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Khan이 되다 (52/70)

Khan이 되다

메코이족과 얄란족의 영토를 모두 회복한 알마리온은 일단 군에 휴식을 주었다.

일부에서는 쇠뿔도 단숨에 빼야 한다면서 군을 쉬게 할 때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아니 실질적으로 군을 지휘하고 있는 리처드는 군에 휴식을 주었다.

“이 상태로 어정쩡하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는…… 아니, 그분은 우리 부족 전체의 은인입니다. 그런 은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얄란족의 대족장인 하얀이리를 중심으로 부족의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들은 벌써 1시간 넘게 심각한 표정으로 부족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은혜를 갚는다고 해서 꼭 부족을 통째로 넘겨줘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이란족에게 패하면서 일부는 고향을 떠나 로엔 왕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하이란족의 노예가 되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예로 살아왔다.

그런 얄란족이 부족의 땅을 되찾고 노예로서 처참한 생활을 이어 오던 나머지 형제들 또한 알마리온의 도움으로 모두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러자 전부터 알마리온과 함께해 온 부족민들이 그를 칸으로 추대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그에 대해 알마리온이란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머지 부족민들은 그를 은인으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구태여 칸으로 추대를 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반대를 하였다.

“그만! 우리 얄란족이 언제부터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않는 약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이지?”

하얀이리의 호통 소리에 게르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가 우리 부족에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대족장님, 은혜를 베풀었다 해서 그를 칸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없다는 것이지? 아니, 그럼 어떻게 해야 그를 인정한다는 것이지?”

“그건…….”

“왜 말을 못 하는 것인가? 무거운망치, 자네도 그가 로엔 왕국 사람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단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말을 하며 무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하얀이리였다. 한데 그와 눈길이 마주친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거나 슬쩍 돌려 버렸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솔직히 그가 로엔 왕국 사람인 것도, 또한 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가 차라리 떠돌이라 하더라도 우리와 같은 게르혼족이라면 이렇게 반대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마리온을 칸으로 추대하는 일에 반대를 하는 이들 대부분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대족장께서도 칸이라는 지위가 어떤 지위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칸이라는 지위는 세습되는 지위였다. 무거운망치가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왕국과 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를 칸으로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왕국과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알마리온을 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훗! 뭐가 걱정이지? 어차피 그의 후손 중 우리의 칸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하면 이탈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야.”

제국이 되었든 왕국이 되었든, 아니면 그 밖의 어떠한 제도를 가지고 있든 나라가 세워지면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들 게르혼족과 같은 초원의 부족들은 지도자의 선출이나 축출에 있어서 제국이나 왕국에 비해 잦은 변동이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지도자란 강한 힘을 가진 자. 자신의 부족을 타 부족으로부터 지켜 낼 수 있는 자를 뜻했다.

메코이족이 족장의 선출 방식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도 바로 자신들의 부족이 타 부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이들 게르혼족은 강함을 숭상하고, 그것이 절대 선이었다.

“내 말이 틀린가?”

“그건…….”

“우린 우리의 전통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야. 그것이 또한 그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내 말 알겠나?”

“…….”

“어째 대답이 없는 것이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무거운망치를 차갑게 바라보며 하얀이리가 반드시 그의 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대답을 강요하였다.

“알겠습니다, 대족장.”

“좋군. 그리고 내 분명히 경고하지. 지금 나의 이런 결정이 불만이라면 부족을 떠나도 좋다. 하나…… 한번 부족을 떠나면 두 번 다시는 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

알마리온을 칸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면 아예 부족을 떠나라는 말에 무거운망치를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부족민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얀이리는 겉보기에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투박하게 생겨 대단치 않게 보였지만 그런 겉모습에 깜빡 속았다가는 그의 지랄맞은 성격에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당하게 된다는 것을 무거운망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장인으로서도 그리고 전사로서도, 본인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으로도 그리고 그 지랄맞은 성격으로도 부족 최고였다.

