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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51/70)

정복

지난겨울은 이 지역 사람들조차 처음 보았을 정도라고 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려 고생을 시키더니, 이번 겨울에는 예년보다 훨씬 추운 날씨가 계속되어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하나 그러한 겨울도 이제 모두 지나가고 점차 따뜻한 기운이 세상을 푸근하게 감싸기 시작할 때였다.

어둠이 짙게 내려진 시간에 두렌 강변에 일단의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시작하라.”

“예.”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잠깐 들리는가 싶더니 몇 명의 검은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여 유유히 흐르는, 비록 날은 많이 풀렸지만 아직은 몸을 담그기에는 너무나도 차가운 강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거침없이 강물을 헤엄쳐 나갔다.

얼마 후 강을 건넌 자들이 몸에 감았던 줄을 당겨 신호를 보내자 또 다른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 가는 줄 위에 두꺼운 밧줄을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줄을 몇 번 당기자 강 건너에서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였다.

퍽! 퍽! 퍽! 퍽!

밧줄을 고정시키기 위해 말뚝을 박는 소리가 강의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들려왔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강을 건너가도록 하지.”

“예.”

또 다른 명령이 내려지자 사전에 미리 준비하였던 뗏목들을 들고 나온 이들이 강 양편에 단단하게 고정된 밧줄에 걸쇠를 걸고는 뗏목을 강물 위에 띄웠다.

“준비된 대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다.”

20여 개의 밧줄이 강 양편에 연결되어 있지만 1천9백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강을 모두 건너는 작업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모두 강을 건너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두 분도 말입니다. 너희 두 사람도 조심해고 네 오빠와 하얀이리 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알겠지?”

강을 건너기가 무섭게 알마리온은 강 건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차트란족에 속한 소부족의 마을을 공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차트란족은 게르혼족 전체로 본다면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부족으로 곳곳에 흩어진 채 농사를 주로 짓는 부족이었다. 때문에 첫 목표로 이들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예, 스승님.”

“예, 영주님.”

담담하게 대답하는 당돌한여우와는 달리 샘의 목소리에는 결연함을 넘어 비장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차트란족은 씨씨와 그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준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녀오마.”

“다녀오겠습니다, 대족장님.”

“크크! 오랜만에 다시 뭉쳤군? 그 기념으로 화끈한 승전보를 전해 주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리처드와 꿈꾸는달 그리고 하얀이리가 각각 5백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첫 공격 목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럼 우리도 움직이도록 한다.”

리처드나 꿈꾸는달 그리고 하얀이리가 이끄는 규모보다는 작은 350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앞서 떠난 세 사람과 같은 이유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니, 알마리온이 이끄는 350명의 병력은 차트란 부족의 중심인 대차트란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는 차트란족은 로엔 왕국과는 두렌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기에 왕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차트란족 일부는 왕국에서 여러 사정으로 국경을 넘어 도주한 왕국의 백성들이기도 하였기에 더욱더 그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충분한 방어 시설을 갖춰 놓고 있어 공략을 하기가 꽤나 번거로운 상황이었다.

차트란족의 근거지 또한 해자垓字 같은 것은 없었지만 견고한 석성으로 지어진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어 그동안 계속되는 외부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자신들을 지켜 오고 있었다.

이런 차트란족을 공략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이 불과 350명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런 곳에 저런 석성이 존재하다니 이상하군요.”

“저런 형태의 석성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오?”

들에핀꽃의 말에 알마리온이 물었다.

“맞아요. 여기 있는 냇가의돌의 부친이시자 우리 검은발 부족의 최고 현자이신 무거운돌 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주 오래 전에 로엔 왕국의 선조들이 초원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 쌓았던 성들이라고 들었어요.”

“아! 그렇소? 하면 저러한 성을 공략하는 일은 어떠했소?”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 정도 병력으로 저런 성을 공략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요. 만약 다른 곳으로 간 전사들까지 모두 합류한다면 모를까…… 아니,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 규모라면 이 안에 수만 명은 살고 있을 것이니 우리의 전력으로는 아예 불가능해요.”

단언하듯 말하는 들에핀꽃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러한 석성을 이용하여 방어하는 다른 게르혼 부족들과의 전투를 수차례 경험을 하였기에 이 정도의 병력으로 석성 안에서 항거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은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할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묘한 웃음으로 그런 들에핀꽃을 바라보며 반문하였다.

“그렇소?”

“물론이에요. 전 솔직히 당신이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석성을 이 정도의 병력만으로 공략하려고 드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자신의 양부인 용맹한영혼 또한 이 정도 규모의 석성을 공략하기 위해 최소한 1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하여 몇 날 며칠을 공략한 이후에야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을 정도다.

한데 되묻는 알마리온의 표정이 참으로 묘했다. 그에게는 이미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꼭 그런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저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오.”

“도대체 무슨…….”

“자! 일단 갑시다.”

“당신 설마! 설마 이 인원을 가지고 저 석성을 정면공격하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모두가 설마 하는 생각에 알마리온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눈앞에 보이는 석성을 단 350명의 전력으로, 그것도 정면으로 공격을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훗! 때로는 미친 짓이야말로 최선의 해결책일 때도 있지 않겠소? 자! 그럼 갑시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평소의 그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기에 다들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로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그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소, 속히 저분을 호위하라! 어서!”

