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부름
레드로의 모친인 이멜다를 혼테르에 머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후 영지를 요하네스와 도일 그리고 케일 세 사람에게 맡긴 후 한센, 요한, 그나이제나우, 안드라스와 함께 이스턴으로 돌아왔다.
“그 녀석에게 그런 일이 있었군?”
“예, 형님.”
“한데 그 녀석 혼자 거길 가서 뭘 하겠다는 것이지?”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여러 일들이 있어서 그랬지 능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친구입니다.”
“어쨌든 그 녀석도 참 힘들게 사는군.”
“잘 헤쳐 나갈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대로 쓰러져 버리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녀석이니까 말이야.”
“예.”
이스턴에 복귀한 알마리온은 안드라스를 재상과 같은 위치에 놓고 그를 중심으로 자신이 통치하는 모든 지역들을 관리토록 하였다.
아울러 테일러 상단의 일과 폰티악 후작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원양 상단의 조직, 심지어는 북동군 사령관으로서 그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과 아직은 그의 관리하에 있는 북동 지역의 7개의 성들, 아니 이제 곧 정식으로 왕실로 반환되는 메코이와 얄란족의 근거지까지 모두 관리토록 전권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리처드와 다른 가신들을 중심으로 군을 재편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한센에게는 메코이와 얄란 그리고 차트란족 전사들 일부로 구성된 병력으로 하알란족에 대한 방어를 맡겼다.
지금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하알란족과 일전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알마리온도, 그리고 리처드나 안드라스도 지금은 구태여 그들과 일전을 벌여서 힘을 뺄 필요가 없다 판단하고 그들에 대한 공격은 차후로 미루기로 하였다.
대신 이들은 일단 왕국의 북쪽 국경과 접한 모든 지역들을 통합해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아니, 처음부터 알마리온은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왕국의 동북쪽 국경이 게르혼족들로부터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면 동북 지역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서쪽 국경 지역으로 집중시킬 수 있으니 그만큼 왕국은 더욱 안전을 확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알마리온이 제국을 다녀오는 동안 하알란족에 대한 설득 작업 또한 이미 마무리가 되어 그들에게 하알란족을 공격하는 데에는 동원하지 않는다는 것과, 하알란족을 제압한 이후 그들의 가족들에 대해 일절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들까지 병력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흡수한 3천의 병력을 알마리온은 그나이제나우에게 맡겼으며 또한 마할족을 비롯한 7개 부족 전사들로 구성된 3천 병력을 요들에게 지휘토록 하였다.
한센이 세 부족의 대전사들 몇 명과 이스턴의 서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떠난 후, 알마리온은 본격적으로 병사들을 훈련시켜 나갔다.
아울러 전쟁에 필요한 많은 물자들을 테일러 상단을 통해 들여오면서 착실히 앞날을 준비해 나갔다.
그날도 그렇게 하루 종일 훈련을 참관하기도 하고, 또한 훈련을 직접 지휘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그는 안드라스와 함께 늦은 시간까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또 의논할 것들을 의논한 후 매우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들에핀꽃은 레드로의 어머니인 이멜다를 위로하기 위해 잠시 혼테르에 가 있었기에 그는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꿈을 꾸었다.
너무나도 포근한 느낌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단지 포근한 느낌만 느낄 수 있었을 뿐,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그저 흐릿하기만 하였다.
그 무엇도 구분할 수 없는, 차라리 완전한 암흑이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무엇인가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다가도 그 무엇도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세상이 온통 뿌옇기만 할 뿐이었다.
귀를 기울여 집중을 하면 무엇인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그조차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무엇도 분명히 보이지 않고 또렷이 들리지 않아 설핏 불안감이 들어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예의 그 포근한 느낌에 다시금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한껏 풀어져 버렸다.
“주군을 뵈옵니다.”
“그레이트 칸을 뵈옵니다.”
