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부에 이는 바람 (53/70)

동부에 이는 바람

“그러니까 그 두 곳을 왕실에 반환을 한다는 것인가?”

궁내부 장관인 에드윈 폰 함멜 자작은 사전 예고도 없이 왕궁을 찾아온 알마리온의 대리인인 요하네스의 전언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렇습니다, 자작님. 그곳은 원래 왕실의 땅. 그들이 왕국을 떠났으니 당연히 그 두 곳을 왕실에 반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왕국의 법이나 절차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많아 주군이신 혼테르 후작 각하께 그에 대한 모든 일을 위임하였습니다.”

“알겠네. 하나 이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하면 소관은 주군의 저택에 머물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요하네스가 궁정을 빠져나가자 에드윈은 곧바로 도르첸을 찾아갔다.

“그 말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조금 전 후작의 대리인이 소관을 찾아와 그들 두 부족이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따라서 왕실 직영지를 반납하고 싶어 한다고 전하였습니다.”

“흠…… 그들이 자신들의 영토로 돌아간다? 하면 이미 혼테르 후작이 그 지역을 장악했다는 뜻이겠군.”

“그렇습니다. 아마도 후작이 귀국 후, 봄이 되자마자 곧바로 행동에 옮긴 것 같습니다.”

“하면 그가 영지군을 움직였다는 것인가? 아니면 북동군이라도 동원한 것인가?”

영지군을 움직였다면 모를까 북동군이라면 왕실의 허락이 있지 않은 경우, 방어를 위한 동원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군을 동원했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하나 더 놀라운 이야기가 에드윈에게서 나왔다.

“혼테르 후작은 영지군도, 그렇다고 북동군도 동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북동군도 영지군도 동원하지 않았다니? 하면 그가 혼자서 게르혼족들을 물리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에드윈은 요하네스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을 도르첸에게 그대로 전하기 시작하였다.

“으음…… 하면 그가 이미 칸이 되었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전하.”

에드윈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도르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가 이처럼 심각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알마리온이나 로엔달, 폰티악과 같은 이들의 힘이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날로 강해져만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틀로 보아서는 모두 한통속이었지만 그 한통속 속에는 또 다른 여러 잔가지가 나뉘어 있었다.

그중 도르첸은 에드윈은 그동안 국왕인 메르타니온의 최고 핵심 측근으로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 왔지만 이제는 점차 밀려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나 포넬과의 전쟁 이후 이들은 여전히 정체되어 있는 반면 과거에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던 존재들이었던 자들은 지금 모두가 왕국 최고의 전쟁 영웅이 되어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특히 알마리온과 폰티악, 로엔달의 급성장은 정적들은 물론 같은 편에서조차 심한 경계심을 가질 정도였다.

“수까지 읽을 줄 안다 이것인가?”

굳이 질문을 한 것이 아닌 혼잣말이었기에 에드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그리고 그 비천한 출신인 애송이가 힘과 꾀를 모두 가지고 있다니.’

알마리온이란 존재를 대하면 대할수록 도르첸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재상이자 정적인 프리모 공작 또한 그러했다.

그동안 보아 온 알마리온이란 존재는 ‘때’를 잘 파악하는 것이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그리고 머물러야 할 때, 욕심을 내거나 욕심을 버려야 할 때를 잘 안다는 것은 그만큼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저들이 그 두 곳을 반환하려 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않겠는가?”

“하나 그 두 곳은 저들 게르혼족이 떠나고 나면 당분간 또다시 비워 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그곳으로 이주시킬 백성이 없습니다.”

“그건…….”

전쟁으로 인해 갑자기 많은 인구가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어느 곳이든 줄어든 인구로 고생하지 않는 곳들이 없었다.

“그동안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 두 곳은 지난 몇 년 동안 지속적인 몬스터 토벌로 이제는 사람들이 살아갈 충분한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 그 두 곳을 비워 두게 되면 또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도 알고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지 않은가? 지금으로써 최선의 방법은 일단 그 두 곳 모두 후작에게 위탁하여 돌보게 하는 방법이네. 아니면 방치를 할 수밖에 없네.”

