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발락 기사단 (49/70)

발락 기사단

“기사단을 만들까 합니다.”

“기사단을 말씀이십니까?”

같은 남작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선임인 발락 성의 성주인 기브엘 폰 파크만 남작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반문하였다.

기사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드시 말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물론 전장에서 항상 말을 타고 적진을 돌파를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란 항시 보유하고 있어야 했고, 그것도 한두 필이 아니라 최소한 서너 필의 말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거기에 각종 무구들까지 갖추려면 그 비용은 기사 한 명당 최소 5백 골드 이상이나 필요했다.

말이 좋아서 5백 골드이지 이 정도 돈이면 6인 가족이 50년을 사용할 수 있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때문에 기사가 된다는 것은 그만한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여기에 설사 이러한 것들을 모두 갖출 수 있다 하여도, 이 외에도 검술과 전술, 글과 춤 그리고 예절과 역사교육 등 다양한 교육까지 받아야 하기에 기사 한 명을 키워 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1천 골드라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만 했다.

때문에 기사들에게는 임금 대신 장원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사들마다 나누어 준 장원에서 세금을 거둬 필요한 경비를 충당케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중소 규모 영지에서는 기사를 두긴 하여도 기사단을 두지는 않고 있었다. 기사의 수가 많을수록 자연히 나누어 주어야 할 장원이 많아질 것이고, 그것은 곧 영주 자신의 수익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모두 직영지였기에 각 성별로 행정을 달리하였기에 그동안 각 성에서 보유한 기사는 불과 서너 명이 전부였다.

따라서 이제 발락 공작 영지에 속한 다섯 곳의 성을 모두 합쳐도 기사의 수는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왕국에서는 하나의 기사단이라 해도 좋을 규모이지만 제국에서는 최소 쉰 명 이상의 기사를 보유하였을 때, 이를 기사단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부족한 숫자의 기사를 고용할 경우 그만큼의 장원을 내주어야 했고, 그것은 곧 성의 수입과 직결된 문제였기에 다소 난색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영지의 수입이 많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기브엘의 목소리보다 좀 더 굳어 있는 쿠루프 성의 성주인 아이케 폰 코렐 남작이었다.

“기사들에게 장원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들에게 당연히 지급해야 하는 장원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알마리온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다섯 성의 성주들과 관리들 전원이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면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고, 또 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장비는 모두 영주가 직접 지급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매달 일정 금액의 임금이 지불될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는 이러한 형태로 기사단을 운영한 일이 있었기에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기사들의 질이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이제 주종 관계도 단순히 충성심만으로 묶을 수는 없는 그러한 시대입니다. 따라서…….”

하타만 성의 디트리히 폰 피셔 남작의 말에 케일론 성의 에라스무스 폰 다윈 남작이 동조하고 나섰다. 거기에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바히만 성의 파크 폰 가르시아 남작 또한 동조하고 나섰는데, 다섯 곳의 성주들 중 유일하게 기사 출신인 성주였다.

“다윈 남작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은 단지 충성심만으로 기사들을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대들의 말처럼 그들이 계약에 의해 주종 관계를 맺을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계약을 통해 그들을 모집할 계획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 기사단에 들어올 기사들은 기존의 기사들과는 다르게 서임식을 하는 대신 계약에 의한 임관식만 하게 될 것입니다.”

임관식이란 군에서 기병대 장교를 임명할 때 치르는 의식이었다. 이들은 정식 기사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하기에 별도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것을 두고 임관식이라고 하였다.

“하면 그들을 기병대로 취급하실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기사들입니다. 다만 계약 기간이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러한 기사들이란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알마리온이 제시한 방법은 기사와 기병대 장교의 장점만을 취한 절충적인 것이었다.

사실 알마리온이 이러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은 재정적인 부담도 부담이었지만, 능력과 자질은 있지만 형편상 기사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지는 워낙 궁벽한 곳인지라 인적자원도 별로 없었고 때문에 하다못해 노예로 팔려 온 게르혼족들까지도 면천을 조건으로 병사로 받아들여야 할 정도였지만, 이곳 발락 영지는 달랐다.

제국에서는 중하급 수준의 영지였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환경으로 인해 그동안 기사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되지 못하였던 인재들을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 알마리온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역시 기사 출신인 가르시아가 가장 먼저 알마리온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에 나머지 네 명의 성주는 물론, 각 성의 관리들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입니다. 쉰 명 정도의 기사단을 1년 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백만에서 150만 골드 정도의 자금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필요한 장비 일체를 지원하게 될 경우 그 비용은 몇 배나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책은 있으신 것입니까?”

가르시아의 질문에 알마리온은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그에 대해 나름 생각해 두었던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의 영지인 혼테르에서 실행하였고, 그 성과 또한 충분하였던 방식을 이곳에서도 똑같이 적용을 할 계획이었다.

“1년 동안은 상당한 비용이 들겠지만, 그 이후에는 그 절반 정도의 비용으로도 충분히 기사단을 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반의 비용으로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기사단은 훈련을 겸하여 몬스터 사냥은 물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용병으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돈을 받고 전쟁이나 분쟁에 끼어드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용병들이었다. 필요에 따라 이러한 자들은 얼마든지 고용되었지만 정작 이들을 고용하는 고용주들이나 기사들은 용병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기사단을 그러한 용병들처럼 활용하겠다고 하니 이를 곱게 받아들일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해를 하셨군요. 난 그들을 용병으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굳이 기사단을 조직할 이유가 없는 일이지요. 기사들은 명예로운 존재들입니다. 비록 주종 관계가 아닌 계약관계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기사들의 명예를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면 처음부터 기사단을 조직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심이 담긴 알마리온의 말에 가르시아 등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그의 이야기를 계속하여 듣기 시작하였다.