“예? 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들에핀꽃이 달려 나가자 그 뒤를 따라 모두가 알마리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끔가다 말이야.

-가끔 뭐?

실레스틴의 말에 셀레아나가 또 무슨 재미난 이야길 해 줄까 싶어 이내 물었다.

-이 녀석이 하는 행동을 보면 어째 예전의 그놈과 너무나도 닮은 것 같지 않아? 마치 예전의 그놈이 다시 환생한 것처럼 말이야. 안 그래?

-흠…… 네 말을 들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아니, 예전 그놈은 지금 이놈보다 좀 더 증세가 심했지. 그놈이 처음 일을 벌였을 때는 단 다섯 명만으로 일을 벌였으니까 말이야.

‘훗!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

‘그분도 꽤나 엉뚱한 분이셨나 보군요.’

-열 받쳐서 그랬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레스틴 님?’

-그게, 그 녀석이 짝사랑하던 여인이 성주에게 납치되어 갔거든. 그녀를 구한답시고 다짜고짜 성으로 달려가서는 성을 온통 뒤집어 놨던 거야.

‘아…… 그랬군요.’

-어쨌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놈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생겼고, 결국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이지.

‘훗! 그랬군요. 하지만 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그럴 인물도 되지 않고 말입니다. 지금은 단지 이것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할 뿐이지요.’

-넌 모르겠지만 그때의 그도 그러했지.

단지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인이 성주에게 납치되어 가자 울컥하는 마음에 일을 벌였지만, 그의 능력에 반한 많은 이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결국 한 명 두 명 그의 곁에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그는 더 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곁에 모여든 자들에 의해 자신만의 대제국을 건설해 나갔던 것이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대충 성벽 위에서 활을 쏘아도 도달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도착하자 알마리온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를 따르기 위해 달려온 들에핀꽃과 적막한초원 등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고…….”

“궁금하지 않소?”

“……?”

“난 늘 궁금했소. 내가 지닌 힘의 크기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 말이오.”

상급 정령술사가 된 이후 지금까지 알마리온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힘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정작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처음으로 확인하려 하였다.

함께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그 자리에 머물게 한 알마리온은 검을 뽑아 들고는 천천히 성 앞으로 걸어갔다.

‘실라이론.’

-오랜만이구나?

‘그렇군요.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호호호! 좋지! 오늘 오랜만에 힘 좀 써 보겠구나?

정신적으로 교감이 되어 있었기에 알마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면 곧바로 그것을 알 수 있는 실라이론이었다.

‘일단 나의 목소리가 저들 모두에게 똑똑하게 들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알았어.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실라이론은 평소 같으면 투덜거릴 부탁에도 신이 나서 들어주었다.

“모두 들어라! 난 위대한 메코이족의 대족장이자 카빌란 제국의 백작이며 아울러 로엔 왕국의 후작이기도 한,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다!”

갑자기 온 세상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뒤에 남아 있던 들에핀꽃이나 적막한초원 그리고 병사들은 물론 성벽 위에서 망을 보던 차트란족 전사들 또한 깜짝 놀라며 웅성거렸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 위대한 메코이족의 대족장이자 카빌란 제국의 백작이며 아울러 로엔 왕국의 후작이기도 한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는 오늘 너희 차트란족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저런 미친놈! 감히 우리 차트란족이 그렇게 우습게 보였다 이 말이지?”

성벽 위에서 밤새 경계를 하는 전사들을 통솔하던 점박이얼굴의 표정은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것에서 빠르게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줌 거리도 안 될 병력을 끌고 와서는 새벽 댓바람부터 말도 되지 않는 짓거리를 해 대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그를 비롯한 모두가 계속된 알마리온의 말에 분노를 느끼며 얼굴을 붉히거나, 아니면 화를 참지 못한 몇몇 전사들의 경우에는 그를 향해 활을 쏘아 댔다.

“뭔가? 무슨 일인가?”

“오셨습니까?”

막 조치를 취하려던 점박이얼굴은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대전사인 바위주먹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체 이 무슨 소란인가?”

“그것이…….”

점박이얼굴이 막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 할 때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 위대한 메코이족의 대족장이자 카빌란 제국의 백작이며 아울러 로엔 왕국의 후작이기도 한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는 오늘 너희 차트란족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차트란족의 대족장은 성을 나와 항복하라! 항복하면 너희 모두 무사하겠지만, 그러지 않고 대응할 경우에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저런 미친…….”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여전히 잠자리에 들어 있던 바위주먹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황급히 달려 나왔지만 그가 본 모습은 너무나도 황당한 모습이었다.

완전히 날이 밝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성벽 위에서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 위대한 메코이족의 대족장이자 카빌란 제국의 백작이며 아울러 로엔 왕국의 후작이기도 한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는 오늘 너희 차트란족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차트란족의 대족장은 성을 나와 항복하라!”

“무슨 일인가? 이게 무슨 소란인가!”

때마침 차트란족의 대족장인 빛나는별이 허겁지겁 성벽 위로 올라오며 물었다.