아직은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신들과 부족들의 족장들이나 대전사들 모두는 그와 함께 새벽 수련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처럼 지도자들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스스로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며 또한 모든 일에서 앞장을 서기 때문인지, 10개 부족의 연합체인 이스턴족은 그 누구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들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시킬 때에는 불만이라는 것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불평은 있을 수 있어도 불만은 있지 않았다.
“자! 그럼 수련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예.”
수련은 해가 완연하게 뜬 이후까지 대략 2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수련이 익숙지 않았는지 상당히 지쳐 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졌는지 새벽 수련이 끝나면 다들 개운한 표정들이 되었다.
이렇게 새벽 수련을 시작으로 하루를 시작한 알마리온은 여느 날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하루 일과를 보냈다. 그리고 또다시 하루를 마감한 후에는 다른 날처럼 홀로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하지만 오늘 꿈은 이전에 꾸었던 꿈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동안의 꿈은 그 무엇도 보이지 않고 분명하게 들리는 것도 없었지만 늘 그를 포근하게 감싸 주는 무엇인가가 존재하였기에 두려움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한데 오늘 꾼 꿈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포근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고통. 그것은 고통이었다.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비명 소리만 난무하는 꿈이었다.
“헉!”
고통 끝에 접하게 된 너무나도 생경한 느낌에 알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한데 잠에서 깨어난 그의 몸은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땀투성이였다.
“무슨 꿈이…….”
꿈속에서 느껴진 고통이 지금도 몸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하나 그러한 고통보다 정작 그를 잠에서 깨어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누구였을까?”
너무나도 생경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크게 울음을 터뜨렸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새로운 느낌에 두려움마저 느낀 나머지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힘껏 뜨긴 하였지만 여전히 세상은 온통 뿌옇기만 할 뿐이었다.
한데 그 희미함 가운데 누군지 정확히 보이지는 않아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가 누구인지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느낌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혼란이었어. 그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에게서 느껴졌던 그 느낌. 그것은 온통 혼란뿐이었다.
“누구인가? 누구인데 날 보며 혼란만을 느꼈던 것일까? 나란 존재가 그렇게 누군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존재였단 말인가?”
기분이 착잡해졌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온통 혼란스러워했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라 하여도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하루.
알마리온은 하루 종일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인해 평소 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잦은 실수를 발했고, 이를 이상히 여긴 가신들이 그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지만 알마리온은 잠들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편안한 자세와 복장으로 눈을 감은 채 메디타티오meditatio에 잠겨 들었다.
이 메디타티오라는 것은 주로 주술사들이나 신관들이 신의 예지를 받거나 종교적인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로, 알마리온은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일들이 과연 무엇들이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메디타티오에 든 것이다.
하나 그가 지난 며칠 동안 보았던 꿈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돌아볼 수가 없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자신이 꾼 꿈을 되돌아본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일이겠지만 주술사인 알마리온에게 있어서 꿈은 과거와 미래를 알려 주는 중요한 척도였다.
특히 꿈을 통해서 주술사들은 신들의 예언을 많이 받았기에 혹여 자신이 놓친 꿈이 있다 하더라도 그 꿈을 되돌아보기 위한 주술 또한 존재하였다.
그가 메디타티오에 든 것도 그러한 주술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주술까지 이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난 며칠 동안 꾸었던 꿈은 그저 모든 것이 뿌옇기만 할 뿐 그 무엇 하나도 또렷한 것이 없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음을 확인한 그는 주술과 메디타티오의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무엇이었을까? 그 꿈이 내게 전해 주고자 하는 것이.”
