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로의 고민 (55/70)

레드로의 고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왜 어머님을 만난 것입니까?”

레드로는 외가에서 온 외사촌 형님인 아담 캠벨로부터 언짢은 소식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었지만 이제는 형수가 된 베라가 어머니인 이멜다를 만났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말씀을 못 하시는 것입니까?”

머뭇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아담의 행동에 레드로가 짜증스레 반응하였다.

“그들이 네 조카를 의심하고 있더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담의 말이 레드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조카라면 자신의 이복형인 하알란과 베라 사이에 태어난 카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한데 이제 세 살인 카일을 하알란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레드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그는 이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설마…….”

“후후…… 그 설마가 맞다. 고모님께서는 말도 되지 않는 억지라고 하셨지만…….”

쾅!

“어떻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그래. 말도 되지 않는 억지지.”

“한데 왜 그녀가 어머니를 만난 것입니까?”

“후후…… 더 기가 막힌 일이 무엇인지 아냐? 당사자인 네 형수라는 여인이 고모님을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네 핏줄이 맞다고 하더구나.”

“……!”

아담의 말에 레드로는 한동안 어이없어하더니 이내 분노가 일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만큼은 절대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한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절대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네 형수의 친정인 오드란 남작 가문에서도 이번 일을 결코 묵과할 수 없다고 하더구나.”

“묵과할 수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네 형수란 여자가 뭐라 했는지 아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내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올 지경이다.”

아담의 행동에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있은 것인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글쎄…… 그녀가…… 내 참. 정말 입이 더러워질까 봐 말을 못 하겠네.”

“형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예?”

“글쎄 그녀가 말하길, 네 그 잘난 형 놈과 자신이 결혼하기 직전에 자기를 강간했다고 하더구나. 네가 말이다. 내 참…….”

“어떻게…….”

“그 일로 인해 지금 고모님은 물론 할아버님께서도 아예 자리에 누우셨다.”

“아…….”

계속되는 아담의 말에 레드로는 결국 그 충격으로 인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녕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가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레드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때 진심으로 사랑을 한 사이였다면 결코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냐? 네가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안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요?”

“귀족원에 정식으로 제소를 하겠다고 하더구나.”

“후후. 결국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군요?”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협박을 한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레드로에게 주어진 영지를 빼앗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킴으로써 그를 귀족들 사이에서 아예 매장을 시켜 버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가 가문을 이탈한 그 순간부터 더글러스 후작 가문은 그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더글러스 후작 가문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레드로와 그의 어머니인 이멜다 그리고 그의 외가인 캠벨 자작가문을 협박하고, 음해해 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지금과 같은 진흙탕 싸움은 걸어오지 않았기에 참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레드로 또한 결코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외가의 명예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명예까지 더럽히려 하는 저들의 행태에 대해서 이번만큼은 결코 참을 수가 없었다.

“제소하라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시오. 아니, 저들이 귀족원에 제소하기 전에 제가 먼저 제소하도록 하겠습니다.”

“너 왜 그래? 이건 그렇게 흥분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 그래?”

“형님께서는 지금 제가 흥분해서 이러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럼 지금 네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이지?”

“형님, 어차피 저들은 제가 항복을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매장되지 않는 한 결코 이런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으음…….”

레드로의 말처럼 저들이 진흙탕 싸움을 걸어온 이상 분명하게 대처하지 않을 경우 레드로는 일방적인 패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하나 자칫 영지전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아담이, 아니 레드로의 외조부인 캠벨 자작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서로가 대화나 협의점을 찾지 못하였을 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영지전은 오랜 전통 중 하나였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영지전은 포넬과의 전쟁이 벌어지기 불과 한 달 전쯤에 있었다. 그만큼 영지전은 서로가 풀지 못한 오해나 대립을 푸는 가장 오랜 관습 중의 하나였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너의 상황으로 더글러스 후작 가문과 오드란 남작 가문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결과는 중요치 않습니다.”

“아니. 결과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하기 때문임을 너도 잘 알 것이다.”

세상은 패자의 역사가 아니라 승자의 역사로만 쓰여 간다. 패자가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결국 승자에 의해 패자의 역사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리게 된다.

“네가 주변에 아무리 강한 친구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영지전이 결정되면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귀족원의 결정에 따라 영지전이 선포되면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것이 전통이자 규칙이었다.