“그것이…….”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나 원 참…….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썩 저놈들을 잡아 내 앞에 무릎 꿇리지 않고!”

빛나는별 또한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어이없어하다가 분노가 치밀었는지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긴 이런 어이없는 일을 당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향해 활을 쏴라! 그리고 바위주먹! 그대는 전사들을 이끌고 나가 저놈을 당장 잡아 오라!”

“예! 대족장님!”

빛나는별의 명령을 받은 바위주먹이 전사들을 이끌고 성벽 위를 내려가기 위해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무슨……!”

비록 익스퍼트는 아니었지만 그에 근접해 있는 바위주먹이었다. 만약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단번에라도 익스퍼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그였으니만큼 갑자기 등 뒤쪽에서 느껴지는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쾅!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한꺼번에 치솟아 올랐다.

“피, 피해!”

“으아악!”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땅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성벽 일부가 함몰되기 시작하면서 그 위에 서 있던 전사들이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무너지는 성벽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엄청나군.’

-호호호! 어때? 볼만하지?

볼만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가공스러운 모습이었다. 전력을 다하긴 하였지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두께가 1미터에 달하는 나무로 만든 성문은 물론, 만약을 위해 나무로 된 성문 뒤에 덧대듯 설치되어 있던 30센티미터 두께의 철문까지도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은 물론, 성문이 위치하였던 곳 자체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문 주변의 성벽 또한 일순간에 큰 힘이 가해지자 이를 감당하지 못한 채 모래로 변해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자 그 위에 쌓아 올려져 있던 성벽들이 빈 공간으로 무너져 내려앉았다.

‘이것이 정녕 내가 한 일이란 말인가?’

분명 자신이 한 일이었고,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도저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기 힘들었다.

그가 그럴 정도이니 이를 지켜본 다른 사람들이나, 이러한 가공할 공격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은 어떠하겠는가.

“아직도 항복할 생각이 없는가?”

꽤나 긴 시간이 지난 후 알마리온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주변에 울려 퍼졌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다시 한 번 힘을 끌어모았다.

“피, 피하십시오! 어서!”

다시 한 번 감당할 수 없는 거력을 느낀 바위주먹이 자신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고 있던 대족장인 빛나는별의 등을 밀쳐 댔다.

“으으…….”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빛나는별이 바위주먹의 떠밀림에 밀려 정신없이 몸을 피하고, 다른 전사들 또한 이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할 무렵 다시 한 번 엄청난 폭음과 함께 성곽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뿌옇게 솟았던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저것이 과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인지 의심되는 광경을 보아야만 했다.

이미 한차례 공격으로 성벽이 일부 무너져 있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마치 푸딩Pudding을 스푼으로 떠낸 듯 깔끔하게 팬 채 사라진 모습에 사람들은 완전히 패닉Panic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경고는 없을 것이다. 항복하라! 그리고 나 대메코이족의 대족장이며 로엔 왕국의 후작이며 아울러 제국으로부터 이 땅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나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를 너희의 진정한 지도자로 받들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 차트란족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치 않게 될 것이다!”

“으으…….”

알마리온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미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빛나는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저 온몸을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니, 비단 그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상태였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대전사인 바위주먹이었다. 그 또한 워낙 충격적인 일을 접한 상태인지라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족의 대전사인 그는 4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여러 역경과 고난을 경험한 때문인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머, 멈추시오! 아니, 멈추십시오!”

“그대는 누구인가?”

“나, 난, 아니 전 차트란족의 대전사인 바위주먹이라고 합니다. 메코이족의 대족장께서는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다시 한 번 차가운 알마리온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저, 저희 대족장님께서 아직……. 부디 이렇게 무릎 꿇고 청을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발!”

부족의 대전사로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처럼 남 앞에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던 바위주먹이다. 아니, 이처럼 누구에게 간청을 해 본 적도 없었던 그다.

하나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만이 자신은 물론, 부족 전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그만큼 알마리온이란 존재는 이들에게 있어서 항거 불능의 절대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좋다. 시간을 주도록 하지. 하나 단 1시간뿐이다. 1시간 안에 너희 차트란족의 모두가 내 앞에 무릎 꿇지 않을 때에는 내 이미 선언한 대로 너희 부족 전체를 이 땅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알겠나?”

다시 한 번 못을 박듯 말하는 알마리온의 목소리는 한겨울 초원을 몰아치는 북풍한설보다 더욱 차갑고 매서워 감히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알마리온은 몸을 돌려 뒤에 남겨져 있는 들에핀꽃과 적막한초원 등이 모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훗! 다들 너무 긴장하는 것 아닌가?”

놀란 토끼 눈을 뜬 채 반쯤 입을 벌리고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들에핀꽃에게 살짝 윙크를 한 알마리온이 장난처럼 말하였다.

“당신…… 인간이 맞나요?”

“무슨 말이오?”

“어떻게 인간이…… 아무리 익스퍼트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혹 당신은 마법사이기도 한가요?”

“하하! 마법사는 아니오. 다만…….”

아무리 자신의 아내라고는 해도 주변에 자신을 지켜보는 자들의 눈이 너무 많았기에 알마리온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아맞힌 이는 다름 아닌 냇가의돌이었다.