“하나 여타의 기사단들처럼 그들이 영지에만 머무르며 훈련하는 식의 운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사단…… 그러니까 앞으로 발락 기사단은 기사단이 조직된 이후 1년 동안 고된 훈련을 받고, 그 이후부터는 황실이 그동안 미루어 왔던 여러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워낙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제국이었기에 제국군이나 제국의 영주들만의 힘으로는 치안을 완벽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외로 강력한 제국은 치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좋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좋지 않았다.

때문에 물자의 이동이 생각보다 어려웠고, 이로 인한 손실이나 물자 부족,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해 나날이 제국 백성들의 삶이 팍팍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과도한 세금을 걷어 갔으니 제국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쪼들리고 궁핍해져 갔다.

“이미 그러기로 약조가 된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재상부에서는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의 사정을 어렵게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하긴…….”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마리온의 생각은 상당히 좋은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영지에서는 워낙 운용과 유지에 많은 비용이 드는 기사단을 두고 있지 않은 채, 몇몇의 기사들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기사단을 치안 유지를 위해 동원할 수도 없는 것이, 이들은 전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경 지역과 황도와 황궁을 방어하는 임무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제국 측에서도 오래전부터 치안의 확보에 대한 필요성은 강하게 대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많은 비용이 드는 기사단이나 군의 동원이 부담스러워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은 부족한 기사단이나 병력을 동원하느라 무리를 하지 않고도 기사단을 동원하여 치안 확보를 할 수 있어서 좋은 일이고, 발락 기사단 또한 실전 경험은 물론, 기사단 운용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확보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었다.

이후에도 발락 기사단 결성을 위한 논의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어느새 발락 기사단 결성 자체를 정하여 놓은 듯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 깊이 있게 논의하였다.

“이거 정말이야?”

“낸들 알겠어? 갑자기 이런 포고문이 붙은 것을 말이야.”

“정말로 신분에 관계없이 기사를 뽑겠다는 것이지? 그렇지?”

“여기 포고문에는 그렇다는데?”

성벽 곳곳에 붙어 있는 포고문을 읽은 자들은 모두가 웅성거리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했다.

이들이 이처럼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는 이유는 바로 영주 대리인인 알마리온의 명령에 따라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일정한 테스트를 거쳐 통과한 이들 모두를 기사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사단에 고용되면 필요한 모든 물품까지 제공될 것이라는 포고문의 내용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기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수련을 하여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재력이 이를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하였다.

때문에 자질이 있거나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환경이 여의치 못해 기사가 되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기병대에 들어가 나름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국은 기병대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기병대에 들어간다는 것조차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정한 테스트를 거쳐 이를 통과해야만 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발락 기사단으로 활동한 후, 본인 의사에 따라 잔류와 이탈을 결정할 수 있으며, 이탈 시에는 본인이 사용하던 말과 무구와 같은 것들을 저렴한 가격에 넘기겠다는 조건은 ‘기회만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해 주었다.

발락 성 외곽의 너른 평지에는 족히 2천 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 형형색색의 복장을 갖춘, 소년에서부터 청년, 심지어는 장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은 바로 신임 영주인 발락 공작 미망인의 대리인인 알마리온의 명의로 공표된 기사 채용을 위한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테스트의 시작은 오전 10시였지만, 이미 사람들은 새벽같이 모여들어 있었다.

기사 등용을 위한 테스트는 글 읽기와 쓰기, 승마 그리고 검술 네 가지를 테스트받게 되어 있었다. 테스트는 엄격하게 진행되었으며 조금이라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탈락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닷새 동안이나 이어진 테스트에서는 무려 280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테스트에 통과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테스트를 통과하다니 놀랍습니다.”

“그렇습니다. 소관들 모두 많아야 삼사십 명 정도 통과하면 다행이라 여겼건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테스트를 통과하다니 참으로 놀랐습니다.”

사실 이를 제안하였던 알마리온조차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테스트에 통과를 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그동안 재능이나 능력이 있으면서도 신분의 벽이나, 아니면 환경에 의해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겠지.’

“한데 이 많은 인원을 모두 기사단에 받아들일 계획이십니까?”

다윈이 물어 왔다. 이에 알마리온도 잠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숫자보다 몇 배나 많은 인원이 테스트를 통과하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말이 좋아 280명이나 되는 기사 후보들이지, 이들 모두를 기사단으로 받아들일 경우 이들을 훈련시키는 데만도 너무나 큰 자금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를 어찌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 중 일부만을 남게 한다면 저들은 분명 크게 반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이곳에서 그 어떠한 정책을 펼쳐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가장 고민되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주군.”

“어떻게 말입니까, 그나이제나우 경?”

“일단 모두를 받아들이십시오.”

“…….”

“그리고 그들에게도 지금의 사정을 솔직히 밝히시고, 그들의 양해를 구하십시오. 어차피 훈련을 하더라도 그들 모두를 동시에 같은 훈련을 시킬 수는 없으니 일단은 훈련에 임하게 하면서 최대한 빨리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들 모두를 받아들인다면 지나치게 많은 유지 비용이 들어감을 그나이제나우 경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네.”

“잘 알고 있습니다, 피셔 남작님. 하나 이는 신뢰의 문제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영지 내에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영지민들은 호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동안 기회가 없어 방치되었던 저들을 모두 수용하고 저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영지민들은 더욱더 영지의 정책에 호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으음…….”

그나이제나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싱긋 미소를 지은 채 그나이제나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결국 장시간의 논의 끝에 몇 년 동안 영지의 살림을 최대한 줄이는 대신 발락 기사단에 지원한 280명의 지원자들 모두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들 모두에게 영지의 사정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밝히자 이들 중 일부는 욕을 하며 자신들을 상대로 영주가, 아니 영주 대리인인 알마리온이 사기를 쳤다며 분통을 터트리고 돌아갔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부가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250명 정도가 남자 알마리온은 이들 모두와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계약을 맺고는 이들을 발락 기사단으로 받아들였다.

