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이 바라는 것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발락 공작 영지의 관리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네.”
베르그가 분명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것이 바로 황제 폐하께서 그대에게 내리는 문책이네.”
“으음. 하나 소관은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입장입니다. 소관에게는 왕국의 국경을 방비할 책임이 있음을 전하께오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네. 또한 그것을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네.”
“하오시면……?”
“백작도 알다시피 제국과 왕국이 혼인을 통해 더욱 결속력을 다지려 한 것도, 그리고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 못하였지만 관례를 깨면서까지 공주를 황실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 또한 모두 게르혼족의 준동 때문이라네. 그건 자네도 잘 알 것이네.”
“…….”
“게다가 제국이 자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네도 잘 알 것이네. 하니 더 이상 설명치 않겠네. 자네가 할 일은 발락 영지의 모든 것과, 자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강군을 육성하는 일이라네. 알겠나? 그것이 제국과 왕국의 기대를 받는 자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라네.”
이렇게까지 말하니 차마 더 이상 자신의 입장만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암! 어쨌든 황실에서도 최대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고 수고하도록 하게.”
“예, 전하.”
“아! 그리고 자네도 황도에 거처를 하나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제국에 머물 계획이 없었고 앞으로도 제국에 머물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굳이 황도에 거처를 준비할 이유가 전혀 없어 아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기에 갑자기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내심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그건…… 알겠습니다. 곧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아니. 자네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마침 생각나는 곳도 있으니 말이네. 그래도 되겠지?”
“전하께 수고로움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허허. 수고는 무슨. 그렇지 않으니 걱정 말도록 하게.”
그냥 적당히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
“그러게.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게.”
“예, 전하.”
황궁의 재상부를 빠져나온 알마리온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어졌기에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 황궁의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만큼 다급하다는 것이겠지. 하긴 그분이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또다시 정복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제국 측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니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이었겠지.’
베르그와의 대화를 통해 제국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시라도 서둘러서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였기에 그도 결코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하나 양쪽 모두를 오가면서 일을 보기에는 힘이 들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은 누군가에게 맡겨야만 하였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었지만 더 큰 일을 해야 할 때마다 그는 늘 자신의 곁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멕테일러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긴 하였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더 오랫동안 있어야 할지 모르니 편지를 써서 사정을 알려야 할 것 같구나.”
어쨌든 발락 공작 영지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관리하여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 영지에서 병력을 육성하여야 하는 임무까지 맡은 때문에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그는 차분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으로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황궁의 정원을 걸으며 생각들을 정리하던 것도 거의 끝마쳐 갈 무렵이었다. 알마리온은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등나무 넝쿨 아래에 마련된 나무 의자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참 맑고 순수한 기운이구나. 마치 잘 정제된 듯 깨끗한 기운이다.’
높아진 주술 덕분에 알마리온은 사람의 몸에서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기운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데 한창 그늘 아래서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알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복장을 보아하니 궁중 관리인 것 같은데…….’
모든 궁중의 관리들은 일정한 형태의 복식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한눈에 보아도 그가 궁중의 관리인지 아닌지를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음? 아! 죄, 죄송합니다.”
한창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던 안드라스는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책에서 고개를 들다가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알마리온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히 허리를 숙여 보이며 무작정 사과하였다.
“훗! 뭐가 죄송하다는 것이오?”
전혀 예상치 않은 반격에 안드라스는 더욱 크게 당황하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허둥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순수해 보여 알마리온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 그것이…….”
“내 이름은 알마리온 헤이그 폰 이스턴이라고 하오.”
“아! 하면 당신이 바로 그……? 아차!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소인은 문서부 3등 서기관인 안드라스 레이라고 합니다. 백작 각하를 몰라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소관의 무례함을 벌하여 주십시오.”
“하하. 그대는 전에 날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각하.”
“한데 오늘 처음 만난 날 어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그대를 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오나…….”
상대를 처음 본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손에 끼고 있는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였다.
제국의 문서부에 등록된 귀족들의 명부만 하더라도 커다란 방으로 몇 개나 되었다. 이곳에는 제국의 모든 귀족들의 혈통과 가계家系에 대한 기록들이 제국이 건국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문도 있지만 그동안 사라진 가문들도, 그리고 새로이 생겨난 가문들도 많았다. 작금에 와서는 이제 그 누구도, 아니 지금 알마리온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젊은 최하급 관리인 안드라스를 제외하고는 제국의 모든 가문의 가계를 기억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따라서 그가 처음 알마리온을 발견하였을 때, 당황하지 않고 알마리온의 손에 낀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만 보았더라도 그는 알마리온의 신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최근에 제국의 귀족으로 새로이 등록된 알마리온의 경우에는 여기저기서 말들이 꽤나 많았기에 더더욱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보다 지금은 근무시간이 아니오?”