어차피 알마리온은 국경 지역에 있는 일곱 곳 성의 성주이자 또한 동북군 사령관이란 지위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게르혼족이 떠나고 빌 두 곳 또한 그가 관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였다.

“괜히 머뭇거리다가는 그 두 곳을 차지하기 위해 프리모 공작 측이 차지하기 위해 농간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니 일단은 그 두 곳의 반환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곳들을 혼테르 후작이 대신 관리하도록 조치를 취하게. 그 이후의 문제는 그 이후에 논의하도록 하고 말이네.”

“알겠습니다, 전하.”

에드윈이 나간 후 폰티악은 곧바로 국왕인 메르타니온을 알현하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향하였다. 조금이라도 지체를 하여 프리모 공작이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면 보나마나 이를 기회로 이 두 지역에 대해 손을 뻗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가 메르타니온의 집무실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프리모 공작이 메르타니온을 알현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부터 프리모 공작이 폐하와 독대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한 20분 정도 되었습니다, 전하. 일정에도 없이 갑자기 폐하께 독대를 요청하셨습니다.”

시종장인 제임스 폰 하셀 남작은 도르첸이 국왕의 곁에 심어 놓은 사람이었다.

“무슨 일로 그가 폐하께 독대를 신청하였는지 아는가?”

“죄송합니다. 몇 차례 오가면서 알아보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대화를 중단하여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흠…… 알겠네. 자네는 일단 내가 폐하를 알현하길 원한다고 전하도록 하게.”

“예, 전하.”

하나 예상외로 메르타니온 국왕과 프리모 공작의 독대는 길어져 거의 1시간 가까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국왕의 집무실을 나오는 프리모 공작의 표정에는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모습에 폰티악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께오서 접견을 허락하셨습니다, 전하.”

“알겠네.”

국왕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메르타니온 국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폰티악은 당연히 해야 할 예도 올리지 않은 채 조용히 한쪽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손짓으로 시종장인 제임스를 방에서 내보냈다.

이럴 때는 오히려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한 것임을 경험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휴…….”

한참을 고민하던 메르타니온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네가 찾아온 것을 보니 자네도 같은 이야기를 하러 온 것 같군.”

“혹 프리모 공작이 폐하께 게르혼족이 반환하겠다고 한 두 곳의 처리 문제를 거론하였던 것입니까?”

“훗! 비슷하지만 아니네.”

“그럼 무슨 일로 그가 폐하를 독대한 것이옵니까?”

“혼테르 후작이 짐을 대신하여 관리하는 일곱 곳의 성들에 적절한 성주를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

“하지만 그곳은 직영지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는 없는 곳입니다.”

“아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주장을 하였다는 것입니까?”

“그는 국경무역을 왕실이나 왕실이 인정한 몇 사람만이 독점하는 것을 문제 삼았네.”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이미 그 이득을 충분히 취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도르첸의 말처럼 이미 왕국의 모든 귀족들은 알마리온의 영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국경무역의 열매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그들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대가에 비하면 그 열매는 크고 또한 많았다.

하나 사람의 욕심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예 하나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일 때는 그 누구도 욕심내지 않았지만, 일단 하나를 갖게 됨으로써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했다.

그것은 분명 욕심이고 탐욕이었지만 때로는 그러한 욕심과 탐욕에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후, 당연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지. 하나 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들은 내게 거래를 제안하였네.”

“…….”

귀족 파벌이 거래를 제안하였다는 말에 도르첸은 조용히 메르타니온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한 가지 제약을 풀어 주겠다고 하였네.”

“제약이라니 어떤 제약을 말씀이시옵니까?”

“왕실 가족들에 대한 제약.”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실 가족들이 관리가 되거나 영지를 가질 수 없게 만든 제약을 풀어 주겠다고 하였네. 대신 그들은 모든 국경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과 국경 지역의 열여섯 곳의 성들 중 여덟 곳의 성주를 자신들 측 사람들에게 내어 달라고 하였네.”