주술사도 사람인지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꿈을 꿀 때도 많았다. 하지만 하나의 주제로 이처럼 며칠 동안 꿈을 꾸는 일은 없었다. 그러했기에 알마리온은 지난 며칠 동안 꾼 꿈이 무슨 의미인지 더욱더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또다시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날도 알마리온은 메디타티오를 하면서 그는 조용히 자신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실타래처럼 엉켜 있듯, 아니 짙은 안개처럼 뿌옇기만 하던 그 꿈의 내용을 오늘도 반추하여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다음에 이어졌던 꿈을 떠올리게 됨으로써 그 꿈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훗! 그러니까 그게 내 모습이었단 말인가? 그럼 그때의 그 포근했던 느낌은…….”
어이가 없었다.
그나이제나우와의 대련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정신세계가 더욱 넓어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의식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기, 그러니까 복중腹中에 있었던 때의 기억까지 떠오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 날 내려다보던 그분은…….”
오랜 산고 끝에 태어난 자신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던 바로 그 사람. 그랬다. 그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
“후후…….”
자조적인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맺혔다. 태어난 자신을 기쁨이 아닌 혼란스러움만으로 바라보던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이 결코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자괴감이 더욱 커지면 커질수록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또한 더욱 커져만 갔다.
“어머니…….”
이미 아버지인 로엔달로부터 두 사람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모두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엘프들의 습성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만큼 알고 있었기에 알마리온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해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초록 일족의 유르스나르…….”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던 그 꿈속에서 역시 또렷하지 않고 아련하게만 들려왔던 몇 마디 되지 않던 말소리.
처음에는 그저 웅성거리듯 들려온 말소리였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계속된 메디타티오 덕분에 그것이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기 직전에 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 어머니…….”
그 존재를 몰랐다면 모를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르자 알마리온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떨쳐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커져만 갔다.
“요즘 무슨 일이 있으신 것입니까?”
두 사람만 있을 때 안드라스가 조용히 물어 왔다.
“음? 무슨 말이오?”
“요즘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음…….”
최근 들어 알마리온이 자주 이상한 모습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미안하오.”
자신으로 인해 다들 걱정하고 있다는 말에 알마리온은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주군께서는 우리 모두의 중심이십니다.”
“…….”
“주군이 어떤 모습을 보이시는가에 따라 저를 비롯한 모두는 그날을 웃을 수도, 울 수도, 힘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내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소.”
“그런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군.”
“하면……?”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시란 뜻입니다.”
“으음…….”
“비록 주군과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주군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주군께서는 결코 작은 일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
“주군 개인적인 일이라 하시니 제가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감히 제가 조언을 할 수 있다면 주군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 주군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주군께 모든 운명을 맡긴 저희에게도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감정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이런 지적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러한 부끄러움보다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지기만 하는 알마리온이었다.
“당분간 내가 자릴 비워도 되겠소?”
“예, 주군.”
“그럼 잘 부탁하겠소.”
하루가 다르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런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는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던 차에 안드라스가 이처럼 권유를 하자 이내 받아들인 것이다.
마음을 정하자 한시도 더 이스턴에 머물 수 없을 것 같은 안달이 나기 시작한 알마리온은 그날 밤 다른 사람에게는 어디를 간다는 말도, 얼마 후면 돌아오겠다는 말도 남겨 놓지 않은 채 어렴풋이 들려왔던 어머니의 부족을 찾아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을 향해 홀로 여행을 떠나 버렸다.
“주군께서 사라지시다니요?”
“방에도 없던데?”
새벽 수련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겨 리처드가 그를 찾기 위해 방으로 가 보았지만 그의 침실에는 아예 밤에 잠을 잔 흔적조차 없었다.
이에 리처드는 모두를 소환하고 알마리온을 찾기 위해 병력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아함! 주군께서는 당분간 보실 일이 있으셔서 여행을 떠나신 것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뒤늦게 나타난 안드라스가 아직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해 비틀거리면서 나타나 큰 하품을 몇 차례 해 댄 후에야 알마리온이 여행을 떠난 것임을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여행이라니? 우리에게 단 한마디도 없이 말인가?”
다그치듯 묻는 리처드였다.