이는 인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물적, 금전적 지원 또한 철저하게, 자칫 영지전이 장기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넌 네 아버지를 상대로 해야 함을 잊은 거냐?”

“…….”

“그것이 고모님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이라는 것은 너도 잘 알 것이다.”

지금도 더글러스 후작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끊어 내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자 레드로는 마음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말로는 이제 정말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지만 레드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도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혼인의 증표인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늘 목에 걸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까지 참았던 것입니다.”

“…….”

“그분이…… 아니, 그가 제 아버지이기 때문에 참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계시는 어머니 때문에 참아 왔던 것입니다!”

“안다. 하지만…….”

“형님, 제가 가문을 나오기로 결정한 날. 폐하를 알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폐하께서는 제게 이런 것을 물으신 적이 있으십니다.”

“…….”

“만약에…… 폐하와 아버지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오게 될 경우 누구를 선택하겠냐고 말입니다.”

“으음…….”

“그때 전 폐하께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온다면 그땐 서슴없이 폐하를 선택하겠다고 말입니다.”

낮게, 으르렁거리듯 읊조리는 레드로였다. 하나 그것은 자신의 외사촌 형님인 아담에게 한 말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사실 레드로 자신도 확실하게 부자의 연을 끊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가 어머니를 이유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도 그 자신 또한 자신의 어머니처럼 미련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지금은 같은 상황이 아니지 않느냐? 게다가…… 넌 어떨지 몰라도 고모님께서는 결코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실 것이다.”

아담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레드로는 다시 한 번 아득해졌다.

바닥이 없는, 그래서 한번 빠지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만나 보게 되어 반갑소.”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백작 각하. 조금 전에 소개 받은 윌리엄 호르헤라고 합니다.”

“그대에 대한 이야기는 안드라스에게서 들었소. 매우 뛰어난 인재라고 말이오.”

“하하, 저 친구가 말씀이십니까? 저 친구라면 저에 대해서 결코 좋은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후훗! 내게 그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가 그댈 인정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소?”

“하하.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이름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외모였지만, 최소한 그 외모와 하는 행동만큼은 같아 보였다.

안드라스가 무엇인가 뒤틀린 사람처럼 냉소적인 면이 보인다면 윌리엄은 그 털털하게 생긴 외모처럼 털털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하나 순간순간 번뜩거리며 빛나는 눈빛만큼은 그가 결코 외모처럼 털털하기만 한 사람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로 하여금 발락 기사단을 지휘케 한 이유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공작 전하.”

“그런가?”

베르그 공작은 내심 알마리온이 직접 발락 기사단을 지휘하며 제국에 남아 있기를 바랐지만 지금 그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나 발락 기사단을 파크 폰 가르시아 남작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자에게 맡겼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발락 기사단의 단장 자리를 다른, 그리고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알마리온에게 말을 꺼냈지만 이를 단번에 거절하였다.

아니, 실상 발락 기사단은 발락 공작 가문의 소속이었으니 이를 가지고 베르그 공작이 왈가왈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아니,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베르그가 이처럼 간섭을 하는 이유는 그가 발락 공작 가문, 아니 알마리온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제국 내에서는 알마리온을 베르그 측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굳이 베르그의 은밀한 공작이 있어서 그리된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알마리온이라는 노예 출신에다 제국이 아닌 왕국 출신을 제국의 정식 귀족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알마리온은 베르그가 건네는 여러 가지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이러한 세인들의 시각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이처럼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서 자신을, 그리고 비록 자신이 책임지고 있지만 엄연히 자신의 것도 아닌 카산느 공주의 것을 그가 마음대로 휘두르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라면 충분히 제국의 방패가 되고 칼이 되어 제국의 안전을 분명하게 책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흠…… 자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알겠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하면 발락 기사단을 언제부터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인가?”

날로 가중되고 있는 용맹한영혼의 압박에 제국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재상인 베르그는 더 많은, 그리고 더 강한 창과 방패를 얻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나 이제 결성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발락 기사단 전체를 실전에 투입하기는 무리였다.

