가 보니 그곳에는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목을 잔뜩 늘인 채 기다리는 유르스나르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제 오니…….”
혹시라도 알마리온이 그대로 떠나 버리지나 않았을까 내내 마음을 졸이며 밖에서 기다리던 유르스나르는 알마리온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자 이내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예, 어머니.”
“흑…… 난 네가…….”
너무나도 가녀리고 나약한 어머니의 모습에 알마리온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또한 이제는 아들을 품에 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인 자신의 품에 어머니가 안겨야 할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어머니의 품이 가져다주는 따뜻함과 포근함 그리고 안락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 아냐. 자…… 어서, 어서 들어가자. 응?”
“먼저 들어가세요. 전 이것을 손질해서 들어가겠습니다.”
“응? 그, 그래…….”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알마리온이 어디론가 훌쩍 가 버릴 것만 같았는지 유르스나르는 그가 보이지 않으면 좀처럼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이윽고 잡아 온 사냥감을 모두 손질하고 그것을 가지고 알마리온이 들어오자 유르스나르는 그것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나 그 음식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음식은 전혀 아니었다.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해야 하는 그녀였기에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만들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미,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어머니. 맛이 괜찮습니다.”
“그, 그래……. 그럼 어서 많이 먹으렴.”
두 사람 모두 음식이 아무런 맛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속이고 속아 주었다. 그것이 그 일 이후로 처음으로 마주한 두 모자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기에 알면서도 속고 속아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안에서 주무세요. 전 밖에서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마리온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그러니까 그날 이후 일을 나중에 듣기로는…….”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만 자신이 한 일이 있기에 도저히 말을 내어 묻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알마리온은 자신이 버려진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알마리온은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였지만 그런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유르스나르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알마리온의 두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하면 네 아버지란 자를 만났다는 것이냐?”
아버지, 그러니까 로엔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동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던 유르스나르의 표정이 갑자기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예, 어머니.”
“누구지?”
누군지 알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사생결단을 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어떻게…….”
진정하라는 말에 유르스나르가 반발을 하려 하였지만 이어지는 알마리온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나 그분 그리고 저…… 모두 그동안 서로에게 상처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넌 네 아버지란 자를 용서하였다는 것이냐?”
“예.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용서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요,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다. 로엔달이란 존재를 자신의 생부라고 인정하긴 하였지만 그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서로의 상처를 묻어 두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기로 하였을 뿐이다. 그건 유르스나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알마리온은 아직 그녀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였을 뿐이다.
“그래…….”
다른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본래의 모습으로 대할 수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알마리온에게만큼은 무조건 약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내일 일족분들에게 부탁을 하나 드릴 생각입니다.”
“일족분들에게? 무엇을 말이냐?”
“어머니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건…….”
고립형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번복되지 않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기에 유르스나르는 아무리 알마리온이라 해도 결코 그 형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하였고, 그 확신이 그녀를 다시 한 번 좌절케 만들었다.
그녀도 알마리온과 함께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들 곁에서 아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것이 자신이 알마리온에게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 자신은 일족의 장로 회의의 결정에 따라 고립형에 처해 있었고, 이 형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 좌절하는 것이었다.
“혹시 네가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함께한 시간도 좀 되었고, 또한 알마리온이 비록 자신을 용서한 것은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보고 함께 가자는 말까지 해 주자 한결 마음이 놓였는지 자애로우면서도 지혜롭던 과거의 그녀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과거의 그녀의 모습을 아는 존재들이라면 그녀가 아무리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이 앓아 낳은 아이를 그런 식으로 버릴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사실 그 당시 유르스나르는 거의 반 미쳐 있는 상태였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소의 성격이 자애롭고 또한 지혜롭다 하여도, 그런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였다면 돌변하지 않는 존재가 과연 있기나 할까?
어쨌든 일은 이미 벌어진 이후였고, 당사자인 유르스나르는 물론 일족 모두가 그 일은 큰 상처이자 아픔이었다.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어머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도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허락되지 않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처럼 고립형은 일족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외부인과도 접촉을 금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니 알마리온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이 가능한 것 자체도 이미 초록 일족에게는 유례없는 파격적인 일이나 다름없었다.
“…….”
‘아마도 이 일로 어머니와 스승님께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실 것이다.’
차분함을 되찾은 유르스나르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어머니이자 일족의 대장로인 살라미스와 자신의 스승이자 일족의 최고의 연장자이며 장로이기도 한 라오니다스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엘프들은 지혜의 종족이었다. 특별히 이들에게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서라기보다는 오랜 삶을 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삶의 자세가 후대에 이어 오고,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다 보니 종족의 특성처럼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들은 개인이 아니라 모두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를 정함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하여 오랜 토론과 검토를 거친 후 투표라는 절차를 거쳐 정할 정도로 신중했다. 한데 그렇게 정해진 규정을 아무런 논의도 근거도 없이 어겼으니 당연히 지금 일족 내부에는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알마리온 또한 그럴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들 일족 내부의 일이고,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기에 구태여 그것을 내색할 이유조차 없었다.
“그래, 하면 넌 아직 가정을 꾸리지 않은 것이니?”
“한 명의 부인이 있습니다.”
“그래?”
“예, 어머니.”
“부인은 한 명뿐인 것이니?”
모든 종족들 중 배우자를 단 한 명만 두는 것은 오직 엘프 사회에서만 있는 일이었고,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르스나르이기에 물은 것이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알마리온의 대답에 살짝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나 관습의 차이이니 구태여 그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내심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였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시겠지.’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유르스나르이기에 차마 말은 못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며 알마리온은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 네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니?”
“예.”
“꼭 그렇게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필요하다면 엘프들도 과감히 전쟁을 벌인다. 하나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를 쌓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이들이 전쟁을 결심할 때는 자신들의 생존에 관계될 때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전쟁이라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서 말입니다.”
“그래…….”
이후에도 두 모자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르스나르는 민감하거나 알마리온의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질문이나 궁금함은 가급적 피하느라 조심하였으며, 알마리온 또한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자극하는 식의 대답은 피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