그런 그가 이처럼 단호하게, 이제 막 다시금 되찾은 형제들에게 나가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알마리온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토록 그를 인정하시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그를 내 머리 위에 두진 않을 것이다.”

“훗! 하긴 대족장의 그 지랄맞은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크크크. 그걸 아는 녀석이 내 앞에서 건방을 떨었던 것이냐?”

뚜뚜둑! 뚜둑! 뚜두둑!

한껏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어 뼈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하얀이리의 모습을 보면서 무거운망치의 표정은 하얗게 변했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오랜만에 그를 다시 본 부족민들의 표정이 대부분 그러했다.

그가 이런 표정과 행동을 할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거야…….”

“크크크. 그래, 오랫동안 네놈들을 너무 풀어 줬던 것 같지? 응?”

“대, 대족장! 내, 내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고요! 하니 제발…….”

이날 밤 얄란족 전사들이 모여 있는 게르 쪽에서 밤새도록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간밤에 무슨 재미난 일이 있었소?”

“크크크, 있었지.”

“쳇! 그런 일이 있었으면 좀 부르지 그랬소? 치사하게 노인네 혼자 재미를 보다니.”

하얀이리의 뒤를 따르는 자들의 상태만 보아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체하며 묻는 리처드였다.

“그나저나 알은 뭐 하냐?”

“이 시간이면 새벽 수련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잖아요?”

“요즘도 그 암호랑이랑 수련을 하나 보지?”

“어련하겠습니까? 지 마누라라고 아주 엄청 챙기더라고요.”

“하하하, 부러우면 너도 혼인을 하면 되지 않겠냐? 그 씨씨라는 아이와는 아직도 그런 거냐?”

“휴…… 그녀 이야기는 뭐하려고 하는 거요?”

갑자기 씨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리처드의 안색이 잔뜩 어두워졌다.

그런 리처드의 표정을 보면서 하얀이리는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아직도 그냥 그 상태냐?”

“훗!”

자조적인 웃음이 지어졌다.

“인석아, 다른 일에는 늘 당당하면서 왜 그 아이에게만은 그리도 못난 것이냐? 차라리 당당하게 말을 해.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처분을 기다려. 설사 그 아이가 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네 마음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보다는 후회가 덜할 것 아니냐? 안 그래?”

맞는 말이었다.

최소한 정정당당하게 거절당할 때는 거절당하더라도 사랑의 고백이라도 하고 또 청혼이라도 하는 것이 미련도 후회도 남기지 않을 일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나 이 순간 리처드는 하얀이리의 말에 무엇인가 커다란 깨달음이라도 느낀 사람처럼 잠시 진저리를 치더니 이내 말을 타고는 혼테르로 달려갔다.

그런 리처드의 모습을 보면서 하얀이리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알마리온의 게르로 가서는 주인도 없는 곳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제 오냐?”

수련을 마쳤는지 게르 안으로 들어서던 알마리온은 하얀이리가 먼저 알은체하자 반가워하는 반면, 들에핀꽃은 아침 댓바람부터 주인도 없는 게르 안에 그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잘 맞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안하무인격인 하얀이리의 행동은 그가 나이가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특히 들에핀꽃처럼 남들에게 떠받듦을 받고 살아온 존재라면 더욱더 이러한 그의 거칠고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이리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게 박힌 들에핀꽃의 표정은 당연히 샐쭉해졌다.

“아! 오셨습니까?”

“…….”

“쯧쯧! 이 계집애야, 넌 뭐가 불만이라서 아침부터 눈을 쭉 찢어 대는 것이냐?”

하얀이리의 도발 아닌 도발을 참고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이 늙은이가!”

“크크크! 늙은이라? 그래, 어디 이 늙은이 워해머War hammer에 당해 보고 싶다 이거지?”

하얀이리가 제 목숨처럼 여기고 있는 워해머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들에핀꽃 또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잔뜩 긴장한 채 검을 쥐고 있는 들에핀꽃과 반면 여유로운 표정에 미소까지 짓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하얀이리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이 끼어들었다.