“으음…….”

메르타니온의 말을 들은 도르첸은 순간 가슴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하였다. 왕실 가족이었기에 그동안 지닌바 재주가 비상하였어도 관리가 될 수 없었으며, 아울러 영지 또한 받을 수 없었다.

허울뿐인 귀족이라는 명목으로 살아갈 저택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연금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리저리 나뉘어 결국 왕실의 혈통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처럼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한데 그러한 속박을 풀어 주겠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크게 기뻐하고 또한 흥분되는 일이었다. 하나 그의 표정만큼은 일절 변화가 없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기쁨을 애써 외면한 채, 그로 인해 왕실, 아니 국왕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였는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하오나 폐하, 그러한 조건이라면 자칫 저들에게 더 큰 힘을 주게 될 것이옵니다.”

전쟁 중이거나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당연히 군을 지휘하거나 하였던 자들이 득세를 하기 마련이었다.

하나 그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들은 자연스럽게 또다시 도태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프리모 공작을 비롯한 귀족 파벌은 구태여 진흙탕 싸움이라고도 하는 논공행상에서 최대한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끝까지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힘의 균형이 너무 크게 기울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동안 참았던 그들의 역공이 다시금 시작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신호탄은 바로 자금줄이었다.

권력은 사람을 부리지만 금력은 사람과 권력 모두를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니, 죽은 자까지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금력이었다.

프리모를 비롯한 귀족 파벌은 국경무역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였고, 굳이 직접 듣지 않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부를 더하기 위해 왕실에 쥐꼬리만 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왕실 가족들에 대한 금제를 풀어 준다는 제안 또한 결국 자신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왕실의 힘을 더욱 분산시키기 위함이옵니다.”

“나도 알고 있다네.”

왕실 가족들에 가해져 있던 금제를 풀어 주게 되면 왕궁을 떠나야만 하는 왕실 가족들은 정식으로 영지를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왕국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그동안 궁을 떠나야만 했던 왕실 가족들에게 지급하던 연금을 더 이상 지급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또한 영지라는 것이 무한정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결국 직영지를 나누고 또 나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취한다 하더라도 결국 왕실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것을 내주어야 했으니 결과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하온데 어찌 그들의 그러한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이신 것이옵니까?”

“터무니없는 제안이라…… 글쎄. 그것은 아직 알 수 없는 일이겠지.”

메르타니온은 프리모의 제안이 반드시 왕실에 손해가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이번 거래를 통해 귀족 파벌이 상당히 많은 이득을 차지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일이니 실상 왕실이 전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저들은 분명 어느 정도 자신들의 이익을 속이겠지만 그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이익을 저들은 결코 왕국을 위해 내놓으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국경 지역이 모두 왕실 직영지인 이유. 그것은 단지 그곳이 쓸모없는 땅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영악하게도 국경 지역을 왕실의 직영지로 남겨 놓아 왕실로 하여금 국경을 방비하는 모든 책임과 의무를 떠넘기려 한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귀족들은 국경을 경비하는 병력을 중앙군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지휘하에 두기를 바랐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

물론 쥐꼬리만큼 부담금을 내놓기는 하였지만 그에 비해 그들이 주장하는 권리는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아마도 이번 전쟁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지자 스스로 그동안 주장해 왔던 권리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과거처럼 왕실만이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귀족들은 자신들이 내놓아야 할 몫은 최대한 줄여서, 아니 가능만 하다면 아예 내놓지 않으려 하면서도 자신들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최대한 늘리려 하였다.

‘어차피 왕국이 존재하는 한 왕실과 귀족들의 이러한 신경전은 끊임없이 이어질 일. 이번 거래가 과연 그대들의 의도대로 될지, 아니면 나의 의도대로 될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혹 다른 복안이라도 있으신 것이옵니까?”

“아니네.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을 뿐.”

“…….”

“한데 자넨 무슨 일인가?”

“게르혼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하옵니다.”

“그 두 부족들이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하면…….”

“혼테르 후작이 움직인 것 같사옵니다.”