“50명으로 구성된 1개 대隊는 4∼5개월 후면 실전에 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락 기사단은 총 5개 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각기 블랙black, 화이트white, 블루blue, 레드red, 옐로우yellow라는 색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이 5개의 대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50명으로 구성된 대가 바로 블랙 기사대였고, 이들은 이미 언제든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기사가 될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기사가 되지 못하였을 뿐인 자들이었다.

그러했기에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사로서 제 몫을 충분히 할 정도였다.

이를 잘 알면서도 알마리온은 이들에게 4∼5개월이라는 여유를 더 주었다. 이제 막 제대로 말을 갖추기 시작한 기사단이었기에 충분히 기사들과 그들이 사용할 말들이 서로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였다.

이것도 알마리온에게나 블랙 기사대에는 상당한 여유를 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제3자인 베르그에게는 겨우 1년 만에 기사 50명을 충분히 실전에 배치할 수 있다는 알마리온의 말이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

‘한 명의 제대로 된 기사들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기간이 최소 10년이다. 그런데 어떻게 단 1년 남짓으로?’

전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통상적으로 10년이 넘게 걸리는 것을 어찌 단 1년 만에 기사를 육성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여기에는 두 사람의 인식 차이가 있었다. 베르그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한 명의 제대로 된 기사를 육성하는 데는 10년의 시간도 짧다.

하나 오직 전투에서 필요한 강인한 전투력만을 갖춘 기사라면 그것을 육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태생적으로 기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이라면 말이다.

이처럼 베르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의 기사를, 그리고 알마리온은 최단기간 내에 전장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최강의 전사들을 가진 기사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갭gap이 상당했다.

베르그의 표정에서 그런 차이를 감지한 알마리온은 아무래도 그에게 발락 기사단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발락 기사단은 공작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기사단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그들은 오직 전장에서 최강의 전투력을 갖도록 훈련받은 자들입니다.”

“그럼 자네 말은……?”

“그렇습니다. 그들을 일반적인 기사로 생각하신다면 그들을 보셨을 때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 전장에서 그들을 본다면 공작 전하께서는 언제나 그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그 정도인가?”

다른 이도 아니고 검의 주인인 그나이제나우에게 훈련받고 사람을 괴롭히는 듯하면서도 극한의 상황을 체험하였던 이답게 전투형 병사들을 만듦에 있어서는 이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요들이 조련한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지난 1년 가까이 받은 훈련의 양은 일반적인 기사들이 10년 동안 받은 훈련의 양보다 오히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또한 매일 이어지는 훈련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전장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치러졌기 때문에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도 모른 채 완벽하게 전장에 적합한 자들이 되어 버렸다.

“그렇습니다.”

“기대되는군.”

“실망하실 일은 없으실 것입니다.”

이후 알마리온은 베르그와 함께 나머지 발락 기사단 중 총 3개 대를 타르탄 성의 게이트 후작 휘하에 두기로 결정하는 등 몇 가지 의견을 더 조율하였다.

“…….”

아무런 표정 없는 카산느였지만 그녀를 늘 곁에서 보필해 온 앨리나는 지금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공주님.”

“수고하셨어요. 그럼 끝인가요?”

“예, 공주님.”

“하면 난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카산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한데 알마리온이 막 공주의 저택을 나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달리듯 빠른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온 앨리나가 알마리온을 붙잡았다.

“후작님! 잠시만요. 잠시만 저와 이야길 나누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부인?”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후작님.”

결국 알마리온은 말에서 내려 다시금 앨리나와 함께 응접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저…….”

막상 알마리온을 다급히 붙잡기는 하였지만 앨리나는 자신이 과연 잘하는 행동인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이 가져올 파장을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머뭇거리는 것이다.

“공주님 신상에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제대로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공주님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부인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차분하였지만 그의 말에는 거역하기 힘든 힘이 담겨 있었다.

“실은…….”

앨리나는 그 견디기 힘든 힘에 굴복하며 어렵게 말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프랑크 황태자가 공주님을……?”

차마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제국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알마리온이었지만 제국의 황태자가 카산느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들을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결정적인 사건은 없었지만 이제 공주님께서는 더 이상 버티실 힘이…….”

“흠…… 일단 공주님을 영지로 돌아가시게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공주님께서는 크게 안정을 취하실 수는 있겠지만…….”