검은발 부족의 대현자를 아버지로 둔 냇가의돌이 알마리온이 익스퍼트가 아닌 정령술사임을 정확히 맞혔다.

“정령술사. 그래, 맞아! 정령술사!”

“…….”

아무리 대현자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정령술사임을 알아낸 냇가의돌이 대단하게 보였다.

“정령술사?”

들에핀꽃과 적막한초원은 물론, 함께하던 모든 전사들의 시선이 냇가의돌에게 쏠렸다.

정령술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던 것이다.

냇가의돌이 슬며시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설명을 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잘못 알고 있군요. 같은 익스퍼트라 해도 보일 수 있는 능력에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모르오?”

“그, 그렇긴 하지만…….”

그의 말처럼 같은 익스퍼트라 하더라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능력은 아무리 최고 수준의 익스퍼트라 하더라도 절대 보일 수 없는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혹 검의 주인이라면 모를까.’

가능성이 있다면 단 하나. 바로 검의 주인이라는 마스터일 경우뿐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결코 잘못 안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알마리온의 말에 반발하려 하였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을 접하자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여 그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일단 저들에게 시간을 주기로 하였으니 기다리도록 하지.”

“…….”

알마리온이 주변을 둘러보다 앉기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발견하고 그곳에 앉자 들에핀꽃 등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고, 그 뒤에 다시 전사들이 모여들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으으…….”

알마리온이 보여 준 상상을 불허하는 막강한 힘에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빛나는별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대족장님! 대족장님!”

“으…….”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그, 그자는……?”

조금 진정이 된 빛나는별이 가장 먼저 물은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능력을 보였던 알마리온에 대해서였다.

“성 밖에 있습니다.”

“으음…….”

공포를 안겨 준 알마리온이 여전히 성 밖에서 시위하고 있다는 말에 빛나는별은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어, 어찌하면 좋겠는가? 말해 보게! 내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비록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나름 부족을 잘 이끌어 온 대족장이었다.

현명하거나 패기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는 성격 또한 아니었다.

아니, 바위주먹은 대족장이 이처럼 두려움에 빠져 허둥대는 모습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 말해 보게! 자, 자네라면 지,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할 것인지를 말이야.”

“제 솔직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무, 물론이네!”

“부족의 대전사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그저 죄스러울 뿐이지만…… 솔직히 전 그자를 감당할 능력도, 자신도 없습니다.”

“으음…….”

바위주먹의 말에 빛나는별은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부족의 대전사인 그가 이처럼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비단 그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자에게 항복해야 하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대족장님.”

“…….”

바로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알마리온이나 혼테르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이다.

알마리온이 혼테르의 영주가 되기 이전부터 이들은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자들과 거래를 하여 왔고, 그러한 거래를 통해서 큰 이익을 얻어 왔다.

하나 알마리온이 영주가 되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벌인 일로 인해 차트란족 또한 큰 타격을 잠시 받았지만 이후 정식으로 교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이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지만 자신들이 좋아지는 것 이상으로 혼테르는 더욱더 발전하였다.

무엇보다도 카빌란 제국에서 그에게 이스턴이라는 성과 함께 백작의 작위,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영지로 정해 주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이후부터 이들 차트란족은 언젠가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하였고, 나름 차분하게 준비를 하여 오고 있었다.

하나 이처럼 빠르게, 그리고 전격적으로 자신들을 공략해 올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하였기에 내심 당황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알마리온이 보여 준 가공할 위력의 힘에 이들은 완전히 전의가 꺾여 버리고 만 것이다.

“흩어져 있는 부족들을 끌어모아도 힘들 것 같은가?”

제발 그것이 가능하다고 대답해 주길 바라는 눈빛이었지만 바위주먹의 대답은 그러한 바람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설사 전령을 보내 부족 전체를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그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부족의 전사들이 모이기도 전에 이 성은 물론, 성안의 모든 부족민들이 그자의 손에 의해 몰살을 당할 것입니다.”

“으음…….”

투석기를 이용한 공격에도 견뎌 낼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진 성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의 가공할 공격력에는 마치 수수깡을 세워 놓은 듯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 눈을 뜨고 지켜봤으니 달리 반발할 말도 없었다.

“결국…….”

다른 부족에 정복당한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는 부족 전체가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족장인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은 정복자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노예로 팔려 나갈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정복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같은 존재는 께름칙한 존재이고, 또한 만약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들은 제거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지만…… 결단을 내리실 것이면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재촉하는 말을 하는 바위주먹을 바라보는 빛나는별의 눈빛 속에는 원망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하나 빛나는별 또한 그가 왜 이처럼 자신의 결단을 재촉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가, 그리고 그의 선조들이 대족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누렸던 많은 특혜는 단지 그들이 부족 내에서 가장 강하였기에 누릴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족장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라는 뜻으로 누렸던 특혜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런 대족장이 해야 할 책임 중 하나는 부족 전체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알마리온에 대해 나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이들이었기에 알마리온이 영주가 되어 처음 영지에 도착하였을 때 그가 벌였던 일들과, 그가 소렌토에서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은 결정을 할 경우, 자칫 감당할 수 없는 화를 당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모르지 않지만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 알겠네. 나를 좀 부축해 주게나.”