발락 기사단의 단장은 그나이제나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부단장은 에릭 하이렌이라 하여 발락 기사단에 지원한 자들 중 테스트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은 에릭 하이렌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각각 쉰 명씩을 1개 대隊로 하여 총 5개의 대로 발락 기사단을 조직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리처드 님.”

“하하. 오랜만이오, 드란 경.”

알마리온이 발락 영지에서 영지 관리는 물론, 기사단 조직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홀로 왕국으로 복귀한 리처드는 소렌토에서 처리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는 곧바로 혼테르에 복귀하였고, 그러한 그를 영지에 남은 이들 모두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모습들인지라 서로 주고받는 인사들이 꽤 길 수밖에 없었다.

“음? 한데 샘과 씨씨는 어째 보이지 않는 것이오?”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리처드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내내 궁금하였다.

“아! 샘은 지금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씨야 언제나 이 시간이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면 조리실에 있단 말이오?”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씨씨야…….”

씨씨는 영주인 알마리온의 전속 요리사이긴 해도 사실 그녀가 유일한 요리사였다. 하나 당연히 매일 이맘때쯤이면 그녀는 당연히 성의 조리실에 들어가 열심히 조리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쳇! 총관.”

“예, 리처드 님.”

“거 요리사 좀 더 구하면 안 돼? 꼭 그런 연약한 여인에게 몇 사람분의 요리를 시켜야 하겠어?”

“그건…….”

리처드의 갑작스러운 추궁에 당황해하는 요하네스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어이없어하는 것은 씨씨 말고도 다른 요리사를 구하라고 갑작스레 추궁하는 리처드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씨씨가 연약하다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연약? 참 나…… 우리보다 힘이 센 씨씨가 연약하다고?’

물론 씨씨는 겉모습으로는 상당히 연약해 보였다. 아니,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나 그녀가 결코 약한 여인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참 나…… 리처드 님, 지금 씨씨가 약하다고 하셨습니까? 맨손으로 오크를 때려잡은 씨씨를 말입니까?”

“오크를 맨손으로 때려잡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인 케일의 말에 리처드가 깜짝 놀라며 한센을 바라보았다.

“식재료를 사러 나가는 일 아니라면 성을 떠날 일이 없을 씨씨가 맨손으로 오크를 때려잡았다니 말이오?”

“그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씨씨가 잼을 만들 재료를 직접 고른다고 마을 여인들과 과수원으로 갔는데 그곳에 떠돌이 오크가 1마리 나타났습니다.”

“떠돌이 오크가 말이오?”

아무리 지속적으로 몬스터를 토벌한다 하더라도 떠돌이 몬스터까지 모두 없앨 수는 없었다.

그런 일까지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을 아예 씨를 말려 버리면 모르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도 자주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예. 그때 씨씨가 맨손으로 그 오크를 때려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씨씨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처음 그녀와 그녀의 남동생인 샘을 발견하여 데려온 알마리온과 그동안 알마리온과 지속적으로 대련을 하였던 리처드 본인과 그나이제나우 그리고 한센 정도만이 그녀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니 그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맨손으로 떠돌이 오크를 때려잡았다며 호들갑을 떨며 원래 하프 엘프는 모두 그런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생각들이었지만, 이들은 하프 엘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며, 또한 그녀의 동생인 샘의 경우 하프 휴먼이면서도 두려움의 존재인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불과 채 1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식으로 1서클 마법사가 된 상태이니, 엘프와의 혼혈은 모두 그처럼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그 이후에 그 비슷한 일은 또 없었던 것이오?”

“예, 리처드 님.”

올해도 가을이 시작되기 전에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이 시작될 것이다. 리처드를 서둘러 돌려보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전력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전략이 뛰어난 인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소. 영지의 자세한 상황은 내일 전체 회의를 통해서 듣기로 하겠소.”

“예, 리처드 님.”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리처드는 곧바로 조리실로 향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씨씨의 무사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탁탁! 타타탁! 탁탁탁!

열려 있는 조리실 문을 통해 그녀가 보였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입가에는 그 봄바람과도 같은 미소를 띤 채 연방 손을 놀려 야채를 썰고 있었다.

“좋았어! 이제 이것만 넣으면 맛있는…… 어머!”

탱! 땡그랑!

다듬기를 마친 야채를 큰 그릇에 모두 담아 한쪽 화로에서 끓고 있는 고기로 낸 국물에 넣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녀가 문가에 기댄 채 웃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처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는 그릇을 놓치자 그릇이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안에 담긴 야채들이 모두 바닥에 쏟아졌다.

“이, 이를 어째…….”

“이런!”

두 사람 모두 갑자기 벌어진 일로 인해 당황하였고, 바닥에 흩어진 잘 다듬어진 야채들을 줍기 위해 거의 동시에 몸을 숙였다.

“아!”

“……!”

“놔, 놔주세요…….”

씨씨가 리처드의 두툼한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내려 하였지만, 리처드는 오히려 힘을 주어 그녀의 가녀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제발…….”

1차 성장을 하고 난 이후 사내들의 이러한 행동을 너무나도 많이 겪어 온 씨씨였기에 더럭 겁이 나며 온몸이 두려움으로 떨려 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행동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씨씨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커다란 눈 하나 가득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자 리처드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리처드가 잡았던 씨씨의 손을 놓아주며 벌떡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미, 미안하오. 내가 실례를 하였소.”

“…….”