“아차!”
안드라스는 황궁에서 일하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황궁 도서관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나 이 도서관은 황실 가족과 황궁의 관리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될 뿐이었다. 사실 그가 궁중 관리로 들어온 것도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황궁 도서관에 보관된 책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보통은 궁중 관리라 하더라도 출퇴근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안드라스는 자신의 상관에게 자신이 받는 임금을 뇌물로 주는 조건으로 매일 번을 서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마음껏 읽어 나갔다.
이처럼 틈만 나면 그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자신이 읽을 수 있는 모든 책들을 섭렵해 나갔다.
다만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지금처럼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까지도 책을 읽느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는데 그로 인해 몇 차례나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 저…….”
“그냥 이대로 간다면 아마도 크게 꾸지람을 들을 것 같은데, 아니오?”
알마리온의 말에 안드라스는 얼굴을 붉힌 채 우물쭈물하기만 하였다.
“갑시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가 근무하는 곳으로 말이오. 함께 갑시다.”
“저…… 무슨 일 때문이신지……?”
“보아하니 그댄 책을 꽤 많이 읽은 것 같은데. 맞소?”
“예? 예…….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한동안 그대를 내가 좀 빌려야 할 것 같소. 하니 그대의 상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소?”
그동안 여러 일들이 갑작스럽게 벌어졌기에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 있었다. 바로 폰티악 후작과 함께 시작하기로 한 해상 교역에 관련된 일이었다.
폰티악 후작은 과거 제국에서 대규모로 선단을 조직하여 수십 년에 걸쳐 동으로, 서로, 남으로 바다를 탐험하였을 때 제작된 해도와 항해일지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니 그것을 꼭 찾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 때마침 책을 읽고 있던 안드라스를 보자 기억났다.
“자, 함께 가지요.”
“예? 예…….”
궁중은 많은 말들이 은밀히 오가는 곳이었다. 그중 요즘 들어서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가 바로 지금 눈앞에서 등을 보인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알마리온 헤이그 폰 이스턴 백작이라는 자였다.
모두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궁 안의 모든 이들이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특히 그의 외모는 뭇 여성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안드라스 또한 사내가 보아도 숨이 찰 정도로 잘생긴 그의 외모는 확실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 하였다.
특히 그의 왼쪽 뺨에 길게 자리 잡은 검상은 전체적으로 유약하게만 보이는 그의 인상을 강렬하게 바꾸어 주었기에 누구라도 그를 한번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를 잊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안드라스 또한 자신이 직접 작성한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그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나 노예 신분을 벗겨 준다는 조건으로 군에 들어갔고, 이후 익스퍼트가 되어 정식 귀족이 되었으며, 군을 지휘하여 전쟁에서도 큰 공을 여러 차례 세운, 그것도 모자라 과거에 잠시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던 종이를 다시 만들어 낸 것 등등. 한마디로 말해서 알마리온 헤이그 폰 이스턴 백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저런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있을까?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이?’
알마리온처럼 가장 밑바닥의 인생에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른 이들의 이름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사람들만도 열 명은 넘었다. 하나 그런 자들은 안드라스에게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크게 감동을 받은 것도, ‘아! 나도 이런 사람들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거나 다질 수 있는 표본이 되어 주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하나 두어 걸음 앞서 걷고 있는 이 사내는 자신과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살아 있는 표본인 자였다. 그런 만큼 그라는 존재감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러니까 내가 처음 보았다고 하여도 그토록 당황한 것이겠지.’
알마리온은 모르고 있었지만 안드라스는 황궁 내에서도 그 지위에 비하면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워낙 책을 좋아해서 오늘처럼 근무지를 이탈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도 그를 유명하게 해 주는 한 가지였고, 그가 자신이 일한 대가로 받는 임금 전액을 상관에게 뇌물로 주어 궁 안에서 매일 숙식을 하는 것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한 가지였지만,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별칭이 일명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라고 할 정도로 무엇을 물어보아도 이내 대답해 줄 정도로 막힘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능글맞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사실 궁중에서 쫓겨나도 벌써 수십 번은 넘게 쫓겨날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고를 여러 번 친 그였지만 지금까지도 궁에 남아 있는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전부는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문약한 소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 안에는 구렁이 100마리 정도 들어가 있다고 할 정도로 느물거리는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안드라스였다.
사실 안드라스가 알마리온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당황하는 표정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과연 그 능구렁이 안드라스가 맞나 싶어 놀랐을 것이다.
문서부에 도착하자 알마리온은 안드라스의 상관에게 그에게 도움 받을 일이 있어서 그런데 며칠 그를 자신이 써도 되겠냐는 말을 하였고, 무척이나 난처해하였지만 상대가 최근 제국에서도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알마리온이었기에 열흘 동안 병가를 내는 것으로 하고 안드라스로 하여금 알마리온을 도우라 하였다.