“후훗! 그만하시오, 부인. 그리고 하얀이리 님도 장난 그만하시고 말입니다.”

“크큭! 장난인 줄 알았냐?”

하얀이리에게는 좋지 않은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과 반드시 드잡이질을 한번 해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더 그러했는데, 알마리온을 제외하고 그를 만난 모든 이들은 그의 끈질긴 도발에 모두 넘어가 한차례씩 그와 드잡이질을 했던 전력이 있었다.

최근의 목표는 바로 알마리온의 처인 들에핀꽃과 그녀와 함께 온 검은발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후훗! 어르신과 어디 한두 해 같이 있어 봅니까? 한데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십니까?”

“쳇! 아쉽네.”

알마리온이 조금만 늦게 끼어들었어도 최근 무서운 속도로 초원의 부족들을 장악해 나가는 검은발 부족의 용맹한영혼의 양녀인, 그리고 ‘초원의 암호랑이’라고 소문난 들에핀꽃의 매서운 손맛을 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인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게 아니고, 너 이제부터 어떻게 할래?”

“무엇을 말입니까?”

앞뒤 말을 모두 잘라 버리고 알맹이만 툭 내뱉듯 말하자 영문을 모르는 알마리온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너도 알 만큼 아는 놈이 뭘 물어?”

“하하.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셔야 저도 알지 않겠습니까?”

“너도 지금쯤 지휘 체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냐?”

“그 말씀이셨습니까?”

“그래.”

“결정은 하신 것입니까?”

사실 얼마 전부터 꿈꾸는달이나 들에핀꽃 등이 그의 지위를 확실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한 일이 있었고, 알마리온 본인 또한 그럴 시기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강제적으로 얄란족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을 주었을 뿐이다.

“훗!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하하.”

“좋아하기는……. 그래, 어젯밤에 결정했다.”

“그래서 그렇게 소란스러웠군요?”

“어린 녀석들 중에 몇 놈이 말을 안 들어서 말이야. 크크크.”

“하하. 그렇다고 아예 못 움직이게 만드신 것은 아니시죠?”

“조만간 또 움직일 생각이냐?”

“예. 하얀이리 님이 늘 주장하시는 것 있지 않습니까? 쇠는 뜨거울 때 두들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하하. 맞는 말이다. 그래야 뭐가 만들어져도 만들어지는 것이지.”

“한데 형님을 보셨습니까? 새벽에도 안 보이시던데 말입니다.”

“그놈 지금 사랑 타령하러 영지로 돌아갔다.”

무슨 말인가 싶어 알마리온도 그리고 들에핀꽃도 멀뚱히 하얀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처드가 씨씨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잘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형님께 저도 같은 충고를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누가 누굴 충고해?”

“예?”

“너도 제대로 못하는 일을 가지고 충고는 무슨…….”

“하하하…….”

“아니, 리처드 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혹 주군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갑자기 영지로 귀환한 리처드를 보며 한센은 전장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물었다.

“아니, 그보다는 씨씨는 어디 있소?”

“씨씨 말입니까? 그녀야…….”

다짜고짜 씨씨를 찾는 리처드의 행동에 무슨 일인지 이해를 못 해 머뭇거리는 한센의 모습에 리처드는 짜증이 난 듯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무작정 그녀를 찾아 조리실로 달려갔다.

하나 조리실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식자재 창고에도, 심지어는 그녀의 방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녀의 방에서도 말이다.

“리처드 님? 무슨 일로 그녀를 찾으시는 것입니까?”

성안에 그녀가 있을 만한 모든 곳을 들쑤시며 찾아다니는 리처드의 모습을 보며 한센이 물었다.

“청혼하려고.”

“예?”

“벌써 가는귀가 먹은 것이오? 청혼하려고 찾는다고 하지 않았소!”

“아! 하하, 그렇습니까?”

“그녀는 어디 있는 것이오?”

“씨씨라면 노엔 부인과 함께 있습니다.”