“…….”

많이 진정이 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려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던 빛나는별이 바위주먹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세나. 자네 말처럼 조금이라도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

“죄송합니다, 대족장님.”

비록 빛나는별에게 결단을 재촉하기는 하였지만 바위주먹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먹거렸다.

“그의 말처럼 성안에 머물고 있는 부족민들 전체를 불러 모으게.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말이네. 알겠는가?”

“예…… 대족장님.”

“저기 보십시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성안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에 다들 차트란족의 대족장이 전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성을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차트란족 사람들이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성을 나오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

전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알마리온의 앞에 다가온 빛나는별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전사들을 물러나게 하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바위주먹에 이끌린 빛나는별의 가족들이 그의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대가 차트란족의 대족장인가?”

너무나도 담담하였기에 오히려 더욱 공포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그렇습니다. 차트란족의 대족장인 빛나는별이라고 하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아, 아옵니다.”

“내가 누구인가?”

“메, 메코이족의 대족장이시며…….”

자신이 알고 있는 알마리온의 신분을 말하려 하였지만 그의 말은 이내 알마리온에 의해 끊겨 버렸다.

메코이족의 대족장이며 혼테르의 영주로 왕국의 후작이며 아울러 제국의 백작이란 그의 신분 따위를 물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원한 대답은 그가 차트란족을 정복한 정복자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묻지. 내가 누구인가?”

“그, 그것이…….”

“…….”

“우리 차, 차트란족의 주, 주인이십니다.”

“내가 차트란족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 그렇습니다. 주, 주인님.”

자신이 차트란족의 주인임을 인정한 빛나는별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알마리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너희 차트란족의 대족장인 빛나는별이 내게 말하길 내가 너희 일족의 주인임을 인정하였다.”

크게 소리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의 말소리는 모두의 귀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에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나서라.”

“…….”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침묵만이 감돌 뿐, 그 누구도 감히 몸을 일으키는 자가 없었다.

“마지막 기회다. 지금 나서는 자에게는 가족들을 데리고 부족을 떠날 기회를 주겠다. 하나…….”

구태여 뒤의 말을 소리 내어 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인가?”

“…….”

“묻겠다. 내가 누구인가?”

빛나는별에게 하였던 질문을 이번에는 차트란족 모두에게 하였다. 하나 이번에도 차트란족 그 누구도 이미 알고 있는 답임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답하는 이가 없었다.

“…….”

비록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긴 하였지만 빛나는별은 알마리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기에 알마리온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차, 차트란족의 주인님이십니다!”

“…….”

혹여 알마리온이 기분을 상하여 부족민들에게 해코지라도 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빛나는별이 큰 소리로 그가 차트란족의 주인이라고 크게 외쳤지만 그 누구도 이를 따라 하는 이가 없었다.

이에 더욱 당황한 빛나는별이 이전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차트란족의 주인님이십니다!”

“차, 차트란족의…….”

여전히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단지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중얼거린 때문에 웅성거림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에 빛나는별과 바위주먹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차트란족의 주인님이십니다!”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이 차트란족의 주인임을 크게 외치자 그제야 모든 차트란 부족민들이 또렷한 목소리로 알마리온이 자신들의 주인임을 외치기 시작했다.

“차트란족의 주인님이십니다.”

몇 차례 똑같은 말들이 계속되자 이제는 모두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알마리온이 차트란족의, 바로 자신들의 주인이라는 말을 외쳐 댔다.

“그만!”

“…….”

바로 직전까지는 마치 신을 숭배하는 신자들의 광적인 종교 행사와도 같았던 것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빛나는별.”

“예, 주인님.”

“그대는 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차트란족의 대족장이오. 내가 없을 때에는 나를 대신하여 차트란족을 이끌어야 할 것이오. 알겠소?”

빛나는별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잔뜩 커졌다. 그는 자신과 가족들이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려 가는 식으로 제거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가 앞으로도 자신의 지위를 그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모두 무사할 수 있게 되자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충심을 다해 주인님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메코이족과 차트란족은 형제가 될 것이오.”

부족 간에 형제가 된다는 것은 두 부족이 동등한 자격을 갖게 될 것임을 뜻하였다. 또한 두 부족은 앞으로 공동 운명체가 되어 흥하게 되더라도 함께 흥할 것이며, 망하게 되더라도 함께 망하게 될 것임을 뜻하였다.

하나 이럴 경우 한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메코이족의 대족장은 어디까지나 알마리온이었다. 따라서 두 부족이 형제의 부족이 될 경우 알마리온과 빛나는별의 지위는 동등해지게 됨을 의미했다. 물론 이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메코이족의 대족장의 자리를 다른 이에게 물려줄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경우 그를 부르는 호칭은 칸Khan이 되는데, 이는 군주를 뜻하는 말이었다.

보통 2개 이상의 부족을 통합하면 칸이라고 하였으며, 10개 이상의 부족을 통합한 경우에는 그레이트 칸Great Khan, 그러니까 대군주라고 하였다.