“역시 젊군.”

지난가을 제국에서 귀국하였을 때 자신을 알현한 자리에서 알마리온은 준비가 되는 대로 행동을 개시할 것임을 보고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시작될 줄 알았던 일이 벌써 시작이 되었고 이미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말에, 메르타니온은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이란 존재에 대해 감탄하였다.

“그의 대리인이 두 곳을 왕실에 반환하기 위한 절차를 밟기 위해 지금 왕도에 와 있사옵니다.”

“그런가? 알겠네. 한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동안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그곳은 과거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옵니다.”

“그럴 것이네.”

“하여…….”

도르첸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탐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 도르첸의 내심을 이내 안 메르타니온은 내심 씁쓸해졌다.

‘역시 그 친구만은 못하구나. 그 친구였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게 주려 하거늘…….’

문득 로엔달이 생각나는 메르타니온이었다. 수를 만드는 데에는 도르첸이 월등히 뛰어났지만 도르첸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심이라는 것은 없었다.

“일단은 그 두 곳 모두 예전과 같이 환원시키도록 하게. 그리고 당분간 그 두 지역을 혼테르 후작에게 관리토록 하게.”

“예, 폐하.”

메코이족과 얄란족의 영역을 다시금 예전처럼 환원하고, 그 두 곳에 대한 관리를 알마리온에게 맡기라는 명에 도르첸은 내심 불만이 있었다. 하나 그것을 표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영지로부터 100가구의 이주민을, 직영지에서는 300가구를 모집하여 두 곳으로 이주시키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폐하.”

“그리고 귀족원에서 법률이 개정되면 자네에게도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네. 그동안 자네가 한 노고를 이제야 갚을 수 있어 다행이네.”

“망극하옵니다, 폐하.”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이 그러니까 3천5백 명 정도이군요?”

“그래.”

“하이란족 노예들은 어떻게 결정하였습니까?”

지난 두 번의 전투로 포로가 된, 아니 노예가 된 하이란족 전사의 수는 무려 1천8백 명이나 되었다. 알마리온은 이들을 노예가 아닌 자신의 병력으로 만들길 원하였고, 전장에 나아가는 조건으로 이들에게 노예가 아닌 이전처럼 전사로서의 모든 권리를 인정하겠다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회의적이다. 자신들의 가족들이 아직 적진에 남아 있는 이상 우리의 편에 설 수는 없다는 것이지.”

“그들은 오해를 하고 있군요. 난 그들을 하이란족과의 전투에 내몰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다음 목표는 하이란족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이란족이 아니라면 다음 목표는 어디지?”

그동안 휴식과 함께 정복을 위한 준비를 시키고 있었지만 정작 그 목표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리처드가 물었다.

“다음 목표는 쿠란족입니다.”

“쿠란족이라…… 후후후! 기대되는군.”

쿠란족은 차트란족과 이웃하고 있는 부족으로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들 쿠란족은 매우 거칠고 잔인한 성품을 지닌 부족이었다.

이들은 마치 길들여지지 않는 사나운 맹수와도 같은 자들로 그 악명이 초원의 모든 부족들은 물론 로엔 왕국에까지 나 있었다.

특히 이들은 다른 부족들처럼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목축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들이 하는 일은 오직 다른 부족이나 로엔 왕국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것들을 약탈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사실 이들 쿠란족은 일정한 근거지 없이 초원 이곳저곳을 떠돌며 타 부족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부족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최근 10년 동안은 지금 있는 곳에서 주변 부족들과 특히 로엔 왕국의 약탈에 전념해 오고 있어 왕국으로서도 이들 쿠란족은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한데 그들을 공격하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지 않을까?”

“그러하기에 더욱 그들을 공략해야 합니다.”

“후후! 너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게 만들 생각이냐?”

“그렇습니다, 형님.”

앞으로도 계속될 정복 전쟁을 위해서 가급적 피해를 줄여야 했다. 또한 차트란족을 병합할 때도 그러했듯이 그에 대한 경외심을 이들에게 갖게 할 생각이었다.