“실은…….”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안드라스가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쳇! 그럼 가면 간다고 말하고 가도 되잖아? 이 자식! 돌아오면 따끔하게 버릇을 좀 고쳐 놔야겠군!”
안드라스의 설명을 들은 리처드가 짜증이 나는 듯 투덜거리며 방을 나가자 다른 사람들도 다들 한마디씩 투덜거리는 것으로 놀란 가슴을 대신 표현하며 각자 할 일을 찾아 방을 나가 버렸다.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은 천연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러한 곳이었다. 인간들의 발걸음이 닿는 것을 허락지 않았기에 그 신비함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쫓기듯 정신없이 단숨에 달려온 알마리온은 내친김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누구에게도 길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지만 알마리온은 마치 이미 수십 번 이곳에 와 본 사람처럼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령을 소환하여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곧바로 갈 수 있었으니 굳이 길을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처음 길을 나설 때부터 알마리온은 기이하게도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상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마치 자신을 인도하듯 이곳까지 이끌어 주었다.
흑주술사인 제리코가 그를 마리오네트marionette로 만들기 위해 저주의 소환 주술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이었지만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마치 어미가 새끼를 찾는 애절함이 담긴 그러한 기운이었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알마리온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행동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애절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영혼의 부름’이라는 주술이었다.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 깃들여 있는, 태고 시대 때부터 주술사들로 활약하였던 많은 주술사들의 주술이 깃들여 있는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서도 단지 그 명칭과 설명만 되어 있을 뿐, 인간 주술사로서는 절대 행할 수 없는 신비의 주술. 그것이 바로 영혼의 부름이라는 주술이었다.
영혼의 부름에 따라 그 진원지를 찾아가는 알마리온의 발걸음은 나는 듯 빨랐다. 그리고 그 빠른 발걸음처럼 그의 심장의 두근거림 또한 빠르게 격해졌다.
그리고 망설여졌다. 아니, 화가 치밀었다. 아들인 자신을 버릴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자신을 찾기 위해 이러한 일을 벌이는 것인지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작 자신을 부르는 영혼의 부름의 근원지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느려지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다.
“…….”
아직 마음을 완전히 정하지 못한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었다.
‘이 숲 저편에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숲 저편에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 준 또 한 명의 친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몇 번씩 결심을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으나 끝내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숲 언저리만 서성거리던 그가 결심을 하고 숲으로 들어간 것은 숲에 도착한 지 이틀이란 시간이 지난 후였다.
“…….”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부는 절벽 위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너무나도 거센 바람에 입고 있는 얇은 한 겹의 수수한 옷은 물론 가냘프게만 보이는 여린 몸이 바람에 날려 휘청거리고 있었다.
꼭 맞잡은 투명하게 보이는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치 신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신전의 벽화에 그려진 성녀聖女의 모습 그대로였다.
무엇이 그리도 아픈 것인지 그림보다 더욱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으며 꼭 감겨 있는 두 눈에서는 보석보다 더욱 영롱한 눈물이 끊임없이 고운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시는 것입니까?’
비록 말을 나눈 것도, 그리고 확인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인의 외모만으로도 그녀가 자신을 버린 자신의 어머니인 유르스나르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후회하시고 아파하실 것…… 왜 그때는 그런 결정을 하신 것입니까?’
원망을 했던 때도 있었다. 몸부림치며 그리워했던 때도 있었다. 부모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때 그는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를 받지 못하였었다.
그럴 때마다 못내 그리움에 사무쳐 홀로 목 놓아 울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같은 노예의 신분이라 해도 부모가 함께하는 노예 아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훨씬 좋았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가운데서도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아낌이 없었다.
그런 모습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던 알마리온이었다.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그런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싶었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로 인해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컸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척이나 고단한 일이기도 하였다.