“노엔 부인과 함께 말이오?”

“예. 씨씨도 최근 노엔 부인에게서 개인 교습을 받고 있습니다.”

리처드와의 일도 있고, 또 동생인 샘이 알마리온을 따라 출전을 함에 따라 마음이 불안해진 씨씨는 자주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예전에는 하지 않던 실수를 자주 하였다.

그런 씨씨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아는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녀가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처럼 글과 예절을 배워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였다.

마리아의 차분한 설득과 한센 또한 적극 권장하자 씨씨 또한 마음이 끌려 지금은 틈나는 대로 마리아에게서 숙녀로서 필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아! 그래요? 알겠소.”

마리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한센의 말에 한달음에 마리아의 거처로 달려갔다.

똑똑!

“예. 들어와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레오폴트 경께서 어떻게…….”

지난번 그 일이 있은 후 성을 떠나 있다가 알마리온과 함께 전장으로 출정한 리처드가 갑자기 영지에 모습을 나타내자 마리아와 씨씨 모두 크게 놀라며 그를 맞이했다.

“수업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레이디 노엔.”

정중하게 자신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수업을 중단케 한 것을 사과하자 마리아는 그동안 자신이 보았던 리처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의 모습에 내심 크게 놀랐다.

리처드는 평소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직설적인 말과 행동을 하였으며, 안하무인에 가까운 행동 또한 곧잘 하여 예절을 중시하는 마리아는 그를 상당히 꺼렸다.

한데 지금 보이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기품이 절로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정중하고 당당했다. 그러한 남성다운 모습에 마리아 또한 순간적으로 가슴이 다 두근거릴 정도였다.

“아, 아니에요. 한데…… 무슨 일이신가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노엔. 제가 용무가 있는 분은 레이디 씨씨입니다.”

“씨씨 말인가요?”

씨씨에게 용무가 있다는 리처드의 말에 마리아는 흠칫하며 어느새 자신의 등 뒤쪽에 몸을 감추고 있는 씨씨를 돌아보았다.

“실례이지만 무슨 일인지 제가 알아도 될까요?”

지난번 일로 리처드에 대한, 아니 그동안 많이 진정되었던 사내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다시금 크게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리처드가 자신의 한 팔을 자르려 했다는 이야기를 샘에게서 전해 들은 씨씨는 이후 모습을 감춘 리처드에게 미안함까지 생겨 더욱 그란 존재가 불편했다.

“…….”

마리아와 씨씨를 번갈아 바라보던 리처드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허리에 찬 검을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여인이 공부를 하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검이었지만 그 검은 포넬의 왕가만을 위해 검을 제작하는 장인 가문인 타무로 장인가에서 최고의 장인이 그를 위해 특별히 제작해 준 명검으로 하얀이리 또한 감탄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검이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고 탈출을 하였을 때조차도 그 검만은 챙겼을 정도로 단 한 번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검이었다.

그런 검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리처드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반지를 하나 꺼내 검의 옆에 내려놓았다.

이 또한 포넬 최고의 보석 세공 가문인 하인세 가문의 가주가 10년 동안 가공하여 만든 반지로 부모님의 약혼 때 선부가 그의 어머니인 마리에게 건넨 예물이었다.

마리는 유독 이 반지를 좋아하여 늘 이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아들이 출전하는 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아들에게 언젠가 마음에 드는 레이디가 생기면 청혼의 반지로 사용하라고 이 반지를 빼어 주었던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리처드의 행동에 두 여인은 영문을 몰랐다.

“나의 여인이 되어 주겠소?”

“예?”

너무나도 무뚝뚝하게,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하자 두 여인 모두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서, 그리고 나중에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

리처드는 씨씨의 대답을 듣기 위해 조용히 침묵한 가운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리처드의 뜨거운 눈길에 씨씨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간절한 눈빛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지만 마리아 또한 어떻게 그녀를 도와야 할지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씨씨의 눈이 리처드의 뒤에 서 있는 한센과 마주쳤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 리처드의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한센과 눈이 마주친 씨씨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씨씨가 이 세상에서 믿는 몇 안 되는 존재 중에는 한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마리온이 그녀를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않는 것으로 신뢰를 쌓았다면, 한센은 마치 친아빠처럼 자신을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었다.