안드라스의 상관에게 열흘 동안 그의 도움을 받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알마리온은 그를 곧바로 황궁 도서관으로 데려갔다.
“이곳에서 찾아 주었으면 하네.”
“그게 무엇입니까?”
“혹 제국 초기에 대규모 선단을 조성하여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하였다는 이야기 알고 있나?”
신분의 차이가 있기에 존대를 해 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자칫 자신이 화를 당할 수 있으니 하대를 해 달라는 안드라스의 말에 그를 대하는 것이 조금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알마리온의 말에 안드라스의 눈이 반짝 빛을 냈다. 하나 그러한 눈빛은 나타나자마자 사라졌기에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랬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그것을 알아보진 못하였겠지만 알마리온이 어디 보통의 사람인가.
‘눈빛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 잘됐어.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어.’
“모르나?”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다시 물어보았다.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백작 각하.”
“잘되었군. 내가 찾는 것은 바로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라네.”
“모든 자료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문득 그러한 자료가 왜 필요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의 처지에서는 그런 것을 묻는 것은 금기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왜 그런 것을 찾는지 궁금한가 보군?”
‘내 표정에 그런 것이 나타났나? 아무래도 좀 더 조심해야겠군.’
비록 지금은 황실 문서부의 최하급 관리인 3등 서기관이었지만 그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가 굳이 문서부라는 곳에서 일을 하는 것도, 그리고 황궁 도서관을 제집보다 더 많이 들락거리는 것도 모두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그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인생에 있어서 기회란 반드시 한 번 이상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하나 그 기회를 잡고 잡지 못하고는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알마리온 헤이그 폰 이스턴 백작이라…….’
문득 이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것이 기회라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난 나의 능력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 선택은 어차피 내가 아닌 이자가 하는 것. 그렇다면 굳이 싸게 굴 필요가 없는 것이지.’
선택받는 것은 능력이 부족한 자들에게나 통용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선택받는 자가 아닌, 스스로 선택을 하는 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어찌 감히 소인이…….”
일부러 당황한 척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것 또한 알마리온이라는 자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한 하나의 작은 테스트였다.
“훗! 그런가? 어쨌든 자네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니 찾기가 쉬울지도 모르겠군. 하면 부탁하네.”
“예? 예, 백작 각하.”
입가에 묘한 미소를 달고 있는 알마리온을 보면서 안드라스는 어쩌면 이번 싸움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끝으로 알마리온 또한 도서관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잘 정리되어 있는 책들의 제목을 보면서 어떤 책들은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꺼내 읽어 보기도 하면서 도서관을 배회하기 시작하였다.
잠시 그런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안드라스 또한 그가 원하는 자료를 찾는 척하면서 자신이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 읽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저자가 찾는 자료는 황실에서 특별히 허락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비밀 서고에 있으니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동안 내가 원하는 것이나 실컷 읽으면 되는 것이고.’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이 다 모여 있다는 황궁 도서관에서 무슨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도서관에는 많은 사서들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자신이 맡은 구역 안에 있는 서가에 어떠한 책들이 있는지만 알 뿐, 전체적으로 어떤 책들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물며 비밀 서고는 청소를 하기 위한 관리만 있을 뿐, 달리 관리하는 이들도 없었다. 이는 황실의 수많은 비밀이 모두 그 안에 보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도서관에서 일을 하는 관리들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서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안드라스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이미 문서부 내에 보관되어 있는 모든 문서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하는 문서부는 황궁에서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이지만 문서로 남겨야 할 자료가 있는 경우에는 모두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안드라스는 제국이 건국된 이후에 지금까지 벌어졌던 거의 모든 일들, 그러니까 기록으로 남겨져 있던 거의 모든 일들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즉, 그는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제국을 통째로 바꿔 놓을 수도 있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가 3등 서기관이라는 낮은 직책에 사고도 많이 치면서도 지금까지 황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의 상관에게 뇌물을 바쳐서도 아니었고, 그의 성격이 느물거려 어느새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서도 아닌, 바로 이러한 능력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은밀히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뇌물을 먹이고 또 느물거리는 성격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겨도 그가 지금까지 황궁에 남아 있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자료를 찾는 척하면서 그동안 읽지 못하였던 책들을 읽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안드라스는 알마리온이 언제 도서관에서 나갔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동안 이곳에 있어야겠군?”
“그렇습니다, 형님.”
저택을 구할 때까지 황궁 내의 여러 별관 중 한곳에 머물고 있는 알마리온과 그 일행이었다.
“하면 네 영지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게다가 왕실에서 네게 부여한 임무도 있는데 말이다.”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형님. 누군가 이곳의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흠…….”