리처드에게 붙잡혔던 손이 자유롭게 되자 씨씨 또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조리실 한쪽 구석으로 도망치듯 가서는 본능적으로 옷을 꼭 여미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마리온의 배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또한 주변 사람들도 과거 그녀가 대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거칠고 투박하긴 하여도 늘 자신은 물론 동생인 샘에게도 잘 대해 주었기에 그녀는 지금의 생활에서 처음으로 평온함과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데 또다시 과거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상황이 연출되자 그녀는 이제 이러한 평화도, 그리고 행복도 모두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하고 겁을 내는 씨씨의 행동에 리처드의 표정이 한없이 굳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어딘지 모를 처연함이 담겨 있었다.

“놀라게 하였다면 미안하오.”

그 말을 끝으로 리처드가 몸을 돌려 조리실을 나가 버렸다.

“아…… 흑! 흑!”

리처드가 조리실을 나가자 씨씨는 다리가 풀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하였다.

“으아아!”

챙! 쨍그랑!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리처드는 들고 있던 망토를 내던졌고, 그가 던진 망토에 맞은 촛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못난 놈! 이런 못난 놈! 그녀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면서도 그 잠깐의 흥분을 참지 못해 그따위 짓을 하다니!”

챙!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뽑히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씨씨와 그의 동생 샘이 알마리온의 손에 이끌려 성으로 왔을 때 리처드는 그녀의 눈빛과 행동에서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두려움과 극도의 경계심이 담겨 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굳이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듣지 않아도, 그녀가 지난 세월 사람들로부터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법을 가르쳐 주면서 마음의 문을 연 샘에게 들은 그녀가 왜 그토록 사람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고, 그녀에게 그러한 고통을 준 모든 인간들을 찾아내 그녀 앞에 무릎 꿇리고 사죄하게 만든 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의 모든 상처를 깨끗이 낫게 해 주고 싶었고,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평안과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이후 그는 늘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미모에 혹해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는 엄중한 경고를.

그런 식으로 은연중에 그녀를 보호하였으며, 쉬쉬하는 가운데 그녀가 그의 여인이라는 소문이 나게 되자 영지 내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려 드는 자들이 없었다.

거기에 알마리온과 자신의 배려로 그녀가 차츰 안정을 찾아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켜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보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보호하며 그녀로 하여금 과거의 고통을 잊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하던 리처드는 몇 달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그녀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보자 너무나도 황홀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취해 저도 모르게 문가에 기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리처드는 그녀가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는 모습에 리처드 또한 당황하였고, 바닥에 떨어진 그릇과 그 안에 담겨 있던 야채들이 바닥에 흩어지자 그것들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녀의 작고 가녀린 손이 자신의 커다란 손에 잡혀 오자 두 사람 모두 당황하였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놀란 그녀가 자신의 손을 빼내려 하였지만 리처드는 더욱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던 것이다. 자신의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이 가져다주는 느낌이 너무나도 황홀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때서야 그녀가 얼마나 그러한 상황을 두렵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런 씨씨의 모습을 보면서 리처드는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지켜 주려 하였던 그녀에게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온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분노하기 시작하였고, 그녀에게 상처를 준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손은 필요 없다! 한낱 순간적인 욕정을 참지 못해 그녀를 다시금 두렵게 만든 이따위 손 같은 것은……!”

그가 막 자신의 손을 검으로 베어 버리려고 할 찰나였다. 그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샘이 달려 들어왔다.

“앗! 매직 애로우!”

쨍! 쿵!

“이놈! 감히! 내 일을 방해하다니!”

“스승님!”

오늘따라 유난히 일찍 시장기를 느낀 샘은 저녁을 먹기 전에 누나를 도울 겸 이것저것 집어먹기 위해 조리실로 갔다가 겁에 질린 채 울면서 떨고 있는 누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누나를 달랜 샘은 누나로부터 리처드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자기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는 리처드였지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에게 해코지를 한 리처드를 용서할 수 없어 무작정 그의 방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한데 방문을 걷어차고 막 방 안으로 들어선 그가 본 것은 스스로 자신의 손을 자르려고 검을 내리치는 리처드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라 늘 인챈트해 둔 마법을 펼쳐 그를 저지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의 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지금 리처드는 한쪽 손을 스스로 잘라 내 버렸을 것이다.

“네놈이 감히!”

“무슨 일이야!”

리처드가 자신의 일을 방해한 샘에게 분노를 터트리려 할 찰나 다시금 일단의 사람들이 그의 방 안에 난입해 들어왔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한센 등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리처드 님?”

“…….”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자 리처드는 분노에 찬 눈으로 다시 한 번 샘을 노려본 후 검을 집어넣었다.

“아무 일도 아니니 모두 돌아가시오. 그리고 난 내일 감비노로 떠날 것이니 내일 아침 일찍 회의실로 모두 모이도록 하시오. 피곤하니 모두 나가 주었으면 좋겠소.”

다들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자 한센이 눈치를 주어 모두 리처드의 방을 나왔다.

“모두 아무 말도 말고 돌아가게. 샘 너도 네 할 일을 하거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입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알겠나?”

“예, 드란 경.”

“알겠네.”

알마리온과 리처드가 없을 때에는 영지의 모든 결정권은 한센에게 있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유독 한 사람, 리처드만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리처드 님은?”

“피곤하신지 잠이 드신 것 같습니다, 나리.”

리처드를 부르기 위해 그의 방을 다녀온 시녀가 말하였다.

“흠…… 아마도 오랜 여행으로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군. 하면 식사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혹시 나중에라도 깨어나시면 시장하실 수 있으니 언제든 리처드 님이 드실 수 있도록 음식을 준비해 놓도록 하시오.”

“예, 나리.”

“그럼 식사를 하도록 하지요.”

“예.”

식사를 시작하기는 하였지만 평소의 그 유쾌한, 아니 조금은 소란스러운 식사와는 전혀 다른 침묵으로 일관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다.