용맹한영혼이 이끄는 검은발 부족에 의해 통합된 초원의 부족들은 모두 32개 부족이며 그 영역은 거의 카빌란 제국의 3분지 2에 해당하였다. 이처럼 광대한 영역을 장악한 대군주, 그레이트 칸이 바로 용맹한영혼이었다.

“빛나는별.”

“예, 칸이시여!”

빛나는별 또한 알마리온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그에 대한 호칭을 주인님이 아닌 통상적으로 여러 부족들의 지도자인 칸이라고 칭하였다.

“사람들을 보내 모든 차트란족의 전사들을 불러 모으시오. 그리고 차트란족에 속한 일부 소부족들 중 세 곳에는 이미 나의 명을 받은 전사들이 가 있을 것이오. 그들을 정중히 이곳까지 모셔 오도록 하시오.”

이미 다른 곳에도 전사들을 보내 공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금 기분이 착잡해져 버린 빛나는별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칸이시여.”

“그럼 이만 성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차트란족의 대족장인 빛나는별의 안내를 받으며 당당하게 성으로 들어서는 알마리온의 뒷모습이 유난히도 커 보였다.

모든 능력을 개방함으로써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차트란족을 복속시킨 알마리온은 다음 목표를 하이란족으로 정하였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하이란족을 다음 목표로 하겠다는 말에 내심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는 꿈꾸는달이었다.

“내 생각도 같다. 그들이 비록 우리 두 부족을 축출하고 우리의 형제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형제들을 해방시키고 또한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 준 그놈들을 응징하고 싶지만 하이란족은 6개 부족을 통합한 대부족이야. 섣부르게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자칫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일일 것이다.”

하얀이리 또한 꿈꾸는달과 같은 생각이었다.

6개 부족을 통합하여 20만에 달하는 부족민을 거느리고 있는 하이란족은 전사의 숫자만 하더라도 4만이 넘었다. 그에 비해 알마리온은 비록 3개 부족을 통합하였다고는 하여도 전사의 수가 5천 정도. 상식적으로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나지?”

“리처드 님,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패기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맞아, 애송이 놈. 네가 강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무작정 힘으로만 밀어붙이다가는 언젠가 크게 다칠 것이다.”

“쯧! 그렇게 겁을 내니까 살던 집을 빼앗긴 것 아니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화를 내다 못해 당장 결투라도 벌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리처드나 하얀이리나 보통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 이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상하게 배포가 잘 맞아서인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가 조마조마할 정도로 말을 막 하였지만 오히려 두 사람은 그런 주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더욱 재미있어하였다.

“흥! 네놈도 네 집을 못 챙겼으면서 말은 참으로 잘하는구나?”

“하하하. 내 집이야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빼앗긴 것을 어쩌란 말이오? 하나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미 포넬을 떠나온 지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상태에서 리처드의 복수를 무한정 뒤로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에게도 나름 희망을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알마리온은 이번 원정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면 그의 복수를 위해 힘을 보태겠다는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 너 그 약속 잊지 않았겠지?”

“노인네, 그럼 빠질 생각이었소?”

“하하. 빠지긴. 내가 언제 또 저 먼바다를 나가 볼 일이 있을 것이라고 빠지겠어?”

“당연하지요. 노인네가 빠진다고 하면 내 당장 이 자리에서 그 짧은 다리를 확 분질러 놓을 줄 아쇼.”

“하하하. 인석아, 내 다리뼈는 워낙 굵어서 그러려면 네 힘 가지고는 턱도 없느니라. 하하하!”

두 사람의 객쩍은 농질에 굳어졌던 분위기가 잠시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하나 안색을 굳힌 리처드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는 다시금 경색이 되었다.

“이야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새긴 하였지만 하이란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저들은 우리의 행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시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바위주먹이 침착한 눈빛으로 리처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간단한 것이오. 노인네가 말하길 얄란족의 근거지였던 곳은 바로 이 산악 지역이오.”

정확한 지도라기보다는 대략적으로 산이 어디에 있고, 강이나 내천이 어디에 있으며, 눈에 띄는 지형지물 같은 것을 표시한 정도의 지도였다.

비록 그렇게 대략적으로 그려진 지도였지만, 다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자들이었기에 리처드의 설명을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얄란족이 살던 곳은 오라클 오브 오딘 산맥의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산의 서쪽 경계면은 매우 가파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완만해지다가 결국 구릉으로 이루어진 너른 지역이 바로 메코이족의 땅이었던 곳이다.

하이란족이 메코이족과 얄란족을 정복한 데에는 이들 두 부족의 땅도 땅이었지만, 이들 두 부족의 능력을 그만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메코이족은 알다시피 농사를 잘 짓기로 유명한 부족이었고, 얄란족은 쇠를 잘 다루기로 유명한 부족이었다.

초원 서쪽에서 검은발 부족의 세가 나날이 커지고 주변 부족들을 하나 둘 정복해 나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하이란족 또한 주변의 부족들을 정복하면 세를 키워 나가기 시작하였다.