마리아가 씨씨를 가르치게 된 것도, 한센이 마리아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마리아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씨씨 또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동생인 샘과 알마리온과 한센 그리고 마리아의 말이라면 일단 무조건 신뢰를 하고 보았다.

그런 한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리처드의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하자 씨씨는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만 붉힌 채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실상 리처드가 자신의 검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반지를 함께 내놓고 씨씨에게 청혼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씨씨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리처드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반지를 깨뜨려 버릴 생각이었다. 씨씨가 아니라면 그 어떤 여인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그만의 의지였던 것이다.

이미 성혼을 한 그였지만 그의 아내는 진정한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단지 원수의 딸로 그녀 또한 아비를 잘못 둔 죄로 그의 복수의 대상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또한 훗날 설사 왕가의 혈통을 잇기 위해 누군가와 혼인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혈통을 잇기 위함일 뿐, 사랑을 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의 마음은 어머니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할 때 쓰라고 준 반지를 부숨과 함께 깨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씨씨에 대한 그의 마음은 강하고 깊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레이디 씨씨. 나의 청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씨씨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다시 한 번 물었다.

“전…….”

“…….”

힘들게 입을 떼긴 하였지만 여전히 뒤의 말을 잇지 못하는 씨씨였다.

“전…… 기사님의 여인이 되기에는…….”

“으음…….”

씨씨의 말에 리처드는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승부는 아니었지만 그의 자존심엔 커다란 상처를 가져다주었다.

한순간 땅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그의 커다란 덩치가 잠시 휘청거렸지만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자 흐트러지려 하였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 놓아둔 검을 향해 손을 뻗어 갔다.

“너무 성급하시군요. 아직 씨씨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검을 향해 손을 뻗어 가던 리처드의 행동을 지켜보던 한센이 그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눈치채고는 그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 말하였다.

하나 정작 씨씨는, 그리고 그녀 곁에 서 있던 마리아는 이들 두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무슨 행동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씨씨야.”

“예?”

“넌 날 믿지?”

“예…… 아저씨.”

늘 자상한 아버지처럼 자신을 보살펴 주는 한센을 그녀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럼 솔직히 말해 보렴. 넌 리처드 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그, 그건…….”

검은색 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훗! 네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굳이 더 이상 묻지 않아도 그녀가 리처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리처드 님.”

“…….”

“리처드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 아이와 샘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서 큰 상처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이미 리처드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고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보며, 혹 자신도 씨씨의 아름다운 모습에 혹하여 더러운 욕정을 가지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던 때도 있었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단순한 욕정이 아닌, 운명과도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그는 늘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은밀히 그녀를 보호해 주었다.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 물론이오! 나…… 난! 진심으로 저 여인을 사모하고 있소!”

굳이 한센에게 그런 자신의 진심을 밝힐 이유는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한센이 자신의 문제에 끼어들 이유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이렇게 나서 주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울 뿐이었다.

하나 한센의 표정은 처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면 왜 그런 성급한 행동을 하신 것입니까?”

“그건…….”

“상처받기 쉬운 여린 아이입니다. 아니, 이미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은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런 저 아이가 리처드 님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한데 리처드 님의 행동은 어떠했습니까? 저 아이가 제 말도 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님은 어떻게 하려 하셨습니까?”

“으음…….”

씨씨의 말을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는 것으로 들어 버린 리처드의 성급함을 준엄하게 꾸짖는 한센이었다.