“리처드 님이란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무거운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식사는 다른 때와는 달리 아주 빨리 끝났다. 그리고 각자 할 일이 있는 이들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갔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처소로 돌아간 상태였다.

다만 한센만이 응접실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리처드가 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한센 등을 비롯한 기사들에게 글과 교양 그리고 예절을 가르치는 마리아 노엔이 다가와 물었다.

봄이 되어 눈이 녹은 이후에야 알마리온이 고용한 몇몇 관리들과 함께 젊은 미망인인 그녀는 혼테르에 도착하였지만 실상 리처드를 볼 기회는 한 번밖에 없었다.

“글쎄요……. 만약 그분이 어떻게 살아오신 분이냐고 묻는 질문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뜻이죠?”

“우리가, 아니 최소한 내가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을 만난 이후의 모습들뿐이기 때문입니다.”

“아!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그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군께서 그분을 받아들이셨고, 우리에게 그것만이 중요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중요치 않으니까 말입니다.”

“예…….”

노엔은 남자들의 이러한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카즈모 노엔 또한 기사였다. 그리고 그 또한 전장에서 주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였다.

평소에도 남편의 모든 가치의 기준은 주군이란 존재였다. 하나 그렇게 주군을 위해 봉사하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지만 결국 홀로 남겨진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남편에게 주어진 조그만 장원마저도 다른 이에게 넘겨준 채 몇 푼의 돈을 위로금으로 받게 된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남편까지 잃고 쫓겨나듯 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친정 오빠인 할버트 말론이 혼테르 영지의 관리로 고용되면서 자신 또한 글과 교양 그리고 예절을 가르치는 독선생으로 가자는 말에 또다시 홀로 되는 것이 두려워 낯선 혼테르까지 오빠 일가와 함께 오게 된 것이었다.

한데 이곳에서도 그녀는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들에게 있어서, 아니 기사란 존재들에게 있어서 주군에 대한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또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우리가, 아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분께서는 주군 못지않게 대단한 분이시라는 것뿐입니다. 능력이나 인격 모두 말입니다.”

“그런가요?”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리처드와 씨씨 사이에 무엇인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리처드에 대한 신뢰가 깊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여인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 그동안 그녀가 보아 온 이곳 영지의 기사들은 여인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하는 이들이 전혀 아니었다. 때문에 더욱 리처드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노엔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단지 스승님이 누나의 손을 잡아서 그랬다는 것이야?”

“그, 그땐 나도 너무 놀라서…… 그래서…….”

누나의 말에 샘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직은 어린 나이이기에 샘은 씨씨가 과거 어떤 일들을 겪을 뻔하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고, 지금도 어렴풋이, 막연하게나마 나쁜 일들을 겪을 뻔하였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나 누나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들이 남아 있는지는 솔직히 전혀 모르고 있는 샘이었다.

단지 누나가 사람들, 특히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자들에 대해 무척이나 겁을 내고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그리고 리처드로부터 마법을 배우게 되면서 힘을 갖게 된 샘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앞으로 자신의 누나를 괴롭게 하는 자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조리실에서 겁에 질린 채 울고 있는 누나를 보았을 때, 샘은 직감적으로 그녀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고는 다그치듯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동생의 모습에 조금은 진정이 된 씨씨가 리처드라는 이름을 말하였을 때, 샘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장 리처드의 방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미 신께 맹세한 것처럼 누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라면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고 용서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하나 막상 그의 방에 뛰어들었을 때, 스스로의 손을 자르려 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그는 그것을 지켜보거나 응징을 가하는 대신 그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아마 그때 한센 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한데 그 소동의 원인이 단지 갑자기 그가 자신의 손을 잡은 것 때문이었다니.

“누나! 그 일로 인해 스승님께서 어떻게 하려 했는지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그분이 뭘 어떻게 했기에……?”

“내가 화가 나 스승님께 따지러 그분 방에 갔을 때, 스승님은 자기 손을 스스로 잘라 내려 하셨다고! 알아?”

“그, 그게 무슨!”

동생의 말에 씨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이야, 누나. 만약 내가 그때 운 좋게 뛰어들어 막지 않았다면 스승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손을 자르셨을 거야.”

“아아…….”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던 씨씨의 몸이 무너지듯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누나…….”

“…….”

“누나…….”

눈물을 흘리는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샘은 다시 한 번 씨씨를 불렀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저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사실 씨씨는 저녁 무렵에 있었던 그 일을 스스로도 황당해하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었다. 하나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너무나 힘들었기에 그녀는 극도로 남자들을 경계하였다.

그나마 자신과 동생을 거두어 준 알마리온의 배려와 리처드의 보살핌 덕분에 안정을 찾아 가고 있던 그녀였지만 그동안 겪은 마음의 상처가 모두 치유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도 모른 체는 하고 있었지만 리처드의 눈길이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은연중에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는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였고, 언제나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 주었다. 그런 그의 배려가 늘 고맙고 감사했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의 배려로 인해 그녀는 더욱 빠르게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데 오늘 갑자기 나타난 리처드의 모습과 그에게 손을 잡혔을 때,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내면에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크게, 그리고 많이 남아 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동생으로부터 리처드가 어떤 행동을 하려 했는지를 들은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모습이 너무나도 싫어졌다.

자신도 그저 평범한 다른 여인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그런 여자였으면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후…… 미안해, 누나. 내가 누나를 지켜 준다고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말이야.”

“흑흑흑!”

“누나…….”

그 밤. 씨씨는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이른 아침 알마리온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겠다는 말에 회의실에는 영지의 모든 관리들이 모여 있었지만 정작 회의를 소집한 리처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 보도록 하겠소.”

한센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처드의 방으로 갔다.

똑똑.

…….

똑! 똑!

“리처드 님?”

…….