아니, 그에게 있어서 남들과 다른 특별하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이기도 하였으니 자신을 지켜 줄 부모의 부재는 그만큼 그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나마 이제는 원망의 마음이 많이 가시기는 하였지만 막상 이렇게 자신을 버린 어머니란 존재를 눈앞에 두게 되니 다시금 그 분하였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울컥 치솟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유르스나르는 자신이 버렸던 이름조차 없는 자신의 아이에 대해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자신이 기억을 잃은 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것도 누구인지도 모를 자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초록 일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그녀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운명은, 아니 신은 그녀로 하여금 천형天刑을 지고 가게 하려는 것인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하게 강요하였다.
유르스나르가 다음 대의 일족을 이끌어 나갈 하이엘프로서의 마지막 자격시험인 바깥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지도자는 지혜로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다양한 경험들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 이들 일족의 전통이었고, 전통에 따라 그녀 또한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한데 그 여행이 끝내 그녀의 운명을 바꿔 놓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 감금당해 있다는 것과, 이미 자신의 처녀가 상실되고 누군지 알 수조차 없는 이의 아이를 갖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을 준 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미 자신의 순결이 깨어졌다는 것은 자신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일족 모두의 희망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결국 유르스나르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제대로 젖 한번 물리지 않은 채 아이를 버릴 결심을 하였고, 아이를 낳은 후 처음 본 집에 이름도 붙이지 않은 자신의 아이인 알마리온을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모진 결심과 행동을 한 유르스나르는 일족에게 돌아와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일족의 어른들에게 그대로 고했다.
유르스나르의 모든 이야기를 소상히 들은 일족의 어른들의 표정에는 곧 분노가 일었다. 몇몇 어른들은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인간들을 응징해야 한다며 강한 어조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결국 그런 소수의 주장은 정식으로 부결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문제는 격론을 통해 그녀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며 아울러 그녀에게 이들 일족에게서 최대의 형벌이라 할 수 있는 고립형孤立刑을 언도했다.
이들 초록 일족은 여느 엘프들처럼 순결을 중시하였다. 하나 무조건적으로 순결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난잡함이었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성 간의 사랑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르스나르에게 평생 동안 그 누구도 접촉할 수 없고 고립된 곳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고립형이라는 최고의 형벌을 내린 것은 그녀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적으로 당한 일은 오히려 일족 모두가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었다. 또한 그로 인해 그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그녀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버렸다는 것만큼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일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단 이유로 갓 태어난 아이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이들 초록 일족이 가장 금기시하는 생명의 존엄성을 저버린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어떠한 일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초록 일족이 가장 중요시하는 생명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들 초록 일족이 그녀에게 평생을 고립된 곳에서 홀로 살아가게 하는 고립형을 내린 이유였다.
그렇게 그녀는 지난 23년 동안을 홀로 외진 곳에서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한 채 홀로 있게 된 이유였다.
그렇게 홀로 외딴 곳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가혹한 운명에 처해야 했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을 지금까지 반성해 오고 있었다.
아울러 자신이 버렸던 자신의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나도 궁금하고 또 죄스러워 이렇게 날마다 이곳에 나와 걱정하며 사죄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상 영혼의 부름이라는 주술은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절함.
자신의 영혼마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그러한 간절함과 절실함이 영혼의 부름이라는 전설로만 존재하는 주술이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해가 질 때까지 자신이 버린 아들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조용한 몸부림을 치는 유르스나르와 그런 그녀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알마리온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
이미 전부터 자신의 뒤로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자신이란 존재를 어머니인 유르스나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따라온다면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게 하겠소?”
속삭이듯 말하는 미지의 존재의 말에 알마리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묻겠소. 인간인 그대가 이곳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던 것이오?”
유르스나르가 있던 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이동하자 알마리온의 등 뒤에 서 있던 자의 차분한, 하지만 확실히 경계하고 있는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찾는 분이 계셔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알마리온은 솔직하게 말하였다. 굳이 이들을 속일 이유도, 그리고 이들과 충돌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만들 필요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인간인 그대를 이곳까지 부른 이가 있을 수 없소!”