강함을 부드러움으로 제압하여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강함을 더 강하게 맞부딪쳐 굴복을 시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였다.

특히 객관적으로 판단하였을 때 메코이, 얄란, 차트란 세 부족이 연합하였다 하더라도 이들은 쿠란족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쿠란족을 완벽하게 굴복시킨다면 이후 그의 행보는 훨씬 쉬워질 것이 분명하였다. 아울러 아직은 그 결속력이 부족한 세 부족의 결속력 또한 더욱 강해질 것이다.

알마리온이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쿠란족을 격파함으로써 싸우지 않아도 항복을 받아 낼 수 있게 하는 것과, 부족들 간의 강인한 결속이야말로 알마리온이 쿠란족을 다음 목표로 정한 진정한 이유였다.

“거기에 덤으로 왕국의 국경 경비에 대한 부담을 크게 줄일 수도 있겠지요.”

목표가 정해지자 알마리온은 이를 모두에게 알렸다. 그리고 이미 예상하였듯이 모두의 반발과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 알마리온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뜻에 따라 3천5백 명의 전사들이 쿠란족과의 일전을 위해 출발하였지만 전장으로 떠나는 전사들 모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들 같은 표정들이었다.

쿠란족은 초원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도 말을 가장 잘 다루는 부족이었다. 이들은 태어날 때도 말 위에서 태어났고, 죽을 때도 말 위에서 죽었다.

이들이 말에서 내려올 때는 죽은 다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들은 평생을 말과 함께하는 부족이었다.

그에 반해 알마리온의 밑에 있는 세 부족은 농사를 짓거나 사람 대신 힘든 일을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나 기타 가축을 사용하지 않는 부족들이었다.

쿠란족은 지난 10여 년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한곳에 정착하지 않은 채 어디가 그 끝인지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너른 초원을 떠돌아다니며 다른 부족들을 약탈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 온 전투 부족이었다.

이에 반해 메코이, 얄란, 차트란족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남들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오직 한곳에서만 농사를 짓거나 광산을 개발하여 물품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 오던 부족들이었다.

그만큼 이들 세 부족의 전투력은 쿠란족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쿠란족의 수는 대략 7천에서 8천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전사라는 것이었다.

쿠란족에게 있어서 남녀의 구분은 없었다. 이들은 15세가 넘어가면 모두 약탈 전쟁에 동원되었기에 너무 어리거나 나이가 많거나 하지 않으면 모두 전장에 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 이들 쿠란족은 부상당한 전사는 가치가 없다며 전장에 버리고 가거나 아니면 부족에서 내쫓아 버린다.

즉, 알마리온의 이스턴족은 3천5백이라는 전사로 두 배에 가까운, 그것도 자신들보다 월등히 강력한 쿠란족을 상대해야만 했다.

이러한 쿠란족과의 첫 전투는 알마리온이 전사들을 이끌고 이들의 영역으로 들어선 첫날이었다.

정찰을 돌고 있던 쿠란족 전사들이 알마리온의 무리를 발견하고는 그 소식을 부족에게 전하자 순식간에 2천 정도의 쿠란족 전사들이 떼로 몰려왔다.

“방어진으로!”

쿠란족 전사들이 나타나자 알마리온은 짤막하게 명령하였다.

이에 출정을 앞두고 열흘 동안 입에서 단내가 나고 온몸에서 소금이 나올 정도로 고된 훈련을 받아 익혔던 삼각형 모양의 방어진을 갖추었다.

진의 가장 외곽에 서 있는 전사들에게는 자신의 가슴까지 올 정도로 큰 방패를 가지고 있었고, 그 뒤 열에 서 있는 전사들의 손에는 5미터에 가까운 장창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 열에 선 병사들에게는 검이, 그 뒤에 선 병사들에게는 활이 쥐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의 가장 안쪽에는 100여 기의 기마 전사가 알마리온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기병이나 기사 들의 돌격을 상대하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어진이었다.