똑! 똑! 똑!

“리처드 님, 아직 주무십니까?”

…….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부수듯 열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방 안에는 리처드의 모습도, 그리고 그가 잠을 잔 것 같은 흔적 또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리처드 님?”

그가 막 방에 딸린 다른 방들을 황급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병사 한 명이 그를 불렀다.

“저…… 부사령관님.”

“뭔가?”

“사령관님께서 새벽에 성을 나가시기 전에 부사령관님께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하셔서…….”

“뭐라고? 하면 리처드 님께서 새벽에 성을 떠나셨다는 말인가?”

“예, 부사령관님.”

“한데 그것을 왜 이제야 알린단 말인가!”

“그것이…… 사령관님께서…….”

아마도 리처드가 새벽에 성을 나가면서 성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던 모양이다.

“후…… 이리 주게.”

“예? 예…….”

“됐으니 자넨 근무지로 돌아가도록 하게.”

“예, 부사령관님.”

혹시라도 무슨 날벼락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한껏 눈치를 살피고 있는 병사를 돌려보낸 한센은 리처드가 남긴 서신을 펼쳐 보았다.

그가 남긴 서신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다만 알마리온이 지시한 사항을 철저히 실행하라는 내용과 함께, 몬스터 토벌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다시 돌아올 것이며, 그동안 감비노 성에서 머물 것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연락을 취하라는 당부의 말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분명 어제 조리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였는데 그 일이 무슨 일이기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한센이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열흘 동안 휴가를 주어 발락 기사단에 소속된 예비 기사들이 주변을 어느 정도 정리케 하는 동안 알마리온은 그들이 훈련을 할 훈련장에 그들이 머물 숙소를 비롯하여 여타 시설들을 마련하느라 성안의 모든 목공수와 여타 장인들과 일꾼들을 총동원하였다.

그리고 열흘 후, 250명의 발락 기사단은 카산느 공주 앞에서 임명식을 거행함으로써 정식으로 발락 기사단의 단원이 되었다.

이후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들에 대한 훈련은 고난의 연속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한데 그 방식이 요들이 영지에서 병사들을 굴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이제나우마저도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에 있어서 요들의 방식만큼 효과적인, 그러면서도 단기간에 능력을 배양시킬 수 있는 방식은 없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병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능력이 요구되는 기사들이었기에 이들에 대한 훈련은 더욱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98! 99! 100!”

“이런 젠장!”

어디선가 들려온 마지막 백 번째 구령 소리에 가뜩이나 계속된 훈련에 진이 잔뜩 빠져 있던 기사들의 입에서 불평의 소리와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가운데 그나이제나우의 조금은 하이 톤의 목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 누가 마지막 구령을 붙인 것인가!”

“…….”

“아직들 체력이 많이 남은 모양이군? 그러니까 힘들이 뻗쳐서 제멋대로 행동하지. 안 그런가?”

“…….”

“이젠 항명을 하겠다는 것인가?”

기사들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나이제나우의 입에서는 묘한 여운이 담겨 있는 비꼬임이 잔뜩 담겨 있는 일성이 터져 나왔다.

이 또한 요들에게 배운 것으로,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하든 꼬투리를 잡히게 돼 있었다. 결국 그 끝은 또 한차례의 기합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 아닙니다!”

“뭐가 아니란 것이지? 응? 이젠 지쳤다는 것인가? 아님 반항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건…….”

“좋다! 귀관들이 항명을 하였으니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이 또한 요들이 자주 써먹는 방법으로 상대에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고서는 그에 대한 답이 늦었을 때에는, 아니 대답을 하기도 전에 미리 선수를 쳐 버려서 병사들을 한바탕 신 나게 굴려 버리곤 하였다.

“지금부터 10분을 주겠다. 모두 저기 놓여 있는 훈련용 메일을 걸치도록! 제한 시간에서 1분씩 늦을 때마다 기합의 강도가 올라갈 것이다. 알겠나?”

아무리 연습용이라지만 풀 플레이트 메일을 혼자의 힘으로 10분 안에 착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사의 곁에 늘 호종하는 이가 따라붙는 이유도 혼자서는 도저히 착용할 수 없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지 괜히 멋을 부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들은 지금 호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혼자들뿐이었으니 홀로 연습용 메일을 착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여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었지만,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 가면서 능숙하게 연습용 메일을 착용해 나갔다.

하나 워낙 착용해야 할 것이 많고, 단단히 착용하지 않게 되면 훈련 도중에 몸에 상처를 주거나 부담을 주기 때문에 꼼꼼히 챙기다 보면 자연 제한 시간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

“어째 대답이 없는가? 모두 알겠나?”

“알겠습니다!”

“좋아! 실시!”

“실시!”

250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한곳에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는 훈련용 메일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나름 장관이었다.

훈련용 메일을 모두 장만하는 데만도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것이 마련되는 동안 발락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그나마 훨씬 편한 상태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 시간이 지나고 차츰 이들의 훈련에 필요한 물품들이 착실하게 장만되면서부터 이들의 훈련 또한 본궤도에 올랐고, 그럴수록 이들의 훈련 또한 고되어 가기만 하였다.

아무리 서로가 돕는다 하더라도 풀 플레이트 메일과 동일한, 아니 연습용이기에 거의 두 배나 가까운 무게를 지니고 있는 연습용 메일을 10분 안에 모두 착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들 모두가 메일을 착용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애초에 정해 주었던 10분이라는 시간을 훨씬 지나 25분이나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고, 15분이나 늦게 메일을 착용한 대가를 온몸으로 치러야만 하였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칸 남작.”

왕국에서야 남작이라는 작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각하.”