“그런 성급함으로 여린 저 아이를 진정으로 위해 주실 수 있다고 자신하시는 것입니까?”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많은 상처를 받은 씨씨는 너무나도 연약해져 버려 아무리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회복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그녀의 의식 깊은 곳에는 여전히 강한 두려움과 불신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최악의 행동은 바로 성급함이었다. 설사 아무리 그녀를 진심으로 사모한다 하더라도 성급한 행동은 도리어 그나마 나아 가고 있는 상처를 다시금 악화시키기만 할 뿐임을 그제야 리처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아이를 끝까지 지켜 주실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스스로 물러나 주십시오. 그것이 저 아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리처드 님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결정일 것입니다.”

“나, 난…….”

“…….”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던 리처드가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한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쳐든 후 그에게 또박또박 말하였다. 하나 그 말은 한센에게 한 것도, 그리고 곁에 서 있는 씨씨나 마리아에게 한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한 다짐의 말이었다.

“저 여인을 지켜 주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또한 기쁨이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물론이오. 나 포넬의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이란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오!”

“포넬의 브리스톨 가문? 설마…….”

“훗! 그렇습니다, 레이디 노엔. 포넬의 이름뿐인 왕가인 브리스톨 왕가. 그곳이 나의 가문입니다.”

“으음…….”

“아! 그래서…….”

리처드가 포넬 왕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자 마리아는 놀라움에, 그리고 한센은 왜 주군인 알마리온이 그동안 그에게는 기사 작위조차 주지 않은 것인지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정식으로 묻겠소, 레이디 씨씨. 이 반지는 나의 어머니께서 아버님께 약혼의 징표로 받으신 반지입니다. 이 반지를 그대가 받아 주었으면 합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나, 난…….”

여전히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씨씨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더욱 당혹스러워했다.

“씨씨, 네 마음 가는 대로 대답하면 된단다.”

당황하는 씨씨에게 한센이 충고하였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씨씨는 잠시 몇 차례 심호흡을 하여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리처드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예.”

단지 그 한마디뿐이었지만,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리라.

“아!”

리처드의 입에서 환희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 준 그녀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하나 그는 섣부른, 그리고 거친 행동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작고 가녀린 손을 잡아 갔다.

“사랑하오.”

“…….”

넘쳐흐를 듯 뜨거운 열정이 가득 담겨 있는 리처드의 눈빛이 느껴지자 씨씨는 목덜미까지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리처드가 혼테르에서 씨씨에게 청혼을 하고 있는 그 순간 알마리온은 메코이족과 얄란족 그리고 차트란족 족장들과 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칸으로 꿈꾸는달과 하얀이리 그리고 빛나는별의 추대를 받아 세 부족의 대족장인 칸이 되었다.

“앞으로 부족 전체의 이름을 이스턴족이라 하겠소.”

제국이 자신에게 준 성姓을 부족의 이름으로 정하였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것일 뿐, 여전히 각각의 부족들의 이름은 메코이였으며 얄란이었고 차트란이었다.

“와! 대이스턴족 만세!”

한동안 환호성과 만세 소리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었다. 세 부족의 전사들은 지난 시간 동안 알마리온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분명하게 확인하였고 그와 함께할 앞으로의 정복 전쟁에서 이들은 승리를 자신하였다.

승자는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었고, 패자는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이 이들의 법칙이었다. 이들이 이처럼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출전을 준비하라!”

“와!”

정복을 위한 출전을 준비하라는 알마리온의 명령이 있자 다시 한 번 거대한 환호성이 대지를 울렸다.

리처드가 다시금 복귀한 것은 그가 혼테르로 떠난 지 나흘이 지난 후였다.

“뭐? 나 없는 동안 네가 칸이 되었다고?”

“하하. 예.”

“이 나쁜 자식! 어떻게 내가 없는 동안…….”

자신이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서운한 것이었다.

그가 칸으로 추대되었을 때 그의 곁에는 그동안 그와 함께했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게르혼족 출신자들만 함께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하. 형님께서는 대신 씨씨와 함께 달콤한 시간을 보내셨지 않습니까?”

“그거야…….”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형님.”

“잘된 것을 어떻게 알았지?”