“형님께서 이곳에 남아 주시겠습니까?”
“내가?”
지금으로써는 가장 확실한 대안은 리처드가 이곳에 남아 공주의 것이 된 발락 영지를 관리하면서 그곳에서 병사들을 모집하고 육성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하나 리처드의 대답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싫다. 내가 재미없게 뭐하러 여기 있냐? 조만간 신 나는 일이 즐비하게 생길 것인데 말이야.”
용맹한영혼이 알마리온에게 준 기간은 3년. 그는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과 대적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그 말은 자신이 통합하지 않고 있는 나머지 절반에 가까운 초원을 통합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리처드는 이곳에 남아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뜨거운 가슴에 쌓인 울분을 풀기 위해 엉뚱한 짓을 벌이기는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그의 울분을 달랠 수는 없었다.
그는 전장에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나이제나우 경에게 말해 보지 그래?”
“그도 이곳보다는 그곳에서 더 필요한 인재인지라…….”
“하긴 그는 이런 행정적인 일보다 전장에서 더 필요한 인재이긴 하지. 흠…… 그럼 누가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멕테일러 자작은 어때?”
“그가 가장 적합하긴 한데…… 그에게는 다른 일을 부탁할 계획이라서 말입니다.”
리처드는 알마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게르혼 부족들을 통합해 나갈 때 멕테일러로 하여금 후방을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흠…… 어쨌든 난 안 된다. 알았지? 그럼 난 볼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 보마.”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부탁을 하면 어쩔 수 없어서라도 들어줘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리처드는 허겁지겁 방을 나가 버렸다. 그런 리처드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피식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 형님도 참…….”
리처드에게 부담을 줄 수도 없었기에 다시금 누가 좋을지를 생각하던 알마리온은 정히 안 되면 한센과 요들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똑똑!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온 이는 이제는 자신의 아내가 된 들에핀꽃이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더 서먹해져 있었기에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얼굴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말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먼저 알마리온의 방에 찾아온 것이다.
“…….”
막상 자리를 함께하긴 하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만이 흘렀다. 하나 먼저 적막을 깬 것은 알마리온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분위기로 함께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정이 들어 한 혼인은 아니지만 이 여인은 이제 나의 여인이 아닌가? 그런 이 여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떻소?”
지금까지와는 달리 알마리온이 따뜻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오히려 흠칫 놀라는 들에핀꽃이었다.
“허락하신다면 돌아가고 싶어요.”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알마리온은 물론, 그녀 자신도 깜짝 놀랐다.
‘내가 갑자기 왜…….’
그녀 스스로도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하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 이미 한번 뱉어 낸 말은 다시금 담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간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는 황급히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절망감을 느꼈다. 알마리온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또다시 싸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일었다. 하나 다음 순간 알마리온에게서 나온 음성은 평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이곳이 많이 불편하겠지만 조금 더 참는 것이 어떻겠소?”
“그건…….”
갑자기 이유도 없이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여 왔기에 들에핀꽃은 다시 서둘러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외면하였다.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하오. 그래 주겠소?”
“예…….”
전이라면 도저히 들어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부끄러움과 수줍음까지 느껴지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들에핀꽃이 대답하였다.
“고맙소.”
알마리온이 살짝 그녀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한번 쓰다듬어 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럼 할 일이 있어서 나가 보고 오겠소. 저녁 시간에는 맞춰서 돌아올 것이니 함께 식사하도록 합시다.”
“예…….”
알마리온의 손이 자신의 손을 살짝 한번 쥐어 준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간신히 그녀가 대답하자 알마리온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천천히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후우…….”
그제야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내쉰 그녀는 자신의 이런 변화에 스스로도 놀라고 또 놀라워했다.
“훗! 내가 왜 이러지?”
스스로의 행동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안 되겠어.”
들에핀꽃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는 싫다는 냇가의돌을 끌고 가다시피 하여 대련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들에핀꽃과의 대화 이후 알마리온은 공주가 머물고 있는 발락 공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앞으로 그가 맡아서 관리를 해야겠지만 그래도 주인은 어디까지나 공주였다. 비록 그것이 명목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제국에서 더 많은 병력을 키워 내기 위해 자신에게 맡긴 영지였지만 어쨌든 주인이 엄연히 있는 곳을 자신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자신의 영지를 어떻게 통치하고 싶어 하는지 등을 알아 두어야 했다.
“마님, 이스턴 백작이 방문하였습니다.”
집사인 칼로스가 알마리온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자 멍한 표정으로 창밖의 낯선 풍경을 내다보고 있던 카산느가 흠칫 놀랐다.
“그, 그런가요?”
카산느는 알마리온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 마님.”