“이제 막 복귀를 하였을 것인데 다시금 이렇게 불러 여러모로 미안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소관에게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임무입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알마리온의 말대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병사들을 인솔하여 왕궁에 복귀를 한 칸은 얼마 후 제국의 공작 부인이 된 카산느 공주의 신변 보호를 위한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공주의 시중을 들 인물들을 인솔하여 다시금 제국으로 와야만 하였다.

언제 임무가 끝나고 왕국으로 복귀할지 모르는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기꺼이 응하여 주는 그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럼 공주님을 뵈러 가지요.”

“예, 각하.”

그동안 알마리온과 시녀장인 앨리나 부인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낯선 이들뿐이었다가 그래도 왕궁에서 자주 접하였던 칸 남작 등을 보게 된 카산느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는지 칸 남작 등을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칸 남작.”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공주님.”

“그리고 후작, 아니 백작께서 칸 남작이 제국에서 활동하려면 아무래도 그에 맞는 작위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본인도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남작에게 제국의 남작의 작위를 내리도록 할 것입니다.”

왕국이든 제국이든,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이들은 필요에 따라 작위를 내려 줄 수 있었다.

단, 이때에는 기본적으로 단승 작위이지만, 작위를 내리는 이가 자신의 영지의 일부를 작위를 내리는 이에게 내줄 경우에는 봉지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 귀족으로 등록된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귀족이 된 사람들은 가신家臣이라 하여 작위를 내려 준 가문에 속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동안 칸 남작은 왕국에서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단승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 공주의 호위를 맡는 책임자로 오게 되자 공주가, 아니 알마리온의 추천에 따라 공주가 그에게 정식 남작의 작위와 봉지를 내주려 하였다.

“공주님?”

카산느의 말에 놀란 칸이 공주와 알마리온을 번갈아 보면서 당황하는 표정이 되었다.

“칸 남작의 영지는 바히만 성의 동쪽에 위치한 이스턴 바히만 성입니다. 성을 비롯하여 14개 마을, 대략 3만 명의 주민이 남작의 영지가 될 것입니다.”

제국 쪽에서 본다면 이 정도 규모의 영지는 가장 작은 규모보다도 못한 하찮은 것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단승귀족이었던 칸 남작이나 왕국의 귀족들 입장에서 본다면 이 정도 규모의 영지는 남작 가문을 풍요롭게 해 주기에 충분한 정도의 크기였다.

“충! 공주님의 가신으로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잘 부탁합니다.”

공주의 호위 문제가 칸 남작의 도착으로 해결이 되자, 알마리온은 일단 황도인 카빌란으로 향했다. 재상부에서 발락 기사단의 문제를 놓고 협상을 할 것도 있고, 또 안드라스의 일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카빌란 인근의 별장지에 마련한 저택에 도착한 알마리온은 사람을 보내 안드라스를 부르는 한편, 재상인 베르그 공작과의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각하.”

“어서 오게. 자네도 그간 잘 지냈나?”

“예, 각하. 여기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입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안드라스가 몇 뭉치의 자료들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그렇군. 이자는 지금 나와 게임을 하고 있어. 이미 충분히 자료를 완전히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 내가 더 관심을 가질 정도로만 자료를 구해 오고 있구나. 그동안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겠지?’

알마리온은 내심 안드라스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점점 그를 멀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상 그를 처음 접하였을 때, 그의 몸에서 일고 있는 맑고 정제된 기운을 읽은 그는 안드라스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이후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자신이 어쩌면 지나치게 주술의 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정도가 되었다.

이런 형태의 사람을 알마리온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나 문득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사람들도 내겐 필요하다. 비록 형님이나 그나이제나우 경 그리고 한센 대장이나 요들, 그 밖의 사람들처럼 내가 진심으로 대할 수 없고, 또 날 진심으로 대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과거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그는 많은 이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이처럼 막중한 사명감을 느껴야 하는 그였기에 단지 자신이 좋아하고 좋아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필요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슬픔과 고통보다는 기쁨과 행복을 최대한 느낄 수 있게 만들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각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으로는 살짝 힘든 내색을 내비치는 것이 그걸 알면 적당히 챙겨 줘라 하는 식의 표정이었다.

‘훗!’

그런 안드라스의 표정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내심 고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더 이상의 자료는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좀 더 시간을 주신다면…….”

“흠! 실은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런다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만간 왕국으로 복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네.”

이미 왕국을 떠난 지도 반년이 지났고, 영지를 떠난 지는 8개월이 다 되었다.

영지의 일이야 한센과 요들이 충분히 감당을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좋았지만 국왕의 명으로 그가 통치하여야 할 국경 지역의 일곱 곳의 성을 무작정 다른 이에게 맡겨 놓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은 공주의 곁에 자신 말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귀국을 미루어 왔지만, 이제 그녀의 곁에 믿을 만한 존재인 칸 남작이 있게 되었기에 그는 일단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아…….”

“이번에 귀국하게 되면 내년이나 되어야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니 그 전에 자료를 모두 찾았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그것이……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미 모든 자료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드라스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런 안드라스를 보면서 알마리온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결정이 제발 옳은 것이길 바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면 더 이상의 자료 수집은 하지 않아도 되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료 찾기는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해 보도록 하겠네. 그 대신 자네에게 다른 제안을 하도록 하지.”

다른 제안을 하겠다는 알마리온의 말에 안드라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아니나 다를까. 알마리온에게서는 그가 원하던 제안을 해 왔다.

“자네 황궁 관리로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가? 발락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어 보는 것이?”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지만 이처럼 전격적으로 이런 제안을 해 오자 안드라스는 내심 조금은 놀라웠다.

“놀라운 모양이군. 하지만 이것은 진심이네. 난 자네가 날 위해 일을 해 주었으면 한다네.”

“소관에게 가신이 되어 달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맞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아니. 이왕이면 이 자리에서 대답을 하여 주었으면 하네.”