“확신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설마?”
알마리온의 말에 무엇인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는지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엘프에게서는 놀람의 당혹성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대가…….”
“…….”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은 유르스나르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 잠시 나와 함께 가 주겠소?”
“그러겠습니다.”
일족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는 말에 알마리온은 순순히 응했다.
초록 일족의 마을은 유르스나르가 있는 곳에서 제법 먼 곳에 있어 봉우리 하나를 넘어가야 했다.
조용하기만 하던 초록 일족의 마을은 알마리온이 등장하자 조용한 가운데서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것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나 다르지 않아 엘프 아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마을로 들어서는 알마리온을 숨어 지켜보았고,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를 바라보며 뭐라 속삭이거나 하면서 잔뜩 그를 경계하였다.
특히 알마리온에게 느껴지는 기운이 예사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 엘프들은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그를 경계하기에 주의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일족의 전사들 몇몇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그를 포위하듯 자리 잡고는 함께 움직였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마을 중심으로 그를 데려간 자는 그제야 처음으로 알마리온의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미 마을에 들어서면서 다른 엘프들을 보았기에 이들 모두가 소문처럼 인간에게서는 볼 수 없는 극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자신을 제압한 사내의 경우에는 그 아름다움이 특히 더해 사내인 알마리온조차도 저도 모르게 잠시 가슴이 울렁거렸을 정도였다.
“…….”
아마도 그가 들어간 아담한 건물은 아마도 이들 일족의 지도자가 사는 곳 같았다.
그렇게 잠시 호기심과 경계심으로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불편함을 감수하자 자신을 제압하였던 그 엘프와 또 다른 한 명의 여성 엘프가 밖으로 나왔다.
한데 여인의 모습은 일견하기에도 유르스나르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걸로 보아 밖으로 나온 엘프와 유르스나르가 최소한 같은 혈통을 지닌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대장로님을 뵈옵니다.”
그녀가 나타나자 모든 엘프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대장로라는 직위는 인간세계에 있어서는 왕이나 영주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이러한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들 엘프들은 장로라는 직위가 있는데, 이 직위는 대장로의 경우와는 달리 승계되는 것이 아니라 일족의 어른들 중 선출을 통해 뽑히는 자리였다.
“으음…….”
모든 일족의 엘프들이 예를 표했지만 여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처음부터 알마리온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알마리온과 같은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비단 눈동자만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은 어느새 잔떨림에서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알마리온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탁을 한 알마리온이었다. 외가 쪽, 그중에서도 모계의 모계 쪽을 많이 닮은 그였기에 모두가 한번 보아도 그가 누구의 혈통을 이은 것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하나 관심을 가지고 두 조손을 바라보았다.
“다들 제 할 일들 하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인가?”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두 조손을 바라보고 서 있자 또 다른 이가 그런 일족의 엘프들에게 나무라듯 말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이들 마을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라오니다스란 장로로 대장로인 살라미스 또한 그에게는 늘 한발 양보를 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의 일침에 모두 황급히 자리를 떠나자 라오니다스는 알마리온과 마주 서더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 하더니 널 보니 딱 그 말이 맞구나.”
“…….”
“허허, 웃는 모습도 제 어미의 어렸을 때 모습을 그대로 닮았구나. 자! 먼 길을 왔을 테니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편안해 알마리온 또한 단번에 긴장을 풀고 대답하였다.
“예, 어르신.”
“대장로도 들어가십시다.”
“예…….”
안으로 들어가자 매우 단출하여 필수적으로 필요한 가구가 아닌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데 이들 세 사람이 막 자리에 앉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또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뒤늦게 나타난 이는 살라미스의 두 딸 중 유르스나르의 동생인 테모스테네스였다. 그러니까 알마리온에게는 이모가 되는 이였다.