말끝마다 ‘마님’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여간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공식으로야 자신은 피어스 황자의 부인이었지만, 실상 두 사람은 손 한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지 않은가.
“무, 무슨 일로……?”
“영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미 황실로부터 사정을 모두 들었기에 알마리온이 자신이 상속받은 발락 공작 영지를 대신 관리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 알았어요. 고, 곧 내려가도록 하겠어요.”
“예, 마님.”
칼로스가 나가자 카산느는 시녀장인 앨리나 부인에게 서둘러 몸단장을 해 달라고 재촉하였다.
“공작 부인을 뵈옵니다.”
정중한, 하지만 무척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알마리온의 인사에 카산느는 살짝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알마리온이 건네 오는 인사를 받자 카산느는 이제 자신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새삼 느껴진 것이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부인.”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차를 내왔다. 시녀장인 앨리나 남작 부인은 알마리온이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차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술과 차를 권하면 어김없이 차를 달라고 하는 사람이었으니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앨리나가 차를 내놓고 나가자 알마리온은 그녀를 찾아온 이유를 말하였다.
“하여 부인께서 영지를 어떻게 운영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있으시면 미리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예……. 그 문제라면 백작님께서 이미 들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만 그곳은 부인의 영지입니다.”
“그런가요?”
자조적인 말투였다. 약혼자인 피어스가 급사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의 미망인이 되어 이곳에 남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로엔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한데 제국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채, 단지 약혼식만 한 자신을 미망인으로 만들어 이곳에 눌러앉혀 버렸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자신은 그 이유조차 설명 듣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습니다, 부인.”
“하지만…….”
카산느는 공주의 신분으로 왕궁에서만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영지의 경영 같은 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백작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다만…… 그곳 사람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만…… 그렇게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황궁에서 오전에 서류를 몇 개 보냈습니다. 내 서명이 필요한 것들이라 하더군요. 그것을 가져오도록 하지요.”
영지 관리에 필요한 대리인 지정에 관련된 서류들일 것이다.
“서명은 하였으니 확인하여 보세요.”
“예.”
절차상 필요한 일인지라 알마리온은 잘 말려 있는 서류를 펼쳐 그 안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건…… 명목상 그 소유자만 공주님이시지…….’
알마리온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서류의 내용은 모든 권리, 심지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영지를 처분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인정받을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서류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본 알마리온의 목소리가 사뭇 굳어져 있었다.
“이 내용…… 읽어 보셨습니까?”
“아, 아니요…….”
“부인, 아니 공주님.”
“예?”
“이유가 어찌 되었든 발락 영지는 공주님이 다스려야 하는 곳입니다.”
“…….”
“한데 이 서류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대리인이 영지를 처분할 수 있는 정도까지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데 그런 서류를 확인하여 보지도 않은 채 서명을 하신 것입니까?”
“그런…….”
황실에서 나온 관리의 구두 설명을 듣긴 하였지만 단지 영지 운영의 대리인으로 알마리온을 지명하였으면 한다는 것과, 그가 대리인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하기 위한 서류라며 서명을 해 줄 것을 요구하였기에 단지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에 서류에 서명을 하였던 그녀였다.
아니, 사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영지였으니 굳이 세세한 설명을 듣는 것도, 따로 알아보는 것도 귀찮았던 그녀는 관리가 요구하는 대로 그냥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발락 공작가를 상징하는 반지로 인장까지 찍었다.
“내일 황궁에 들어가서 다시금 서류를 작성토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공주님의 호위는 누가 하고 있습니까?”
“오전까지는 존스 남작이 하였지만…… 황궁에서 관리들이 나온 이후로는 병사들만 남겨 놓은 채 모두 황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대리인인 알마리온이 그 문제로 서로 의견 충돌이 있을까 싶어서 알아서 먼저 데리고 간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왕실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할 것 같구나. 공주님 곁에 그래도 익숙한 자들이 있다 보면 마음이 보다 빨리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야. 아, 그래! 이왕이면 칸 남작이 책임자로 이곳에 오면 좋겠군. 그라면 충분히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소관이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일단 왕국에 사람을 보내 근위군에서 몇 명을 보내 달라고 폐하께 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궁중 관리들 몇도 말입니다. 그편이 공주님이 덜 외로움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인가요?”
“예, 공주님.”
“부탁드려요. 제발.”
공주의 표정이 처음으로 밝아지는 것을 보자 알마리온 또한 부드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심려치 마십시오, 공주님. 일단 오늘부터 그나이제나우 경을 이곳에 머무르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예? 하면 백작님께서는…….”