왠지 시간을 주면 또 다른 생각을 할 것 같았기에 알마리온은 자신 또한 어렵게 한 결심대로 그 또한 분명한 대답을 해 주길 바랐다.

“그 전에 무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왜 소관이 필요한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자네의 주군이 될 능력이 있는 것인지를 내 스스로 대답해 주길 원하는 것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이 서로에게 편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훗! 그렇습니다.”

차가운 눈빛과 시니컬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알마리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어 왔다.

“충분하네.”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나 두 사람의 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알마리온의 깊고 투명한 눈빛을 바라보던 안드라스는 문득 자신이 그의 눈빛에 깊이 빠져들어 가는 것을 느끼고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렸다.

‘무슨 사내 눈빛이…….’

괜한 투덜거림이었다. 그도 알마리온의 눈빛이 여인네를 유혹하기 위한 그런 느끼한 눈빛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깊은 눈빛에 저도 모르게 그의 포로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다잡기 위해 부러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나의 사람이 되어 주겠는가?”

“그럼 제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은 물론, 우리 두 사람의 어깨 위에 놓인 많은 이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이것은 그는 물론,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경고였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은 알마리온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을 위해 많은 이들이 희생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네. 하나 그 또한 희생을 해야 하는 자들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희생이어야 하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것이 가능하기에 하는 말이네.”

“만약…… 만약 그것이 가능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시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날 자네에게 주지.”

“으음…….”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던지 안드라스는 알마리온의 말에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런 각오시라면…… 알겠습니다. 주군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꽤나 긴 시간을 고민하던 안드라스가 결국 알마리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나 그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러한 결정이 과연 잘하는 결정인지를 말이다.

“하하하. 후회하진 않을 것이네.”

“부디…… 주군을 위해서도, 그리고 소신을 위해서도 그랬으면 합니다.”

만면에 웃음을 띤 알마리온과는 달리 안드라스의 표정은 여전히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일단 이곳에 며칠 동안 머물 계획이네. 그동안 자네도 주변을 정리하도록 하게. 주변이 정리되면 이곳으로 오고 말이네.”

“예, 주군.”

“그리고 일단 그대의 환영식은 나와 조촐하게 한 후, 다음에 다른 가신들을 만나게 되면 그때마다 서로 상견례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밤. 비록 두 사람만의 조촐한 환영식이었지만 외려 허심탄회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밝힐 수 있었고,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 갈 수 있었다.

밤을 새우다시피 많은 대화를 나누고 1∼2시간 정도 눈을 붙인 알마리온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수련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안드라스를 볼 수 있었다.

“피곤하지 않소?”

“괜찮습니다, 주군. 한데 늘 그렇게 수련을 하십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데 피곤하지 않소?”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이기도 하였다.

지난밤 두 사람이 나눈 많은 대화로 인해 이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기도 하였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괜찮습니다. 한데 제게 며칠의 시간을 더 주신다면 주군께서 원하시는 자료를 모두 찾아냈으면 합니다.”

“할 수 있겠소?”

“실은 나머지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 지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내색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가능하겠소?”

“그동안 조사한 바로는 그것들이 황궁에서도 가장 극비로만 취급되는 비밀 서고에 보관되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솔직히 제국에서 왜 그와 같은 자료를 활용하지 않는 것인지 알마리온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해상을 통해 더 많은 나라와 교역을 한다는 것이 그들 자신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 알마리온의 의문점을 눈치챘는지 안드라스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군께서는 왜 제국에서 그와 같은 좋은 자료를 그냥 처박아 둔 채 활용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드시는 것 같군요?”

“솔직히 그렇소.”

“그건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간단하다?”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은 남도 가질 수 없어야 한다. 뭐 이런 것이죠.”

“흠…….”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 일은 황제를 보필하는 궁중 관리가 주도한 모험이었습니다. 다행히 행상을 통한 교류는 크게 성공을 하였지만 그로 인한 이익은 모두 황제에게만 집중되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고 말입니다.”

“…….”

“어느 나라든 군주의 위엄은 가장 높아야 하지만, 독선적으로 흐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설사 그것이 때로는 군주의 권한을 제한시켜 놓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여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일로 인해 황권이 너무 강력해지자 이를 지켜보던 귀족들이 그것을 제한하기 위해 그런 귀중한 자료를 영구 봉인시켰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주군. 모든 귀족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해상을 통한 교역은 막대한 이익을 황제 1인에게 집중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아마 주군께서도 그러한 점을 잘 감안하시지 않는다면 자칫 그 일로 인하여 큰 위험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잘 알겠소. 그 말 명심하겠소.”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안드라스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일찍 일어난 김에 함께 아침 식사를 하지 않겠소?”

“예, 주군.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발락 기사단의 일과 여타 다른 일들을 협의하고 일단 왕국으로 복귀할 것임을 통보한 그는 십여 일 정도 카빌란에서 머물다 다시금 발락으로 돌아갔다.

“……하여 소관이 부재중일 때에는 여기 있는 안드라스 남작이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공주님.”

알마리온이 귀국을 한다는 말에 카산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자신도 그와 함께 이 낯선 곳에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녀는 돌아갈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뿌리를 내리며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이곳 발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카산느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자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위로하려 하던 알마리온은 이내 자제하였다. 그것이 잠시 위로는 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디 발락.”

“그, 그러세요…….”

다시 한 번 분명한 선을 긋는 알마리온의 행동에 카산느는 또다시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커져 가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한데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며 묘하게 웃음을 짓는 이가 있었다. 바로 안드라스였다. 하나 그의 웃음은 만들어지자마자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발락에서 머물면서 조정해야 할 일들을 조정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한 알마리온은 들에핀꽃과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냇가의돌 그리고 몇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배편으로 왕국으로 귀환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