그런 알마리온군을 보며 쿠란족은 잔뜩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이러한 방어진을 깨뜨릴 충분한 실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란족 전사들이 도열을 마치고 서서히 말을 달려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궁수 준비!”

쿠란족 전사들이 점차 속도를 높여 간격을 좁혀 오는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활을 든 전사들을 준비시켰다.

“발사!”

알마리온에게서 다시금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번에는 그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쿠란족 전사들이 충분히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 하는가! 무조건 나의 명령에 복종하라!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너희 모두를 베어 버리리라!”

전사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자 알마리온은 준엄하게 전사들을 꾸짖었다. 그 기세가 워낙 엄청나 감히 그 누구도 알마리온에게 아직 사정거리가 되지 않아 쓸데없이 화살만 낭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익스퍼트인 리처드나 자존심 하나만은 검의 주인이라는 마스터라 해도 감당하지 못할 하얀이리 또한 서슬 퍼런 알마리온의 그러한 준엄함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궁수 준비! 발사!”

핑! 핑! 핑! 핑! 핑!

전사들 중 활을 든 궁수의 수는 모두 5백 명. 그들이 알마리온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잔뜩 당긴 시위를 일제히 놓자 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일제히 호선을 그리며 허공의 한 부분을 까맣게 채우며 비행하기 시작했다.

-실프들아! 저 화살들을 더욱 멀리 날려 줘. 그리고 모든 화살들이 적들의 심장에 정확히 꽂히도록 해 줘!

정상적이라면 아직 100여 미터를 더 다가와야 했지만 알마리온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도 파괴적이었다.

바람의 정령에 의해 쏘아진 화살들은 더욱 멀리 날아갔으며 모든 화살이 정확히 쿠란족 전사들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으악!”

“컥!”

“헉!”

달려오는 쿠란족 전사들 후미 쪽에 위치한 자들이 일제히 날아오는 화살에 심장이 정확히 꿰뚫린 채 말에서 떨어졌다.

일을 벌인 알마리온과, 그가 정령술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만이 그가 벌인 일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였으니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이들의 놀라움이야 오죽하였을까.

너무나도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 벌어지자 모두 크게 놀랐지만 쿠란족 전사들은 멈출 수가 없었다.

수천의 인마人馬가 오와 열을 맞춰 움직이고 있을 때는 설사 멈추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모두가 동시에 그러지 않는다면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평생을 말 위에서 살아온 이들 쿠란족이라면 다른 이들보다는 훨씬 적은 피해만으로 멈춰 설 수 있었지만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놀란 마음에 그럴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궁수 준비!”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의 입에서 냉정한 명령이 내려지자 활을 든 전사들은 부지불식간에 활을 들어 시위를 힘껏 당겼다.

“발사!”

핑! 핑! 핑! 핑! 핑!

다시 한 번 허공의 한 부분이 화살들로 가득 찼고, 그렇게 허공을 비행한 화살들은 이번에도 또다시 쿠란족 전사들에게 확실한 죽음을 선사하였다.

단 두 번의 공격에 쿠란족 전사들 절반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쿠란족 전사들의 전열은 완전히 무너졌다.

“돌격!”

그때 다시 알마리온이 먼저 말을 몰아 달려 나가자 그 뒤를 따라 100기의 전사들이 박차를 가하며 그 뒤를 따랐다.

진을 박차고 나온 100여 기의 기마는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알마리온을 꼭짓점으로 모여들었고 또 다른 한 무리는 리처드를 꼭짓점으로 모인 채 혼란에 빠진 쿠란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차례 화살 공격으로 완전히 속도가 떨어지고 일부에서는 혼란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가운데 알마리온과 리처드를 정점으로 하여 달려오는 두 무리의 기마는 이미 멈추어 선, 그리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들 앞에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사나운 모습을 나타냈다.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마치 사전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우아아아아!”

“와아아아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급 정령술사인 알마리온과 익스퍼트인 리처드가 이끄는 2개의 태풍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제 갈 길을 나아갔다.