부족의 덩치가 커지면 당연히 그만큼 필요한 것도 많아지기도 하였지만, 문제는 정복 전쟁을 지속하다 보니 자연 식량을 생산하거나 아니면 물자를 생산하는 일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 부족한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부족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코이족이나 얄란족은 이들 하이란족에 있어서는 최상의 정복 대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두 부족은 하이란족에 의해 정복당하였고, 이 두 부족은 오딘 산맥을 넘어 로엔의 영토로 피난을 오게 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이들과 이웃하고 있는 차트란족이 하이란족의 정복 전쟁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차트란족에는 다른 대부분의 게르혼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강력한 방어 시설, 즉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건설된 석성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하이란족의 행보를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차트란족의 대부분의 전력이 북쪽에서 남진하는 하이란족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북쪽으로 집중되어 있는 상황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알마리온은 과감한 행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이란족의 주력부대는 평원 지역에 위치한 이 세 곳의 성에 집중되어 있소. 그렇지 않소?”

리처드가 손으로 가리킨 세 곳의 성은 피손, 말론, 리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성들이었다.

이 세 곳의 성에는 각각 5천 정도의 하이란족 전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3천 정도의 차트란족 전사들이 대치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두 곳에는 각각 2천 정도의 병력만 주둔시켜 놓은 것으로 알고 있소.”

“……!”

바위주먹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도 혼테르의 사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다른 그 누구보다 혼테르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처럼 속속들이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맞소?”

“맞습니다…….”

“그동안 그대들이 하이란족을 반격하지 못한 이유는, 아니 사실 반격을 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어쨌든 역공을 취하지 않은 것은 전력이 적을 압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오.”

“그 말씀 또한 맞습니다.”

하이란족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차트란족은 굳이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 차트란족은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워할 정도였으며,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는 것은 이들 차트란 부족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었다.

하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던 것이다. 하이란족에 패배하여 탈출에 성공을 한 메코이족과 얄란족의 수는 전체 부족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나머지 부족민들은 하이란족의 노예가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가축처럼 부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단 이들 두 부족의 영역을 되찾기만 한다면 그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세를 불릴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차트란족까지 합류를 할 경우 순식간에 이들의 세력은 몇 배나 불어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하이란족이라 하더라도 쉽게 메코이, 얄란, 차트란 연합 세력을 상대할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검은발 부족이 지금처럼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하이란족은 이곳이 아닌, 서쪽에 더 많은 전력을 집중시킬 것이니 이번 기회가 아니면 실지를 되찾기 힘들게 된다는 것이지.”

“…….”

모두 리처드의 설명을 듣고는 수긍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친김에 마저 설명할까?”

“하하. 그렇게 하세요, 형님.”

애초부터 이번 정복 전쟁은 철저하게 리처드가 모든 계획을 세웠다. 이번 정복 전쟁이 끝난 후, 그 지역을 안정시키면 곧바로 자신의 복수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이 이번 정복 전쟁을 주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 리처드의 성급함에 알마리온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복수를 원한다 하더라도 리처드는 일국의 왕자였던 신분. 그것도 하루하루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힘을 키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던 인물이다.

“먼저 병력을 여섯으로 나누는 것이 좋겠군. 두 무리는 각각 5백 명으로 하고…….”

달빛조차 없는 밤에 산길을 이동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그러한 산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행여 작은 소리라도 날까 두려워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얼마나 준비를 단단히 하였는지 옷자락 끌리는 소리까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옷자락을 줄로 단단히 여며 놓은 것은 물론 각자의 무기들 또한 천으로 꽁꽁 싸매 쇳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였을 정도였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이동하던 이들 일행이 드디어 목적한 곳에 도착을 하였는지 잔뜩 몸을 숙인 채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주변 정찰은?”

아주 작은 말소리였지만 귀를 기울이면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주변에는 이들 무리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소곤거림을 들을 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쳤습니다.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좋아. 그럼 몸을 숨기도록 한다.”

“예.”

꿈꾸는달의 명령에 따라 5백 명으로 구성된 매복 부대는 철저하게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고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지.”

“예.”

약속된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한 리처드가 공격 명령을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전사 한 명이 활을 들어 힘껏 당기기 시작했다.

핑! 삐이이이이이익!

“와아아!”

“와아!”

“쏴라!”

퉁! 퉁! 퉁! 퉁!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호각 소리가 조용하기만 하던 산중의 침묵을 날카롭게 깨뜨렸다.

아니, 그와 거의 동시에 어둠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2천의 전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고, 방패에 칼을 부딪치면서 최대한 요란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힘들게 옮겨 온 소형 트레뷰셋 20기에서 일제히 불붙은 기름 항아리가 허공을 가르며 마치 유성처럼 하이란족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를 향해 떨어졌다.

한데 그 방향이 요새의 한 쪽을 제외하고는 세 방향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최대한 소란스럽게 하면서 전사들을 접근시키도록 하시오. 그리고 활을 든 전사들은 사정권 안에 들어가면 무조건 활을 쏘도록 하고 말이오.”

“예.”

다시 한 번 리처드의 명령이 내려지자 바위주먹은 그의 명령을 모두에게 전달하였고, 그 명령을 받은 전사들은 더욱 크게 고함을 지르며 무기를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탁! 탁! 탁! 탁!

“와아아!”

“와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 공격을 당함으로써 이미 당황한 하이란족이었다.