이왕이면 왕국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마리온이 모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과 왕국 사이에 조정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그 문제는 생각보다 선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부인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

“하여 지금 당장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 일단 공주님의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 가능한 공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알마리온이 힘을 써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나의 표정은 썩 밝지가 않았다.

‘공주님께서 진정 원하는 것은…….’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럼 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다면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가 그런 요청을 하였단 말입니까?”

“그렇사옵니다, 황태자 전하.”

카산느 공주의 귀국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프랑크는 단숨에 재상부에 달려온 프랑크는 따지듯 왜 그런 일이 갑자기 추진되고 있는 것인지를 물었다.

“그가 갑자기 왜 그녀를 귀국시키려 하는 것입니까?”

“후…… 전하, 정녕 그 이유를 몰라서 물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베르그의 말에 프랑크는 내심 뜨끔해졌다.

“전하,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명목상 그녀가 내 아우의 부인이 되긴 하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지 않았소?”

“그 말씀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것인지 전하께서는 정녕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억지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번 빠져들기 시작한 마음은 그런 억지를 주저함이 없어지게 만들 정도로 강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전하!”

“후…… 미안합니다. 하지만…….”

모르면 모를까. 베르그는 이번 기회에 분명히 못을 박아 두는 것이 좋겠단 생각을 하였다.

지금은 제국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때였다. 이러한 때에 짐짓 왕국은 물론 제국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 주며 또한 큰 성과를 내고 있는 알마리온을 자극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전하의 마음이 어떤지 지금 보이신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전하의 위치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 이러한 그의 행동이 오히려 프랑크를 자극하여 버리고 말았다. 황태자로서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것이 없는 그에게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도 같은 일이었다.

‘감히! 좋아. 그대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또 하나의 암울한 운명의 굴곡은 이렇게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이다.”

“그래. 그간 잘 지냈나?”

서로의 일들이 바빠 1년 넘게 한두 차례 서신만 주고받았을 뿐 오랜만에 만나게 된 알마리온과 레드로는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은 채 반가움을 나누고 있었다.

“나야 뭐……. 그나저나 참 대단하더군. 자네 이야기는 이곳에서도 모두가 칭송하고 있다네.”

“훗! 기회가 닿는다면 자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후후……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런 기회가 내게 주어질 수 있을까?’

알마리온의 말에 레드로는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미소를 짓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의 그의 심정은 그저 암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많이 힘들어하고 있구나.’

레드로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런 친구의 어려움이 그대로 전해져 오자 알마리온의 마음 또한 무거워졌다.

“우리…… 대련 한번 하지 않겠나?”

“대련을? 자네와 말인가?”

알마리온은 지금 이 상태로 레드로가 더 마음속에 울분을 쌓으면 크게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것 같은 느낌을 받자, 과거 리처드가 그러했듯이 그동안 가슴에 쌓인 모든 것을 털어 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어 제안하였다.

“갑자기 무슨 대련을 하자는 것인가?”

“그냥 자네 실력이 솔직히 궁금해서 말이네. 우리 아직 한 번도 대련을 해 본 적 없었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크게 놀랐던 일이 있었다.

지금의 알마리온은 레드로의 능력을 월등히 뛰어넘어 굳이 그와 대련을 하지 않아도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목적이 그것이 아니었기에 그로 하여금 대련에 응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알겠네. 그렇게 하지. 나도 솔직히 자네 실력이 궁금하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야.”

“그럼 1시간 후쯤에 보도록 하지. 어디 조용한 데 알고 있나?”

“성의 지하에 개인 수련장이 있네. 그곳이라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네.”

“그래? 잘됐군. 그럼 1시간 후에 그곳에서 보도록 하세.”

“그렇게 하지.”

1시간 후. 두 사람은 개인 수련장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긴장되는군.”

“나도 그렇네.”

사실 알마리온은 전혀 긴장되지 않았지만 레드로의 자존심을 위해 짐짓 긴장된다는 듯 행동하였다.

“그럼 시작할까?”

“그러지.”

두 사람이 사용하는 검은 날이 없는 대련용 검이었지만 익스퍼트에게 있어 이런 제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

챙!

검을 잠시 맞댄 후 각자 두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서로 검을 들어 상대를 겨누며 자세를 잡았다. 하나 상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레드로는 쉽사리 공격해 오지 않았다. 결국 먼저 공격해 들어간 것은 알마리온이었다.