쿠란족과의 첫 전투는 대승이었다. 아마도 하얀이리가 이끄는 나머지 전사들이 제때에 알마리온과 리처드의 뒤를 따랐다면 더 큰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겠지만 이들 또한 놀라 허둥거린 때문에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란족과의 첫 전투는 일방적이다 못해 마치 어른과 어린아이가 싸운 것처럼 싱겁게 끝이 나 버렸다.

“이쯤이 좋을 것 같군요.”

첫 전투가 있은 다음 날. 알마리온은 전사들을 이끌고 좀 더 쿠란족 영역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전장으로 적당하다 싶은 지역을 찾아냈다.

너른 초원이라고 하지만 끝없는 평원은 아니었다. 곳곳에 구릉이 이어지는 곳도, 습지인 곳도,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평원처럼 이어진 곳도 있었다.

그가 쿠란족을 상대하기 위해 선택한 두 번째 전장은 그러한 곳들 중 구릉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릉이 심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말의 기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이었을 뿐이다.

한데 이들 두 사람이 선택한 전장은 주변의 구릉보다는 약간은 더 높고 넓은 구릉을 가운데 두고 주변에 그보다는 낮고 좁은 세 곳의 구릉들이 감싸고 있는 것 같은 형태였다.

물론 그래 봐야 그 차이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이들이 선택한 구릉이나 그 주변의 구릉이나 그리 높지도 않아 말을 타지 않고 두 발로 달린다고 하더라도 약간 숨이 차오를 정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사람은 마치 이곳이 최적의 전장인 양 만족스러워하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리처드 또한 알마리온이 선택한 두 번째 전쟁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하였다.

“그럼 형님께서 생각하신 것들을 시도해 보도록 하지요.”

“하하! 나야 대환영이지!”

아무래도 상대보다 적은 병력, 그리고 기동력에서 완전히 밀리는 상황에서 첫 전투처럼 상대가 더 이상 자신들을 깔보지 않고 제대로 작정을 하고 달려들면 큰 피해가 예상되었다.

물론 알마리온이나 마법사인 샘 그리고 익스퍼트인 자신이라면 그 피해를 확실하게 줄일 수 있었지만 언제나 자신들이 이들 전사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바에는 이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적을 대함에 있어 자신감을 갖게 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그것도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두려워 마지않는 쿠란족을 상대로 완벽히 승리한다면 더더욱 큰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앞선 첫 전투가 알마리온의 신비한 능력에 의한 현실적이지 못한 승리였다면 이번에는 최대한 전사들 본연의 능력과 지략을 더한 전투로 이끌어 갈 계획이었다.

리처드는 전사들을 이끌어 미리 준비하여 온 나무로 목책을 만들어 구릉의 8부 능선쯤에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구릉 아래쪽에는 말의 움직임을 곤란하게 만들 고랑들을 구릉을 삥 둘러가며 겹겹이 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랑들과 목책이라면 더 이상 쿠란족은 자신들의 장기인 기마전으로 전장을 이끌어 가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리처드가 그렇게 주변에 장애물들을 설치하는 동안 하얀이리와 꿈꾸는달은 트레뷰셋을 설치하여 자신들이 위치한 구릉을 세 방향에서 감싸고 있는 또 다른 구릉들의 정상을 향하도록 설치하고 미리 몇 차례 시험 발사를 통해 사거리 등을 조절하였다.

그러는 동안 알마리온은 샘과 함께 주변 지역을 탐문하며 몇 개의 마법 아이템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쿠란족들이 찾아올 때까지 휴식을 취하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이미 첫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발휘된 알마리온과 리처드의 능력에 그동안 불안해하던 일부 전사들의 마음이 진정되어 있었기에 크게 불안해하는 이들 없이 조용히 곧 있을 전투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성난 쿠란족이 이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이들이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며 전의를 가다듬기 시작한 지 이틀 후였다.

앞선 첫 전투에서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당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쿠란족은 부족 전체를 이끌고 달려왔고, 이들의 성난 움직임으로 인해 주변 지역이 온통 흙먼지로 인해 뿌옇게 채색되었다.