더욱이 달빛조차 없는 칠흑 같은 밤에 자신들은 곳곳에 떨어지기 시작한 화공火攻으로 인해 그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난 반면 기습 공격을 감행한 적군의 모습은 아직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다는 것도 이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거기에 들려오는 소음만으로 보아서는 기습 공격을 감행한 적군은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자신들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나 이들 또한 그동안 전장을 누비면서 때로는 승리를, 때로는 패배를 경험하였던 노련한 전사들이었기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어느새 적지 않은 수의 전사들이 요새 위로 올라가 활을 쏘며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제법 잘 훈련되어 있군.”

“저들 모두 몇 년째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전사들입니다.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훗! 제법 잘 훈련된 적들이긴 하지만 저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노인네, 준비 다 되었소?”

“클클클! 보면 모르냐? 당장이라도 저놈들 골통을 부숴 버리고 싶어 움찔거리는 이 몸을 말이다.”

“하하. 노인네도 하여간…… 알겠소. 샘! 우리가 움직이면 근사한 녀석으로 한 방 부탁한다. 알겠냐?”

“예, 스승님.”

“그럼 뒤를 부탁하겠소.”

“알겠습니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건투는 무슨! 그런 것은 적이 어느 정도 위협적일 때나 쓰는 말이오. 자! 노인네! 갑시다!”

“하하하! 이놈들! 여기 얄란족의 대족장인 나 하얀이리가 네놈들의 대갈통을 부숴 주러 친히 왕림하셨으니 얌전히 머리통을 내밀고 있거라! 하하하하!”

리처드와 얄란족 전사 5백 명으로 구성된 돌격대가 어둠을 뚫고 하이란족의 요새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자 샘은 알마리온으로부터 건네받은 마법 아이템을 사용하여 요새 일부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 한 번의 마법 공격은 간신히 전의를 찾아 가고 체계적인 반격을 가하려던 하이란족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

이처럼 단 한 번의 마법 공격에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하이란족 전사들은 요새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적에 대한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야압!”

돌격대의 선두에 서 있던 리처드에게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검이 순간 밝은 빛을 뿌렸다.

비록 나무로 만든 요새였지만 나름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만들어진 문이었지만 쇳조각도 단번에 잘라 내 버리는 마나 소드를 감당하지 못한 채 그대로 두 조각이 나 버렸다.

“돌격!”

“우와아아아!”

단번에 파괴된 요새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자 허둥대는 하이란족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죽어!”

“크하하하! 이놈들! 그동안 잘도 우리 형제들을 노예처럼 부렸겠다! 오늘 네놈들 모두 그 대가를 치르리라!”

복수의 칼을 갈아 오며 때를 기다리던 얄란족 전사들은 자신의 형제들을, 부모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부린 하이란족에 눈곱만큼도 자비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항을 하려 했지만 익스퍼트의 위력은 가공하다 못해 공포, 그 자체였다. 또한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얄란족 전사들의 광기에 찬 공격은 이미 전열도 무너졌고, 전의마저 상실한 하이란족의 전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하이란족 전사들은 적의 공격이 집중되지 않은 곳을 이용하여 무작정 탈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나 이들의 도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메코이족 전사들이 정신없이 도주하고 있는 하이란족 전사들이 나타나자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이다! 공격! 공격하라!”

“우와아!”

“와아! 원수를 갚자!”

“으악!”

“으아악!”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메코이족 또한 이들 하이란족에 대해서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에 이들에 대한 응징은 잔인하리만치 가혹하였다.

사실 숫자상으로만 본다면 매복하고 있던 메코이족이나 도망가는 하이란족의 수나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하나 상대는 이미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그 누구의 지휘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도주하였다는 것이 마일드 성의 차트란족과 대치하던 2천의 하이란족 전사들에게는 최후의 실책이었다.

그리고 그 최후의 실책의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하였다.

전멸.

마일드 성과 마주하고 있던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2천의 하이란족 전사들 중 이날 살아서 돌아간 전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렇듯 마일드 성과 대치하고 있던 하이란족 전사들이 살육을 당하고 있던 그 시간.

알마리온이 지휘하고 있는 또 다른 병력은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 버린 전투에 완전히 맥이 빠져 버렸다.

투석기로도 단번에 파괴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진 석성도 버티지 못한 알마리온의 힘을 한낱 나무로 덧대어 만든 요새가 버틸 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나름 힘 조절을 한다고 하였지만 단번에 요새의 절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자 요새 안에 있던 하이란족 전사들은 대번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을 하였던 것이다.

덕분에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진 않았지만, 복수의 칼날을 갈아 온 메코이족 전사들에게는 큰 실망만을 안겨 주어야만 하였다.

하나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얄란족의 영역이었던 곳과 메코이족의 영역이었던 곳에는 아직도 이들이 상대해야 할 하이란족 전사들이 남아 있었다.

전장을 정리한 이들은 마일드 성과 스피크 성에 주둔하고 있던 차트란족의 전사들을 합류시켜 우선적으로 얄란족의 영역을 수복하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광풍狂風.

그것은 한마디로 광풍이었다.

전격적으로 시작된 알마리온의 정복행은 이처럼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휩쓸어 파괴하는 미친바람처럼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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