챙! 채챙! 챙! 챙!

순식간에 검을 나누었던 두 사람이 잠시 몸을 떨어뜨렸다가 이내 다시금 뜨거운 검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나 시간이 흘렀는지 레드로는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갖는 같은 익스퍼트와의 대련이었기에 신중하기만 하던 레드로는 이제 더 이상 신중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더욱 끌어내는 알마리온의 의도에 레드로는 빠져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팡! 파팡! 팡! 팡!

두 사람은 어느새 익스퍼트의 전유물인 마나를 사용한 검술을 펼쳤고 그 기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흉험해졌다.

‘재미있다!’

어느 순간 레드로는 지금의 이 대련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얍!”

팡! 파앙! 파아아앙!

“웃!”

처음부터 검을 익힌 것이 아니었기에 순수한 검술에 있어서는 레드로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알마리온이었다.

하나 그동안 리처드와 그나이제나우 등과 대련을 해 오면서 많은 것을 깨달은 그였기에 이제는 순수한 검술에 있어서도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레드로의 검이 때에 따라 불필요한 멋이 담겨 있었다면, 알마리온의 검은 철저하게 실전 위주의 검이었다.

레드로는 정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수련한 검술에 맞춰 몸을 움직였지만 이제는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검을 움직였다.

“좋아!”

그런 레드로의 변화에 알마리온 또한 저도 모르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검과 검이 어우러지면서 레드로는 자신의 마음이 점차 가벼워짐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런 느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더 검에 집중하였다.

‘좋아! 그렇게 마음을 비워 나가는 거다, 친구. 그렇게 마음을 비우다 보면 어느덧 새로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야!’

무엇인가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걸 잘 알기에 알마리온은 레드로가 그동안 자신을 가두어 두었던 모든 것을 벗어날 수 있도록 그를 더욱더 몰아갔다.

“으아! 으아아아!”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지르며 광폭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는 레드로였다.

하나 그런 광폭함은 흉성이 폭발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위한 산고産苦였다.

‘좀 더! 좀 더!’

여전히 차분한 시선으로 레드로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알마리온은 그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친구인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해 주기 위해 더욱 그를 자극하였다.

어느 한순간.

레드로의 입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온전한 해방감을 느낀 자만이 낼 수 있는 환희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속박束縛에서 벗어난 레드로의 표정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며 환희의 여운을 한껏 즐기기 시작했다.

“축하하네, 친구.”

“자네…….”

레드로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그 순간부터 한동안 그가 온전히 자유의 의지를 가질 때까지 곁을 지켜 주었던 알마리온이 따뜻한 축하의 말을 건네자 레드로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그제야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친구인 알마리온이 어떤 경지에 도달한 상태인지를.

“고마우이, 친구.”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네, 친구.”

“난 자네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잖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번에도 또다시 자네에게 너무나도 큰 것을 받게 되는군.”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인해 영지를 받았다. 하나 그의 영지는 너무나도 가난했다. 그런 영지를 처음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준 이가 바로 알마리온이었다.

한데 이번에는 자신에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층 높은 경지에 올라설 수 있게 해 준 친구의 배려에 레드로는 무엇으로 이를 갚아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결국 제법 긴 시간을 홀로 고민하던 레드로는 자신을 친구인 알마리온에게 주는 것만이 자신이 그동안 알마리온에게 받은 많은 것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금전적인 것은 몰라도 자신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여 준 것.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한 단계 더 높은 세상으로 안내를 해 준 것만으로도 그는 기꺼이 자신을 친구인 알마리온에게 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날…… 날 자네의 수하로 받아 주게.”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만약 자네의 그 무릎이 그대로 굽혀지는 그 순간, 난 자넬 죽일 것이네.”

“하지만…….”

“조금 전 자네가 맛보았던 그것을 자네는 벌써 잊었는가?”

알마리온의 말에 레드로는 다시 한 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 전에 그가 맛보았던 것.

그것은 모든 속박의 굴레에서 완벽히 벗어난 온전한 해방감의 희열이었다. 한데 그 희열이 미처 다 가시기도 전에 레드로는 또다시 자신을 속박하려 들고 있었던 것이다.

“훗! 나에게 철면피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인가?”