“허허. 테네스도 왔구나. 자! 뭘 하느냐? 어서 자리에 앉지 않고?”
분명 오늘 처음으로 보는 조카였지만 테네스는 알마리온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훗!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군.’
구태여 주술사로서의 능력을 쓰지 않아도 상대가 자신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쯧! 어째 처음 보는 조카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냐?”
“장로님! 어째서 저 사람이 내 조카라는 것입니까?”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한 겹 얼음이 껴 있는 듯 차갑기만 한 인상과 눈빛이었다.
“허허. 그건 네가 거부할 수 없는 것임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리고 널 올려다보는 것도 힘드니 어서 자리에 앉거라.”
살라미스의 집이었지만 마치 그가 집주인인 양 행동하는 라오니다스였다. 하나 누구도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알마리온…… 알마리온입니다.”
이들에게 구태여 자신의 정식 이름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었다. 성이나 작위 같은 것은 이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이름이구나.”
“감사합니다.”
“허허. 대장로께서는 어찌 아무 말씀도 없으신 것이오? 처음으로 외손자를 보는 것인데 말이오?”
외손자라는 말에 기어코 살라미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아…… 알마리온이라 했니?”
“예.”
“내가…… 내가 누구인지 알겠니?”
“…….”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애잔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머뭇거리는 살라미스가 자신의 외조모임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또한 쌓인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허허. 네가 쌓인 것이 많은가 보구나.”
“…….”
“그래, 그렇겠지.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말이다, 네 외조모는 널 찾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하였단다.”
“……?”
이후 라오니다스의 말은 알마리온의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은 풀려질 수밖에 없었다.
유르스나르가 갓 태어난 알마리온을 처음 눈에 띈 인가에 버리고 복귀한 후, 그녀에 대한 문제를 처리한 살라미스는 라오니다스와 함께 일족의 전사 몇몇을 대동하고 인간 세상으로 나왔다.
바로 딸인 유르스나르가 버린 자신의 외손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나 이들 일행이 알마리온을 버린 인가를 찾았을 때는 이미 그곳에 살던 이들이 어디론가 떠난 후였던 것이다.
알마리온을 발견한 그 집의 주인은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알마리온을 곧바로 노예 상인에게 비싼 값으로 판 후 그 돈으로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렸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인간이었다면 로엔달처럼 어찌어찌하여 찾을 수 있었겠지만, 이들은 근 반년 가까이 주변 지역을 샅샅이 찾아보아도 알마리온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자 결국 포기하고 다시금 돌아왔던 것이다.
“하니 너무 네 외조모를 원망하지 말거라. 그때 네 외조모는 널 찾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느라 한동안 병이 생겨 자리에 누웠을 정도였단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또 그 말로 인해 그동안 가졌던 불편한 마음이 어느 정도 가심을 느꼈지만 그래도 이내 모든 것이 바뀌진 않았다.
“후…… 그래. 너도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여전히 무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알마리온을 보면서 살라미스가 자조적으로 말하였다.
하긴 눈으로 보아도 알마리온의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나 있었으니 그가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지……?”
“예…….”
집 안으로 들어온 후 처음으로 알마리온이 말문을 열었다.
“내 새끼…… 미안하다…… 미안해…… 이 할미가 미안하다…… 흑흑흑!”
알마리온이 처음으로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하여 주자 살라미스는 그동안 참고 있던 감정의 둑을 모두 무너뜨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알마리온의 몸을 덥석 품에 안았다.
“…….”
그런 살라미스의 행동에 잠시 당황하던 알마리온은 할머니의 품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포근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채 몸의 긴장을 풀고 그녀의 품에 안겨 들었다.
“허허…….”
그 모습에 라오니다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나 알마리온의 이모인 테모스테네스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과 표정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조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두 조손은 상반된 감정을 가진 두 엘프의 시선 속에서 한참을 안은 채 그간 서로 나누지 못한 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