엉겁결에 한 말이었지만 말을 꺼내 놓고 보니 제가 한 말이 부끄러웠는지 목까지 붉어진 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소관은 황궁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이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이제 막 미망인이 된 카산느였다. 그것이 제국과 왕국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긴 하였어도 어쨌든 대외적으로 그녀는 피어스의 미망인으로 그를 애도해야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재혼을 할 수도 있지만 한때 염문설까지 나 있는 자신이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이곳에 상주하게 되면 카산느 공주의 정절에 큰 흠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알마리온은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가 모셔야 할 상전이 된 그녀의 정절과 명예를 지켜 주는 것 또한 당연히 그가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이 어리고 여린 여인이 세파에 휩쓸리거나 불편하게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볼일만 보고 다시금 황궁으로 돌아온 알마리온은 재상부의 고위 관리와 만나 새로운 대리권에 관련된 서류의 작성과 함께 왕국에서 공주를 호위할 이들을 데려오겠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고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자신이 머물고 있는 거처로 향하였다.
베르그 공작 가문의 총관인 게오르그 폰 솔타인 남작이 알마리온을 방문한 것은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스턴 백작 각하.”
“반갑습니다, 솔타인 남작.”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은 베르그 공작이 알아봐 주겠다고 한 거처 문제 때문이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백작 각하께 적당한 거처를 알아보신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게도 전하께서 본 관이 이곳의 실정을 잘 모르니 대신 알아봐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적당히 자신의 주군을 치켜세워 주는 언사에 솔타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하여 적당한 저택을 물색하였는데 마침 괜찮다 싶은 것을 발견하여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벌써 말입니까?”
“예.”
아마도 베르그 공작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는 또 다른 저택들 중 하나를 내줄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저택을 구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시겠습니까? 지금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둘러보도록 하지요.”
어차피 황궁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였던 알마리온은 가급적 빨리 황궁에서 나가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알마리온은 들에핀꽃과 함께 베르그 공작이 마련해 준 새로운 거처를 살펴보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황도 카빌란에서 약 1시간 정도 마차로 이동한 황도의 외곽에 위치한 곳에 고즈넉한 풍경을 가진 곳에 그림처럼 세워진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결코 작지도 않은 그러한 저택이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저택을 모두 돌아본 알마리온은 솔직히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의 경관도 매우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도 황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거기에 카산느 공주가 머물고 있는 발락 공자가의 저택 또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곳이군요. 주변 풍경도 그렇고 말입니다.”
“원래 이곳은 황실은 물론, 제국의 고위 귀족들의 별장지인 곳입니다. 카빌란 내에서는 아무래도 저택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때문에 우선 황도에서 가까운 이곳에 저택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이 저택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솔직히 본인은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부인은 어떻소?”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부인이라 칭하는 것은 처음이었는지라 들에핀꽃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소곳이 말하였다.
“저도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다소곳한 그녀의 행동에 살짝 미소 지어 보인 알마리온은 이곳을 매입하기로 결정하였다.
“하면 필요한 서류들을 작성하여 각하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가구들과 사람들을 구하기 전까지 이곳에 있는 가구들이나 하인들은 그대로 사용하셔도 될 것입니다.”
“전하의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백작 각하.”
알마리온의 말에 솔타인은 다시 한 번 만족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주군께서 이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곳은 주군께서 백작이 제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선물이니 기꺼이 받아 주셨으면 한다고 말입니다.”
솔타인의 말에 알마리온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한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순순히 그의 의도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제국과 왕국이 연합하기로 하였고, 공주와 자신이 그 연결 고리들이었으니 일단은 그것을 튼튼히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후에 이러한 것을 받은 것에 대한 대가를 따로, 그리고 다른 명목으로 전달할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전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전하를 찾아뵙고 따로 인사를 드릴 것이라 전해 주십시오.”
“잘 알겠습니다, 각하.”
“그래, 알아보았는가?”
“죄송합니다. 그동안 찾아보느라 찾아보았지만 이 정도밖에는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안드라스가 건네준 자료들은 그가 찾는 자료들은 아니고 단지 그와 관련된 자료들일 뿐이었다.
‘훗! 그 정도면 앞으로도 한동안 날 붙들고 도서관에 처박혀 있게 만들어 주겠군.’
그가 알마리온에게 건네준 자료는 알맹이는 없지만,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 더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 정도의 자료들이었다.
적당히 시간을 끌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하다가 알마리온이 찾고 있는 자료가 비밀 서고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 주면서 자신의 능력도 알려 주고, 아울러 알마리온의 능력 또한 알아보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만약 그가 비밀 서고에 대한 출입 권한을 얻게 된다면 그만큼 그는 권력의 핵심에 위치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그 자료를 얼마나 원하는가에 따라서 그 기간도 달라지겠지.’
“흠…….”
한동안 안드라스가 건네준 것들을 살펴보던 알마리온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 꾀가 많은 자군. 딱 내가 관심을 더 가질 정도의 자료들만 찾아왔군.’