“원 형님도……. 형님의 얼굴이 지금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그 사랑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기 마련이니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하…… 그, 그러냐?”

“훗! 어쨌든 다행입니다. 형님과 그녀…… 아니, 이젠 형수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하. 당연하지! 내 아내가 될 여인이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냐.”

“뭐, 그러죠. 어쨌든 두 분이 잘되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래. 고맙다.”

곁에 있던 하얀이리와 꿈꾸는달을 비롯해 모두가 그의 일을 축하해 주었다.

특히 자신의 누이의 일이었기에 가장 기뻐한 이는 다름 아닌 샘이었고, 샘은 리처드가 자신의 매형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만족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리처드의 일로 서로 축하를 전하고 받는 시간이 끝나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일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의논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칸.”

“무엇입니까, 꿈꾸는달 님?”

“실은 부족민들 상당수가 고향으로 되돌아가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칸.”

“그렇다면 얄란족도 다르지 않겠군요?”

“험! 험! 뭐 그런 셈이지.”

혼테르 영지를 좌우에 끼고 정착을 한 메코이족과 얄란족은 알마리온의 전폭적인 지원과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제 겨우 정착한 곳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데 옛 고향을 되찾게 되자 두 부족의 부족민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길 원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 두 부족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경우 왕국이 내준 이들의 정착 지역이 공중에 떠 버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들 두 부족이 생산해 내는 종이 또한 그만큼 양이 감소되는 것이었기에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려울 것 없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고향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왕국이 내준 두 정착지는 다시금 왕실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뭐가 당연하냐? 그동안 우리가 그곳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렀는지 너도 잘 알잖아?”

알마리온이 칸이 된 이후에도 하얀이리의 말투나 행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가릴 인물 자체가 아니었다.

“작은 것일 뿐입니다.”

메코이족이나 얄란족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은 결코 작은 곳이 아니었다.

환경이 척박하고 끊임없는 몬스터와 게르혼족의 약탈을 받아야 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 두 곳의 넓이는 어지간한 자작이나 남작의 영지를 상회하는 너른 지역들이었다.

그곳을 지난 수년 동안 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작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두 곳이라면 충분히 더 많은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은 너도 잘 알잖아? 게다가 너의 가신들 또한 언제까지 지금처럼 연금만을 받고 살아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말이야.”

한센이나 요들, 그나이제나우, 요하네스 등 그의 가신들은 여전히 장원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건 제 영지만으로도 충분한 일입니다, 형님.”

알마리온의 영지인 혼테르는 무척이나 넓은 곳이었다. 그동안은 대부분 아무도 살지 않는, 아니 살 수 없는 버려진 땅들이었고 쓸모없는 땅들이었지만 알마리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영지 내에 얼마나 많은 자원들이 매장되어 있는지를 말이다.

그는 자신의 영지 모든 곳을 정령을 통해 샅샅이 살펴보았고 몬스터만 몰아내면 충분히 한 나라를 세워도 좋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자원이 매장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메코이족과 얄란족에게 내준 땅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최상의 환경을 가진 곳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이를 욕심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알마리온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곳 초원이 나의 근거지가 될 것입니다. 나의 가신들과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부족장들이 이 너른 초원을 마음껏 질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혼테르는 단지 나와 왕국의 인연을 연결해 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왕국의 귀족들은 알게 모르게 그를 경계하였다. 귀족 파벌이야 국왕파에 속하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지만, 같은 국왕 파벌에 속한 자들 또한 결코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단지 몇 명만이 그를 진심으로 대하였고, 그의 성장과 발전을 기꺼이 축하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굳이 왕국 내에서 자신의 세를 늘려 더 많은 견제와 질시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긴. 어차피 너와 이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이 끝이 없는 초원을 모두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

리처드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알마리온의 능력을 능가하는 인물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누구도 알마리온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네 말처럼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전령을 보내세요. 그 일을 요하네스 경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부족은 고향으로 돌아올 차비를 하라 하십시오. 그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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