“그래서 친구가 좋은 것 아니겠나?”

“하하하하! 그렇군! 자네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네. 친구! 그래, 그래서 친구가 좋은 것이겠지. 하하하하하!”

참으로 통쾌했다. 그리고 이런 친구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좋아. 자네의 호의 받아들이지. 그리고 자네 말처럼 철면피가 되도록 하지. 하지만 말이네…… 자네도 내 호의를 받아들여야 해. 왜냐고? 난 말이네, 빚을 지고는 못 살거든.”

“훗! 자존심만 높아 가지고서는…… 그래, 뭔가? 자네가 내게 베풀려고 하는 호의는?”

“나의 영지를 주겠네.”

“자네?”

“아니, 내 말을 마저 듣게. 내가 호의라고 말하였지만 사실 그건 내가 편하자고 하는 행동이네. 자네가 아직 모르겠지만 난…….”

레드로는 그동안 자신의 신변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일들에 대해 알마리온에게 그대로 털어놓았다.

특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지를 빼앗기 위해 자신의 친부와 이복형이 그리고 오드란 남작 가문이 며느리와 아내 그리고 딸까지 동원하여 어떤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도 모두 털어놓았다.

“으음…… 그런 일들이 있었군. 자네가 마음고생이 많았겠군.”

“후후. 이르다 뿐인가? 솔직히 난 오늘 자네가 날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자결을 할 생각이었네.”

그랬다.

레드로는 만약 자신의 본가와 오드란 남작 가문에서 자신을 정식으로 귀족원에 제소를 할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이러한 일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

“후후. 자네가 미안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친구란 내가 자네에게 단 한 번도 위안이 되어 주질 못하였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하. 그래도 결국 친구인 자네 덕분에 그동안 날 괴롭혔던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

“어쨌든 내 영지를 이제부터 자네가 맡아 주게.”

“지금의 자네라면 충분히 자네 자신은 물론, 자네가 돌봐야 할 많은 이들을 지켜 낼 수 있지 않은가?”

“맞네.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네. 하지만 말이네…… 난 그러고 싶지 않네.”

레드로는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그리고 친부와 비록 다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계이긴 하지만 형인 하알란, 그리고 한때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했지만 이제는 형수가 되어 버린 베라와 그녀의 친가, 그리고 자신에게는 조카가 되는 카일까지 상처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냥 왕실에 반환하면 되지 않겠나?”

“글쎄. 그건 그냥 자네가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게.”

“그러지.”

더 이상의 영지 같은 것은 알마리온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알마리온은 레드로의 영지를 다시 왕실에 반납할 생각을 하였다.

“또한 난 나의 작위도 반납할 것이네.”

“떠날 생각이군.”

“그래. 난 떠날 것이네. 그동안 자네의 활동을 곰곰이 짚어 보니 자네 곧 리처드 형님의 원수를 갚을 계획인 것 같더군.”

레드로 또한 리처드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맞네.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면 곧바로 형님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네.”

“그렇다면 내 미리 가서 약간의 준비를 해 놓도록 하지.”

“자네가?”

“그래.”

레드로의 결심이 단단한 것임을 확인한 알마리온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알겠네. 형님께도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네.”

“한데 말이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게. 심심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알겠지?”

“하하하. 알겠네.”

“아! 그리고 자네 소렌토에 일단 들를 것이지?”

“그래야겠지. 못난 친구 때문에라도 말이야.”

어차피 레드로의 말을 들어주려면 왕도에 가서 처리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부탁하네. 평생을 불쌍하게 살아오신 분이네.”

“그러지.”

“고마우이.”

“알면 나중에 웃는 얼굴을 보여 주게.”

“하하하, 그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보여 줄 수 있지. 이렇게 말이네. 하하하하!”

“후훗! 좋군. 폰티악 후작을 찾아가도록 하게. 그분이라면 자넬 조용히 보내 주실 수 있을 것이네.”

“그러지. 그럼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

“그러지.”

그렇게 레드로는 모습을 감추었다. 당연히 그가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것도 모자라 작위와 영지까지 왕실에 반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일반 귀족이 이런 행동을 하여도 그 충격이 큰 일이었는데 하물며 왕국의 여덟 번째 익스퍼트이자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전쟁 영웅의 잠적은 왕국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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