안드라스의 의도를 눈치챈 알마리온은 그가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내심 웃음을 지었다.
‘날 시험한다는 것은 내게 생각이 있단 뜻이겠지?’
안드라스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시험이 단순한 호기심 정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모두 펼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좀 더 주면 자료를 찾을 수 있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소관은 궁중 관리라서 업무에 복귀를 하여야만 합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지.”
“하오나…….”
“일단 자네는 근무처로 돌아가 있도록 하게. 그리고 조만간 인사 발령이 나게 될 것이네.”
“알겠습니다, 각하. 하면 일단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굳이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주의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궁중에서 개인적으로 부탁하거나 부탁받은 모든 일들은 전부 비밀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으로, 그러한 것을 말하는 쪽이나, 그러한 말을 듣지 못했으니 비밀을 지키지 않는 쪽이나 둘 다 어리석은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안드라스는 자신의 근무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근무를 하기 위해 열흘 만에 모습을 나타냈다. 한데 그의 상관이 그를 부르더니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자네 발령장이네.”
“발령장입니까?”
“그래. 이제 자네 근무처는 황궁 도서관이네. 그쪽에서도 이미 소식을 통보받았으니 그냥 가기만 하면 될 것이네.”
‘훗! 황실에서, 아니 재상께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그렇게도 큰 것이란 말이지?’
알마리온의 말대로 하루 정도 푹 쉬고 근무지인 문서부로 왔더니 이미 발령장이 나와 있다는 것을 보아 알마리온이라는 존재가 제국에서도 얼마나 필요한 존재라는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한 것인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쳇! 그 느물거리는 웃음 짓지 말고. 어떻게 했기에 자네가 도서관으로 자릴 옮기게 된 것이냐고. 그것도 비밀 서고 관리인으로 말이네.”
“예? 비밀 서고 관리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호! 이건 좀 의외인데?’
확실히 의외의 일이었다. 그가 비밀 서고란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자신을 단번에 그런 비밀 서고의 관리인으로 보냈다는 것도 전혀 의외의 일이었다.
“자네도 몰랐던 것인가?”
“예.”
“그래? 어쨌든 아쉽군. 농땡이는 자주 피웠어도 자네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아주 편하게 보냈는데 말이야.”
“하하…….”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라 할 정도로 모르는 것이 없는 그였기에 여러모로 일을 할 때 무척이나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곳에 가서는 사고 치지 말라고. 그쪽 관리 책임자인 케니토 남작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말이야. 자네도 잘 알지?”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남들은 모르지만 도서관 관리 책임자인 케니토 남작은 평범한 문관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안드라스였다.
‘황궁의 비밀 기사단인 골든이글 기사단Golden Eagle Knightage의 부단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황실과 왕실에는 숨겨진 힘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카빌란 제국에도 그러한 숨겨진 힘이 존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골든이글 기사단이었다.
그 골든이글 기사단의 부단장이 바로 황궁 도서관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케니토 남작이었다.
그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모두 문서부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서류들을 바탕으로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그가 아는 골든이글 기사단은 모두 1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모두가 여러 형태로 황궁에서 일을 하면서 황실 가족들, 아니 황제의 안위를 은밀히 보호하고 있었다.
세상에서는 전혀 그 존재를 모르는, 오직 황제만이 알고 있는 이들 골든이글 기사단이었지만 이들에 대한 존재마저도 황궁에서 작성되는 모든 서류들을 꿰어 맞추면서 추론하여 알아낸 안드라스야말로 실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보딩 사무관님.”
“잘 가게.”
카산느 공주와 알마리온, 들에핀꽃 그리고 리처드와 그나이제나우를 비롯하여 왕국에서 공주를 호위하기 위한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제국의 여러 기사단 중 여성으로만 구성된 레드로즈Red Rose 기사단이 이들을 호위하여 발락 공작 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제국에서도 남녀의 차별은 존재하지만, 그러했기에 오히려 황실 가족들 중 여성만을 위해 특별히 여성들로만 구성된 3개의 기사단이 존재하였다.
이처럼 여성들로만 구성된 세 곳의 기사단은 황후와 황제의 여러 부인들 그리고 황제 직계의 공주들의 호위를 맡아 하였지만 당분간 그녀의 호위를 맡아 주었다.
해안가에 접해 있는 발락 공작 영지는 황도인 카빌란에서는 말을 타고 열흘 정도는 가야만 했다. 하여 일단 황실 직영지인 골드포트로 이동, 그곳에서 배편을 이용하여 발락 공작 영지까지 이동하기로 하였다.