하나 전투는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알마리온 측이 이미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였음을 확인한 쿠란족은 일단 자신들도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주변을 탐색하며 공격의 시기를 저울질하였다.

그렇게 양측이 대치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 쿠란족은 이제 충분하다 싶었는지 은밀히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모두 밝으려면 2시간 정도는 더 필요하였지만 어슴푸레 밝아 오기 시작한 미약한 빛은 불편함을 느끼게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물을 아예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공격 준비를 마친 쿠란족은 말발굽에까지 가죽을 씌워 소리가 나지 않게 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이스턴족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접근해 왔다.

하나 이들의 움직임은 이미 모두 낱낱이 알마리온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조용히 사람들을 깨워 준비시키는 동안 저 멀리 동녘 하늘은 완연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때를 기해 사방에서 쿠란족 전사들이 거칠게 말을 몰아 짓쳐들어왔다.

“쏴라!”

그런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알마리온의 입에서 궁수들에게 활을 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잔뜩 준비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힘껏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이때 반대편 구릉들에서도 쿠란족 전사들이 반격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후후! 곧 불벼락을 내려 주지. 준비되었으면 쏴!”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하얀이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세 방향으로 고르게 겨냥되어 있던 트리뷰셋에서 불붙은 기름 항아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이미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여 놓은 때문에 첫 번째 발사부터 정확하게 반대편 구릉들에 떨어지기 시작한 불붙은 기름 항아리들로 인해 삽시간에 구릉의 정상이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이에 크게 당황한 쿠란족의 반격은 순식간에 멈춰 버렸다. 하나 이미 구릉을 달려 내려온 또 다른 쿠란족 전사들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전에 미리 준비하여 둔 함정에 쿠란족의 선두가 빠지자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기병 준비!”

“이얍!”

알마리온이 크게 외치자 리처드를 비롯한 100여 기의 기마 전사들이 힘차게 기합을 넣는 것이, 마치 잘 훈련된 기사단처럼 보였다.

“돌격!”

이번 전투에서 알마리온은 기마와 함께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전장을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리처드를 선두로 한 기마 전사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자 알마리온은 잠시 상황을 좀 더 지켜보다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보병 준비!”

“이얍!”

다시 한 번 우렁찬 기합 소리가 이제는 완연히 밝아 온 아침 하늘을 우렁차게 울렸다.

“돌격!”

“우와아아!”

하얀이리와 빛나는별 그리고 적막한초원이 각각 나누어 지휘하고 있는 부대가 알마리온의 명령에 따라 적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트리뷰셋 부대는 적의 후방을 최대한 차단하라!”

마주하고 있는 구릉들에서 다시금 쿠란족 전사들이 모습을 나타내자 알마리온은 대기하고 있던 트리뷰셋을 다루는 병사들에게 다시금 발사 명령을 내렸다.

구릉과 구릉 사이의 좁은 지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접전은 이미 사기가 떨어지고 혼란에 빠진 쿠란족 전사들을 일방적으로 이스턴족 전사들이 밀어붙였다.

그 모습은 과연 쿠란족이 초원의 무법자, 약탈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샘!”

“예, 주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샘 또한 이미 알마리온을 주군으로 섬기고 있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라!”

“예, 주군!”

명령을 받은 샘이 주문을 외우자 구릉 너머에서 거대한 화염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 모습에 구릉과 구릉 사이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양측의 모든 전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거대한 화염이 일어나는 쪽으로 향하였다.

그것으로 사실상의 전투는 이미 끝난 셈이었다. 구릉 너머에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쿠란족 전사들은 미리 설치하여 놓았던 마법 아이템이 일으킨 거대한 화염에 휩쓸려 버렸고 살아남은 자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마법을 접해 본 적이 없던 이들에게 있어서 마법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할 위력을 가진 화염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

이미 사기가 완전히 꺾여 버린 쿠란족 전사들의 귀에 항복을 권하는 알마리온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이스턴족 전사들이 이를 따라 하자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채 살아남은 쿠란족 전사들은 황급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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