카빌란 제국은 해상을 통한 교역은 철저하게 금하고 있지만 어업과 자국 내에서의 운항은 가능한 나라였는데, 워낙 영토가 넓다 보니 모든 이동을 육지로만 할 수는 없어 내륙 수운이나 해상을 통한 이동은 시간을 단축시켜 주었기에 많이 발달해 있었다.
그렇게 배를 타고 이틀 만에 발락 영지에 도착한 알마리온은 그곳의 관리들을 만나 영지의 전반적인 사정을 알아 가기 시작하였다.
발락에는 모두 다섯 곳의 성이 존재하였고, 그중 발락 성의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곳이 영지 전체의 행정의 중심지였다.
성안에 기거하는 인구만 하여도 3만이었으며, 성이 직접 행정을 맡고 있는 주변의 마을의 수만 해도 서른 곳으로, 인구가 총 8만에 달하였다.
여기에 다른 네 곳의 성도 그 규모 또한 왕국의 어지간한 공작 영지의 규모와 맞먹을 정도였다.
발락 성 다음으로 규모가 큰 성은 해안가에 위치한 하타만 성이었다. 이곳은 제국의 동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해상운송의 연결선에 위치해 있었기에 알마리온 일행 또한 이곳을 통해 발락 영지에 도착한 것이다.
성안에 거주하는 인구의 규모로만 따지면 오히려 발락 성보다 인구가 많아서, 그 인구가 5만이나 되었다.
다만 주변 마을의 수와 그러한 마을에 살아가는 인구수가 적어 전체적으로는 발락 성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그래도 7만이나 되는 성민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성이 바히만 성으로 성의 인구가 1만에 25개 마을을 관리하고 이곳에 총 5만 5천 명의 인구가 상주하여 전체적으로는 6만 5천 명의 인구가 있었다.
네 번째 규모의 성은 케일론으로 성에 사는 인구가 1만, 부속된 마을의 수가 20개로 5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어 총 6만 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규모의 성은 쿠루프 성이었지만 이곳에서도 성안에서 살아가는 상주인구는 1만이었으며, 관장하고 있는 마을의 수가 18개, 총 인구 4만 명 규모의 성이었다.
이렇게 하여 발락 영지는 총 5개의 성과 110개의 마을, 총 인구 31만 5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영지였다.
과연 제국은 제국이었다.
“휴…… 정말 대단하구만.”
“정말 그렇습니다. 이런 큰 영지가 중하급 수준의 영지라니 제국이 확실히 크긴 크군요.”
제국은 영지를 모두 9등급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곳은 그중에서 중하급에 속하는 영지로 말이 좋아 공작의 영지이지 실상은 자작이나 별 볼일 없는 백작 정도에게나 주어지는 영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영지는 로엔 왕국에서는 프리모 공작의 영지에서나 가능한 규모였다. 이것만 놓고 보아도 제국과 로엔 왕국의 규모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인지 이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혼족의 침입을 두려워하고 있다. 무엇일까, 그 이유가? 이렇듯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는 것조차 제대로 다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많은 것을 가지면서도 게르혼족의 침입을 걱정하여 자신들이 가진 것에 비하면 몇십 배나 적은 로엔 왕국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같은 이까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인지 말이다.
‘당장 황제의 명령만 떨어져도 50∼60만 정도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거늘……. 어쨌든 제국이 내게 원하는 것은 가능한 많은 병력을 양성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기사단까지도.’
제국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군대의 양성이었다. 그것도 대충 머릿수만 채워 놓는 그러한 군대의 양성이 아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적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 그러한 강한 군대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기사단까지도 육성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아마도 그렇게 육성된 병력과 기사단은 게르혼족과의 전쟁에서 가장 먼저 전투에 투입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설프게 병사들을 훈련시켜 이도 저도 아닌 어중이떠중이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요들은 반드시 이곳에 필요할 것 같구나.’
요들만큼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훈련시키는 이는 없다는 것이 모두의 중평이었다. 그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혹독하기 그지없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 정도였지만 훈련이 끝난 이후, 그들이 실전에 투입되면 유감없이 그동안 훈련받은 능력을 발휘하게 되니 그만큼 사상자의 수가 크게 줄어드는 것은 물론, 여러 다양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단 요들과 몇 명을 이곳으로 오게 하여 병사들을 훈련시키면 되는데…… 문제는 기사단이군. 역시 지금으로써는 그나이제나우 경이 아니고서는 기사단을 육성할 만한 인물이 없겠어. 그리고 영지의 관리는…….’
문득 안드라스가 생각이 났다. 이미 그에 대해서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아본 알마리온은 그가 영지를 맡아 관리하여 주었으면 했지만 아직은 그와의 게임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당분간은 자신이 이곳에 남아서 관리를 하여야만 했다.
“대신 형님께서 영지로 돌아가셔서 영지를 대신 관리하여 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홀로 영지로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무척이나 기분 좋아했다.